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집영취화(集英聚華) (3)
진짜 광혈단이라면?
과거에 들었던 대로 전신이 폭발하여 주위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터.
고검이 찬란한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단숨에 태백종사를 박살 낼 요량으로 해원기가 군림검을 구현하는 순간,
휘릭.
“원기야, 잠깐! 독이 아니다!”
급한 단목정의 외침보다 해원기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길게 이어지는 한 줄기 선.
훤한 대낮의 모래밭처럼 반짝거리는 그 선이 신쾌하게 공중을 날아 대번에 태백종사의 전신을 휘감았다.
동시에 해원기의 어깨를 짚으면서 몸을 날리는 단목정. 따라오라는 의미를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해원기는 형님이 혹시라도 위험할까 싶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데,
“단령(斷靈)! 봉사(封邪)!”
단목정이 연달아 읊는 구령. 상당히 초조한 음성이다.
촤르르르.
한 줄기 선은 새끼손가락만 한 굵기의 붉은 노끈.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얼핏 분간할 수 없지만, 세심하게 꼬아낸 그 줄의 끝을 단목정이 쥐었고,
다른 쪽에는 짧은 침이 수십 개나 매달려서 단목정의 구령을 따라 태백종사의 전신에 파고든다.
태백종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피 안개가 삽시간에 멈추면서 부풀던 몸이 비틀.
일 장 거리를 두고 정면에 내려선 단목정이 두 손을 모으며 짧은 기합을 토했다.
“합.”
그러자 홀연히 품에서 번지는 부드러운 광채.
곧장 붉은 노끈을 타고 태백종사에게 밀려가면서, 해원기는 비로소 서른여섯 개의 침이 태백종사의 전신 삼십육 대혈에 빠짐없이 박혔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부드러운 광채가 붉은 노끈을 통해 서른여섯 개의 침으로, 삼십육 대혈로 동시에 그 광채를 받아들인 태백종사는 더욱 힘을 잃는 듯.
검붉게 물들었던 피부가 도로 제 색을 찾으면서, 부릅떴던 눈을 스르르 감는다.
터질 듯 부풀었던 체구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확 줄어들더니,
마침내 정신을 잃고 나자빠졌다.
퉁.
해원기와 공방을 거듭하며 엉망이 된 골목길이라 바닥도 평평한 곳이 없어서,
충격에 꿈틀거리는 태백종사.
그야말로 불붙인 화약 같았던 방금 상황 때문에 해원기조차 움찔했으나.
단목정은 도리어 모았던 손을 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 어찌어찌 막아낸 것 같구나. 아, 이젠 괜찮다. 광혈단이든 광혼(狂魂)이든 봉사침승법(封邪針繩法)이 제대로 먹혔으니까. 에……”
광혈단이 벽세에서 만든 괴약이라면, 광혼은 지부에서 마공을 폭증시키는 비법.
서른여섯 개의 침을 매단 붉은 노끈 한 줄기로 태백종사를 제압한 기예가 봉사침승법인 모양인데.
자신의 바로 곁에 딱 붙어선 해원기에게 단목정이 어쩐지 계면쩍은 표정을 짓는다.
“어째 네가 손을 쓰려고 하면 내가 자꾸 가로막는 꼴이 되는구나.”
해원기가 눈을 껌뻑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가를 허물어뜨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는 산소라는 괴물, 다음에는 기라고 불리는 하백 빙이, 그리고 이번엔 태백종사.
전부 해원기가 결판을 내려고 할 때마다 단목정이 말리는 역할이었구나.
그렇다고 단목정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을 것까지는 없었는데.
오히려 단목정 덕분에 해원기는 쓸데없이 손에 피를 묻힐 상황을 피한 셈.
“형님이니까요.”
철컥.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가만히 대답하며 검을 거두자,
그제야 일행들이 바쁘게 다가왔다.
“단목 당주, 조금 전의 그건?”
금정령이 바쁘게 몸을 날리는 와중에도 궁금증을 참지 못한 듯,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공을 펼치던 단목정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아직은 뭐라고 확언할 수가 없습니다만, 광혈이라고 보긴 어렵더군요. 저도 처음엔 예상하지 못한 현상에 당황했었습니다. 이제껏 알려진 바에 따르면 광혈은 단약의 형태로 제조한 약물. 그러나 태백종사는 복용할 시간도 없었고.”
멀쩡하게 해원기와 싸우던 태백종사다.
원양대진력에 홍운백일품, 편책이라는 기형 병기를 꺼내어 점고달초식이란 기예를 썼고. 나중에야 당황해서 미심환영 류의 신법을 급하게 펼쳤었다.
비록 지부 오대마도에서 유래한 신법이 추가되긴 했으나.
원양대진력부터 점고달초식까지는 전부 고유의 이치를 담은 정통 무학.
“속가의 비전에 지부의 마공에서 파생한 신법을 섞어 썼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그건 원기의 말처럼 뜻이 어긋나는 정도지, 저런 괴이한 현상이 일어날 리 없죠. 미심환영의 신법은 조화부인이란 여자도 썼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를 정도니까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터.”
“음, 그 조화부인이란 여자, 갑자기 사라진 게 의심스럽군.”
“맞습니다. 일단은 태백종사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요. 아, 물론 원기가 진즉 생포할 생각이었으니까.”
슬쩍 돌아보는 시선.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해원기는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서.
금정령과 단목정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일행이 향하는 곳은 맹진.
연묵재가 이미 노출된 상태요, 조화부인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더욱이 유탕대진도가 유인의 복진으로 쓰이긴 했어도 이미 발동한 이상, 낙양 안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비록 수신오웅을 먼저 급파했지만, 방주인 금정령이 속히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바로 뒤에 붙어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증명단이 해원기 대신 끼어들었다.
“본래 생포할 생각이었다구요?”
아직 그녀의 안목으로는 싸움의 전개가 지닌 의미까지 알아보기 어렵다.
“음, 홍운백일품을 알아본 후에 원기는 태백종사가 가진 밑천을 전부 들출 계획이었던 것 같아서.”
“어, 왜…….”
이번엔 증명단의 고개가 해원기를 찾아 돌아가려는데,
태백종사를 둘러업은 악송령이 먼저 짤막하게 말을 받는다.
“검의 뜻이 그렇더군.”
“……!”
말문이 막힌 증명단. 그러나 급한 성질과 달리 타고난 재질이 뛰어난 소녀라 입을 벌리는 대신에 신중하게 눈을 빛냈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지냈기에 악송령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그저 사부가 평생을 들여 발굴한 항산의 검을 억지로 익혔던 자신과 달리, 악송령은 도(道)를 닦듯 도(刀)를 닦은 이.
똑같이 오악검법에 속한 태산의 해운파랑검을 칼로 익혔고, 소림사의 고승이 손수 가르침을 내려서 마침내 연벽도를 연성했다고 하지 않았나.
악송령이 눈치 챈 걸 자신은 알아보지 못했다니.
은근히 경쟁심까지 더해져 스스로 그 답을 찾으려 한다.
만약을 위해 홀로 후미를 맡았지만, 혼자 따져봐야 할 게 적지 않아서.
해원기는 굳이 오가는 대화에 끼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머물렀던 경사의 현도관(玄道觀). 어르신에게 그곳을 넘겨받은 이가 강 사부다. 강 사부와 그 어머님, 그리고 죽을 때까지 대량강문의 은혜를 지키려는 조 아저씨. 오직 세 분만 있을 텐데. 아저씨가 사부님을 통해 깨달은 건 속가 삼대종(三大宗)에 속하는 비전절학, 함부로 남에게 전했을 리 없다. 더구나.’
태백종사가 익힌 건 원양대진력.
본래 홍운백일품은 원극순양공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조원록이 남에게 전수했다면 원양대진력이 아니라 원극순양공이었을 터.
그리고 편책으로 점고달초식을 익히는 건 속가에도 전해진 적이 없다.
‘비록 삼대종이 흩어지긴 했지만, 속가의 모든 무공을 집대성한 분은 개세무존(蓋世武尊) 도자명(都子明)이란 분. 신주영웅회에서 속가를 대표하는 백가장으로 추대되었던 분이고, 벽세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돌아가셨다고. 그러나 아무리 그분이라도 기문병기(奇門兵器)의 절학에 대해 탁 소숙만큼 알지는 못한다.’
천하의 모든 병기와 연결된 절학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바로 탁관영.
해원기가 한눈에 점고달초식을 언급할 수 있었던 건 바로 탁관영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속가 삼대종의 하나가 군문에 깃들긴 했어도 장군이나 되어야 접할 수 있다는 점고달초식은 별개의 문제다.
동창에는 대체 얼마나 되는 무공이 있는지.
벽세와 지부의 흔적을 제외하고도 동창에서 나온 자들은 죄다 이름만 간신히 전하는 절학들을 용케 지니고 있었다.
태백종사와의 싸움 도중에 얼핏 머리를 스쳤던 생각. 대내무림(大內武林)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다양한 무공들이 존재하는 듯.
‘하지만, 방잡(庬雜)하다.’
전진의 명옥신공에서 비롯된 경옥신공이니, 고대의 방술과 유사한 영사태화의 비법이니.
하나같이 무인들로 하여금 실전(失傳)되었다는 아쉬움을 삼키게 하는 고심막측한 신공이지만,
정심(精深)하게 조예에 이른 자가 없다.
속되게 표현하자면, 귀한 음식을 너절하게 늘어놓고 마구잡이로 손댄 격이랄까.
아무리 용간봉수(龍肝鳳髓)를 구했어도 비싼 조미료로 범벅된 채 탁한 물로 반죽해서 거친 불로 익히면.
길가에서 파는 싸구려 전병만도 못한 법.
생각이 엉뚱한 쪽으로 빠지려고 해서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하여간 문제는 홍운백일품의 출처다.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부분이니 직접 확인해야. 음, 그리고 대내의 무공에 관해서도 알아보는 게 좋겠군.’
황궁이 무공에 집중하게 된 건 남송에서 원을 거쳐 지금의 명이 세워지면서다.
그 시기에 맞물리는 사건은 바로 백가장이 벽세의 음모를 피해 황궁으로 피신한 것.
예전에 사부에게 들었던 사연들을 다시 되새기고서,
해원기가 다음 문제를 떠올렸다.
‘단목 형님이 독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순간적으로 내 심상에 스친 그건 대체 뭘까?’
장안의 황가약포에서 나중에야 발견했던 한 톨의 독기.
지금까지 독이라고 여겼다.
오온존자의 거듭된 독술에 오소민이 중태에 빠졌고, 보명오석을 사용해 해독한 후에 손가락에 잔류한 독기라고.
그러나 약왕당의 당주요 당세 제일의 신의인 단목정이 독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당장 앞으로 나서서 봉사침승법이란 독특한 수법으로 태백종사를 제압한 것도 독이 아니라 일종의 사술임을 확신했기 때문.
하긴, 독이었다면 제탁지검을 휘둘렀을 때 반응이 있어야 했고,
손가락에 붙어서 황가약포까지 따라올 수가 없다.
‘신왕공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고, 잠심침령에도 걸리지 않았으며, 제탁지검에도 베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독이나 삿된 기운이 아니라는 뜻.
손이 자연스레 허리의 요대자를 더듬는다.
그 손가락 끝이 요대자에 넣은 금오혈석과 마주친 순간에 흰 연기를 내며 사라졌던 한 톨의 독기.
독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기에.
해원기가 요대자 속의 금오혈석을 느끼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오리 알처럼 생긴 이 정체불명의 돌멩이.
단목정과 좀 더 깊이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이 돌멩이가 일으킨 겁표 사건을 확실히 파헤치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어쩐지 강호에 나온 이후, 계속해서 동창에 휘말려 움직인 듯한 좋지 않은 느낌이다.
대화가 멈추면서 경공에 힘을 쏟은 덕분일까.
한 시진이 채 안 되어 회맹진(會盟鎭)이란 고을에 접어들었고,
맞으러 나온 수신오웅을 보고서 경공을 멈추었다.
“북쪽에는 황하가 흐르지. 우리는 여기서 서쪽 삼문협(三門峽) 방향으로 조금 더 가야 하네. 다행히 별다른 변화는 없다는군.”
금정령은 그새 수신오웅에게 전음으로 보고를 받은 듯, 일행에게 남은 길을 가리키는데.
잠시 악송령의 등에 업힌 태백종사의 상태를 살피던 단목정이 지나온 길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하군요.”
금정령도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하고,
“은문진으로 나온 둘, 그중에 조화부인은 상관을 놔두고 사라졌고. 딱히 뒤를 밟는 자도 없구먼. 그러면서 목우대의 동향에는 신경을 썼다라.”
경계를 늦추지 않고 여러 가지 가능성에 주의했었다.
그러나 동창의 행태가 예상과는 전혀 다르니.
황 학사와 현신장 셋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오성복진을 발동해 태백종사와 조화부인을 연묵재로 보냈고.
금정령이 단목정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쯧, 단목 당주의 말대로 이자들은 강호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군. 거창한 이름처럼 상당한 지위를 지녔을 이 태백종사라는 자를 그냥 내버릴 셈일까?”
원양대진력에 홍운백일품. 나중에 듣도 보도 못한 편책의 점고달초식은 비장의 한 수였을 것이다. 게다가 미심환영의 신법까지.
해원기가 없었다면 상당한 싸움이 되었을 터. 그런 태백종사가 그저 쓰고 버리는 말에 불과한지.
단목정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