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장 현조안귀(玄鳥安歸) (1)
진시(辰時)가 넘었는데도 관도에 오가는 이가 없다.
덕분에 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주위의 경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름 신경을 쓰면서도 오소민이 궁금증을 참기 어려워 기어이 해원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가능해? 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동시에 운용한다는 게.”
지금 안양으로 향하는 관도에는 해원기와 오소민 둘뿐.
신향을 벗어날 때까지는 방수인이 안내를 맡았으나, 객잔을 떠날 때 이미 철금장에 보낼 편지를 맡겼으니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쉬워하는 방수인을 달래듯이 해원기가 일러준 검기핍인의 요결.
듣기는 들었어도, 방수인만이 아니라 오소민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행상생과 오행상극을 양손에 나누어 운용한다나.
말이야 쉽지.
방수인 앞에서야 똑같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기 싫어서 참았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뭔가 생각에 잠겼던 해원기가 눈을 껌뻑였다.
“응? 그다지 어려울 건 없지 않나. 어차피 순환(循環)의 이치라.”
평소의 허술한 얼굴을 보이니,
오소민의 눈매가 살짝 올라간다. 요럴 때는 요 얼굴이 어지간히 얄밉다.
“어, 애들끼리 하는 놀이 있잖아. 왼손으로는 동그라미, 오른손으로는 네모나 세모를 그리는. 그런 요령일세. 물론 검기를 이루기는 어려워도, 꼭 검기여야 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예전보다는 눈치가 많이 늘었는지.
해원기가 얼른 설명을 보태자, 오소민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상승의 무공을 익힌 이라면 자연스레 오행의 변화를 터득하는 법. 그래도 오행상생과 오행상극을 동시에 다룬다는 건 대단히 특이한 발상이다.
개방의 뿌리인 팔선에게 공동으로 배운 오소민이나, 할아버지가 녹림노조요 아버지가 천극인 방수인이 어찌 평범하겠는가마는.
이걸 간단히 애들 놀이에 비유할 만큼 이치를 훤히 꿰뚫지는 못했다.
‘상반(相反)이 아니라 순환이라. 그거야 상성(相成)의 도리를 알아야 비로소. 자기는 안다 이거지, 흥.’
해원기의 비유를 듣고서야 요결의 핵심을 엿보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더 얄밉다.
하여간 무학 얘기에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똑똑해진다니까.
오소민의 눈매가 더 사나워질 듯한 예감에,
해원기가 얼른 질문을 던졌다.
“참, 자네가 보기에 수인이는 어떻든가?”
우연히 마주쳐 잠깐 함께했던 아우. 이렇게 헤어지기엔 해원기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라도 나누면 좋았으련만.
오소민의 눈매가 느즈러졌다.
“흠, 귀엽던데. 눈치도 빠르고 행동도 기민하고. 장난기가 좀 있어 보이지만, 그 나이 때야 다 그렇지 뭐. 벌써 녹림장관의 대탐자라잖아. 장래가 자못 기대되는 녀석이야.”
꽤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하는데.
“아니. 무공이 어떤가 해서.”
해원기가 듣고자 했던 건 다른 내용인 듯. 얘기의 시작은 검기핍인이었잖나.
오소민이 머쓱했다가 바로 표정을 고쳤다.
“글쎄. 나이답지 않게 내공이 깊은 편, 근기가 아주 단단해 보이더군. 노조의 직계라서인지 정록이와는 전혀 다른 기공을 지닌 것 같고. 그 완세구라는 조그만 공을 병기로 쓰는 것도 여간 특이하지 않아. 아마 다양한 병기를 익혔을걸.”
정확한 평가. 해원기는 이미 방수인의 내력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오소민이 어떻게 보는지 알고 싶었다.
방수인의 품에는 완세구 외에도 공교부(工巧斧)라는 장난감 같은 도끼와 폐옥홀(弊玉笏)이라는 이가 빠진 옥홀이 있었고, 양쪽 소매에는 짧은 철척(鐵尺)과 단봉까지 숨긴데다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커다란 등짐 또한 방패의 일종의 순패(盾牌)라서.
그야말로 온몸이 병기고와 다름없었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기예를 익혔다면, 마찬가지로 팔선의 무공을 이은 오소민이 가장 잘 알아볼 터.
고개를 끄덕거리자, 오소민이 피식 웃었다.
“흐, 이제 조금 마음이 놓이나? 이제야 만난 아우가 어지간히 걱정되나 보네. 그래 봬도 녹림장관의 소주인이라고. 철금장까지 가는 길도 당연히 빠삭하게 알 텐데. 형 노릇이란 게, 참. 흐흐.”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분명히 놀리는 웃음이다.
해원기가 멋쩍게 얼굴을 돌렸다.
“아니, 뭐. 어서 가세.”
앞을 향해 몸을 날리니,
그 뒷모습에 오소민이 키득거리며 곧장 뒤를 따른다.
역시 놀려먹는 게 재미있다.
한참을 달려서 바위와 숲으로 덮인 언덕이 보이자 오소민이 손을 들었다.
“잠시 쉬세.”
힐끗 살핀 해원기의 얼굴은 역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
오소민 자신은 그래도 그 더러운 객방에서 토막잠이라도 잔 편이지만, 해원기는 제대로 눈을 붙인 적도 없이 계속 강행군이다.
객잔에서 대화를 마치고, 오소민에게 녹림장관에 보낼 서찰을 부탁한 후에 곧장 출발.
그리고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도 않고.
서두른다.
이미 녹림장관이 태항산 위의 무수산장에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 안양에 집결하는 동창의 인마가 결국은 헛걸음을 할 것이란 것도 알면서.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자리를 잡고 대충 챙겨온 건량을 풀면서 오소민이 말을 걸었다.
“안양의 은허가 또 용문처럼 되리라 여기나?”
생각에 잠겼던 해원기의 눈이 천천히 오소민을 향한다.
“딱히 그렇지는 않지만.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계속 드는구먼.”
좋지 않은 예감. 평소라면 가볍게 비웃어줄 오소민이 건량 한쪽을 주욱 찢으며 미간을 좁혔다.
“은허라. 은나라의 폐허라고 쓰지만 나라 이름은 본래 상(商)이지…….”
이전에 배웠던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본다.
시조는 설(契). 대우(大禹)를 도와 홍수를 다스리는데 큰 공을 세워서 상구(商丘) 땅을 봉해 받았으므로 나라 이름을 상이라고 했다.
이후에 수도를 빈번히 옮기다가 반경(盤庚) 때에 이르러 북몽(北蒙)이란 땅으로 천도하곤 이름을 은(殷)이라 바꾸었으니.
은은 본래 수도의 이름일 뿐.
반경에서부터 마지막 제신(帝辛)에 이르기까지 열두 명의 군주가 근 삼백 년 동안 천하를 다스렸고. 마지막 군주인 제신, 즉 주(紂)가 주나라 무왕에게 패하면서 마침내 도읍인 은이 무너져 그 터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나라가 무너진 후, 상나라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장사치로 연명하면서 상인(商人)이란 단어가 생겼다던가.
“상고(上古) 때니만큼 적지 않은 신화와 전설이 섞였지만, 용문 때처럼 수신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다르지. 하(夏)나라의 폭군 걸(桀)을 물리치고 천하를 차지한 상탕(商湯)도 신력을 지닌 인간이니. 다른 군주도 소와 말을 길들여 농업에 공헌하고, 수레를 만들거나 물물교환을 시작했다는 기록 밖에는.”
대학자 방효유의 후손이라 남들이 알기 어려운 지식을 많이 배웠고.
그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런데 해원기가 불쑥 끼어든다.
“상이란 글자가 무슨 뜻인가?”
오소민이 좁혔던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눈을 깜빡였다.
장사할 상(商)이란 글자를 몰라서 물었을 리 없다.
“흠, 그건 지금까지 정설이 없어. 밖에서 안을 살피는 형태라서 본디 헤아린다는 뜻의 글자라는 설, 높을 고(高)와 유사한 모양으로 상성(商星)이란 별도 있으니까 하늘에 닿았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음이 상(傷)과 같기에 상음(商音)은 서쪽이나 가을을 의미하니까 늙어서 시든다는 뜻일지도. 고체(古體)에선 연(燕)이란 글자와 같다고 하는데.”
과연 배운 티가 나서 해설이 줄줄 나오는 중에.
“제비 연 자지. 은상(殷商)은 원래 동이(東夷)였을 거야.”
또 말을 가로채는 해원기.
“그런 견해도 있어. 시조인 설을 읊은 시경의 시에 ‘하늘이 현조(玄鳥)에게 명하여 내려가 상(商)을 낳았도다.’라는 구절이 있거든. 사기에도 유융(有娀)의 딸인 간적(簡狄)이 현조의 알을 삼키고서 설을 낳았다고 했고. 역시 신화지. 현조는 흔히 제비라고 하고, 새를 숭배하는 건 동방의 풍속 중 하나거든. 마침 상성이란 별도 동쪽에 뜨니까. 뭐, 그 옛날에는 동이니 뭐니 해도 그저 상대적인 방위였을걸? 상나라를 대신한 주나라도 처음엔 서주(西周)였잖아.”
툭툭 던진 한마디가 오히려 오소민의 머리를 자극해서인지.
설명이 막힘없이 자세하게 나온다.
해원기가 그런 오소민에게 자신의 물통을 건넸다.
“동이나 서주를 따지자는 게 아닐세. 은상이 동쪽의 나라, 그리고 그들이 숭배한 현조.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말이야.”
어울린다?
막 물통을 받아들던 오소민의 손이 딱 멈추었다.
지금 역사를 토론하는 게 아니잖나.
동창이 만약 녹림장관을 친다는 핑계를 대고서 사실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안양의 은허에 집결한다면.
그 목적을 헤아려야만 한다.
“동쪽의 나라, 아득한 하늘에서 내려온 새…금오혈석!”
단번에 답이 나온다.
동(東)은 나무(木)에 해(日)가 걸린 모양.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 진다.
그걸 사일신화에서는 동쪽의 부상(扶桑)이란 나무에 얹은 열 개의 해가 차례로 하늘을 운행한 후에 서쪽의 감연(甘淵)이란 못에서 몸을 씻는다고 했었다.
그리고 예의 화살에 맞아 떨어진 아홉 개의 해는 전부 까마귀로 화해 금오(金烏)라고 불렀다나.
이미 단목정과 몇 번이나 토의했던 내용.
상나라의 전설이 이와 겹치는 부분, 아니 겹친다기보다 아예 똑같은 내용의 또 다른 판본인 듯.
오소민의 답을 기다렸던 것처럼 해원기가 천천히 말을 받았다.
“아홉 개의 금오혈석. 어디서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해득하기 위해서 동창은 오랜 시간 많은 공을 들였을 걸세. 그래서 양도양경, 오래된 고을에 남은 흔적들을 악착같이 뒤졌겠지.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목격한 결과는.”
“육악지력이로군. 그것도 세 개.”
요술사는 알유, 오온존자는 우강, 진여신승은 구영.
“자네가 장안을 떠나기 전에 장안의 길거리 가게에 걸어놓았다는 네 글자를 수수께끼로 냈잖은가? 그게 계속 뇌리에 맴돌더라고.”
육피구단(六皮九蛋). 오리 알과 달걀을 같이 삶아놓고, 손님이 찍어서 오리 알을 맞추면 여섯 푼, 못 맞추면 아홉 푼을 내야 한다는 장사 수법.
수수께끼처럼 그 네 글자를 남겨놓았던 오소민이 코를 찡긋했다.
“아, 그거야 우습지도 않은 수작을 보니까 얼핏 금오혈석이 떠올라서. 유 분타주가 자꾸 묻길래 그냥.”
사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장안에서 해원기를 보기 민망해 훌쩍 총단으로 떠나려는데, 유항이 자꾸 이유를 묻는 게 성가셔서 뭔가 비밀을 깨달은 척했을 뿐.
이제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게 굳이 뇌리에 맴돌게 놔둔 건 또 뭔지.
괜히 어딘가가 간지러운 느낌이라, 오소민이 어깨를 조금 틀다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데?”
하여간 해원기는 확 털어놓으면 될 얘기를 쓸데없이 돌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
해원기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음. 금오혈석이 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더구먼. 금오혈석이 신화에서 말한 아홉 개의 떨어진 해라면…….”
침착하게 정리해 말하려는데.
이제는 오소민이 훨씬 빠르다.
“소위 태양지력(太陽之力)이겠지. 그런데 육악지력이 나왔단 말이야. 그것도 세 개. 그럼 나머지 여섯 개 중에 절반의 확률일 가능성이. 음?”
금오혈석에서 육악지력의 세 개가 풀려나왔다. 그러면 육악지력의 나머지 세 개를 제외하고도 또 세 개가 남는다. 그 마지막 세 개에 태양지력이 숨겨져 있을지.
간단한 셈을 서둘러 말하던 오소민이 해원기의 부스럭거리는 동작에 초점을 모았다.
건량을 꺼냈던 요대자에서 다시 끄집어낸 검은 상자.
해원기가 자신이 지닌 금오혈석을 보며 중얼거렸고,
“그럼 사일지능(射日之能)은 없을까?”
해를 쏘아 떨구었던 능력.
오소민이 눈썹을 기묘하게 휘면서 해원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둔하고 답답하다고 ‘바부탱이’니 ‘고구마 대장’이니 놀려댔지만,
총명을 자부하는 오소민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부분이 있다. 아니, 오소민뿐 아니라 단목정조차 아직 깨닫지 못한 점.
금오혈석에 태양이나 육악의 힘이 담긴 것만 따지다가,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구나.
사일신화의 주인공, 예의 신능(神能)이 이 금오혈석을 낳았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