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55화 (255/410)

제64장 위초산채(圍剿山寨) (3)

“뭐라고! 이, 이 소형제가, 탁 대협의.”

지나치게 놀라 목소리가 가늘어진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오소민.

그러든 말든 방수인은 방수인대로 해원기의 얼굴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설명은 천상 말재주 없는 해원기의 몫이 되어서,

“응, 탁 소숙의 아들이지. 다만 숙모 집안을 이을 손이 없다 보니. 그래서 방 원주(園主), 사부님의 가장 친한 벗이시지. 그분이 사부님께 ‘드디어 할아버지가 되었다네. 이제부터 나를 노조(老祖)라고 부르게.’라고 편지를 보내 자랑하셨거든. 그때 어찌나 웃으시던지. 하하.”

새삼스럽게 옛 생각이 나는지 또 입가에 웃음이 매달린다.

방 원주는 녹림을 지탱하는 거인, 녹림노조 방송서.

그 외호가 손자를 본 할아버지라는 뜻이었나.

무림뿐 아니라 일반 여염집에서도 어미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위 데릴사위가 그런 식이고.

오소민은 여전히 해원기를 뚫어지게 본 채.

“나도 예전에 이름만 알았지,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아까 수인이 펼친 무공을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네. 녹림장관에 있을지, 탁 소숙과 함께 있을지 전혀 모르는 판이라.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

주렁주렁 매달리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마치 화난 것처럼 말이 없어서.

해원기는 계속 입을 놀려야 했다. 변명이라도 하듯이.

“그게, 수인이 외우던 것처럼 나도. 에, 탁 소숙의 아들이면 친동생과 다름없으니까. 더구나 방 숙모가 또 큰 사모님과는 가까운 사이라서.”

괜한 소리까지 해야 했다.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당대 녹림장관의 주인은 여의낭랑(如意娘娘) 방온화(方溫華). 녹림노조의 친딸이요, 천극 탁관영의 부인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여걸이니.

해원기의 사부와 탁관영이 친형제와 같은 사이란 걸 잘 아는 오소민이다.

제자인 해원기와 아들인 방수인이 사부와 아버지처럼 형제지의를 맺는 건 당연한 일.

그래도.

“큰 사모님?”

남의 집안 사정까지야 어찌 샅샅이 알 수 있겠나. 오소민의 사부와 사형들도 자세한 얘기를 해준 적이 없다.

사실은 친형제와 같은 사이가 이제야 처음 만났다는 사연도 궁금했지만,

해원기의 큰 사모가 여의낭랑 방온화와 가까운 사이란 것도 난생처음 듣는 얘기라 대뜸 따지듯 반문이 나온다.

“어, 음…….”

갑작스런 반문에 놀랐을까, 아니면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을까.

해원기가 어정쩡하게 입을 다물지만, 대답은 바로 옆에서 나오고,

“어머니께 들었지요. 해천옥녀(海天玉女)라는 외호를 쓰시는 대(戴) 백모.”

눈을 반짝거리며 돌아보는 방수인.

그러나 오소민은 어물거리던 해원기의 미간에 어두운 기색이 스치는 걸 알아챘다.

우울함, 서글픔. 그런 감정.

대백모(大伯母)와 대 백모는 다른 발음이지만, 그걸 따질 마음도 들지 않는다.

불긍기공, 수벌기덕.

공을 자랑하지 않고, 덕을 베풀었다고 내세우는 걸 부끄러워한다는 팔자의 언약.

그 언약으로 스스로 이름을 지웠던 전설의 대영웅, 고검협 묵세휘.

그 의지를 기려 다들 대놓고 떠들진 않았으나, 아는 이들끼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기에.

제자에게 간략히라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고검협의 가족이 누구인지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검왕이 어떤 이름인지조차 몰랐다.

‘큰 사모님이라고 했으니 또 사모가 있다는 뜻인데. 해천옥녀란 외호는 들어본 적이 없어. 아니, 그보다 이 바부탱이는 그간 뭐 하느라…….’

친동생과 다름없다는 방수인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까.

오소민이 입을 삐죽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묻고 싶은 게 가슴 속에 가득하지만, 쉬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냥 방수인에게 시선을 보낸다.

해원기의 얼굴에 스치는 서글픔이 어쩐지 마음에 툭 닿아서.

“흐음. 그런데 정록이는 한 번도 소형제를 얘기해준 적이 없구먼.”

“아, 그랬을 겁니다. 제가 공부를 마치고 정식으로 장관의 일을 보기 전까지는, 에,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없는 놈 친다.’였거든요. 쩝.”

쑥스럽게 머리를 긁는 모습에,

오소민이 픽, 하고 웃었다.

먼지투성이 얼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대단히 준수한 용모. 평범의 극을 달리는 해원기와는 딴판인데 어째 하는 짓이 닮았다. 진짜 형제처럼.

괜히 귀엽게 느껴져 대뜸 말을 받았다.

“없는 놈 친다? 금쪽같은 아드님에게 왜?”

방수인이 계면쩍게 연달아 입맛을 다신다.

“쩝, 금쪽은 무슨. 나중에 덜떨어진 녀석이 되면 다 어머니 탓, 아니 방 씨 집안이 전부 덤터기를 쓴다고. 뭐 그런 이유가 있거든요.”

“어머니 탓에 방 씨 집안이 덤터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방수인을 만나고 나서는 총명한 오소민의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데.

“풋!”

해원기가 참았던 웃음이 터져서 입을 가리다가, 오소민의 시선에 겨우 꺼내는 답.

“타, 탁 소숙은 천생무골(天生武骨)이라고. 하하하하.”

“아하.”

천생무골. 하늘이 낸 무인. 확실히 탁관영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무학의 천재라고 들었다.

그런데 탁관영의 아들인 방수인의 성은 방.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고 외탁을 했다는 말이 되니까.

비로소 알아들은 오소민도 헛웃음을 흘리면서,

또 슬쩍 해원기를 흘겨보았다.

그러고 보니 방수인을 만나고 나서는 호탕하게 웃기도 잘하는 게 왠지 얄밉다.

“할 얘기가 적지 않겠다만.”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아, 먼저 말씀하십시오. 형님.”

서로 동시에 말을 꺼내는 바람에,

방수인이 얼른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양보한다. 의젓하게 ‘형님’ 소리에 힘까지 줘가면서.

해원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먼저 네 얘기부터. 동창에서 나온 자들을 여기까지 쫓은 것 같던데. 대체 무슨 일이냐?”

장돌뱅이 모습으로 우연히 이 변두리 객잔을 찾은 게 아니었다.

방수인이 또 머리를 긁는다.

“아 참. 깜빡 잊을 뻔했네요. 그게, 얼마 전부터 우리 장관 주위에 영 수상한 낌새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팔대탐자가 미리 알았어야 할 낌새지만, 지금은 절반이 밖으로 도는 중이거든요. 에, 그게 사실은 형님 소식 때문에.”

말끝이 묘하게 흐려지고,

“나?”

되묻는 해원기에게 바로 대답하긴 어려운지, 시선이 슬쩍 오소민을 향했다.

“녹림장관이 태항산에 있는 건 사방을 두루 살피고 관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채기에 좋기 때문이지요. 하북, 하남, 산동, 산서. 전부 연결되니까요. 근래에 각지에서 허랑방탕한 기풍이 유행하고, 그러면서 가난한 백성들이 갑작스레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살길이 없다고 무작정 산으로 기어들면, 되지도 않을 산적으로 몰리기 십상이라. 뭐, 그게 다 내시들이 권력을 쥐고 엉뚱한 짓거리를 일삼으면서부터인데. 이게 또 얼토당토않은 일을 녹림에다 뒤집어씌우기 일쑤라서요.”

그러면서 녹림장관 얘기를 늘어놓으니, 해원기와 무슨 상관인지.

하지만, 오소민은 본래의 총명함이 되살아난 듯 금방 알아들었다.

“이런. 덕주의 겁표 사건. 그리고 일련의……. 어이구, 답답이. 해 형도 정록이에게 들었다며?”

말이 빨라지고, 해원기에게 도로 답답이라고 타박하고.

해원기도 비로소 황연히 깨달았다.

내막이 어떻든 모든 일의 시작은 낙향하던 상보감 태감이 표물을 겁탈당한 사건. 그 사건에 휘말린 계기는 대첨산 호중객잔에 들면서였다. 덕주에 안덕차행을 찾아가고, 흥륭전장을 거쳐 제남에서 흥륭의 가주를 구출했으며, 오보혜를 개봉까지 호송했었으니.

녹림장관이 살피는 곳에서 빠짐없이 등장했었다.

해원기의 출현.

그 소식을 접한 녹림장관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진짜라면 어떻게든 소재를 파악하려고 팔대탐자의 절반을 내보냈을 터.

알리고 싶지 않다고 알려지지 않을 수 있겠나.

해원기의 얼굴에 낭패한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 소홀했었다.

그런데 계속 이어지는 방수인의 말.

“정 사형이 제일 먼저 명을 받아 서쪽으로 갔고. 그 때문에 제가 대탐자가 된 건데. 갑자기 희한한 연락이 들어왔더랍니다. 그것도 경사에서요. 산서와 사천을 살피러 간 양반이. 미리 보고도 없이 경사로 올라간 이유는 밝히지도 않은데다가, 연락이라고 달랑 네 글자만 남기는 바람에. 어머니가 잔뜩 짜증을 내셨더랬죠.”

뚝뚝 끊기는 말투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오소민이 바로 물었다.

“네 글자? 뭔데?”

“그게. 위초산채(圍剿山寨)라고. 우리 순점(脣點)이에요.”

해원기가 짧게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

장안에서 처음 벗이 되었을 때, 녹림장관에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정록은 해원기의 부탁을 철저하게 지켜서, 자신이 밀각의 여 대부로 변장해 경사까지 간 사정도 전혀 밝히지 않았다.

벗은 신의로 사귄다.

정록이 사제인 방수인을 굳이 알려주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일 터.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정록은 참으로 신의를 중히 여기는 친구였다.

해원기는 새삼 자신의 무지에 속이 상했지만, 지금은 자책만 할 때가 아니다.

오소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녹림의 순점? 무슨 뜻이지?”

순점은 특정한 조직 내부에서 쓰이는 은어. 흔히 흑화(黑話)라고 하며 내부인이 아니면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위초는 포위해서 겁박한다는 의미지만, 산채를 포위해서 산적을 모조리 처리한다는 말이 은어라면.

해원기에게 되돌아온 방수인의 시선.

“태항산의 녹림장관을 치려고 각지의 인마가 소집되었다는 거죠. 그런데 관아에서 관병을 끌어모으는 기미도 없고.”

“관병을 끌어 모으는 기미가 없다는 건 동창이 직접 나선다는 뜻이겠군. 무슨 목적으로? 혹시 우리 개방이나 소림을 공격했던 것처럼? 아니, 그건 시기가 맞지 않지. 더구나 동창이나 금의위면 녹림장관을 치기에 충분하다는 건가? 진짜 하찮은 산적 나부랭이가 모인 산채인 줄 아는 거야?”

해원기가 끼든 말든 오소민이 머리를 흔들며 나섰다.

녹림.

산적들을 녹림이라 부르는 것도 순점의 일종이지만, 당대의 녹림장관은 한낱 산적 따위가 아니다.

원대(元代)에는 산적으로 치부되던 이들이 새로이 나라를 세우고 공신이 되면서, 함부로 녹림을 입에 올리긴 어려워졌지만. 그렇다고 산적이 없어지기라도 했나.

언제나 나쁜 짓을 일삼는 놈들이 산속에 모이기 마련이요, 정치가 부패하고 삶이 어려워지면 어쩔 수 없이 말로에 빠지는 이들이 생기는 법이다.

그런 나쁜 놈들을 처리하고, 그런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강호를 의기로 살아가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협(俠)을 기치로 내건 푸른 숲의 호한들. 이것이 바로 녹림노조의 이상이요, 그 이상을 구현한 녹림의 총본산이 바로 녹림장관이다.

하물며 과거의 난세를 헤쳐 온 녹림노조의 진짜 뿌리는 참으로 고귀한 가문이었다는 걸 누가 알리오.

“동창에 용호방이니 풍운책이니 있다면서 그것도 모를까? 우리 방주 사형도, 화산검협도, 비천무영도 전부 노조의 상대가 아닐 거라고. 맹주를 비롯한 정세삼협이 안심하고 강호를 떠날 수 있는 바탕이 바로 노조라고. 난 그렇게 들었는데?”

인상을 잔뜩 쓴 채 해원기에게 달려들 것처럼 얼굴을 들이미니.

아직 오소민과 해원기의 관계를 잘 모르는 방수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해원기의 손끝이 눈썹에 붙었다.

오소민이 왜 곤혹스러워하는지 안다. 계속 의문 부호가 붙는 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

산채를 친다면서 관병을 동원하지 않는다. 동창의 무력으로만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개방의 총단과 소림을 공격했던 건 용문석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양동(陽動)이었지만, 이번에는 무슨 이유일까.

녹림노조 방송서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를 리 없거늘. 기껏해야 금위위에서 조발한 동창의 이십사개조로 건드릴 셈이라.

이미 동창의 배후를 벽세의 후예로 의심하는 판. 이런 괴상한 짓거리의 의도를 쉽사리 알아볼 수 없는 게 답답하다는 표현일 터.

잠깐 상황을 따져보려던 해원기의 눈에 얼핏 방수인의 달싹거리는 입술이 보였다.

할 말이 남았나.

“수인, 위초산채가 태항산의 녹림장관을 친다는 뜻이라고 했지?”

다시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놀린다.

“그러니까 순점이라고요. 동창 것들은 태항산의 산장을 녹림장관으로 아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머니가 탐자와 이목(耳目)을 죄다 움직여 그 의도를 파악하라 명하시고. 음, 함부로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저지르지 말라는. 쳇, 답답해서 어디 봐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쩝.”

풀을 건드려 괜히 뱀을 놀라게 하지 마라.

그리 일렀는데 방수인은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따로 떨어진 무리를 때려잡을 작정이었던 모양.

하지 않아도 될 소리까지 지껄여 마른 입맛만 다시는데,

해원기와 오소민이 서로 마주 보며 눈을 빛냈다.

녹림장관이 태항산에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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