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49화 (249/410)

제63장 일로북상(一路北上) (1)

배를 채우고 잠을 잔다.

사람이란 활동을 하고 나서 휴식을 취해야 원기를 회복하는 법.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단지 운기조식만으로 버틸 수는 없다.

간밤의 소란을 벗어난 일행이 잠에서 깨어 다시 음식 앞에 앉은 건 이미 해가 저물었을 때. 꼬박 하룻낮을 잠들었으니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금정령이 돌 탁자를 둘러보았다.

“손님들에게 대접이 소홀해서 무안할 따름이오. 더구나 식사를 마치면 해 소협은 곧장 경사로 떠난다니.”

씁쓸한 표정.

천하제일대방이라는 개방의 방주요, 당금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지만. 이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서 그저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했고.

지금도 이 외진 계곡 속에 숨어서 초라한 음식을 내놓는 처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공화상이 커다란 만두 하나를 집으며 처진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말씀을. 이렇게 시원한 곳에서 따가운 햇볕을 피해 푹 쉬었는걸요. 올해는 덕분에 제대로 피서를 합니다. 아미타부르.”

밖에서는 들여다보이지 않는 깊은 숲이니 햇볕이 들 리 없고, 토굴 안이 시원한 것도 당연한 일.

그렇다고 늘어지게 낮잠만 잔 것도 아니면서. 금정령의 마음을 이해하고 슬쩍 엉너리를 친다.

“한가하게 피서로 놀러 왔으면 더 좋았겠지요. 뭐, 우리 팔자가 그리 한가할 일은 없어 보이고. 금 방주도 굳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귀 방의 도움을 받은 덕에 잠시나마 여유가 생겼는걸요.”

단목정도 같은 마음. 일부러 예의를 차려 하는 말도 아니다.

개방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없었다면 이렇게 멀쩡하게 모이기도 쉽지 않았을 터.

더구나 이들은 모두 강호를 삶의 터전으로 하는 무인들이다.

단삼육이 호로병을 슬쩍 흔들며 피식 웃었다.

“흐, 우리 팔자라. 맞는 말이네. 본래 강호행(江湖行)이란 게 풍찬노숙의 나날이라고. 아, 그래도 해 소협의 결정은 좀.”

단삼육의 예전 별호는 소취개. 한때는 무림 후기지수(後起之秀)의 한 명으로 거론되며 난세를 고스란히 겪어보았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호법장로로 대우받는 나이인데 또다시 강호의 혼란을 맞이하는 감개가 웃음에 담겼으나.

해원기가 떠난다는 사실이 조금 염려되는 듯.

금정령과 무공화상의 시선도 따라서 해원기에게 모여들자,

단목정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받았다.

“확실히 지금은 동창의 내부를 제대로 인지할 필요가 있지요. 권력에 취한 내시들이 강호를 어지럽히다가 아예 집어삼킬 망상을 품은 정도면 괜찮은데, 아무래도 다른 내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어쩌면 대역모(大逆謀).”

이미 한 차례 나눈 얘기지만,

‘대역모’라는 단어에는 좌중의 표정이 저절로 굳어진다. 함부로 입에 담기 어려운 단어다.

“강호의 삶이 딱히 조정에 관심을 둘 이유는 없으나, 그렇다고 외면하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정하불상침의 오랜 묵계는 단지 우물물만 탓하는 말이 아니니까요. 황실과 조정이 안정되어야 강호도 평안한 법. 주황실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쓸데없는 불안과 파국을 막는 게 중요하죠. 무엇보다도 동창이 정녕 강호를 바탕으로 삼아 대역모까지 꿈꾸는 상황이라면 가벼이 대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음.”

했던 얘기를 또 반복하게 될까봐 입을 다물자.

해원기가 바로 뒤를 이었다.

“누가 언제부터 이런 국면을 조성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평소처럼 맑고 차분한 목소리.

그러나 이 간결한 대답에 금정령, 단삼육, 무공화상이 똑같이 묘한 표정이 되었다.

찡그린 듯한 미간과 미소가 맺힌 입매. 바로 간밤에 단목정이 지었던 표정이다.

돌 탁자 위에 오른 건 전부 밖에서 사온 길거리 음식. 간밤에 내놓았던 데운 물 대신에 커다란 술 단지 하나가 각자의 잔을 채웠다.

식은 만두, 간단한 채소볶음 몇 가지와 마른반찬이 다인 식사지만, 그래도 술이 한 순배 돌면서 조금 분위기가 풀어졌고,

눈치 빠른 증명단이 그제야 참았던 입을 놀렸다.

“그런데 오라버니 혼자 괜찮아요? 대뜸 궁궐로 쳐들어갈 건감?”

경사에 가본 적도 없는 산골 소녀니 해원기가 경사로 간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헛웃음이 나올 어이없는 질문이지만.

아직 자세한 계획을 모르는 이들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간밤에 해원기는 차후의 일정을 대강 정하고 나서 단목정과 상세한 부분을 의논했었다.

단삼육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혼자서 검 한 자루로 황궁에 쳐들어간다? 그거 멋진데!”

조금 전에 떠올렸던 고검지주(孤劍之主)에 딱 맞는 장면이랄까.

상상만으로도 호쾌하다.

좌중에 웃음이 번지고, 해원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니. 전에 쾌체 일로 아는 곳이 몇 군데 있고, 흥륭에게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그리고 장안에서 사귄 정 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연락할 방도를 찾아봐야지.”

현도관 얘기는 밝히기 어려운 기밀.

그러나 흥륭이라면 경사에 탄탄한 인맥을 갖추었을 것이요, 여 대부로 변장한 정록이 경사로 복귀했다면 큰 힘이 된다.

이미 장안에서 중상을 입은 척했으니 경사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큰데,

문제는 정록과 어떻게 연락을 취하느냐는 것.

헌데.

“그 망나니를 무슨 수로 찾아? 천상 또 내가 돌봐줘야겠구먼. 칫.”

불쑥 오소민이 혀를 차고,

금정령과 단삼육이 멈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소민은 이 계곡으로 들어와서는 얼굴을 잘 보이지도 않았고, 대화에 끼지도 않았었다.

총단의 인원을 단속하느라 바빴었나. 구출한 목우대 인원을 보살피고 용문세가에 통보하느라 틈을 내지 못했었나. 사형인 개방 방주와 호법장로가 있는 자리라 말을 삼갔을까.

대충 그렇게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이제야 툭 꺼내는 말에 단삼육이 호로병을 든 채 눈을 껌뻑였다.

“에, 막내야, 지금 네 말은.”

잘게 뜯은 만두를 오물거리던 오소민이 냉큼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같이 가야지요. 고구마 대장 혼자 보내는 게 다 걱정되잖아요?”

좌중의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다들 신경이 쓰인 건 사실이다.

동창의 본거지는 그야말로 용담호혈(龍潭虎穴)과 다름없을 테니.

이미 몇 차례나 동창과 맞선 절세검왕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금정령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 해 소협의 뜻을 존중해 따르기로 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지. 네가 같이 간다면, 흠, 확실히 도움이 되겠구나. 그런데, 괜찮겠냐?”

진중한 말투가 꾹꾹 누르듯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무겁게 묻는다.

막내가 걱정되어서일까. 굳이 확인하는 질문에,

오소민이 입을 닦고 똑바로 금정령을 보았다.

“네. 흥륭과는 이전에 안면을 텄고, 정록이와도 연락이 가능한 사람은 저뿐이니까요. 가는 길에 미리 녹림장관에도 소식을 알릴 생각입니다. 경사에서 한바탕 싸울 것도 아니고, 은밀하게 상황을 확인하는 게 먼저. 제가 가는 게 낫지요.”

사형이기 전에 방주.

금정령에게 또렷하게 이유를 밝히는 오소민의 말소리도 진지하다.

다들 수긍할 이유다. 처음부터 해원기와 동행했었고, 머리가 뛰어나고 무공도 고강하며, 어떤 상황도 적절히 대처할 재주가 있는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

특히 정록과 녹림장관을 제대로 안다는 게 큰 이점이다.

이 대답을 들으려고 금정령은 괜찮은지 물어봤나 보다.

해원기가 어색하게 손을 들며,

“아, 굳이 오 형이…….”

사양하는 뜻을 밝히기 전에, 금정령이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맞다. 지금으로선 네가 적임이야. 흠, 해 소협, 막내는 어렸을 때 녹림장관에 자주 왕래한 경험이 있지요. 이래야 개방의 면목도 좀 세울 수 있고.”

손님 대접도 제대로 못 했으니, 순행장로를 수행으로 보내야 맘이 놓인다는 거다.

말이 끊긴 해원기가 금정령의 정중한 요청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음, 좋습니다. 녹림장관과의 연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죠.”

단목정이 대뜸 찬성을 표하고,

“그렇지. 역시 귀염둥이, 아니, 신비의 유룡개가 똘망똘망하니까. 큰 도움이 되리다. 남몰아미타부르.”

무공화상이 엉뚱한 소리와 불호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해원기는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어? 그럼 나도 오라버니 따라서…….”

“마음은 굴뚝같지만, 우린 도리어 방해가 될 거외다.”

더구나 이때다 싶어 설치는 증명단을 악송령이 묵직하게 말리기까지 한다.

더 말할 것 없이 동행하는 거로 결정이 된 상황.

해원기가 들었던 손으로 뺨을 긁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어서 맞은편에 앉은 오소민을 볼 수가 없다.

낙양에서 경사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

이전에 오보혜를 호송했던 길을 거꾸로 밟아 산동을 통해 올라가는 길과,

아예 산서 쪽으로 태항산맥을 곧장 넘는 길이다.

밤에 출발해 굳이 관도를 이용할 필요가 없으니 우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식후에까지 이어진 대화.

개방은 총단을 다시 개봉으로 옮기고 주요 분타주를 소집하여 동창의 움직임과 각지의 연락을 맡기로 했다.

단목정은 일단 개방에서 태백종사의 상태를 살피며 심문을 계속할 계획. 든든한 조수가 된 증명단에 악송령까지 그 호위를 맡는다.

무공화상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소림과 무당에 알리고, 단목정의 요청에 따라 고술의 치료에 필요한 지원을 한다. 아울러 구주정문의 현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개방을 중심으로 동창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는 게 요점.

그밖에도 몇 가지 세부적인 내용이 논의되었으나 해원기는 집중이 되지 않아서, 그저 대체적인 내용만 기억했다.

인사를 나누고,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악송령과 굳게 손을 맞잡고, 뿌루퉁한 증명단을 다독이고.

그렇게 떠날 때의 번잡함도 어쩐지 어영부영.

신경이 딴 곳에 가 있어서다.

“……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자고. 알았지?”

“응? 뭐라고 했나?”

오소민이 곁에서 뭐라고 하는 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새 황하 앞. 경공을 풀고 고개를 돌리자 오소민이 묘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어이, 왜 그래? 그러다가 황하에 퐁당 빠지겠네.”

경공을 펼치면서도 입을 벌려 말할 실력을 갖춘 고수들이지만,

그래도 대화 중에는 속도를 줄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계곡을 떠나자마자 날듯이 북쪽으로 치달리기 시작한 해원기. 몇 번이나 말을 걸어도 그저 앞으로만 죽죽 날아가서, 황하도 그냥 날아 넘을 기세였다.

오면서 했던 말을 하나도 안 들었다는 걸 확인한 오소민이 빤히 쳐다보자,

해원기가 얼른 표정을 고쳤다.

“아, 미안하네.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오소민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시선을 돌렸다.

“흥, 무슨 생각이기에 그리. 됐네. 이쪽은 강폭도 넓고 건널 배도 없어. 나루터는 서쪽으로 조금 더 가야하고, 이 시각에도 배가 있는지 알아봐야 해. 강을 건너고도 안양(安陽)까지는 꽤 멀지. 낮에는 동창의 눈도 신경 써야 하니까 꽤 고된 여정이 될 거야.”

행로에 관한 의논이었던 모양이다.

이쪽 지리는 오소민이 해원기보다 잘 아니까 낙양에서부터 하남 땅을 벗어나는 경로와 태항산맥으로 오르는 일정 따위를 알려준 건데.

선 불 맞은 짐승처럼 앞으로만 치달렸으니.

해원기가 무안해서 뒷머리를 긁었다.

“알았네. 자네 말대로 하세.”

그런 해원기를 본체만체, 오소민이 몸을 돌려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가 드물어서인지 수량이 많이 준 황하. 물가가 바짝 말라 먼지가 풀썩 일어난다.

주위에는 갈대와 풀이 사람 키만큼 자랐고, 늦더위에 날벌레가 기승스럽다.

해원기가 제때 오소민의 말을 들었으면 미리 방향을 틀었을 터.

날벌레를 손으로 내젓던 오소민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어색한가? 그냥 예전처럼 하면 되잖아.”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낮은 목소리지만,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는 똑똑히 들린다.

해원기가 오소민의 등을 보며 나오려던 한숨을 삼켰다.

오는 내내 머릿속을 감돌았던 생각과 똑같은 소리를 하다니.

한숨과 함께 입 밖으로 나오려던 대답.

그게 쉽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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