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집영취화(集英聚華) (2)
졸지에 싸움을 맡긴 꼴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구경만 할 사람들이 아니다.
금정령과 단목정이 재빨리 시선을 교환하고 악송령과 증명단에게 바짝 붙도록 손짓을 보냈다.
그분의 제자요, 절세검왕이란 소문이 있긴 했으나.
아직 해원기의 진정한 능력을 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관심과 염려를 품은 채 태백종사라는 자와의 싸움을 지켜보긴 해도,
주변 상황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용문세가 목우대 두 사람을 부축하고 먼저 맹진으로 떠난 단삼육과 오소민. 이 연묵재는 개방이 비밀리에 차려놓은 거점이기에 지금 남은 인원은 금정령과 항상 곁을 지키는 수신오웅뿐.
수신오웅에겐 미리 연묵재 주위를 경계하도록 지시했다. 혹시 적의 원군이 이르는 걸 미리 살피고 만일을 위해 퇴로를 확보하도록.
그러나 태백종사와 조화부인이 나타난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정말 이 둘만 왔는가.
그런 생각은 단목정도 마찬가지인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남몰래 손가락을 꼽는 모습.
은문진으로 불시에 들이닥친 적이니까 진도의 흔적을 찾는 게 분명하다.
금정령이 힐끗 단목정을 보곤 다시 싸움으로 눈길을 보냈다.
과거의 검형수를 연상케 하는 해원기의 맨손.
태백종사의 유래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능력을 조금씩 몰아붙여 기어이 편책이라는 병기까지 쥐게 했음을,
관전하는 처지에서는 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과연.’
심중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탄.
그분이 그랬었지.
능숙하게 상대의 수를 끄집어내고 그에 걸맞은 대응을 찾아내 항상 승기를 놓치지 않는다.
해원기의 날카로운 시선이 태백종사의 편책을 빠르게 훑었다.
점고달초식 역시 군문(軍門)에서 전승되는 절학. 정통의 십팔반(十八般)과 기문(奇門)의 십팔반 어디에도 오르지 않은 짧은 말채찍을 병기로 쓰는 무공이다.
본래 일군(一軍)의 대장이나 삼군(三軍)의 원수라야 익힐 수 있다던가. 춘추시대 진(晉)이 육군(六軍)을 두었을 때 창안되었다고 하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
전설이야 어떻든 하여간 평범한 기예가 아니다.
움찔하는 태백종사를 향해 슬쩍 한마디를 던져본다.
“주국경 호경륭이랬던가. 목왕팔준경만큼 신기한 무공들을 잘도 구하는구나.”
상대의 실력을 샅샅이 파악해야 공략의 첩경을 택할 수 있다.
일단 공략의 첩경을 고르면 주저하지 않고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
처음 사부를 모셨을 때부터 배웠던 걸 어찌 잊었겠나.
그러나 지금은 홍운백일품을 비롯한 희귀한 공부를 어디서 얻었는지 밝히려는 또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장안에서 부딪쳤던 첨유진과 호경륭은 다 기록으로만 남았다고 여겼던 무공을 드러냈었으니.
오대마도와 벽세의 사술 외에 동창이 지닌 것.
그게 아마도 대내(大內)의 비밀이 아닐까.
자신의 점고달초식을 단번에 알아본 해원기 때문에 움찔했던 태백종사가,
노한 표정으로 확 바뀌고.
“이놈! 네놈이 감히 호 주국을 해쳤겠다? 내 오늘 남(藍) 원수 대신에 그 복수를 하리라!”
분을 참지 못하고 먼저 달려들었다.
쉬이이이이.
어디선가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 전신에서 불타는 것처럼 홍운이 피어나고, 새까만 편책이 하얗게 달구어졌다.
홍운강기에 열양백일, 그리고 점고달초식이 한꺼번에 운용되어서.
열기로 이지러지는 공간. 태백종사가 어디를 어떻게 노릴지 알 수 없는데.
해원기는 기다렸던 것처럼 훌쩍 공간 속으로 뛰어들었다.
가늘게 뜬 눈에서 신광이 무섭게 번뜩인다.
번쩍.
불쑥 시야를 덮는 섬광.
퍽.
진흙을 내던진 것 같은 괴상한 소음이 이어지더니.
태백종사가 갑자기 예닐곱 명이나 불어나 겹쳐지고. 그런 광경도 헛것을 본 것처럼 금방 사라지면서, 어느새 십여 장 뒤쪽에 몸을 세운다.
“음.”
신음을 억지로 삼키지만,
흔들리는 눈이 자신의 편책을 급히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낭창하던 끝부분이 뭉텅 끊겨서 겨우 절반만 남은 편책을 쥔 손, 아니 팔뚝까지 훤히 보이게 소매가 갈가리 찢겼다.
손이 날아갈 뻔했다.
감정이 격하면 허점을 보이게 마련이다.
점고달초식을 익힌 편책까지 꺼내서 홍운백일품을 한껏 끌어올렸어도, 태백종사가 달려들자마자 해원기는 훤히 약점을 간파했고.
열양백일을 덧씌운 오른손을 겨냥했다.
정도오악검법과 마도절세오검을 병용하려던 애초의 계획 대신에,
천손검법 제삼초, 판분천지.
딱히 검상을 구현하지 않고 순수하게 신왕공을 담았을 뿐이언만,
단번에 태백종사를 제압해버렸다.
필경 원양대진력은 원극순양공이 아니요, 점고달초식이 아무리 신기해도 홍운백일품의 뜻과는 어긋나니.
편책에 열양백일을 씌워 해원기를 노린 순간에 파탄이 생기는 걸 피하기 어렵다.
더구나 구름이 아무리 붉다 해도 바람에는 흩어질 수밖에 없고, 백일이 아무리 맵다 해도 물의 정화에는 식어버리는 법.
팔풍지력과 수정지기는 이미 신왕공과 구별되지 않는다.
홍운백일품에서 열양백일은 이미 강기를 구상화한 경지인데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해서, 판분천지가 아무 장애도 없이 그 오른팔까지 통째로 끊어버리려 했다.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깊이 새겨졌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적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전에 내가 범했던 실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군.’
멀찍이 떨어져 싸움을 지켜보는 조화부인.
수차제에서 해원기도 원광과 수진이 위험에 처한 걸 발견하고선 서두르다가 곤경에 몰리지 않았던가.
지닌 능력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서.
물론 당시엔 수정지기를 얻지 못했었지만, 무엇보다 경험이 부족했다.
싸움 중에 상대에게서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는 한편, 해원기는 이 방약무인하게 굴던 태백종사라는 자가 의외로 대적의 경험이 빈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열양백일이 힘을 잃고 오른손이 날아갈 상황이 되자 반전을 꾀하기는커녕 엉뚱하게 눈을 홀리는 신법으로 물러나기 급급했으니.
홍운백일품이면 충분히 막아낼 방도를 찾을 텐데.
호궁 집금오로부터 비롯된 절학. 본래 방어에는 무엇보다 뛰어난 속가의 비전이거늘.
“미심환영!”
뒤에서 단목정이 짧게 외치는 소리가 아니어도 모를 리 없다.
지부 오대마도 중 곤혹도에 속하는 괴이한 신법.
해원기가 휘두른 그대로 검극을 옆으로 내린 채 사뿐히 한 걸음 나아갔다.
“순후한 원양대진력이면 능히 바탕을 이룰 수 있지만, 그따위 마학(魔學)을 꺼냈으니 네 홍운백일품은 이미 무너진 셈. 더 보일 재간이 있느냐?”
“네 이놈! 감히.”
해원기의 차분한 음성에 대뜸 목청을 높이는 태백종사.
그러나 붉게 상기되었던 얼굴은 허옇게 질렸고, 편책을 쥔 오른손이 부르르 떠는 건 노여움 때문만은 아닌 듯.
흔들리는 눈동자에 당혹과 불신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등장한 이래로 남을 전부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 달랑 조화부인만 거느리고 찾아와 개방 방주건 약왕당 주인이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었다.
소위 절세검왕이란 하찮은 꼬맹이 하나를 냉큼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상대는 내 무공을 속속들이 알아보고, 나는 상대가 무슨 수법을 쓰는지 모른다.
맨손으로 검기를 이룰 뿐 아니라 홍운강기를 압박하고, 열양백일로 나아가서야 겨우 압박을 풀어냈다. 비장의 편책을 꺼내니까 당장 점고달초식을 읊어대더니 벼락같이 뽑은 일검에 손이 잘릴 뻔했다.
남몰래 익혔던 환영요란(幻影搖亂)의 신법이 아니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결과.
항상 남을 무시하던 자신이 이런 꼴이 될 줄이야. 생전 처음으로 몸이 굳어지고 입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게 겁이 나서라는 것도 모르고, 어느새 고개를 돌려 조화부인을 찾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어리석은 짓.
눈앞에 적을 두고서 한눈을 팔다니.
멀찍이 떨어진 조화부인이 여전히 공손한 자세로 지켜본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퍼뜩 되돌아왔지만,
이미 전신을 꼼짝 못 하게 옭아매는 기운. 해원기가 지척에 이르렀다.
검은 볼 새도 없다.
“이익!”
억지로 기합을 지르자 신형이 파라락 불어난다. 일단 환영요란의 신법을 펼친 건 맹수를 피해 거리를 두려는 본능에 거의 가까웠다.
오른손에 쥔 반 토막의 편책을 있는 힘껏 휘두르고, 왼손은 정신없이 전면을 두드리고.
붉은 기운이 마구 폭발해 주위를 뒤덮지만, 그건 형태와 기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막무가내에 불과해서.
해원기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해원기가 말한 대로다. 지부의 미심환영에서 유래한 신법에 원양대진력과 홍운백일품을 마구잡이로 내쳤으니 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해원기의 왼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게 검신을 훑고, 오른손이 유연하게 검을 내질렀다.
절세오검의 섬전추풍과 오악검법의 복룡검식이 한데 어울렸다.
형편없이 무너진 상대에게 또 천손검법을 쓰는 건 과한 일.
빠른 번개가 바람을 쫓자 용을 묶고 구름을 가두는 검이 풍뢰를 일으킨다.
그것도 검기핍인의 울을 이루면서.
파파파파.
태백종사의 불어난 신형이 물거품으로 꺼지고, 눈 깜짝할 새에 고검이 그의 전신을 스물네 번이나 찍었다.
검극으로 대혈(大穴)만 골라 점하는 놀라운 수법에 홍운이 저절로 흩어지고,
쿵.
맥이 풀린 태백종사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자기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몰라서 멍하니 눈만 껌뻑대는 모습.
해원기가 비로소 길게 숨을 내쉬는데.
순간,
풀어지던 미간을 급하게 좁혔다.
번갯불 같은 시선이 태백종사에서 조화부인을 찾고, 다시 태백종사로 돌아왔다가,
펄쩍.
무서운 속도로 물러나면서 거두려던 고검이 커다랗게 원을 그린다.
“독? 형님!”
파아앗.
태백종사와 싸울 때도 구현하지 않았던 검상. 적멸검의 검상이 골목을 전부 뒤덮고, 그 결계 안에 신왕공의 청정한 기운이 좌악 펼쳐졌다.
제탁지검.
해원기를 중심으로 금정령과 단목정, 악송령과 증명단 앞은 전부 제탁지검의 검세 안이고.
그 안에는 주저앉은 태백종사와 가만히 보고만 있던 조화부인이 있다.
그런데.
독이라는 소리에 단목정이 전면을 훑어보기도 전에,
픽.
조화부인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동시에 멍하니 주저앉았던 태백종사가 전신을 기괴하게 비틀기 시작했다.
전신의 대혈이 스물네 개나 막히고, 적멸검의 검상에 의해 제탁지검이 내부를 베었을 텐데도.
“독이라니? 아니, 저건 무슨…….”
단목정의 다급한 대답이 이어지지 않는다.
조화부인이 졸지에 사라져버린 것도 이상하지만, 삐꺽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태백종사의 모습이 더욱 기괴하다.
몸속에서 뭔가가 사방으로 쑤셔대는가. 오른쪽 허리가 툭 삐져나오더니 왼쪽 어깨가 불쑥 치솟고, 목이 우득우득 꺾이면서 머리통이 들린 다음에는 팔다리가 내던진 것처럼 펴진다.
게다가 그럴 때마다 뿜어지는 가는 핏줄기. 살갗을 바늘로 찌르고 꾹 누르면 저렇게 안개처럼 피가 뿜어 나오나.
그 핏줄기가 전부 스물네 개. 해원기가 점한 대혈이 저절로 풀렸다. 아니, 혈도가 풀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괴되었을 터.
그런데도 전신을 검붉게 물들이며 일어서는 태백종사의 눈에 괴상한 불꽃이 매달리고,
이를 갈며 여는 입에선 연기가 뭉클 흘러나온다.
“이, 이 쳐 죽일. 우리, 우리 송가(宋家)가 버러지들한테, 이런 수모를. 크으으으.”
펑퍼짐한 백의를 걸친 청수한 용모는 어디로 갔는지.
잘 알아듣기도 어려운 소릴 중얼거리는 태백종사는 처음보다 몸집이 더 커진 듯, 백의 곳곳이 죽죽 찢어진다.
금정령이 급히 옆으로 다가와,
“저런 해괴한! 설마 광혈(狂血)을?”
황급히 자세를 잡으며 인상을 쓰지만, 해원기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광혈은 과거에 벽세가 썼던 광혈단을 가리킨다. 사람이 복용하면 체내의 잠력을 모조리 격발시켜 마침내 폭발하고, 그 혈육 한 점조차 바위에 구멍을 뚫는 위력이 있다고.
그러나 태백종사가 입에다 뭔가를 넣은 적이 없고.
괴이하게 부푼 그 몸집을 보면서 해원기의 머릿속에는 전혀 상반된 모습 하나가 떠올랐다.
등봉에서 처참하게 죽은 팽조린.
그는 약을 먹고 잠력을 일으켜 미친 듯이 도강을 휘두르긴 했어도 나중에는 해골처럼 말라비틀어져 목숨이 끊어졌었다.
또 태백종사의 대혈을 점하고 한숨을 돌리려고 할 때 문득 심상에서 느꼈던 것. 그건 장안의 황가약포에서 쉴 때 우연히 발견했던 한 톨의 독기와 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