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장 일로북상(一路北上) (4)
반짝반짝 빛나는 오소민의 눈.
“그러고 보면 처음에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주의할 필요가 있었어. 그때는 단지 세력이 비대해진 환관들이 동창이라는 걸 만들어 횡행하는 정도로만 여겼지. 권력을 지녔다고 재물까지 탐내는 비천한 짓거리라고.”
해원기도 짧은 한숨을 더했다.
“후, 나도 생각이 짧았네. 동창에게 강호를 이용할 안목을 제공해준 자라고 했거늘. 소홀했어.”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잖나. 용호방이니 풍운방이니, 그저 무림에 무지한 것들이 헛수작이나 벌인다고. 칫.”
해원기와 오소민이 처음으로 같이 겪었던 일.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무렵에 시작된 동행이었다. 그 이후로 별별 일을 다 거치고서 이제 가을로 접어드는데,
결국,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오소민도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불평만 늘어놓아서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터.
반짝거리는 두 눈이 해원기를 똑바로 본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지. 어떻든 지금은 그 묘능이란 중이 목표. 그런데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자네, 그냥 평범한 절의 주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말없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해원기.
그 표정을 보자마자 오소민의 표정이 힘없이 풀어졌다.
그럼 그렇지.
이 대단하신 ‘절세검왕’께서 사정을 다 알고 있을 리 없지.
한심스러워서 당장 타박하는 소리가 나오려는 걸 꿀꺽 삼키고,
“어이, 경수사의 주지라고. 조카인 건문제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영락제, 그 모든 계획과 모략을 만들어낸 배후가 바로 도연이잖아. 그 도연의 뒤를 이어 주지가 된 묘능이야. 경수사만 해도 그냥 황족이 드나드는 황사(皇寺) 따위가 아니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해원기가 평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예상했네. 요승(妖僧) 도연에 대한 소문은 민간에도 꽤 알려졌으니까. 그 후계자인 묘능 역시 국사(國師) 대접을 받는다던가. 당연히 관병이 주위를 지킬 거야.”
“흥, 관병이 지키는 정도겠나? 아예 관아는 저리 가라 할 규모일걸. 더구나 지금 우리는 그 묘능이 동창의 배후라고 추측하는 판이잖아.”
오소민이 대뜸 참았던 타박을 코웃음으로 대신하자,
해원기의 표정도 달라졌다.
십이태감, 이십사아문의 형세를 조성하고 동창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라면.
정말로 벽세의 뿌리를 찾은 주모자라면,
관병들만이 있겠는가.
반룡령이나 하북팽가 등의 주구들은 차치하고라도, 수족인 금의위가 철통같이 지킬 것이요,
동창에 어떤 자들이 웅크리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밀각의 각주인 첨유진과 대부들, 주국경 호경륭과 얼마 전에 싸웠던 태백종사, 그리고 육학사와 현신장에다가 조화부인.
이런 자들이 또 얼마나 있을지.
오소민이 해원기의 생각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을 이었다.
“당장 동창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조차 몰라. 몸뚱이야 당연히 비대하겠지만, 팔다리가 몇 개인지, 아니, 대가리가 아홉 개나 달렸을 수도 있잖겠어? 묘능이 배후라고 쳐도 진짜 우두머리일까? 아니면 그저 잔머리만 굴린 책사일까? 흠, 자네가 그랬잖아. 과거의 벽세랑 닮았다고. 그렇다면 그런 수준에서 따져보는 게 옳아.”
맞는 말.
해원기가 묵묵히 오소민의 말을 듣다가 앞으로 밀어놓았던 사발을 쥐었다.
절로 입가에 맺히는 씁쓸한 미소.
“역시 자네가 함께 있으니 좋군.”
시선을 내리며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오소민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뭐야?”
인상 쓴 얼굴을 들이밀지만,
해원기의 이어지는 말에 입맛만 다셔야 했다.
“자네가 없었으면 또 헛고생만 했겠지. 난 바부탱이잖나.”
오소민이 놀리느라 붙인 별명을 툭 꺼내고선,
술 사발을 쭉 들이켠다.
시원하게도.
마치 술을 탐내는 것처럼 맹하니 해원기의 목젖만 쳐다보던 오소민이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이거, 이제 보니 은근히 꽁하고 있었구먼. 사내대장부가 속 좁게스리.”
퉁명스럽게 내뱉는 소리에 해원기가 사발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하하하, 꽁하기는. 하마터면 정말 바보짓을 할 뻔했는데.”
그 웃음은 오소민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
항상 침착하고 세심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무 준비도 없이 막무가내로 쳐들어가는 꼴과 다를 게 없었다.
오소민과의 대화로 새삼스럽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달까.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일러주셨거늘.’
불현듯 떠오르는 사부 얼굴.
때로는 과거에 당신이 거쳤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때로는 검을 가르치면서, 또 때로는 온 가족이 함께 열여섯 둥근 달을 구경하면서.
자주 일러주셨던 말씀이지만,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육 년여의 쾌체 생활은 그저 자신을 세상에서 혼자 떼어놓았을 뿐. 무림을 떠나고 강호를 벗어났다고, 홀로 백성을 도우며 살면 그만이라고.
잘못 생각했었다.
오소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어땠을까. 아니, 오소민이 곁에 있는데도 여전히 바보를 면치 못하잖나.
비로소 해원기의 웃음이 가볍지 않다는 걸 알아챈 오소민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됐네. 엉뚱한 소리는. 어차피 다 추측에 불과해. 진짜 벽세의 후예라면 내 추측 따위는 훌쩍 뛰어넘을걸. 자네나 나나 우린 실제로 그 시절을 살아본 게 아니잖아. 단목 당주나 삼정협의 천기 같은 분들이 아니면, 흐음, 역시.”
해원기를 위로하는 게 아닌 듯.
단목정과 전자방을 언급하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하다가 그친 말.
해원기가 얼굴을 고치고 가만히 쳐다보니, 오소민이 입술을 몇 번 씹다가 중얼거렸다.
“역시 요사(妖邪)에는 교활(狡猾)이 답이겠지. 에잉!”
답은 구했어도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반응이다.
무슨 소린가 싶어 해원기가 다시 묻기 전에,
오소민이 더 빠르게 입을 놀렸다.
“나중에 말하지. 그보다 목적이 두 가지라며? 그럼 두 번째는 뭐야?”
일부러 다른 화제를 끄집어낸 게 분명하지만,
해원기가 술 사발을 무겁게 내려놓았다.
첫 번째 목적을 이루려다가 하마터면 바보짓을 할 뻔했다는 자책과 달리,
두 번째는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일 수 있기에.
싸구려 술.
그래도 맛이 나쁘진 않았고, 아직은 후덥지근한 밤중에 메마른 목을 적시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방금 시원하게 들이켠 한 모금을 잊은 것처럼 어렵사리 입을 떼는 해원기의 목소리는 상당히 메말랐다.
“난 열 살쯤에 입문했네. 뭐가 뭔지도 모르는 한심한 꼬맹이여서 사부님은 먼저 내게 글공부부터 시키셨지. 당시에 경사에는 사부님의 먼 친척분이 계셨고, 또 사부님과의 인연으로 학식이 뛰어난 선생님을 모실 수 있었어. 친척분은 무지한 꼬맹이에게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셨고, 학식이 뛰어난 선생님은 글을 가르쳐주셨는데. 그 선생님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명문의 후손. 대량강문(大梁姜門)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고죽에 이어진 천손(天孫)의 책무와 외진 곳에 머물며 세상을 지켜보는 자부(紫府)의 운명을 밝히기는 어렵다.
설사 밝힌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부는 천손의 책무를 다 했기에 굳이 해원기에게 묵(墨)이란 성을 남기지 않았고,
자부는 그릇된 운명을 탓했기에 기어이 세상의 한 귀퉁이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그래서 세상과 맞닿은 부분만 가려서 얘기를 시작했다.
마침 오소민은 대유(大儒) 방효유의 후손. 금방 해원기의 얘기를 알아듣겠지.
“대량강문? 글쎄, 얼핏 귀에 익은 것처럼 들리긴 하는데.”
“좀 특이한 가학(家學)을 전승한 집안일세. 신화와 전설뿐 아니라 여항(閭巷)에 도는 기문이담(奇聞異談)에도 두루 통해서…….”
“어, 잠깐.”
신화와 전설, 그리고 백성들끼리 수군거리는 신기한 이야기들. 그런 걸 다 아는 게 가학이라.
오소민이 얼핏 떠오른 기억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설마 감진식보(鑑珍識寶)로 이름난, 건국공신(建國功臣)의.”
갑자기 어려운 단어가 주르르 나오는 건 들어서 외웠다는 뜻.
진귀한 보배를 감식하는 가학으로 대명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집안인데,
동그랗게 뜬 눈매가 금세 일그러졌다.
“멸문이 되었지. 남옥의 옥사에 연루되어서. 그 집안에 후손이 있다고?”
믿기 어렵다는 질문.
“응, 유(有)자와 행(行)자를 쓰는 분이 바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분일세. 성을 강(康)으로 바꿨지만.”
강유행. 이 사람이 바로 해원기의 글 선생이다.
경사에 가는 두 번째 목적이라면서 어렸을 적의 글 선생을 거론했으니.
내막이 있으리라는 짐작에 오소민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멸문지화를 피한 사람은 겨우 강 사부와 강 사부의 할머님 두 분. 그리고 그 두 분을 끝까지 지키려고 호위를 자처한 아저씨 한 분이 있었지. 본래 남옥 대장군 휘하, 군문에 있던 무관이었고. 아저씨의 이름은 조원록으로 무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우연히 사부님을 만나게 되었다네. 당시 강 사부 조손은 상당히 위험한 처지에, 흠, 사부님이 조 아저씨를 도와야 할 상황이었다더군.”
사부가 귀왕검의 후유증 때문에 무공을 잃은 시기였다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어서,
대충 뭉뚱그려 넘어간다.
“사부님이 직접 나설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지. 그래서 조 아저씨가 익힌 공부를 한 단계 높이는 그런 방향으로. 요결의 의미를 풀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메꿔주고, 뭐 그런 방법 말일세. 공교롭게도 사부님이 이미 아는 무공이라 자세히 일러줄 수 있었다고 하셨네.”
말이야 쉽지.
남이 익힌 공부의 요결을 풀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인가.
어린애도 속지 않을 헛소리라고 치부할 얘기지만,
오소민은 일단 집중해서 들었다. 말재주가 서툰 해원기의 설명이 장황해도 중요한 단서가 슬슬 나올 때니까.
해원기가 그런 오소민을 힐끗 보곤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 그 무공이 원극순양공과 홍운백일품이야.”
오소민의 긴 속눈썹이 살짝 흔들린다.
태백종사가 감히 개방 방주와 약왕당 당주를 우습게 보고 설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가 익힌 독특한 무공 때문. 직접 보진 못했으나 소위 속가제일비전이라고 한다던데, 그렇게 비밀리에 전승되는 절학을 아무나 익힐 수는 없을 터.
해원기가 왜 경사를 가야 하는지 이해했다.
“그, 조 아저씨라는 양반에게서 유출되었다고 보나?”
“그럴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원극순양공과 홍운백일품을 다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흐으음.”
속을 끓이는 신음.
“다 아는 사람이 몇인데?”
“사부님, 탁 소숙, 조 아저씨, 그리고 백가장 도 어르신. 도 어르신은 돌아가셨으니까 그분의 제자겠지.”
“그럼 조 아저씨 말고도 혐의를 둘 사람이 하나 더 있잖아?”
“아니. 도 어르신의 제자는 더더욱. 절대로 황궁과 엮일 리가 없거든. 게다가 태백종사는 원극순양공이 아닌 원양대진력을 익혔어. 그래서 홍운백일품도 본래의 칠팔 성(成) 수준이었고. 바탕이 달라서야 아무리 형태를 구했어도 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지. 하아.”
신음과 한숨의 이유를 비로소 알겠다.
“자네, 염려하는구먼.”
자진해서 건네준 게 아니라면.
혹시 조원록이 어쩔 수 없이 빼앗겼을 수도.
해원기가 서둘러 경사로 향하는 두 번째 목적은 바로 글 선생 일가의 안위를 살피려는 것이었다.
오소민이 코를 찡긋거렸다.
어렸을 적의 글 선생 일가. 인연이 있는 이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데 그분들이 여전히 경사에 있어? 아무리 성씨를 바꾸고 신분을 감추었다고 해도 뭐 하러 경사에.”
남옥의 옥사에 연루되어 멸문된 집안이잖나.
멸문의 원흉인 황제가 거처하는 황궁 옆에 사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황제를 암살해서 불공대천의 원수라도 갚을 셈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을 하자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한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어쩐지 오소민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목정의 추리. 밀각 각주, 주국경, 태백종사 등의 성씨를 통해 이들이 황실에 원한을 지닌 집안의 후대들이라고, 대역모를 꿈꿀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잖은가.
‘칫, 그것도 나쁘진 않아.’
마음 한구석에 그런 마음이 드는 걸 입 밖으로 내기는 싫었다.
해원기는 오소민이 어떤 마음인지도 헤아리지 못하고,
경사 현도관(玄都觀)을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만 궁리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