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장 일로북상(一路北上) (2)
세 시진.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출발해서 자정이 넘도록 캄캄한 밤을 달렸는데.
황하 앞에서 오소민 말대로 한다더니 그 후로 해원기는 그저 오소민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무슨 묵언 수행도 아니면서.
둘 다 내력이 견실하고 경공에도 뛰어나, 걸으며 길을 찾고 때에 따라 빠른 경공을 펼쳤으니,
세 시진이 흘렀을 때는 이미 신향(新鄕) 부근에 이르렀다.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는 오소민.
사방엔 불빛 한 점 없고, 지형을 살피느라 공력을 더했는지 눈에는 환한 빛을 머금어서.
그런 오소민을 보던 해원기가 괜히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오는 내내 길을 헷갈리지 않도록, 또 혹시라도 동창의 시선이 있지 않을까 신경을 썼었다.
늦은 시각에 황하를 건너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
평소의 화려한 백의를 뒤집어 입고, 머리를 헝클어 수려한 외모를 감추고.
노모가 병으로 누웠다는 소식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는 중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도 만들어내고.
그 소식을 급보로 가져온 쾌체가 해원기니까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다.
황하를 건너자마자 되도록 인가가 없는 곳을 골라 속도를 높이다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다시 똑같은 핑계를 대면서.
쉬지 않고 이동했다.
과연 영특하고 기민한 친구.
오소민과 함께면 언제나 이렇게 덕을 보는구나.
그런데 이놈의 입에는 풀이라도 칠한 양 당최 말이 나오질 않으니.
왜 이럴까.
오소민이 오른쪽 언덕을 가리키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잠깐 쉬지. 이 앞에는 또 황하의 지류인 위하(衛河)가 흐르니까. 이 시각엔 배도 없거든.”
“어, 음, 그러어, 세.”
뜻밖의 대화라서인지,
서둘러 대답하려는 해원기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뒤집히자,
오소민이 픽, 웃고는 훌쩍 언덕 위로 올라갔다.
해원기도 스스로 어이가 없어 머리를 긁으며 바로 몸을 날리고.
널찍한 바위 하나를 찾아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
휘잉.
조금 높은 곳이라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분다.
오소민이 허리춤에서 대나무 물통을 꺼내 들었다.
“이젠 더위가 한풀 꺾일 때건만, 나 참. 어허, 좋구나.”
둘둘 말아 올린 소매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면서 땀을 식히는 모습.
하는 말이나 행동은 영락없는 사내건만.
해원기도 요대자에 끼워놓은 물통을 쥐면서 말을 받았다.
“그러게. 처서도 지나고 백로가 멀지 않았지. 거, 배고프지 않나?”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보려는 말. 그래도 배고프지가 뭐냐.
세 시진을 달렸어도 저녁을 제대로 먹고 출발했잖나.
해원기가 연달아 엉뚱한 소릴 하는 이유. 오소민이 모를 리 없다.
맥이 빠진 것처럼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해원기를 향해 앉은 자세를 고친다.
“후, 해 형.”
차분하게 부르는 소리에 또 뜨끔한 듯한 해원기.
오소민의 입가에 어쩔 수 없다는 미소가 매달리지만,
“용문석굴에선 예전처럼 대하더니만, 또 왜 그러나?”
하려던 말을 바꾸진 않았다.
해원기가 잠시 자신의 손에 쥔 물병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라. 글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니, 당장 자네를, ‘오 형’이라 부르는 게 옳은지조차…….”
“허, 현장사에선 잘도 성질을 낸 주제에. 내가 여자라서? 그게 뭐, 그리 큰 문제라고.”
오소민이 대뜸 해원기의 말을 끊으려 하는데,
해원기도 이번엔 그냥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다.
“나한테는 큰 문제였네. 자네는 내가 처음으로 믿고 기댄 친구였으니까.”
“그거야, 친구란 게 본래 그런 사이잖아. 전에 둘째 사형이 말한 것처럼 친구끼리도 툭탁거리고, 가끔 오해도 하고 그런.”
“아니, 난 신의를 얘기한 걸세.”
신의.
오소민이 인상을 쓰려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칫, 이건 또 억울한. 내가 자네에게 신의가 없었다? 이것 봐, 사람마다 다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라고. 자네도 나에게 속내를 다 털어놓은 건 아닐걸. 그렇다고 자네와 내가 서로 속이기라도 했나? 우린 처음부터 우연히.”
“취개 단 장로에게 들었네. 자네의 내력.”
“에잇.”
연달아 말이 끊긴 오소민이 기어이 미간을 찡그리다가 얼른 물을 들이켰다.
자신의 내력이 밝혀지리란 건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풍진삼우는 전부 해원기와 깊은 인연을 맺은 사이. 단삼육이 아니라도 무공화상이나 부덕도인 누구든 떠들었을 터. 금정령이나 단목정도 충분히 그럴 사람들이고.
게다가 이번 여정에는 정록 때문에 녹림장관을 들러야 하니, 거기에서라도 어차피 밝혀졌을 것이다.
해원기는 나이만 오소민과 같이 젊은 축이지, 윗대가 죄다 알아주는 신분이니까.
그럼 오소민이 왜 남장으로 살아야 하는지 다 알았을 텐데.
왜 이리 심통이야. 신의까지 들먹여가면서.
오소민이 덜컥 소리가 날 만큼 물병을 내려놓으며 눈을 치켜떴다.
“그래, 그럼 내가 신의가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장안에서 자네가 쪽지만 남기고 떠난 후에 많이 걱정했네.”
또 말이 잘렸지만, 이번엔 오소민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조용히 이어가는 해원기의 음성. 차갑게 가라앉지도, 돌처럼 딱딱해지지도 않은 평소 목소리.
“자네가 붙인 별명처럼 나는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언제나 서툴고 실수를 범하고도 깨닫지 못해. 그러니 무림에 들어와 자네를 만난 건 다행 중의 다행.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
오소민의 치켜떴던 눈꼬리가 내려왔다.
고구마 대장이니 바부탱이니. 전부 자기가 해원기를 놀리느라 붙인 별명. 그러나 해원기는 전혀 가볍고 장난스럽지 않았다.
“자네 말이 맞아. 집집마다 읽기 어려운 불경 한 권은 있다는 속담대로, 나 역시 자네에게 모든 걸 밝히진 않았으니까. 또 그만큼 우리가 아직 거기까지 이르진 못했을지도. 그래도 갑자기 떠날 때, 한마디 귀띔을 나눌 사이라곤 생각했다네.”
“……!”
오소민의 눈썹이 가늘게 떨린다.
‘후회유기’라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네 글자만 남기고 장안을 떠난 자신.
해원기는 그게 그리 마음에 걸렸었구나.
그리고,
“자네가 입은 독상은 가볍지 않았어. 이사모가 내려주신 보명오석을 써서야 겨우 물리칠 정도였으니까. 더구나 나중에 황가약포에서 내 손가락 끝에 잔류한 독기, 흠, 확실히 독기인지도 모를 한 톨을 발견한 후에는 더욱 자네를 만나야 했거든. 자네는 괜찮은지, 아니, 그런 해괴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나를 제대로 이끌어줄 친구는 자네뿐이잖아. 그러면서 자네가 남장한 이유도 묻고 싶었고. 후우.”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풀어내선지, 해원기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오소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현장사에서 해원기가 물었던 질문에 미처 대답할 틈이 없었다.
장안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해원기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타박하던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묻던 질문.
왜 그랬는지 모르느냐고 했었고,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나를 걱정했구나.
꿀꺽.
말을 마친 해원기가 물을 마시곤 시선을 멀리 던지고,
오소민도 괜히 물병을 입에 붙였다가 떼었다.
독한 술도 아니면서 맛은 씁쓸하고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는다. 하긴, 할 말이 없어서 물을 마시는 척했을 뿐.
대화를 시작한 게 자신이니 뭐하고 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굽히긴 싫고, 그렇다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는 건 더 구차해 보일 터.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할 말을 따지다 보니 한편으론 시답잖다는 생각도 들어서,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 해 형이 난 좋아서, 에?”
이건 무슨 소리냐.
내 입이 미쳤나 싶어 오소민이 눈을 똥그랗게 떴고,
오소민의 말을 기다리던 해원기도 뜬금없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다가,
둘의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캄캄한 밤. 어디를 봐도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두 사람의 눈만이 별처럼 빛난다.
내공을 주입하지도 않았건만.
“그, 나도 처음부터 딱 믿음직하게 봤다 뭐 그런. 어흠, 해 형은 좋은 사람이지, 좋은 사람. 내가 좀 성질을 내도 자네가 또 넉넉하게 받아주는.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기를 쓰고 자네랑 붙어 다니는 거 아닌가. 하핫, 자, 그럼 화해한 걸세?”
오소민이 급하게 말을 이으면서 활짝 웃고는,
대나무 물통을 해원기의 얼굴 앞에 들었다.
술잔을 부딪치는 대신으로.
얼떨결에 마주 물통을 든 해원기가 눈을 껌뻑이다가 말없이 물을 들이켜자.
오소민이 또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그 얘기는 단목 당주에게 부탁하던 내용이지? 흠, 독기 같으면서 독기가 아니라. 그러나 이미 남은 증거가 없으니 단목 당주라도 쉬 알아내기 어려울 걸. 독기라면 분명히 나한테서, 그보다는 나에게 독을 사용한 오온존자한테서 나온 거지. 그렇지만 자네는 모든 독을 감지하고 제거하는 힘이 있는데, 전혀 걸리지 않았다는 것도 묘해. 게다가 금오혈석과 닿자 소멸했다니. 허, 그 오리 알 닮은 돌멩이에 무슨 특별함이 있기에?”
화제를 바꾸자 쌓인 둑을 허물 듯 와르르 쏟아지는 말.
해원기가 물통을 도로 요대자에 꽂으면서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어. 이 금오혈석이 진짜인지도 알 길이 없는 판에. 독기인지 뭔지가 오온존자에게서 시작된 건 분명하고. 흠, 자네는 정말 괜찮은가?”
장안을 떠나 지금까지 별다른 일이 없었던 오소민이다.
“아무렇지 않아. 그러지 않아도 장안을 떠난 후에 기맥이 전보다 창통해서 나도 몇 번이나 내부를 점검해봤거든. 나는 오히려 그 보명오석이란 기물 덕을 본 것 같으이. 그러고 보니 그 오온존자의 독공은 이상해. 내 항룡진기가 그리 쉽게 독기에 침습된 것도 그렇고, 보패인 하화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도.”
보명오석은 본디 여와(女媧)가 이지러진 하늘을 메울 때 썼다는 보천석(補天石)을 갈아서 만든 오행명공권(五行明空圈)의 부스러기. 비록 작은 조각만이 남았어도 여전히 일정한 힘을 지닌 모양이다.
오소민이 독문 내공과 하화를 언급하자, 해원기의 손가락이 절로 눈썹 끝에 닿았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
“그렇군. 팔선의 보패를 무력하게 했었지. 깜빡하고 단목 형님에게 미처 알리지 못했네. 이건 어쩌면.”
“어쩌면?”
“전에 얘기한 적 있었지. 소단과 약왕당을 찾아갈 때.”
“아, 그래. 구란와자던가, 거기 두목이 무슨 조합독인가를 쓰려고 했다, 그리고 약왕당까지 따라붙은 사천당가의 당오매. 흐흠.”
빠르게 알아들은 오소민 역시 미간을 좁히면서 뺨을 긁었다.
조합독이 아니라 화합독술이었지만, 명칭이야 어떻든 오소민은 단번에 해원기가 떠올린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챈 듯.
“오온존자는 육악 중에 대풍의 능력을 이었다고. 그러면서 또 독공을 지녔어. 물론 대풍의 별명은 우강이고, 어느 정도 독에 관한 기록도 있지만 내가 연거푸 당할 정도의 독공이었지. 오온(五蘊)이 아니라 오온(五瘟)이 진짜 이름일 정도로. 그러려면 독에 대해 잘 알아야…… 당가가 잃어버린 게 독경약전이고, 그중에 또. 허, 어럽쇼?”
역병 온(瘟)이란 글자까지 떠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해원기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바로 해원기가 불현듯 떠올렸던 생각의 추론. 삼재금독 중의 인앙독은 화합의 독술일 가능성이 크고, 음독과 양독을 조합하는 형태라면 한 가지만으로는 독기가 되지 않을 수도 있잖은가.
더구나 인앙독의 대표라는 망령칩독은 대첨산 화전민 마을을 해친 원인으로 추정되니.
공교롭다고만 여길 수 없는 연결점이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소민이 짧게 코웃음을 덧붙였다.
“흥, 요것 봐라. 이거 아무래도 그 오온존자라는 놈을 잡아서. 아니지, 동창 내부에 누가 독술을 전수했는지 알아내면. 역시 아홉 도적의 겁표 사건부터 다 얽혔던 거로군. 어지간히 세상을 속이고 희롱하는 놈들이야.”
“그만큼 강호가, 무림이 우스워 보였을까? 흐음.”
착잡한 심정에 탄식이 나온다.
알면 알수록 안타까운 국면이고, 이런 국면이 된 데에는 해원기의 책임도 있을 터.
오소민이 해원기를 힐끗 보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자, 이쯤 해두고 슬슬 움직이세. 일단 신향까지 가서 상황을 보자고. 별문제 없으면 낮에라도 길을 재촉하지, 뭐. 물만 마셨더니 입이 좀 심심하기도 해. 신향이면 새벽에라도 요깃거리를 구할 수 있겠지. 그리고선 안양을 통해 태항산맥을 타면, 에이!”
말머리를 돌리다가 문득 불만스러운 탄성을 내니.
“왜 그러나?”
해원기가 바로 묻는 소리에 오소민이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안양쯤에서 녹림장관에 연락을 취해야 해. 그 요물단지 망나니를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이고, 귀찮아라.”
요물단지 망나니는 정록을 가리키는 말.
오소민의 장난스러운 짜증에 해원기는 예전에 정록과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이제는 마음속에 아무런 앙금도 남지 않았으나.
그럴수록 더 오소민을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