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54화 (254/410)

제64장 위초산채(圍剿山寨) (2)

“가만!”

호통을 친 조장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다른 흑의인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을러대며 희롱하던 객잔 주인을 뒤로 밀어놓고 슬슬 양쪽으로 퍼지는 넷. 조장이 그제야 앞으로 나서서 입구 부근에 주저앉은 장돌뱅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스물이 될까 말까 하는 새파란 애송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커다란 등짐 외에는 뭐 하나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자신과 수하들을 훑어보는 얼굴에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다.

방금 엎드려 빌어대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냥 애송이 장돌뱅이는 아니란 거지. 네놈, 우리가 누군지나 알고 감히 야료를 부리는 것이냐?”

고압적인 말투에 낮은 음성. 바로 관아에서 죄인들을 다룰 때 쓰는 위협적인 목소리라, 평범한 사람은 듣기만 해도 주눅이 드는데.

장돌뱅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졸라맸던 어깨끈을 풀기 시작한다.

“응, 대강은 알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몰라도. 대인? 대관인? 아니면 한심한 잡역일까?”

또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조장의 눈매가 꿈틀했다.

대강은 안다. 그런데 호칭이 세 가지. 대인이면 그냥 벼슬아치를, 대관인이면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을 부를 때 호칭이고. 한심한 잡역이란 동창의 번역들을 놀리는 말이다.

이 더러운 객잔을 점거한 다섯은 본디 금의위 소속. 임무를 받아 나오면서 지방 관아의 평범한 벼슬아치로 위장했었고, 사실은 동창의 수족 노릇을 하는 열두 개 조의 하나다.

다 알고 떠드는 건가.

그런데 혼잣말이 끝나자마자 장돌뱅이가 조장을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너희는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야료를 부리려는 거야? 히.”

조장의 말투를 고스란히 흉내 낸 반문.

기가 찰 노릇이요, 그러면서 천진난만하게 이까지 드러내며 웃는 얼굴이라. 조장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신 화를 낸 이는 부장.

“이놈잇!”

당장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얹는 순간,

“어?”

눈을 휘둥그레 뜬 조장. 바로 자기 앞에서 올려다보던 장돌뱅이가 돌연 사라졌다. 눈도 깜빡하지 않았거늘.

퍽.

“억.”

어깨가 꺾여 뱅글 돌아 나자빠지는 부장을 확인할 새도 없이,

팡, 아악, 파팡, 에쿠.

좌우에서 연달아 울리는 소음과 비명. 양쪽으로 벌어졌던 흑의인 넷이 뭔지도 모르게 번갈아 나뒹굴어서,

조장이 칼을 뽑으면서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이렇게 빠른 신법이 있다고? 아니, 그보다 왜 좌우로 벌린 수하 넷이 차례대로가 아니라 번갈아 쓰러지나?

의문 부호가 와르르 머릿속을 채우지만, 조장은 일반 번역과 수준이 다르다.

객잔에 갑자기 아득한 기운이 감돌 때부터 이 장돌뱅이가 평범하지 않다고 의심했었다.

쉬익.

짧은 칼에 도기가 새파랗게 일면서 단번에 뒤를 가른다.

반원을 그리며 거친 파도처럼 퍼지는 도기. 아무리 빠르게 날뛰어도 이 넓은 도기를 피하기는 어려울 터.

쩡.

“케엑! 다, 당두, 왜…….”

그러나 자신의 수하 하나가 피를 뿜으며 주저앉는 모습에 얼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기를 막으려고 뽑던 수하의 칼이 부러져 가슴을 찌르고,

그 수하의 어깨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건 바로 장돌뱅이.

통통.

주먹만 한 공 하나를 가볍게 튕기면서 해괴한 표정을 짓는다.

“으헤에, 자기 졸개를 마구 죽이네. 무서워라아아.”

껑충 옆으로 뛰는 구석은 바로 객잔 주인을 내던진 곳이다.

얼마나 가볍고 독특한 움직임인지. 해괴한 표정으로 갸웃거리는 고갯짓과 장난스럽게 튕기는 공 하나.

원숭이 같다.

어깨가 부러져 고꾸라진 부장, 망치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머리가 홱 돌아가 인사불성인 흑의인 둘. 그리고 부러진 제 칼에 꽂혀 주저앉은 채 피를 흘리는 하나.

그 잠깐 새에, 벼락같이 칼을 뽑아 도기를 펼쳐 낸 그 짧은 시간에 수하 넷이 전부 쓰러지다니.

“뭐가, 어, 어떻게…….”

귀신에 홀린 느낌이라 조장이 다시 성형도기를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런 기미를 알아본 장돌뱅이가 비로소 몸을 똑바로 세웠다.

퉁.

바닥을 치고 돌아오는 공.

“꼬락서니를 보니 금의위에서 끌려온 것들이구먼. 어쩐지 딴 길로 빠지더라. 뭐, 그렇다고 봐 줄 생각은 없어. 죄다 목을 분질러서. 어?”

손에 쥔 이 공을 날리면 얼빠진 조장도 똑같이 머리를 맞고 기절할 터.

그런데 불현듯 드는 기이한 느낌에 급하게 머리를 돌려야 했다. 목에서 삐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삐꺽.

장돌뱅이의 목이 아니라 한쪽 벽의 가운데 문이 열리는 소리.

해원기와 오소민이 차분하게 모습을 보이자 이번에는 장돌뱅이가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객잔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기척을 살폈거늘.

외딴 변두리의 더러운 객잔. 주인 혼자서 그럭저럭 이어가는 이 객잔에는 동창 졸개들 한 조밖에는 더 사람이 없다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가운데 방에 사람이? 그것도 둘이나?

“누구……?”

“쯧, 상대를 남겨두고 한눈을 팔면 안 되지.”

그중에 눈이 확 뜨일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 혀를 차더니 공중을 뛰어넘어 손을 떨친다.

부드러운 옥빛이 얼핏 일어났을까.

쿠당.

오소민의 옥판장 한 수에 얼이 빠진 조장이 칼을 놓치고 나뒹굴고,

이 뛰어난 신수에 장돌뱅이가 눈을 껌뻑였다.

자신의 무공에 나름 자부심을 지녔는데, 이 잘생긴 청년의 신법과 수법 또한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잖나.

그러나 놀라기는 아직 일러서.

바로 이어지는 해원기의 물음에 장돌뱅이는 바보처럼 입을 딱 벌렸다.

“무상창궁기(無上蒼穹氣)에 영원신법(靈猿身法). 흠, 완세구(玩世球)가 그렇게 작을 줄은 몰랐군. 장관(壯觀)에서 왔는가?”

장관은 훌륭한 경치라는 말.

그 단어를 조직의 이름으로 쓰는 곳은 녹림뿐이지만, 그런 사실조차 아는 이가 극히 드문데.

더구나 동창의 다섯을 제압할 때 쓴 무공에다 작은 공의 이름까지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장돌뱅이가 바보 같은 얼굴로 멍하니 해원기를 바라보았다.

허름한 차림새의 더벅머리 청년.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청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오소민이 얼른 전령전을 꺼내 보이면서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면 장돌뱅이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거 알아보겠지? 나는 개방의 순행장로, 유룡개라고 하네. 소형제는.”

가까이서 보니 더 어려 보이는 장돌뱅이가 그제야 급히 작은 공을 소매에 넣으며 손을 모은다.

“아, 압니다. 오, 오 장로, 맞죠? 저는, 장관 휘하, 대탐자(大探子)를 맡은 방수인(方樹人)이라고. 어떻게 여기에…… 에, 또.”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 어린 티를 팍팍 내면서,

오소민에게 포권을 취하고, 그 모은 주먹이 해원기를 향하지만, 아직 누군지 몰라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하고.

게다가 오소민이 먼저 재빠르게 말을 받는다.

“대탐자? 그거 탐자들의 우두머리 아닌가? 녹림장관 주위를 살피는 중요한 직책이라 여덟 명밖에 없는. 전부 중년이 넘은 분들이라고 들었는데.”

본래 사이가 좋고 왕래가 빈번한 개방과 녹림이다.

탐자는 이른바 개방의 호법에 상당하는 자리. 열 명이 넘는 호법의 우두머리가 바로 호법장로 취개 단삼육이다.

듣기로는 녹림장관의 팔대탐자는 전부 사오십 대라고 했으니,

이 방수인이라는 장돌뱅이 소년이 단삼육과 같은 위치라는 걸 선뜻 믿기 어렵다.

“에, 물론 팔대탐자는 죄다 수염이 더부룩한.”

“서쪽으로 가기 전에는 정록이 대탐자였잖아. 방, 소형제는 정록이하고 어떤 사이길래?”

“네, 그랬지요. 정 사형과 잘 아세요?”

정 사형.

정록을 거론하자 방수인의 얼굴이 확 펴지면서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만,

오소민이 되레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방수인을 본다.

낯선 사람과 처음 인사를 나누다가 서로 아는 이름이 나오면 그제야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가는 법.

사형인 정록을 이름으로 부른다는 건 오소민이 그만큼 가깝다는 의미, 그러나 오소민은 정록에게 사제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형의 지인을 만난 방수인은 얼굴 가득 반가움이 번지는데,

오소민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그런 방수인의 얼굴을 훑어본다. 들어본 적도 없는 정록의 사제요,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대탐자라.

그 가운데에서 아직 인사도 나누지 못한 해원기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이 주인에게는 횡액이지만, 우리가 객잔은 제대로 고른 듯하군. 일단 이들을 한쪽에 치워놓고 얘기하세.”

해원기가 입을 열지 않았으면 오소민과 방수인은 서로 엉뚱한 눈싸움만 계속했을 터.

서둘러 주인의 수혈을 짚어 방에 누이고, 나머지 흑의인들은 손을 나누어 구석에 처박아두고서.

멀쩡한 탁자에 모여 앉자,

또 해원기가 먼저 말문을 연다.

“이름이 방수인이라고 했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

아직 통성명도 마치지 않았거늘. 대뜸 나이를 묻는 말에 방수인이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지만, 오소민과 같이 온 사람이다.

“열일곱, 아니, 이번 달이 지나면 열여덟이지요. 그런데 왜…….”

“그래, 그렇구나. 하하, 그래서 그때 사부님이 그렇게, 하하하하하.”

어지간히 무례한 사낼세.

대뜸 나이를 묻고는 이유도 대지 않고 웃음을 터뜨리다니. 방수인뿐 아니라 오소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원기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그렇게 웃어대던 해원기가 다음에 한 말이 또 희한하다.

“이렇게 만나는구나. 내 이름은 해원기.”

여기까지야 언제나 하는 자기소개. 몇 번이나 이 엉뚱한 소리를 들었던 오소민이 입을 삐죽이기도 전에,

“네 형이다.”

다정하게 일러주는 말에 오소민이 저도 모르게 해원기의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았고,

해원기가 그 말소리만큼 따뜻한 정을 얼굴 가득 띠고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에? 해, 원, 기면.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검왕! 지, 진짜.”

방수인이 기겁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까지는 이해했지만,

그렇게 전신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달싹거리는 소리는.

“열 살 많은 형이 하나, 한 달 빠른 누나가 하나. 서로 성은 달라도 친혈육과 똑같은 삼 남매라는 걸 절대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전혀, 믿지 않았었는데.”

감격이 지나쳐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듯,

그러다가 방수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형!”

해원기가 얼른 방수인의 손을 잡아 도로 자리에 앉히는 광경까지.

오소민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생전 처음 만난 사이다. 방안에서 문틈으로 볼 때도 그저 녹림장관 출신이란 것만 알아봤을 뿐. 이름도 모르면서.

그러다 한쪽이 나이를 알고는 형을 자칭하고.

그랬더니 또 다른 한쪽은 희한한 혼잣말을 지껄이다가 대뜸 형이라고 부른다.

녹림장관에서 검왕의 전설을 들은 거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어도, 그 검왕이 자기 형이란 건.

더구나 성이 하나는 해, 하나는 방인데.

한 달 빠른 누나는 또 누구야.

오소민은 태어나서 이렇게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진 적이 처음이었다.

‘방’이라는 성 때문에 방수인의 부모가 누군지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