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장 일로북상(一路北上) (3)
신향에 들어간 시각이 한밤중.
다행히 변두리의 허름한 객잔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간판도 제대로 달리지 않은 더러운 객잔.
작은 탁자 네 개와 좁은 방 세 개가 전부요, 점소이도 없이 주인이 주방까지 도맡았으니 평소에도 여간해선 손님을 받기 어려운 곳일 터.
추레한 주인이 오랜만에 은자를 받아서인지 시키지도 않은 요깃거리와 술 한 병을 내오는 건 괜찮은데.
“잘만한 방은 요것뿐이네, 쳇.”
오소민이 삐걱거리는 침상에 털썩 앉으면서 혀를 찼다.
방이 세 개면 뭐하나. 하나는 주인이 살림방으로 쓰고, 또 하나는 돼지우리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더러워서.
침상만 세 개가 나란히 놓인 세 번째 방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남는 침상을 창고처럼 쟁여두던 곳이었는지, 탁자도 의자도 없고, 아직 날씨가 더울 때라고 낡은 나무 침상 위에는 얇은 수건 한 장 깔리지 않았다.
주인은 당연한 듯 가운데 침상 위에 요깃거리와 술을 내려놓았고.
해원기도 한쪽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신향이면 작지 않은 고을이건만. 그래도 객잔 노릇은 하잖나.”
축시.
더러운 객잔이라도 노숙보다는 낫다. 더구나 하찮은 땅콩 나부랭이와 싸구려 술이라도 내오는 게 어딘가.
그렇게 위로하며 검대를 풀자, 오소민이 냉큼 술부터 따른다.
“이거면 족하지 뭐. 자, 껄끄러운 목부터 씻자고.”
물만 마시면 목이 껄끄러워지나.
이가 빠진 사발에 술을 가득 따라 건네는데.
해원기가 조금 어색하게 사발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화산에서 둘이 한방을 쓴 이후 처음이다. 물론 그전에도 덕주에서 배계와 술을 나눠 마신 적이 있지만.
그때는 오소민을 남자로 여겼기에 아무렇지 않았던 상황.
그러나 지금은.
먼저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고 바로 땅콩을 쥐어가던 오소민이 그제야 해원기에게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러나? 나쁘지 않은 술인데.”
술을 마다치 않는 해원기가 웬일로 가만히 사발만 쳐다보고 있기에.
“어, 음. 아닐세.”
해원기가 얼른 사발을 입에 대면서,
평소와 다르게 눈을 질끈 감고서 마시는 건 또 뭔지.
오소민이 묘한 표정이 되었다가 아무 소리 없이 땅콩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해원기가 왜 그러는지 뻔히 눈치를 챘지만, 그렇다고 다시 어색한 화제를 꺼내기는 싫고.
어정쩡한 티를 감추지 못하는 해원기가 우습기도 하고.
오소민이 애꿎은 땅콩만 으적거리며 씹다가 생각나는 대로 화제를 꺼내 들었다.
“동창의 감시망이 얼마나 될까?”
밤에 떠나서 고향의 노모를 찾으러 간다는 핑계도 댔다. 축시에 이 더럽고 좁은 객잔 방에 들어온 것도 다 동창의 눈을 피하기 위함.
해원기가 사발을 내려놓으며 표정을 고쳤다.
“글쎄. 태백종사를 생포하고서 바로 단목 형님에게 얘기는 했었네. 장안에서 호경륭과 첨유진을 잡았을 때 그자들 몸에 지닌 신물로 위치가 금방 드러난 적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다른 얘기가 나와서 다행이라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오소민이 모른 척 머리를 갸웃거렸다.
“눈에 익은 철패 때문이었다며. 단목 당주는 여러 가지 방술(方術)도 아시니까 괜찮겠지만. 흠, 용문석굴에 나타난 동창의 무리들, 무명천은 들어본 적이 없어도 조양신문은 결국 동창의 졸개였단 말이지.”
태산에서 내려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부터 의심스럽던 자들이었다.
낙양을 떠나 경사로 향하는 동안 되도록 동창과의 충돌을 피하자고 꺼낸 말이었으나,
해원기가 장안에서 벌어졌던 사건으로 이해하는 바람에 초점이 조금 어긋난 셈.
그래도 어차피 한번은 따져볼 문제여서 오소민이 미간을 좁혔다.
“동창의 앞잡이로 전락한 무림인이 적지 않다는 소문은 꽤 있었어. 그래도 떳떳하지 못한 건 아는지 내놓고 설치는 작자들은 드물었고. 지금까지는 반룡령이나, 음, 하북팽가 정도일까. 그렇지만, 조양신문의 예를 보면 강호 곳곳에 동창이 만든 세력이 하나둘이 아니겠지. 용문세가에 끼어들어 흥륭을 노린 차상(茶商)도, 그래, 금오혈석을 지닌 정수회가 또 연결되는구먼. 허어.”
단목정이 괴질 치료를 핑계로 방문해서 직접 확인한 일.
하나씩 꼽아보다가 탄식을 더하고,
“게다가 동창이란 조직이 본래 기찰밀탐(機察密探)이 장기잖아. 금의위도 수족으로 부리면서. 정말 천하에 그물을 깔아놓은 것과 다름없네. 골치 아파.”
머리를 짚는 모습에 해원기가 문득 시선을 멀리 던졌다.
“이런 경우.”
잠깐 말을 끊고 뭔가 생각하는 얼굴.
오소민이 무슨 소린가 해서 쳐다보자,
“과거에도 이렇게 열악한 상황이었다지. 그럴 때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하셨네.”
과거의 열악한 상황, 그리고 존대로 끝낸 말투.
해원기가 사부에게서 들었다는 얘기다.
딱딱하게 굳어진 해원기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오소민의 표정도 더 어두워지고,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오소민도 자주 들었던 과거의 상황, 그리고 그 난세를 끝냈던 단 한 가지 방법. 그건 듣는 처지에서도 참으로 아슬아슬했었다.
“뱀을 잡으려면 그 머리를 치고, 도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를 잡으라는. 그 방법 말인가?”
셋으로 쪼개졌어도 그 하나하나가 협의로 뭉친 무림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는 벽세.
이 벽세를 힘으로 능가하던 지부.
그 가운데에서 벽세의 주력을 차례로 무찌르고, 끝내 지부의 천마까지 처치했던 과거는 그냥 위업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원기의 사부가 없었다면, 또 그분을 바로 곁에서 도왔던 아우와 동료가 목숨을 걸고 만난을 무릅쓰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기적.
단지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려 끄집어낸 화제였지만,
해원기의 굳은 얼굴을 보면서 오소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과거를 겪지 않은 자신이지만, 당세의 강호는 어쩌면 과거의 난세와 다를 바 없을지도.
정확히 동창의 규모와 그 숨겨진 의도를 모르는 것도 딱 벽세나 지부를 닮았다.
금적금왕(擒賊擒王). 도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를 잡아야 한다.
혹시 지금 해원기가 경사를 향하는 목적이 다른 데 있지 않을까.
그의 사부가 행했던 것처럼.
“해 형, 자네 설마…….”
오소민이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끌자,
해원기가 굳었던 얼굴을 풀며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그건 아닐세. 실정을 모르고 함부로 달려드는 건 무모한 만용일 뿐이야. 나도 그쯤은 안다네. 이번에 경사로 가는 가장 큰 목적은 두 가지. 한 가지는 과거 백협맹에 속했던 분들이 짐작하셨을 테고.”
대뜸 황궁으로 쳐들어가 동창을 뒤집어놓을 줄 알았나.
절로 쓴웃음이 맺히는데, 오소민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다시 술 사발을 쥐다가.
“응? 뭐야, 다들 알 거라고 아예 말도 안 꺼냈나?”
눈이 세모꼴이 되어 해원기를 흘긴다.
낙양을 떠날 때는 그저 ‘누가 언제부터 이런 국면을 조성했는지 알아본다.’라고만 했었다.
다들 그렇게만 인지했거늘, 목적이 두 가지라니.
가장 처음부터 해원기와 동행했던 오소민이나, 나중에 일행이 된 증명단과 악송령도 그간의 사정을 통해 대강 해원기의 행선지를 알 수는 있었다.
흥륭상단.
이미 덕주의 흥륭전장에서 당금 황실의 내밀한 정세까지 들은 적이 있잖은가.
과거 백협맹에 속했던 분들은 당연히 짐작하리란 것도 금시초문.
“어이, 어이. 똑바로 털어놓지 못해?”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따지자 해원기가 버릇처럼 더벅머리를 긁었다.
생각해 보면 금정령과 단목정을 비롯한 이들이 대화의 상대였던 터라 다른 사람에겐 설명이 부족했던 면이 있었다.
굳이 일부러 드러낼 사항도 아니었고.
그러나 지금은 호랑이 굴에 같이 뛰어드는 격.
해원기와 함께 움직일 오소민에게는 자세히 알려두는 게 옳다.
자신의 술 사발을 조금 앞으로 밀었다.
“전에 오 형과 함께 갔었던 덕주의 흥륭전장. 그리고 거기서 비천무영 황 대협을 만나러 갔다가 제남의 흥륭 본가에까지 머물면서 흥륭황가의 형제 몇 분을 만났지.”
오소민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주 흥륭전장의 관사는 황륙, 제남의 별서에서 만난 비천무영 황정리, 그리고 가주는 황칠이고 총관은 황량, 마지막에 염상단을 맡은 황일까지 만났었다.
흥륭황가가 팔형제(八兄弟)란 것도 처음 알았고, 가주가 일곱째라는 사실도 신기하게 여겼는데.
가장 기이했던 건 오소민이 만난 팔형제 중의 다섯이 전부 해원기를 상전 모시듯 했던 광경.
당연히 해원기의 사부와 관련이 있겠으나. 그래도 무림인인 황정리 외에 상계의 부호들이 어떻게 얽혔을까.
“에, 과거의 백협맹(百俠盟)은 탁 소숙의 명에 의해 해산했지만, 가까운 몇 분은 여전히 탁 소숙과 함께 지부와 벽세의 잔당이 다시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애쓰고 계시고. 그 가운데 탁 소숙의 벗 두 분은 특히 핵심적인 역할을…….”
황가의 팔형제를 거론하다가 갑자기 왜 백협맹을 들먹이나.
해원기가 본래 말재주가 없다는 걸 아는 오소민이 눈을 깜빡이다가 재빨리 말을 채갔다.
“정천삼협(定天三俠)? 천극(天極), 천기(天機), 천도(天都)의 세 분이잖아. 나를 뭐로 보고. 어, 그러고 보니 자네의 절세검왕이란 소문이랑 비슷하게 잠깐 알려졌다가.”
다시 흘기려던 눈매가 슬그머니 처진다.
해원기의 소문과 마찬가지. 오랜 시간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떠들썩한 소문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마련이다.
강호를 위해, 무림의 생기를 보존하려고 세상 밖에서 지부와 벽세의 잔당을 진압하는데 일생을 바친 협사들. 세상은 매몰차게도 그 위대한 희생을 이미 잊어간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말을 멈추는데, 이번엔 해원기가 의아한 듯.
“정천삼협이라. 천신쾌(天神快)가 아니고 천기와 천도? 그새 그렇게 바뀌었나?”
오소민이 안타까움을 느낄 새도 없이 어이없다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무의 극치에 이른 천극 탁 대협, 하늘의 기밀을 전부 아는 천기 전(田) 대협, 세상의 이치를 두루 꿰는 천도 도(都) 대협이라고. 처음에는 삼정협(三鼎俠)이라고도 했다던데. 자네가 모르면 어떻게 하나?”
해원기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사람들.
그러나 정천삼협도, 삼정협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해원기는 오소민의 타박에 오히려 대강 이해할 실마리를 찾았다.
천극 탁관영, 신기수사 전자방, 쾌주랑 도신주.
젊었을 때 강호가 알아주는 미남자들이어서, 본래는 천신쾌의 강호삼준(江湖三俊)이라 불렀고.
백협맹이 세워졌을 때, 천극은 맹주, 신기수사는 기밀을 다루는 기무당의 당주, 쾌주랑은 대외의 첩보를 다루는 총순찰을 맡았었다.
맹이 해산한 후에 삼준은 세상을 지키는 세 개의 솥발이 되었으니. 다 같이 하늘 천 자를 붙여 존경하는 게 당연하다.
‘호오, 천신쾌 뿐 아니라 무광(武狂)이니 지치(智痴)니 도귀(賭鬼)니 하는 옛날 별명도 다 없어진 모양이네. 그래도 신기수사를 천기라고 하는 건 일리가 있지만, 도박의 도(賭)를 하늘의 도(都)로 바꾼 건. 도 대협의 성을 그대로 땄나?’
사부에게 들었던 예전의 일화가 떠올라 절로 입가가 이지러지지만,
곧장 이어지는 오소민의 물음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삼협은 왜 거론하는 건데?”
“음, 그중의 천도, 도 대협이 예전에 직접 가르쳐서 사부님을 비밀리에 모시던 분들이 있네. 황룡칠절(黃龍七絶)이라고. 그분들이 바로 흥륭황가의.”
“엉? 아니, 흥륭은 팔형제잖아?”
“아, 가주는 빼고.”
정천삼협에서 세상의 이치를 두루 꿰는 천도가 직접 가르친 흥륭황가의 일곱 형제. 황룡칠절이란 이름으로 해원기의 사부를 비밀리에 모셨다?
이것만으로는 도무지 그 안의 사연을 알 수가 없는데, 팔형제 중의 가주는 빼고 칠절이라면 비천무영 황정리도 포함되잖나.
오소민이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렸다.
어쩐지 흥륭전장의 황륙이라는 관사가 황궁의 내밀한 사정뿐 아니라 동창의 구조나 용호방과 풍운책 같은 기밀까지 알려주더라니.
과거에 백협맹에 속했던 이들이 짐작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비로소 깨달았으나.
지금 경사로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황룡칠절을 다시 무림으로 불러오려는 목적일까.
그럴 리 없다.
해원기의 성격을 뻔히 아는 오소민의 영특한 머리가 멍한 중에도 재빠르게 돌았고.
벌렸던 입이 마침내 정확한 답을 말한다.
“그때, 동창의 배후라고 의심했다는, 묘능이라는 중?”
“맞아. 경수사의 주지라는 그 중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네.”
해원기의 차분한 대답에 오소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누가 언제부터 이런 국면을 조성했는가.
동창의 배후를 밝히는 게 첫 번째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