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집영취화(集英聚華) (1)
눈앞의 적을 상대하면서 한눈을 파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경험이 풍부한 고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건만, 지금 단목정은 자신도 모르게 해원기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제일지의 유일한 제자로서 온갖 희귀한 무공을 알아보는 안목. 자신과 금정령의 대응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강대한 힘을 거듭 뿜어내는 태백종사가 원양대진력을 연성했음을 간파했다.
그러나 전설의 신공을 연성했다고 해서, 추측하기 어려운 공력을 지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무공의 고하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금정령이 처음에 펼친 사실보허는 상대의 힘을 뜻대로 비트는 고심한 기예, 더구나 원양대진력의 강대한 힘을 뿌리친 것은 이제껏 누구도 익히지 못했던 개방의 절학이다. 그게 선가(仙家) 최상승의 청허신수(淸虛神手)와 유사하다는 것까지 알아보았기에,
단목정 자신도 혜성십지(彗星十指)에 이어 북두신강을 아끼지 않고 내질렀었다.
무공이란 자신에게 어울려야만 한다. 아무리 절세의 신공을 익혔어도 운용에 미숙해서야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상대의 힘을 비트는 사실보허, 강대한 힘을 무산시키는 청허신수. 노리는 곳을 알기 어려운 혜성지에다 어떤 변화라도 그 맥을 끊는 북두신강인데.
태백종사는 능히 버티고서 멀쩡하게 손을 거두었다. 개방 방주와 약왕당 당주에게 연거푸 손을 쓴 티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되레 충격을 받은 쪽은 단목정과 금정령이다.
원양대진력이 비록 강대하고 끈질긴 특성을 지녔다 해도 이렇게 여유만만하다니.
그 이유가 바로 평범한 듯한 손놀림.
그 수법이 단목정조차 이름만 들어보았던 홍운백일품일줄이야.
“화, 확실하니? 속가제일비전(俗家第一秘傳)…….”
묻는 말에 해원기가 고개만 끄덕이곤 불쑥 앞으로 튀어나간다.
“무례를 범합니다만.”
무거운 음성.
금정령과 단목정이 맡은 싸움이다. 형제지의로 맺은 단목정이야 그렇다 쳐도, 천하제일대방의 주인을 뒤로 두는 건 확실히 무례한 행동.
그러나 금정령은 홀린 듯 해원기의 등을 보며 자세를 풀었다.
땅 울림처럼 낮은 목소리와 등을 가로지르는 한 자루 장검이 금정령을 단숨에 수십 년 전의 기억으로 되돌렸기에.
개방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 무인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었던 그분. 그 계기가 없었다면 어찌 청허신수를 연성할 수 있었겠나.
마치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 같았다.
고검협이.
“반드시 제가 풀어야 할 문제. 죄송합니다.”
무례에 대한 사과라는 걸 깨닫기도 전에,
해원기의 말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너, 어디서 홍운백일품을 얻었느냐?”
쿵, 쿵.
힘주어 밟는 걸음에 지면이 울리더니, 무너진 골목길이 와르르 들썩이고.
처음에 태백종사가 장력을 떨치면서 뜯겨나갔던 양쪽의 담장과 바닥이,
이번에는 거꾸로 태백종사 쪽으로 파도처럼 밀려 나간다.
신왕공에 풍뢰결.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지유진(地維震)이 펼쳐졌다.
멈칫거렸던 태백종사가 한 손을 뒤집었다.
펑.
폭음과 함께 한 자 가까이 내려앉는 골목길. 지유진을 눌러서 풀어낸다.
“네놈이 절세검왕. 어찌 홍운백일품을 알지?”
그 또한 해원기가 자신의 수법을 알아본 게 놀라웠던 듯. 거침없이 몰아치던 공격을 멈추고 일단 묻는데.
이렇게 저렇게 도발을 행하던 단목정처럼 말을 받아줄 줄 알았나 보다.
하긴 단목정을 비롯해 해원기를 아는 악송령이나 증명단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본래 자분자분 답답한 소리를 해대서 남의 속을 뒤집기 일쑤니까.
그러나.
해원기의 가늘게 뜬 눈매에서 신광이 흐르고, 두 손이 곧장 공간을 베어온다.
쉬잉.
이십 장 가까운 거리를 무시하고 양쪽 어깨를 끊는 기운.
“검기?”
태백종사가 눈을 홉뜨면서 두 손을 번갈아 흔들었다. 검왕수를 곧장 받아내려는 동작, 그러나 손목이 교묘히 흔들려 붉은 기운이 동그랗게 일어나고.
채챙.
꼼짝도 하지 않고 튕겨낸다.
“건방진. 맨손으로 이룬 검기 따위 아무 소용없다. 이 정도로 백년제일이라는 고천무쌍의 검? 웃기는…….”
여전히 방약무인하게 비웃음을 더하는데,
해원기의 손이 원을 그리자 급히 자세를 고치느라 말을 맺지 못했다.
위잉!
그냥 검기가 아니라 전신을 꿰어버릴 것 같은 느낌. 과연 맹렬한 소음을 동반한 검형이 부서진 골목을 가득 채우고 날아든다.
검왕오형의 발검제형.
방금 튕겨냈던 두 줄기 검기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태백종사가 가슴 앞에서 두 손을 수레바퀴처럼 돌렸다. 양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구름처럼 이는 붉은 기운.
펑!
명칭대로 홍운(紅雲)이 발검제형을 정면으로 막아내고, 어깨만 움찔한 태백종사. 원양대진력을 끌어올려 방어가 더 단단해졌다.
그러나 이번엔 태백종사가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끼잉.
홍운에 의해 꺾였을 검형이 어느새 다시 날아들고 그 위력도 더욱 강해져서,
태백종사가 두 발을 엇갈리며 수레바퀴처럼 돌렸던 두 팔을 힘차게 떨쳐냈다.
퍼펑!
팔뚝을 덮은 홍운이 쳐낸 검형은 하나건만, 폭음은 두 번. 동시에 엇갈렸던 발이 뒤로 미끄러진다.
“이게……!”
입을 열 틈도 없다. 무지막지한 검형이 산산이 부서지는가 싶더니 공간을 종횡으로 쪼개기 시작했으니까.
태백종사가 보법을 바꾸며 양팔을 거칠게 흔들었다.
망치질하듯 휘두르는 주먹, 도장을 치는 듯한 손바닥. 어깨는 북채처럼 흔들리고 팔꿈치는 작두처럼 내리친다. 바닥을 짓이기는 두 다리는 늘어서는 기둥이요, 좌우로 튕기는 허리는 이어지는 성벽.
전신이 첩첩이 쌓아 올린 벽돌처럼 보인다.
차차차차차창.
검왕오형의 재단경위가 원양대진력의 홍운강기와 맞부딪치면서,
태백종사를 둘러싼 공간이 미친 듯이 울어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얼핏 들리는 짧은 신음.
“음?”
자신의 홍운백일품이 차츰 굼떠지는 걸 비로소 자각한 놀라움이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 같지만,
검왕오형을 연용하는 해원기의 시선은 냉정하게 상대를 살폈다.
홍운백일품.
단목정이니까 그나마 ‘속가제일비전’이란 표현이라도 하지, 당세에 이 이름을 아는 이는 거의 없을 터.
한대(漢代) 호궁(護宮) 집금오(執金吾)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 기예는 속가의 한 축을 이루는 군문(軍門)에서만 남몰래 명맥을 이은 비전 중의 비전. 권법과 장법을 넘어 어떤 병기로도 펼칠 수 있는 기오막측한 절학이지만, 그만큼 제대로 익힌 이가 극히 드물어 부전지비(不傳之秘)라고 불릴 정도였다.
더구나 이 홍운백일품을 완벽하게 펼치려면 그에 걸맞은 양강의 내공을 바탕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 또한 속가에서조차 잊힌 신공이라. 바로 원극순양공(元極純陽功).
전승의 내막을 제대로 아는 이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원극순양공에 홍운백일품.
짝을 맞추어 익힌 정통 계승자는 단 한 사람.
사부가 직접 가르침을 주었으니 다른 이가 있을 수 없고,
더구나 해원기가 어렸을 적에 짧은 시간이나마 곁에서 보살펴 주던 사람이었다.
의리를 지켜 대량강문(大梁姜門)의 마지막 후손을 지키던 무사.
해원기와 얽힌 인연의 그 이름은 조원록(趙元祿)이었다.
‘절대로 강호로 나올 사람이 아니요, 함부로 무공을 외부에 전할 리 없거늘. 세상과 떨어져 오직 강 사부(師父)를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
그런데 눈앞의 태백종사가 홍운백일품을 펼치다니.
비록 원극순양공 대신에 원양대진력을 바탕으로 삼긴 했으나, 그 조예가 단순히 흉내만 낸 게 아니다.
검왕오형이 이미 검림소연의 수주개와로 나아갔는데도 옷깃 하나 베지 못했다.
손과 팔, 발과 다리, 상체와 하체를 놀리는 움직임이 다양하긴 해도 특별할 것은 없는데. 원양대진력이 홍운의 강기를 이루어 모조리 막아낸다.
‘사부님께 들었던 대로라면.’
파앗.
지면에서 숲처럼 솟구치는 검기.
태백종사가 힘껏 두 발을 굴러 검기를 마구 짓밟더니 버럭 고함을 지른다.
“퇴(退)!”
굼떠지는 동작과 계속해서 밀리는 처지에 화가 난 듯.
두 팔이 머리 위로 여덟팔자를 이루고, 양쪽으로 벌린 다리가 무릎을 굽혀 원형을 이루자.
전신이 번쩍 빛을 토하면서 홍운이 사방으로 폭발했다.
쾅!
순간적으로 눈이 멀듯 한 백광(白光). 검림소연이 수주개와의 오의로 변하기 전에 무너졌다.
그리고 그 백광이 잦아들기 전,
“이 죽일 놈잇.”
태백종사가 노성을 지르며 펄쩍 앞으로 달려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과연 홍운백일.
명실상부한 호궁신공(護宮神功)답게 품세(品勢)를 거듭하면서 쌓인 홍운강기가 마침내 열양백일(烈陽白日)로 이어졌고,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태백종사의 손에는 백광이 송곳처럼 튀어나왔다.
해원기가 흩어지는 검왕수의 여력을 모아 손바닥을 훌쩍 뒤집었고,
퍼엉.
대우신장으로 밀어내면서 두 발이 춤추듯 겅중거렸다.
찌익.
가늘게 찢겨나가는 왼쪽 어깻죽지. 해원기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훌쩍 물러서는 태백종사를 노려보았다.
간격을 강제로 띄우는 대우신장이 밀어냈음에도 열양백일의 한 줄기 여파가 기어이 옷을 찢었다.
“이놈, 도대체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냐!”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치는 태백종사의 손에 어느새 들린 짧은 물건.
길이는 두 자가 채 되지 않고, 손가락 세 개를 합친 두께에 옻칠을 입힌 듯 새까매서. 얼핏 짧은 회초리로 보이지만 낭창하니 탄성도 갖추었다.
이것도 병기인가.
그러나 그 물건을 훑어본 해원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편책(鞭策)이라, 점고달초식(點考撻楚式)이었군.”
차분히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불같이 화를 내려던 태백종사의 입이 얼어붙었다.
편책은 말채찍. 말을 달리게 하고 군대를 지휘할 때 쓰이는 물건이지만, 이 편책을 병기로 쓰는 유일한 수법이 바로 점고달초식. 하지만, 이건 홍운백일품보다 더욱 희귀한 무학인데.
이 더벅머리 녀석은 어떻게 알아보는가.
맨손으로 연달아 변화막측한 검형을 펼쳤지만, 그보다 더 괴이했던 것은 갈수록 자신의 홍운백일품을 굼뜨게 만들었던 기운. 홍운강기가 전신을 완벽히 지켜냈음에도 자꾸 옥죄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기어이 열양백일을 펼치고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으니.
이건 분명히 못된 사술. 같잖은 사술에 당한 게 분통 터질 일이라 한바탕 크게 꾸짖어줄 셈이었으나.
자신의 모든 걸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해원기.
태백종사는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새삼스럽게 이 더벅머리의 외호를 되새겨야 했다.
절세검왕.
해원기가 오른손을 뒤로 돌려 검병을 쥔다.
지금까진 맨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