소설리스트

검왕춘추-258화 (258/410)

제65장 현조안귀(玄鳥安歸) (2)

이전에 단목정이 했던 자책.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게 따지다가 꼭 한 가지를 놓치곤 한다더니.

그 말 그대로 금오혈석의 비밀에 몰두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잊었었다.

금오혈석이든 육악지력이든 배경이 되는 것은 바로 사일신화고, 사일신화의 주인공은 두말할 필요 없이 예다.

한꺼번에 출현한 열 개의 태양, 그중 아홉 개를 지상에 떨어뜨린 이도 예요,

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 포악을 떨던 여섯 마리의 괴물을 처치한 이도 예다.

태양지력과 육악지력을 전부 제압했던 그 힘이야말로 신능이라고 할 만하다.

오소민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혀를 찼다.

“쳇, 이거 더 골치 아파졌잖아. 그 오리 알, 정말 속 썩이는 애물단질세. 육피구단 앞에다 삼미(三謎)라는 글귀를 덧붙여야겠어.”

삼미는 세 가지 수수께끼. 자신이 엉터리로 핑계를 댔던 장사 수법이 민망했던 참이라 슬쩍 진짜 수수께끼라고 넘어가려는데.

해원기가 금오혈석을 도로 요대자에 넣으며 빙긋 웃는다.

“삼미육피구단, 삼육구(三六九)로 제대로 운을 맞췄구먼.”

엉뚱한 소리에 오소민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세 가지 수수께끼, 여섯 개의 육악지력, 아홉 개의 금오혈석. 생각할수록 더욱 헷갈리는 문제건만, 그저 삼(三)이 두 배, 세 배로 이어지는 운율이 재밌다는 건가.

어쩔 수 없는 친구다.

이제는 해원기의 독특한 성격을 가장 잘 아는 오소민이라,

맥빠진 한숨을 억지로 삼키면서 받았던 물통을 도로 건네주었다.

“됐네, 됐어. 지금 우리가 떠들어봐야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지. 자, 목이나 축이게. 조금 쉬었다가 출발하자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해원기.

아직 안양까지는 한참 멀고, 가을 햇볕은 점점 따가워진다.

또 두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렸다.

관도를 따라 움직이는 터라 예상보다는 훨씬 빠른 이동.

그래도 주위를 경계하면서 두 시진을 계속 달리는 건 상당히 지치는 일이다.

오소민이 속도를 늦추면서 머리를 갸웃거리고, 따라서 걸음을 멈춘 해원기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나?”

“흠, 듣던 것과는 좀 달라서.”

오소민이 지나온 관도를 돌아보고, 다시 전면을 살피더니.

“이쪽은 나도 온 적이 없어. 신향에서 안양까지는 전부 관용(官用)의 목적으로 관도를 닦아서 주변에 마을이 별로 없다더군. 안양을 중심으로 하는 창덕부는 아무래도 요충지니까 말이야. 그래도 오가는 이가 적지 않을 텐데.”

한낮.

비록 햇볕이 따갑긴 해도 워낙 날이 좋아서 밖으로 돌아다니기 좋을 때건만, 오는 내내 그다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덕분에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경공을 펼쳤으나.

해원기가 시선을 멀리 보냈다.

“관용의 목적이라면서. 주변에 가까운 마을도 없다면 일반인으로선 고된 여정이잖나. 우리가 신향에서 오래 머물지도 않았고.”

관용의 목적이란 군사를 이동하거나 공물을 수송하는 편리함을 가리킨다. 관운(官運)이야 넉넉하게 준비해서 이동하겠지만, 일반 백성이 중간에 마을도 없는 먼 길을 음식까지 챙겨서 움직이기엔 엄두가 나지 않을 터.

또 신향과 안양의 관청에서 도로를 봉쇄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향의 변두리 객잔에서 동창의 무리를 보았으니. 소집령에 응한 금의위나 동창의 인사가 아예 길을 치웠을 수도.

방수인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짧았고, 신향의 상황을 살필 틈도 없었다.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오소민이 앞을 가리켰다.

“그래도 방 소형제가 야점(野店)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특히 안양에 가까워질수록.”

야점은 길가에 간이로 벌여놓은 점포. 간단하게 천막을 치고서 여행에 지친 손님에게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이다.

동창의 동정을 파악하려고 우선 안양으로 향한다는 해원기와 오소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방수인이 헤어지는 순간에 급히 일러준 정보.

특히 안양 근처의 야점 중에는 녹림장관에 끈이 닿은 자도 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오면서 천막은커녕 천 쪼가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과연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관도의 좌우엔 그저 나무와 바위만 보일 뿐.

훨씬 먼 곳을 볼 수 있는 해원기가 미간에 힘을 주다가,

“조금 더 가보세.”

동시안에 뭔가 비쳤을까.

오소민이 옷자락을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통은 비었고, 건량은 부스러기만 남았으며 점심때가 이미 지났다.

동시안에 비친 게 맞았다.

둘이 조금 더 기운을 내자 절반으로 쪼개진 언덕 뒤로 누런 주기(酒旗)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으니.

거의 안양 경계에 들어서고서야 기대하던 야점을 만났다.

“지형이 많이 달라졌어. 태항산 줄기의 영향이겠지만, 이 관도를 닦느라 고생깨나 했겠는걸.”

신향에서 멀어질수록 꿈틀거리는 언덕이 늘어났고, 숲이나 바위도 훨씬 흔하게 나타나서 지대가 높아질수록 험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관도를 내느라 아예 중간이 뻥 뚫린 언덕이 마치 성문(城門) 같고, 그 뒤쪽에 가려진 야점은 주기가 없다면 있는지도 몰랐을 터.

터벅터벅 걸으면서 오소민이 말을 이었다.

“아주 절묘한 장소에 아주 절묘할 때 나타나는구먼.”

해원기도 동시안을 거두고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네다섯 길은 될 듯한 높이에 커다란 바위가 박힌 큰 언덕이다. 오소민의 말마따나 길을 뚫기 어려운 곳이라 자연히 성문 형태가 되어버렸고, 그 덕에 뒤쪽 기슭은 풍진을 막고 그늘을 드리운 장소로 야점을 차리기엔 안성맞춤.

또 목이 마르고 허기를 느낄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어이구, 점심때가 지나고서야 첫 손님이라. 어여, 어여 오시우.”

주기 아래에 어슬렁대던 중년 사내가 어지간히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오고,

반기는 대로 따라가자 숲의 나무와 장대에 매단 천막 아래 다섯 개의 작은 탁자가 보인다.

한쪽엔 솥을 건 아궁이와 대충 다리를 세운 조리대, 열 개쯤 쌓인 커다란 술독.

해원기가 재빨리 안을 살피곤 손을 모았다.

“여기가 어디쯤입니까?”

야점에는 익숙한 해원기다.

문득 이전에 대별산을 넘어 방성으로 향하다가 습격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이 야점에는 주인 하나를 빼곤 텅 빈 탁자뿐.

먼 길을 지나온 과객답게 지리를 물어 인사를 대신한다.

주인이 가까운 탁자를 서둘러 닦으며 웃는 낯을 보였다.

“초행이시구먼. 여기는 십리파(十里坡)라고 십 리만 더 가면 안양의 성문이 보일 거요. 신향에서 오는 길이요? 허어.”

어차피 신향에서 안양으로 통하는 관도. 뻔한 걸 물으면서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훑어보는 것도 당연한데.

허름한 더벅머리와 준수한 공자님의 동행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

오소민이 씩 웃으며 나섰다.

“얘기만 들었지 이렇게 고된 길일 줄 누가 알았나. 그나마 신향에서 같이 떠난 이 친구가 말벗이 되지 않았다면 도로 돌아갈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일단 시원하게 마실 것부터 내주시오. 그런데 오는 내내 정말 아무것도 없습디다.”

나뭇등걸을 깎아 만든 투박한 의자를 끌어 앉자.

주인이 얼른 술독으로 향하며 말을 받았고,

“본래 한적하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 며칠은 진짜 오가는 이가 없구려. 한참 추수에 바쁠 때지만, 그래도 이맘때는 관차(官差)나 압행(押行)이 한참 많은 편이어서. 자.”

작은 단지에 따른 술과 바짝 튀긴 떡 몇 조각을 내주더니, 솥으로 가면서는 아예 머리를 설레설레 젓는다.

오시가 끝나고 미시로 넘어갈 무렵.

이제야 첫 손님을 받았으니 어지간히 장사가 안된 거다.

농사일에 바쁠 시기라 돌아다니는 이들이 드문 건 이해해도, 창덕부가 있는 안양이니만큼 공무의 왕래가 갑자기 줄어들 리 없다.

문서가 오가고, 필요한 물자를 운송하는 것뿐 아니라 죄인을 압송해 형을 치르는 때이기에.

절로 푸념이 입 밖으로 나올 수밖에.

오소민이 해원기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다시 말을 붙였다.

“뭔 일이 있는 걸까요? 신향에서 출발할 때 듣기에는 중간에 야점이 꽤 있다고 들었건만,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점심도 제때 못 먹고, 목은 마르고.”

솥에 든 건 삶은 돼지고기.

주인이 오만상을 쓰면서 돼지고기를 한 접시 가져온다.

“에헤? 여기 오기 몇 리 전에 마가(馬哥)가 하는 야점이 있을 텐데. 아니, 신향 쪽에서 나온 야점도 두어 집 있는 거로. 중간에 야점이 하나도 없었다고요? 이게 뭔 일이래? 허어.”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고선,

뒤로 돌아서는 주인.

오소민의 눈이 자신의 앞을 거쳐 해원기를 보면서 반짝 빛났다.

주인이 돼지고기를 담는 동안, 오소민이 차례로 따른 술. 야점답게 넓적한 사발이 술잔을 대신했고, 그 위에 젓가락이 비스듬히 엇갈려 놓였다.

언뜻 평범해 보여도 이 술잔 위에 엇갈린 젓가락은 방수인이 가르쳐준 표기.

녹림과 연관된 이라면 반응을 보였어야 한다.

“오는 내내 보이지 않았다니까요. 그럼 여기에서 안양으로 가는 도중에 또 야점이 있습니까?”

남은 거리는 십 리니까 굳이 다시 야점에 들릴 이유는 없으나.

그렇게 묻는 오소민을 등지고 주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여섯 리 가면 양가(楊哥)가 하는 야점이 있소만, 여기서 든든히 자시고 가면 되잖수.”

“하, 그렇지요. 어차피 십 리만 가면 안양, 다시 야점을 찾을 일은 없지요. 계속 야점만 찾다 보니 내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하하, 주인장은 성이 어떻게 됩니까?”

대충 다리를 세운 허술한 조리대 앞에서 주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별 걸 다 궁금해하는구먼. 난 우가(牛哥)요.”

덤덤한 얼굴.

그런데,

오소민이 젓가락 하나를 집어 사발을 가볍게 두들겼다.

“말과 양에 소라. 해형, 이것도 무슨 암호일까?”

시선은 해원기를 향한 채. 주인이 등진 후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놀렸었다.

양(楊)은 양(羊)과 같은 발음. 마가, 양가, 우가는 공교롭게도 말, 양, 소라는 짐승으로 들린다.

물론 흔한 성씨니 우연일 수 있겠으나.

해원기가 사발을 들어 돼지고기 위에 술을 부었다.

쉬이이.

뜨끈하게 삶은 돼지고기에서 뽀얗게 치솟는 김. 그 김을 통해 주인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안양으로 올 줄 알았소?”

무겁게 묻는 말.

덤덤한 표정의 주인이 눈을 살짝 찡그리더니,

“산공분(散功粉)의 연기도 괜찮다는 건가. 흠, 어떻게 알았지?”

오히려 머리를 까닥거리며 되묻는다.

이상한 주인, 게다가 조금 전과 달리 목소리가 가늘고 뾰족하게 변했다.

사발을 두드리던 오소민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이 친구가 워낙 신통해서 말이요. 그리고 이렇게 몇 번씩이나 만나면 아무래도 눈에 익기 마련이잖소. 그나저나 우리가 가는 길목에 미리 와서 이런 준비까지, 참 용하오, 용해.”

주인은 평범한 용모에 수염 자국이 선명한 중년 사내.

표정도 변하지 않고서 어깨를 으쓱 올리며 손바닥을 내보인다.

“하긴 개방의 순행장로인 신비의 유룡개가 같이 있으니까. 웅황정을 미리 복용했을 수도 있고, 그래, 그 연꽃 모양의 보패가 특이한 공능을 지녔나 보구나. 아, 먼저 물었던 것부터 답해줄게. 우리 연묵재 골목에서 잠깐 만났었잖아. 귀인들은 대개 몸에 좋은 향을 지니고 다니거든. 아마 그때 태백종사의 좋은 향이 너희 몸에 배어서…….”

투박한 말투도 사라져 가볍게 조잘거리는 입.

“천리추종향(千里追蹤香)이었군.”

해원기의 짧은 한마디에 그 입이 닫혔고,

오소민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또 젓가락으로 사발을 두드렸다.

“참 희귀한 물건을 잘도, 아니, 그것보다 그 향기를 맡는 기술이 더 대단하다던가. 그나저나 태백종사가 윗사람인 것 같던데, 그러면 그 개 같은 코로 우선 윗사람부터 찾아 나서야 옳지 않겠소? 모시던 윗사람은 내팽개치고 이렇게 우리 앞에 떡 나선 이유가. 허, 설마 젊은 사내에게 집적될 심산으로? 에이, 부인, 부인의 나이를 생각하쇼. 어디 언감생심, 어허험.”

웃음보다 마지막 헛기침이 더 심한 조롱이라서,

주인의 눈매가 확 치솟았지만. 섣불리 달려드는 대신 예리한 시선만이 오소민을 노려보았다.

부인이라는 칭호.

주인으로 분장한 인물은 바로 조화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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