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53화 (253/410)

제64장 위초산채(圍剿山寨) (1)

해원기는 바보가 아니다.

타고난 심성이 워낙 순후하고, 오랜 시간 남들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분위기를 살피거나 요령 좋게 설명하는 재주가 부족하긴 하지만.

둔하고 멍청해서야 어찌 ‘박대정심’을 목표로 삼을 수 있겠는가.

오소민의 표정이 왜 짧은 순간 몇 번이나 바뀌는지 금세 눈치 챘다.

화제가 계속되면 혹여 오소민으로 하여금 과거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되살리게 할 수도 있다.

“아흠, 좀 피곤하군.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하고, 일단 눈을 좀 붙이세. 이러다가 또.”

갑작스러운 하품이 어설픈 연극이란 건 오소민이 아니라도 다 알겠다.

그래도 오소민이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거 불길하지. 또 누가 찾아오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아아, 절대 사양이야. 바로 누워야겠네.”

화산에서 둘이 떠들었던 기억. 그 후로 참 일이 많았었다.

사발에 남은 술을 훌쩍 들이켜더니 바로 침상에 머리를 붙인다.

해원기가 자신도 술 사발을 들었다.

설명하기 곤란한 얘기라고 대충 둘러대긴 싫었다. 그래서 핑계를 붙여 다음으로 미룬 건데.

그러고 보니 화산 꼭대기에서도 둘이 한방에 머물렀었구나.

종남파 청령선고가 갑자기 방문했었고, 그다음에는 사건이 연달았으며, 오소민이 이유도 가르쳐주지 않고 떠났었지.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난 기억들.

이렇게 다시 둘이 같은 방에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오 형이 남자인 줄 알아서.’

마시려던 사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참 얘기를 나눌 때는 잊었던 어색함이 또 슬그머니 머리를 든다.

언제 여자랑 한방에서 자본 적이 있나.

아무래도 마음을 다스리려면 잠심침령이 효과가 있을 텐데.

“해 형, 거기 등 좀 꺼.”

무심한 오소민의 음성.

“어, 응.”

가운데 침상에 올려놓았던 작은 등을 후, 불어 끄자 대번에 캄캄해졌다.

“잘 자게.”

“음, 자네도.”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은 했지만.

어둠 속에서 해원기는 침상에 앉은 그대로. 아직 누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러다 정말 밤을 꼴딱 새우게 생겼다.

등을 보인 채 누운 오소민.

불이 꺼지자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뜬다.

캄캄한 방안이라고, 등지고 누웠다고 해원기가 앉은 걸 모를 리 없다.

‘흥, 바부탱이. 어지간히 좀 하지. 남자니, 여자니…….’

입이 삐죽거리지만, 그만큼 자기도 해원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닫진 못한다.

저렇게 침상에 앉아서 운기조식으로 때울 셈인가.

그렇다고 일부러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자꾸 뒤통수로만 눈이 돌아가려고 해서,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사부님들과 사형들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벽세라. 진짜 과거의 벽세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자가 있을까. 근 이십 년간 아무런 흔적이 없었잖아. 지부와 벽세의 잔당이 다시 중원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정천삼협을 중심으로 한 위대한 협사들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 이십 년의 시간을 들여 음모를 획책했다? 누가? 설마, 복수일까?’

복수라면.

해원기의 사부인 그분. 고검협을 찾아 복수하려는 걸까.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복수란 어떤 면에서 굉장히 순수한 감정의 표현이지. 탐욕에 찌들어 오직 권력만 좇는 자들에겐 그런 마음가짐 자체가 있을 수 없어. 게다가 누가 그분을 찾을 수 있겠나, 차라리 탁 대협을 찾는 게 빠르지. 복수? 흥.’

그 단어 자체가 가소롭다.

개방에 들어 팔선을 사부로 모시면서 과거의 많은 걸 버렸던 자신. 그중 가장 먼저 버린 게 복수였다.

십족구멸(十族俱滅)이란 역사에도 없는 끔찍한 학살을 당한 집안. 그 원한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만, 원수는 다름 아닌 황제요, 그 황제도 지금은 세상에 없다.

더구나 영락제가 등극한 후에 나라는 더욱 흥해서 사람들의 삶도 점점 나아졌으니. 권력이 부패하고 정사가 문란해지는 건 어느 때나 있었던 일. 그저 백성들이 걱정 없이 살기만 하면 그만이잖나.

복수한답시고 주황실을 통째로 뒤집어엎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단목 당주의 추측처럼 황권까지 노리는 거라면 엄청난 규모야. 그런데 아무리 동창이라고 해도 그런 역모의 조짐이 전혀 노출되지 않았을까? 영락의 아들인 홍희(洪熙)는 그래도 꽤 현명한 군주였거늘. 아니, 조정이 어떻게 되든 뭔 상관이람. 우선은 강호, 무림에 집중해야 해. 지부의 오대마도, 벽세에서 유래한 갖가지 사술…….’

쓸데없이 늘어나는 잡념을 치우고 오직 강호만 염두에 둔다.

그렇게 아는 것, 들었던 것을 하나하나 견주어보고 따지다가,

얼핏 잠이 들은 듯.

“웅? 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느낌에 눈이 뜨였고, 그 눈에 보이는 건 자신을 내려다보는 해원기의 얼굴.

뭐지? 잠은 안 자고. 왜 갑자기 바짝 다가온 거야?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곳을 향한 해원기의 시선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낡은 방문.

오소민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해원기와 함께 방문 앞으로 움직였다.

[지금이 몇 시인가?]

해원기가 손가락 네 개를 펴는 걸 확인하고,

[묘시면 이미 해가 떴겠군. 빌어먹을 이 객방은 창도 다 막아놔서. 누군데?]

햇빛 한 줄 들지 않아 컴컴한 방안. 그래도 그 덕분에 한 시진 넘게 잤나 보다.

아침 식사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더러운 객잔이지만, 해원기가 이렇게 조심하는 건 누군가 들어왔다는 의미.

손님이 찾아올 것 같지도 않은 변두리의 한심한 객잔인데.

고개를 젓는 해원기를 보며 방문에 귀를 붙였다.

떠드는 소리가 커진다.

“뭐 이런 곳으로 왔어? 더럽고 좁고. 쳇.”

“이것도 객잔인가. 나 참.”

“그러니까 티 나지 않게 빠지기 좋잖아. 내가 예전에 봐두길 잘했지. 술은 꽤 괜찮으니까 그걸로 참으라고.”

“하긴. 이따위 시궁창엔 손님도 들지 않겠지. 주위에 다른 집도 없어.”

“흐흐, 그러니까. 어이, 주인장!”

“주인이 혼자 하는 것 같던데.”

“그럼 더욱 좋고. 나중에 깨끗이 지우고 떠나기 편하겠구먼.”

다섯 명.

제멋대로 떠드는 목소리에 오소민이 미간을 찡그리며 해원기를 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해원기의 동시안에 냉기가 흐른다.

[검은 옷, 검은 두건에 어중간한 길이의 칼.]

문틈으로 다섯 명의 차림새를 확인했던지. 귀에 전해지는 전음에 오소민이 눈썹을 꿈틀했다.

처음 해원기와 함께 싸웠던 덕주의 안덕차행.

[번역 넷에 당두 하나가 한 조라고 했던가. 동창의 졸개들이로군.]

어떤 자들인지 알았으나,

이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걸까.

낙양을 떠날 때부터 종적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그 고생을 했건만. 겨우 신향에 들어와 객잔에 몸을 눕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켰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오소민이 머리를 조금 흔들고 해원기에게 바짝 붙어 문틈에 눈을 들이댔다.

과연 탁자 하나를 차지한 다섯의 모습이 보인다.

“당두, 괜찮겠죠?”

주인을 끌고 나온 한 명과 거기에 어울려 이것저것 주문하는 둘. 지금 대화를 나누는 건 나머지 둘이다.

당두라고 불린 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별일 있겠냐? 이쪽도 다 일하던 참에 갑자기 모이란다고. 뭐, 안양으로 대지급 소집령? 누가 내린 명령인지도 확실치 않잖아. 우린 대영반(大領班) 지시만 따르면 돼. 인자조(寅字組)가 보고하러 갔다니까 그때까진 뭉그적거려봐야지. 마, 당두가 뭐냐? 아예 역장이라고 해라.”

“아, 죄송합니다. 조장(組長). 그런데 안양에 뭐가 있다고…….”

동창의 번역들이 금의위 출신과 섞여 있어서 때로는 비어복이라는 관복 차림인 것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호칭에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듯.

부장 격인 사내가 말을 흐리자 조장이 불쾌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얼핏 들었더니 산적이란다. 어이가 없어서.”

“네? 산적이요? 아니, 산적 소탕에 대지급 소집령이라니. 그런 건 그냥 관아에서 처리할.”

“누가 아니라나. 그러니까 한심하다 않느냐. 하북, 하남, 산동, 산서…… 이십사 개조를 다 불렀다는데.”

“허, 그 정도면 장군부(將軍府)나 도찰원(都察院)을 칠 규모. 핑계를 산적으로 댄 게 영 이상하군요.”

“내시들이란 게 본래…….”

불만스러운 대화가 계속 이어지자.

문틈에서 눈을 뗀 오소민이 해원기에게 눈을 찡긋했다.

[저것들 잡아서 좀 때려주세.]

해원기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호중객잔.

산서에서 물길을 뚫고 산동으로 넘어갈 때 예전에 들었던 얘기가 기억나 찾았던 대첨산 속의 숨은 객잔.

그때처럼 또 좋지 않은 불청객이 뒤따라 들어온 셈이잖나.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적대하는 동창의 무리요, 자신의 행적을 함부로 노출할 수도 없는 처지.

하지만 오소민의 엉뚱한(?) 요청을 듣자마자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동창 휘하의 한 조는 자신들을 뒤쫓는 게 아니라 모종의 소집령에 응해서 이동하던 중. 그 소집령에 불만을 품고 일부러 태만하게 시간을 보내려는 것이다.

더구나 길 안내를 맡은 오소민이 경사로 가는 도중에 녹림장관을 들른다고 했었고, 태항산 위의 녹림장관에 오르려면 안양을 거쳐야 한다.

이들이 이 신향의 변두리 객잔에 숨어든 이유를 제대로 알아낼 필요가 있다.

그래도 ‘때려주자’라니.

짓궂은 표현에 고소가 입가에 매달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해원기의 동시안이 번쩍 빛을 뿜으면서 곧장 문틈으로 향했다.

“에고고고, 밤새 걸었더니 피곤해 죽겠네. 어이, 주인장, 에?”

불쑥 객잔 안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

어지간히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들어서서 주인을 찾다가,

흑의에 칼을 찬 사내들을 보더니 놀라 어쩔 줄을 모른다.

객잔 주인을 을러대며 이것저것 주문하던 흑의인들도 이 뜻밖의 손님에 눈을 둥그렇게 떴고,

겨우 객잔을 찾은 손님은 흉흉한 분위기에 산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겁을 먹었는지.

서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오소민이 예상할 수 없었던 손님의 등장에 눈을 깜빡거렸다.

하필 작정하고 손을 쓰려던 참에 이 불청객은 뭐냐.

여긴 절대 손님이 찾지 않을 객잔이라고 단정했건만, 어쩐 일로 이렇게 손님이 몰리는 건지.

시선이 해원기를 힐끔 훑었다.

‘이 바부탱이가 은근히 사람을 끈다니까. 장사를 하면 큰돈을 벌 팔자지, 암.’

이게 전부 해원기 때문인 것 같다.

오소민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뭔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해원기.

문틈으로 내다보는 동시안의 비췻빛이 깊이 가라앉는다.

객잔에 막 들어온 새로운 손님. 나이는 스물이나 되었을까. 피곤함에 찌든 얼굴은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하고, 이마에 질끈 묶은 녹색 천과 몸에 걸친 허름한 경장은 먼지가 뽀얗게 앉아 색도 구분하기 어렵다.

작은 키에 꽤 단단한 몸집, 등에는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등짐을 져서 장돌뱅이 차림인데. 실눈에 조그만 코와 입, 반면에 시커멓고 짙은 눈썹이 커다란 귀까지 늘어져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외모다.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던 것도 잠깐, 장돌뱅이가 와락 바닥에 엎드렸다.

“아이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저 용서를.”

뭐가 죄송하고 뭐를 잘못했기에.

대뜸 빌기부터 하는 장돌뱅이의 목소리에 흑의인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마주 쳐다보고,

조장과 대화하던 사내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시끄럽다. 어서 치워라. 나중에 한꺼번에 처리하고.”

주인을 을러대던 자들 중 하나가 웃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어차피 흔적을 남기지 않을 셈이었으니 멍청한 장돌뱅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달라질 게 뭐 있나.

당장 장돌뱅이의 머리통을 힘차게 내차려는데,

“아휴, 다행히 보는 눈이 없구나. 누가 봤으면 또 들통 냈다고 일러바쳤겠지. 그럼 아무도 몰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아서는 중얼중얼.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싶지만, 말을 끌면서 올려다보는 시선이 갑자기 섬뜩해져서.

흑의인이 저도 모르게 멈칫거렸다. 아니, 흑의인 다섯이 전부 움찔할 수밖에 없었던 건 돌연히 객잔 안을 감도는 아득한 기운 때문.

이 광경을 보는 해원기의 가늘어진 눈매에 기이한 감정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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