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동창성조(東昌聖朝) (4)
아직 더위가 남은 밤중에도 토시와 감발을 단단히 차서 먼 길을 나서는 장돌뱅이 같은 행색.
그 등짐이 터져 천 조각이 어지럽게 날리고,
느슨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던 야경꾼의 손에선 손때 묻은 딱딱이가 박살이 나서 흩어진다.
퍼펑.
“으음.”
좁은 골목 끝까지 밀려난 장돌뱅이와 야경꾼이 창백한 얼굴로 신음을 삼켰다.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둘을 이렇게 몰아붙인 이.
고급스러운 가죽신이 바닥을 가볍게 밟으며,
“용문세가의 어린 계집이 꾀가 많다더니. 겨우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이 돌아다녔던 거였나? 흠, 골동가라.”
오십 대의 청수한 얼굴이 느긋하게 말을 꺼내자,
조금 뒤에 선 중년미부가 골목 오른쪽 나무가 우거진 곳을 가리켰다.
“진도에 이상을 보인 곳은 저쪽, 연묵재라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손짓이며 대답이 공손한데,
머리엔 무수한 구슬로 치장한 주관을 쓰고, 목을 바짝 채우는 둥근 옷깃에 화려한 두루마기까지 대단히 특이한 복장. 내명부의 작위를 받은 귀한 집 여인이나 입는다는 명부관복이다.
그저 펑퍼짐한 백삼을 걸친 청수한 인물이 자신의 풍성한 수염을 의젓하게 쓰다듬었다.
“그래, 황 학사가 그리 말했었지. 그 친구가 오성복진(五星複陣)까지 움직인다고 하기에 꽤 흥미가 일었거늘. 괜스레 손만 더럽히는 게 아닌가 싶구나.”
시선은 중년미부가 가리킨 방향을 향한 채. 가벼운 손짓으로 날려 보낸 장돌뱅이와 야경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주위를 전부 내려다보는 듯한 행동과 말투. 이렇게 자연스러운 건 오랜 시간 남의 위에 있었다는 방증이다.
중년미부가 손을 내리고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하찮은 일에 어찌 종사(宗師)를 모셨겠습니까. 용호방에서 미진했던 부분, 상당히 다루기 어렵다고 평가한 작자의 단서가 보였기에…….”
종사. 누구나 스승으로 존경한다는 어마어마한 호칭으로 부르며 조심스럽게 이어가는 말을,
종사라 불린 백삼의 인물이 웃음으로 받았다.
“허허, 다 아는 얘기.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굳이 직접 나섰겠느냐. 자, 어디 보자.”
위엄과 기풍이 넘치는 몸짓.
수염 끝을 살짝 말아 튕기면서 비로소 시선을 돌리는데.
어느새 골목 끝에는 사람이 늘었고,
종사라 불린 백삼의 인물도 그 등장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장돌뱅이와 야경꾼으로 변장한 둘은 용문세가의 목우대. 무공화상을 연묵재까지 안내한 후에 혹여 전할 소식이 있을까 해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단삼육과 오소민이 이 둘을 부축하자마자 곧장 몸을 날렸고,
금정령과 단목정이 앞으로 나서서 상대를 주시했다.
그 뒤에는 해원기와 악송령, 그리고 기어이 남겠다고 억지를 쓴 증명단의 셋.
목우대를 구한 단삼육과 오소민은 무공화상과 함께 일단 맹진의 총단으로 빠지기로 했다. 비록 유인의 복진이긴 해도 유탕대진도라는 괴이한 사술이 시행된 이상, 외곽의 맹진도 미리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
양쪽으로 나누어 대처해야만 하는 상황.
그런데 막상 연묵재를 노리고 온 자들은 단 두 명뿐이다.
살펴보던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하고,
“조화부인이라는 여자입니다.”
작은 목소리로 먼저 일러주었다.
진평현 수차제에서 온갖 괴이한 술법을 동원하고, 오방신수의 이름을 딴 수하를 부려 희한한 공격을 펼쳤으며, 마침내 오대마도 중 곤혹도까지 펼쳐 해원기를 괴롭혔던 조화부인.
오랜만에 만났어도 저 특이한 복색은 여전하다.
이미 해원기에게 들은 적이 있는 금정령과 단목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알아본 건 조화부인도 마찬가지.
“앞에 선 둘은 개방 방주와 약왕당의 제세성수. 뒤의 셋 중에 더벅머리가 바로 절세검왕이라는 놈입니다.”
금정령이 다시 한 걸음 나서려는데,
종사라는 인물이 먼저 혀를 찬다.
“쯧쯧, 아무리 천하제일대방이니 뭐니 해도 어차피 더러운 거지 떼의 두목이요, 기껏해야 종기나 짜고 탕약이나 끓이는 의원 나부랭이. 하찮은 것들은 물리고, 그래, 너, 절세검왕이니 뭐니 하는 젊은 놈, 이리 나와 보아라.”
방약무인.
뻔히 금정령과 단목정의 신분을 듣고도 불쾌한 표정으로 해원기만을 불러내니. 도대체 뭐 하는 작자인가.
단목정이 얼른 앞으로 나아가 금정령에게 예를 취했다.
“아아, 이거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나왔네. 금 방주께서 직접 상대할 가치도 없어 보입니다. 제가 우선 좀 놀아줘도 되겠지요?”
뻔히 들으라는 소리.
거지 두목이 직접 상대할 가치도 없는 무식쟁이란다.
굳이 금정령의 허락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어서.
단목정이 포권을 그대로 앞으로 옮겼다.
“어이, 아, 이름도 모르니까 그냥 이렇게 부릅시다. 옆의 여자분은 명부관복까지 갖춰 입고 조화부인이라고 자칭한다던데. 그럼 그쪽은 일품대관(一品大官)쯤 되나 보오? 옳지, 조화부인의 바깥양반이신가?”
모은 손을 대충 흔들고 내려놓으면서 히죽대는 말투.
방약무인한 상대의 무례한 언사에 대놓고 놀려대는 거다.
당장 조화부인이 쌍심지를 세우며 목청을 돋우려는데,
종사라 불린 인물이 먼저 손을 들었다.
“천한 주둥이.”
짤막한 꾸짖음보다 매서운 경기가 먼저 단목정의 얼굴로 날아든다.
쐐액.
이십여 장의 거리를 단숨에 가르는 화살 같은 경기.
그러나 단목정은 마침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듯 손을 내젓는 판이었다.
“아니, 숨겨놓은 기둥서방일지도.”
팡.
가벼운 폭음과 함께 단목정이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흔들었지만, 놀리는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분명히 매서운 경기를 풀어냈는데도 팔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 대단한 공력이다.
놀라기는 종사라는 자가 더한지.
풍성한 수염으로 돌아가려던 자신의 손을 유심히 살펴본다.
“일개 의원 따위가……?”
단목정이 손을 거두며 힐끗 금정령을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에고, 그냥 친해 보자고 던진 농담이 아픈 데를 찔렀나? 이해하슈, 본래 의원의 손이 좀 따끔한 편이잖소. 그런데 아까 얼핏 종사라고 하는 것 같던데. 어느 가(家), 어느 문(門)인지는 알려줘야 괜한 무례는 범하지 않을 거라. 험, 사람과 사람이 초면에 나누는 예의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놀려대는 말투를 접은 것 같아도 조롱은 더욱 심해졌다.
단 한 번의 격돌.
그러나 지혜가 과인한 단목정은 전후의 반응을 통해 상대를 좀 더 도발하기로 마음먹었다.
해원기를 통해 들었던 동창 고수들의 특징.
자존망대하고 강호의 실정을 잘 모른다는 그 특징이 여실히 보이는 상대다.
금정령을 거지 떼 두목, 자신을 의원 나부랭이라고 하면서 아예 눈에도 두지 않았고,
그러면서 대충 펼친 한 수는 대단한 공력을 지녔으며, 그게 막힌 게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치.
당세의 개방 방주가 어느 수준인지, 약왕당의 주인이 누구의 후예인지도 제대로 모르나.
아니,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건 대개 그 아는 바가 피상적일 경우지.’
용호방과 풍운책이라고 했던가. 그냥 기록을 눈으로만 살핀 결과다.
종사라는 인물은 단목정의 조롱이 들리지도 않는지 자신의 손만 쳐다보고, 그 옆의 조화부인은 함부로 나설 수도 없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단목정이 말을 이어나갔다.
“뭐, 이쯤에서 나도 괜한 엉너리는 그만두지. 어차피 동창에서 나왔을 터. 용문석굴에서 거하게 소란을 떨다가 소리 소문 없이 내뺀 자들은 어디 있소? 밀각 육학사에 속한다는 황 학사와 공동과 아미를 집어삼킨 현신장 셋이면 딱히 꿀릴 힘이 아니건만. 흠, 저희는 싹 빠지고 따로 지원군을 불렀다? 게다가 내 아우의 수하패장(手下敗將)인 여인네까지 끼워서? 이게 우리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오.”
조롱을 싹 뺀 묵직한 음성.
유탕대진도를 유인의 복진으로 써서 위치를 찾고, 은문진까지 열어서 바로 급습을 시도한 것치고는,
인원은 둘에 그다지 서두르지도 않는다. 규모도 태도도 어울리지 않는 상대.
그 내막을 더 파헤치려는 의도로 한 말에,
종사라는 인물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어이가 없구나.”
거꾸로 되묻는 소리에 단목정이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방약무인한 자가 일단 대화에 응했으니 떠드는 내용을 들어줄 참.
“너희, 소위 강호니 무림이니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듯 구는 게 뭔가 특별한 줄 아느냐? 그래 봤자 기껏 자기들 잇속이나 차리고 헛된 명성이나 퍼뜨리는 종자들. 천하를 경영할 포부도, 세상을 바로잡을 의지도 없이 제멋대로 살아갈 뿐이잖나. 도도한 역사의 흐름과 뒤바뀌는 천명의 소재가 뭔지도 모르고. 허, 어차피 동창? 지금이야말로 동산영창(東山永昌)의 건업지제(建業之際)라는 걸 내가 굳이 떠들어야. 한심한 것들!”
종사라는 인물이 눈썹을 곧추세운 채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다.
노한 눈, 단호한 꾸짖음.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를 깨우치기에 지친 탄식 같다.
단목정이 얼핏 눈에 이채를 띠다가 얼굴을 조금 내밀며 일부러 눈을 껌뻑여 보였다.
“이건 무슨 말씀? 동창은 동창, 황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 내시들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다고? 제멋대로는 거기에 어울리는 표현이지. 그리고 강호와 무림을 아예 멸시하는 듯한 언사는 듣기 거북하구려. 태조 홍무제의 출신 또한 강호라는 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외다.”
이게 상식이라는 항변에,
종사라는 인물의 얼굴에 더욱 열이 오른다.
“닥쳐라! 터진 주둥이라고 어디 감히. 시작부터 잘못된 주황실(朱皇室) 같은 건.”
“태백종사(泰伯宗師)! 말씀이.”
조화부인이 질겁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면 말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태백종사가 정식 호칭인 듯. 험하게 일그러졌던 인상이 풀리면서 벌겋게 달아올랐던 안색도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그래. 한심한 것들과 말을 섞은 것부터 내 불찰이지. 곧장…….”
금방 평정을 되찾는 수양도 범상치 않은데.
그 호흡의 틈을 놓치지 않고 달라붙는 단목정의 질문에 눈매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동창에 용호풍운의 기록이 있다는데 나는 어디쯤이요?”
“기껏 용호방의 중간쯤에 있는 놈이.”
이를 갈면서도 절로 대답이 나오자, 단목정이 지체 없이 손가락을 세웠다.
“그럼 여기 금 방주는? 그쪽이 직접 지목한 내 아우는?”
금정령을 가리키고, 해원기를 가리키고.
애들 장난 같은 손짓에 더는 참을 수 없었나.
“이놈!”
태백종사가 호통을 치며 두 손을 벼락같이 내뻗었다.
콰와아아아.
골목길의 좌우 담벼락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엄청난 힘줄기가,
앞에 선 단목정과 금정령을 가리지 않고 덮쳐들었다.
가공할 위력.
골목 전체가 박살이 나서 몰려드는 광경에 해원기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절로 긴장하는데.
단목정이 손가락 열 개를 한꺼번에 퉁기고, 금정령이 한 발을 성큼 내디디며 어깨를 크게 떨었다.
과거의 난세를 겪었던 두 사람. 지난 세월 동안 방주로서 개방의 내실을 다지고, 당주로서 약왕당을 재건하는 데 힘썼지만, 자신을 닦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대화를 하면서도 노련하게 상대를 살폈고,
태백종사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손을 쓴다.
하늘의 별이 뚝뚝 떨어지듯 공간을 꿰뚫는 손가락, 허허롭게 퍼져가는 아득한 기운.
퍼엉.
골목 중간이 폭발하면서 돌가루가 사방으로 날았다.
“혜성지(彗星指)를 상쇄하는 중수법(重手法).”
“허실보사(虛實補瀉)조차 밀어내는군.”
단목정과 금정령이 빠르게 자신이 펼친 무공을 서로 알리는 건 상대의 수법을 파악하기 위함.
그러면서 금정령이 비스듬히 앞에 서고 단목정이 뒤로 물러나 어느새 합을 맞춘다.
무너진 골목을 곧장 뚫고 다가드는 태백종사의 두 손이 교차하면서 홀연히 홍광(紅光)이 떠올랐고,
반면에 주먹을 번갈아 내미는 금정령에게선 맑은 청광(淸光)이 꿈틀거렸다.
쾅!
상반된 빛이 부딪치는 굉음.
골목을 이루는 양쪽의 돌담만이 아니라 바닥까지 죄다 터져나갈 것 같더니.
솨아아아.
충격의 여파가 홀연히 태백종사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순간에 단목정이 빠르게 수도를 휘두르자 찬란한 성광(星光)이 금정령의 앞에 횡으로 걸렸다.
쩡!
엉뚱하게 귀를 울리는 쇳소리.
힘줄기가 끊겨 뒤로 물러나는 태백종사를 보면서 단목정이 충격으로 부르르 떠는 손을 얼른 오므렸다.
놀라운 일. 자신의 북두신강(北斗神罡)이 끊지 못하고 되레 튕겨나가다니. 무겁고 강한 공력뿐 아니라 주위의 여파를 빨아들이는 기묘한 수법까지.
홍광을 띠던 광경을 떠올리며 단목정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원양대진력(元陽大眞力)!”
태백종사가 익힌 건 그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드문 전설의 신공이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해원기의 의아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놀라움이 더욱 커졌다.
“홍운백일품(紅雲白日品)?”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건만, 태백종사도 눈을 크게 뜨며 멈칫거린다.
자신의 신공과 수법이 이렇게 단번에 밝혀질 줄 몰라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