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집영취화(集英聚華) (4)
황하를 등지고 지대가 차츰 높아져서 가파른 언덕이 어지럽게 얽힌 곳.
짙어진 숲으로 계곡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당연히 계곡 곳곳에 수십 명의 거지가 숨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한쪽 구석의 토굴이 지금의 개방 총단이란 걸 누가 알겠나.
무성한 나뭇가지 아래, 자연석으로 만든 나지막한 탁자와 의자.
악송령이 탁자 위에 올라온 물과 주전부리를 보며 짧게 감탄했다.
“허, 그야말로 숨겨진 승경(勝景). 부호들이 피서하는 별장이 부럽지 않구먼.”
나무물통, 대나무를 끊어 만든 잔, 볶은 씨앗과 구운 떡. 소박한 차림이 이런 야외에선 오히려 운치를 더한다.
비록 별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이지만, 깊은 계곡 그늘 밑에 숨은 절묘한 장소.
천하제일대방이라고 해도 어차피 거지들이 모인 방파거늘, 구걸하기에 용이한 시정이라면 몰라도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아냈을지.
해원기가 동감을 표했다.
“그렇군요. 덕분에 이번 여름 첫 피서를 온 셈입니다.”
구석의 토굴에 힐끗 시선을 보냈으나, 젊은 셋에게도 이 휴식은 중요했다.
금정령이 돌아왔으니 장로인 단삼육과 오소민은 서둘러 차후의 계획을 의논해야 할 터.
단목정도 무공화상과 함께 먼저 생포한 태백종사의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조처를 하려고 따로 공간을 얻었기에.
이렇게 악송령, 증명단과 잠깐의 한가함을 누리는 중이다.
연묵재에서 명물인 낙양수석이 저녁으로 나오긴 했어도, 워낙 논의할 내용이 많아서 편히 식사를 즐길 자린 아니었으니.
그런데 의외로 조용한 증명단.
이 성격 급하고 입 빠른 소녀가 웬일로 연묵재 골목을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뭔 생각에 잠겼는지.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괜찮으냐, 소단?”
해원기가 관심을 보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어, 응? 먹을 게 왔구나. 그러지 않아도 속이 좀 허한 판이었는데.”
구운 빵을 성큼 베무는 모습은 평소 그대로.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선이 해원기의 얼굴을 찾고.
“오라버니, 평범이 비범을 누르려면, 그건 힘인가요?”
뜻밖의 질문에 해원기만이 아니라 물잔을 들던 악송령의 손도 멈추었다.
간단한 질문. 그러나 간단히 대답하기 어렵다.
해원기가 볶은 씨앗을 몇 개 쥐었다.
“비범이란 특출함인데 힘으로 누를 수 있다면 그건 이미 평범이 아니라 비상(非常)함일걸. 무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
이 막무가내가 나름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 이유가 있을 거다.
우선 묻는 대로 답을 내주자, 증명단이 곧장 말을 받는다.
“그, 당주님이 현란한 손가락과 환한 손날을, 움움, 방주님은 아스라한 기운에 상쾌한 손속을 더했는데도 태백종사가 엄청 쉽게 풀어냈잖아요. 그러다가 오라버니가 검을 뽑으니까…….”
한편으론 입에 넣은 걸 씹어대고, 또 한편으론 자기가 본 상황을 묘사하고.
한 손이 바쁘게 해원기의 등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검은 또 어디서 났대? 움, 꿀꺽.”
단번에 목으로 넘기는 소리가 크기도 하다.
예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자신을 향한 증명단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비유구나. 소단이 단목 형님의 북두신강과 금 방주의 청허신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는 의미지. 그러나 이 두 가지 비범한 신공을 막아 낸 태백종사의 홍운백일품도 결코 평범한 기예가 아니란다. 단목 형님과 금 방주 두 분은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또 뒤에 있는 우리를 생각해서 힘을 상당히 조절했었지. 환한 손날에는 현란한 손가락을, 상쾌한 손속에는 아스라한 기운을 품게 해서. 쉽게 얘기하면 공격보다는 먼저 방어에 주력했달까? 그에 반해 태백종사는 바탕이 되는 공력으로 평범을 가장했기에 바로 내력이 드러났고.”
“원양대진력으로 홍운백일품을 가장?”
태백종사가 펼친 무공이 무엇인지는 이미 들었으나. 평범을 가장했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 홍운백일품은 실상 묵수(墨守)의 철학을 고스란히 구현한 속가 비전 중의 비전이라. 다만 제대로 이루려면 원극순양공이란 기공을 익혀야 하고, 적어도 한 가지 병기를 삼십 년 정도 다루어야 한다. 게다가 진정한 평범의 경지에 이르려면 무학뿐 아니라 병법(兵法)도 어느 정도 깨달아야 하지. 결국, 스스로 부족함을 알자마자 편책을 꺼내고 미심환영의 신법으로 피하는 수준이었다.”
증명단이 대뜸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아하, 억지로 흉내 낸 거구나. 어쩐지 나중에는 겁을 덜컥 집어먹은 것 같더니.”
그것까지 알아보았나?
해원기가 증명단을 대견스럽게 보며 자신의 가슴을 툭 쳤다.
“심겁(心怯)하고서야 묵수의 철학을 견지할 수는 없지. 그래도 원극순양공을 원양대진력으로 대치해 홍운백일품을 익혀낸 건 확실히 평범치 않다. 맨손으로 편책의 점고달초식을 제압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상대의 허점을 단번에 꿰뚫을 필요가 있어서 바로 검을 뽑았다. 그간 나도 어지간히 고생을 겪은 터라 서둘러 가전(家傳)의 검을 챙겨왔거든. 봐라, 오죽하면 귀한 판과까지 없어졌겠니?”
증명단이 눈을 깜빡거렸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서 이 답답한 오라버니가 뭔가 달라졌다고 느꼈는데. 비로소 가슴팍의 조그만 솥 대신에 등에 기다란 검이 걸렸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아니, 그런 외양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지.
“그러네. 뭐, 그래도 검으로 그 태백종사란 재수 없는 자를 잘도 요리하더구먼. 그물로 미꾸라지 잡듯이.”
증명단이 평소의 되바라진 말투로 돌아가자,
해원기가 손을 가볍게 움켜쥐어 껍질을 날린 볶은 씨앗을 증명단의 손바닥에 건네준다. 빙긋 웃으면서.
“눈이 밝아졌구나. 잘했다.”
칭찬과 포상이다.
그물로 미꾸라지 잡듯이. 마지막에 섬전추풍과 함께 시전한 복룡검식까지 알아봤으니 만나지 못한 새에 증명단은 또 성장해서.
기특하다.
우직.
해원기만이 아니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악송령 역시 투박한 손으로 한 움큼 씨앗을 으깨 증명단 앞에 밀어주면서,
“의상(意想)을 이렇게 쉽게 표현하는 법. 구상(具象)이란 걸 많이 배웠군. 소단은 비범하고 비상하오.”
무뚝뚝한 말투라서 자칫 놀리는 소리로 오해할 만한데.
악송령을 아는 증명단이 픽, 웃으며 괜히 성깔을 부리는 척.
“아, 내가 애예요?”
악송령을 흘기며 거꾸로 놀려줄 마음을 먹었다.
이 과묵한 아저씨도 배필을 만나고선 딴사람이 되었네그려.
남이 변한 건 잘도 알아채면서 자신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는 증명단이었다.
그러나 토굴에서 나오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 단목정 때문에, 증명단은 악송령을 놀릴 기회를 잃었다.
“형님.”
다 같이 일어나려는 젊은이들을 손짓으로 말리면서, 단목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먼저 물 한 잔을 들이켠다.
“푸, 영 골치 아프겠다. 아무래도 고술(蠱術) 같구나.”
수염에 묻은 물방울을 털지도 않고 바로 해원기에게 말을 건네는 표정이 심각하다.
고술.
그 단어를 듣자 해원기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히고,
“고술? 그거, 남방에서 독충을 쓰는?”
증명단이 먼저 입을 놀렸지만, 해원기와 단목정은 서로 무거운 시선을 마주한 채.
단목정이 자리에 앉으며 잔을 움켜쥐었다.
“광혈단은 아니다. 과거에 일부분을 얻어 살핀 적이 있거든. 광혈단은 무엇보다 홍황(洪荒)…… 이건 내가 더 궁리할 문제구나. 일단 금 방주에게 따로 장소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태백종사는 일종의 정신 금제에 걸린 것과 마찬가지라 정보를 얻으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음.”
먼저 상황을 설명하지만.
지혜롭고 쾌활한 단목정이 말을 쉽게 잇지 못한다.
해원기도 같은 심정. 차라리 확실히 알지는 못해도 팽조린처럼 잠력을 한꺼번에 일으키는 약을 먹는 게 낫다.
과거에 벽세가 백 년에 걸친 난세를 조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
그건 바로 사람의 심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고술 때문이었다.
지금 이 소식을 전하는 단목정의 사부, 천하제일지자로 칭송받았던 천문노인(天門老人)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지독한 고술.
바로 절대심인고(絶對心印蠱).
지금 대화를 나누는 둘만이 아니라 금정령과 단삼육도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
언제나 주변 분위기를 살펴서 증명단에게도 쉽게 가르쳐 주곤 하던 단목정이,
이번에는 악송령과 증명단에게 시선을 보내지도 않는다.
“단정하긴 어렵다. 지금 무공화상이 범음선창을 시행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 반응을 봐야지. 여차하면 소림사로 옮겨서라도…….”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심인고는 단순한 고술을 넘어선 사도대법(邪道大法)과 다름없다. 과거에 사부가 소림사에 남긴 세존패엽(世尊貝葉)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뜻.
그만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사태인데, 말끝을 흐린 단목정이 고개를 흔들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도 작은 소득 한 가지는 있었다. 태백종사라는 자, 자신의 이름과 가계만은 정확히 대더구나. 송청계(宋淸溪), 금화송씨(金華宋氏)의 직계라고.”
정신이 금제된 자가 그래도 이름과 가계는 밝혔다. 그만큼 뇌리에 깊이 각인된 자부심이란 걸까.
증명단이 감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저 해원기와 악송령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태백종사가 괴상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할 때 스스로 ‘송’이란 성을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단목정이 비로소 시선을 돌리면서 혀를 찼다.
“쯧, 그래. 소단처럼 다들 송이란 성은 들었지만, 금화송씨의 직계라고 하니까 문득 희한한 생각이 나서 말이다. 원기, 너도 이미 의식했겠지. 내시가 아닌 자들, 죄다 희귀한 공부를 익혔지 않으냐?”
그러지 않아도 속으로 생각했던 문제.
해원기가 새삼 중도에 궁리했던 부분을 되짚었다.
워낙 정도의 많은 절학들이 벽세에 의해 유실되긴 했지만, 강호에서도 거의 잊힌 전설로 치부되는 무공들이 등장했었다.
그것도 내시가 아닌 자들. 전부 어울리지 않는 높은 관직을 자랑하듯 내세우면서.
목왕팔준경, 십전염왕진, 나타육비, 순양동자공. 그리고 원양대진력에 홍운백일품. 하나도 같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전진에서 유래한 경옥신공이나 태고의 술수인 영사태화 등을 빼더라도 평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단목정이 주목한 건 조금 다른 부분.
“네가 주국경이란 자를 언급하자마자 태백종사가 버럭 화를 내면서 ‘남 원수’니 뭐니 했었지. 장안에 등장한 주국경의 성은 호, 밀각 각주는 첨, 남 원수를 거론한 태백종사는 금화송씨라. 에, 이게 참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
호경륭, 첨유진, 송청계. 이 이름만으로 뭘 떠올릴 수 있을까?
희한한 생각, 어처구니없는 발상.
단목정이 이렇게 말을 끄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금화송씨로 가장 유명한 이는 송렴(宋濂)이다. 국초(國初)의 명신이지만, 나중에 역모에 연좌되어 두 아들이 처형되었고, 송렴 자신도 귀양 가던 중에 객사했는데. 흠, 그 역모가 바로 호유용(胡惟庸)의 사건이요, 이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큰 역모는 대장군 남옥(藍玉)의 사건. 그리고 남옥의 사건에 연루되어 주살된 자가 송렴과 비견되었던 첨동(詹同)의 아들 첨휘(詹徽)다. 흐으음.”
말하면서도 영 미덥지 않다는 신음이 끝에 붙는데.
해원기가 생각지도 않았던 내용에 눈썹을 세웠고, 무뚝뚝한 악송령조차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가운데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꼽다가 눈을 둥그렇게 뜨는 증명단.
“송렴이 금화송씨면 태백종사의 조상? 주국경의 성이 호유용과 같고, 밀각 각주는 첨휘와 같다니, 에?”
그러면 태백종사가 거론한 남 원수는 또 남옥과 관계된다.
전부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문무에서 큰 이름을 떨쳤던 이들. 모반죄를 저질렀다고 큰 옥사가 벌어져 처형되었던 사실은 민간에도 널리 알려져 증명단도 모를 수가 없다.
단목정이 마른 입맛을 쩍 다시고 또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서 어처구니없다고 했잖냐. 그런데 태백종사가 얼핏 보였던 주황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원기는 장안에서 그 호경륭이란 자가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주장했다고 해서.”
“형님.”
어색하게 덧붙이는 설명을 해원기가 무겁게 끊었다.
잔뜩 올라붙은 눈썹과 달리 깊은 호수처럼 가라앉은 시선이 단목정을 향하면서,
“그저 공교롭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형님의 생각이 가슴에 걸리는군요. 이미 동창을 단순히 내시들이 모인 집단으로 여길 수는 없으니까요. 확실히 알아봐야겠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귀신놀음을 하는지. 또…….”
또.
벽세의 그 해괴한 음모를 계승한 자라면 어떤 상황도 이상하지 않다. 희한하다고, 어처구니없다고 여길 일들이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으니.
해원기가 머리를 천천히 북쪽으로 돌렸다.
“그러지 않아도 형님과 상의할 생각이었지요. 동창의 내막을 제대로 살피고, 그 배후를 밝히려면 직접 가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해서요.”
담담한 목소리.
악송령과 증명단이 해원기가 어디를 보나 살피며 북쪽을 보는 것과는 달리,
말뜻을 알아들은 단목정의 얼굴은 당장 일그러졌다.
형이라고, 지혜가 뛰어나다고 설치다가 이 아우가 누구인지 깜빡했었다.
천하를 홀로 누볐던 고검(孤劍)의 주인.
동창이 있는 경사에 몸소 뛰어들겠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