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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243화 (243/410)

제61장 동창성조(東昌聖朝) (3)

증명단이 그녀답지 않게 동그란 머리를 요리조리 흔들어댔다.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생김새와는 달리 급한 성격이라 엉뚱한 소리를 자주 지껄이지만.

타고난 총기를 지녀서 의외로 핵심을 곧장 짚어대곤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거 신주의 뿌리를 찾는다는 얘기. 그럼…… 우리가 지금 벽세나 지부인 거예요? 헤에!”

짧은 탄성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좌중이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으나.

굳은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단목정을 따라 차례로 인상을 찡그린다.

해원기의 간략한 설명.

과거의 난세를 재현하려고 벽세의 뿌리를 찾은 자가 있다.

이 얘기는 본래 신주영웅회에 속했던 후예들, 잃었던 뿌리를 되찾고자 했던 이들이 주인공이어야 할 내용이다.

단목정에게서 과거의 이야기를 들었던 증명단으로선 주인공이 바뀌었으니 이야기도 뒤집어야 한다고 여긴 셈이고.

벽세의 뿌리를 찾은 자가 신주의 후예 역할을 맡으면,

신주의 후예는 결국 벽세나 지부 중에서 한 가지 배역이 될 터.

엉터리 같은 소리지만, 난세를 겪었던 이들은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오소민이 단목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주께선, 그 고약한 극본(劇本)이 아직 남아있으리라 여기십니까?”

이름이야 예전부터 많이 들었어도,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라 낯설기도 하겠지만.

단목정이 놀라운 추리로 논지를 전개하면 할수록, 오소민은 조금 뒤로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먼저 입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겪진 않았으나 어려서부터 사부와 사형들에게 틈틈이 들었던 지난 역사.

실정을 알수록 모골이 송연해졌고, 그 역경을 뚫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이룬 과정이 기적과 같았거늘.

지금 단목정은 그 재판(再版)을 예측하고, 증명단은 거기서 한술 더 떠서 한심한 처지라고 꼬집은 셈이잖은가.

단목정이 오소민에게 힐끔 시선을 보내곤,

자기와 해원기의 찻잔 두 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고약한 극본이라. 오 장로의 표현이 마음에 드는구먼. 소단의 말마따나 남은 배역은 두 개고, 우리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을 테니. 아마도 지부를 배당했을 걸세. 이제야 강호 도처에 알게 모르게 주구들을 깔아놓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어. 방만한 조직은 벽세의 특징이거든. 뭐, 이번에는 신주가 벽세를 조종하는 줄거리라서 딱히 고민할 거리도 없고. 그래서.”

두 손이 하나씩 찻잔을 덮고,

“우두머리가 적어도 둘은 될 테고, 그중 하나가 아마 ‘태상’이라는 작자. 어사를 시종으로 부리는 태감과 삼보별저의 주인이 받드는 인물이니까 동창의 제독태감일 가능성이 짙군. 이쪽이 허무맹랑한 권력욕에 젖어 황제를 넘보는 걸까? 흠, 그렇다면 다른 쪽은…….”

말끝을 흐리면서 시선이 깊어진다.

오소민의 눈도 단목정의 손을 따라 찻잔을 번갈아 살피더니,

“한낱 내시 따위가 황권을 넘볼 욕심을 품었다니. 어쩌면 다른 한쪽이 그 욕심을 불어넣은 배후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자가 바로.”

일부러 뒷말을 삼켰지만, 몰라서는 아니었고.

좌중 역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벽세의 뿌리를 찾은 자. 모든 모략의 진짜 주재자일 것이다.

얘기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금정령이 헛기침과 함께 좌중을 둘러보았다.

“어, 흠. 단목 당주 덕분에 상대를 꽤 파악한 셈이지만, 무엇보다 정보가 부족하구려. 우리를 지부로 취급한다 해도, 지금 그 배역을 맡기엔. 허허.”

쓰디쓴 웃음이다.

과거의 지부는 신주는 물론이요 벽세의 꿍꿍이까지 훤히 들여다볼 정도였는데.

상대가 제멋대로 부여한 배역. 참으로 가소로운 처지에다 그 배역을 감당할 준비조차 되지 않았다.

회생과 재기에 애쓴 이십 년 세월이 남의 손에 놀아난 어릿광대와 다름없었다니.

개방의 방주로서 어떻게든 참담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웃음에,

단목정이 수염을 슬쩍 문질렀다.

“아직은 예측이고 추정일 뿐입니다. 상대가 정해진 이상, 금 방주 말씀대로 이제부터 정보를 더 모아야겠지요. 그리고 배역이라, 크흠.”

묘한 코 울림을 더하고,

“알기 쉽게 벽세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만, 뭘 어디서 얼마나 되찾았을까요? 단순한 계산과 유치한 셈법만으로 흉내를 내서야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맞이할 터. 준다고 냉큼 받을 배역도 아니고, 시킨다고 얼씨구나 따를 사람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다시 언급하는 단순한 계산과 유치한 셈법.

묘한 코 울림은 비웃음이었나 보다.

그러나 가벼워진 말투에는 아까와 달리 강한 힘이 담겨서.

금정령의 쓴웃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단삼육과 무공화상의 표정도 슬며시 풀려간다.

“그렇지. 아주 우습게 봤던 거잖아. 거, 천기를 뒤집는 재주라는 것도 없으면서.”

“명조운류(命潮運流)라네. 그것조차 사람의 의지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배웠잖나. 아미타부르.”

예의 우스꽝스러운 불호로 되돌아가자,

어쩐지 다른 이들의 마음도 넉넉해지는 듯.

과거의 난세를 겪지 않은 젊은이들도 새삼 호기가 일어남을 느꼈다.

배움은 쓰임이라.

무도를 왜 익혔던가.

금정령이 허리를 곧게 폈다.

“꽤 긴 이야기가 되었구려. 이쯤에서 자리를 파하고 좀 쉬는 게 좋겠소. 밤이 꽤 깊었으니.”

낙양수석으로 끼니를 때운 것도 잊을 정도로 심각한 화제가 이어졌었다.

단목정과 증명단, 무공화상과 악송령. 다 급한 길을 달려왔고, 해원기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휴식이 필요할 때다.

주인이 먼저 말을 꺼냈으니 객은 따르면 될 뿐.

단목정이 먼저 포권을 취했다.

“네. 자세한 사항은 다시 논하기로 하죠. 그럼.”

금정령이 일어서고, 다른 이들이 분분히 손을 모아 예를 차리고.

단삼육은 무공화상과 단목정을 번갈아 보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오소민은 우선 증명단을 보며 방을 따로 알려줄 모양인데.

악송령 곁으로 가려던 해원기의 움직임이 멈칫거렸다.

“음!”

짧고 묵직한 경호성과 함께 홀연히 방안을 휩쓰는 돌풍 같은 기세.

먼저 밖으로 나가려던 금정령까지 이 기세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다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기세가 일어난 곳을 찾았고,

해원기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오소민이 급히 입을 열었다.

“해 형, 왜?”

이전에 흥륭전장의 밀실에서 해원기가 드러냈던 그 기세지만, 지금은 딱히 어울리는 이유도 없는데.

해원기의 날카로운 시선이 곧장 단목정을 향했다.

“형님, 이건 유탕대진도, 장안에 펼쳐졌던 것과 같은 기운이.”

해원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목정이 털썩 앉으면서 두 눈을 내리감았고,

수인을 맺는 오른손, 갑자를 짚는 왼손이 복잡하게 얽히더니.

“그래, 확실히 뭔가 있구나. 금 방주, 연묵재와 주변을 살펴주십시오. 다들 도로 탁자 주위로, 아, 혹시 용문세가 목우대가 아직 있습니까?”

빠르게 이어지는 말.

금정령과 단삼육이 곧장 방문으로 빠져나간다.

해원기가 등을 가리듯 뒤에 버티어 서고, 증명단이 바짝 곁에 붙으며, 환도를 짚은 악송령 곁에 오소민이 엉거주춤 탁자를 짚지만,

단목정은 상관하지 않고 입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연달아 탁자를 두드렸다.

탕탕.

“엄(掩)!”

한 소리에 탁자 위의 젓가락들이 죄다 퉁겨져 천장에 꽂히고,

“수(搜)!”

또 한 소리에 찻주전자가 훌떡 뒤집혀 떨어졌다.

팍.

본래 금정령이 앉았던 주인 자리. 연묵재에서 쓰는 찻주전자라 사기로 빚은 고급품인데 누가 내던진 것처럼 의자 뒤의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나서 찻물이 흥건하게 흐른다.

그제야 눈을 뜨는 단목정.

“일단 이곳의 기척을 가렸고, 어디서 사기가 전해졌는지 되짚도록 했다. 흥, 그깟 낡아빠진 유탕섭백대진 정도로는. 오래 머물면 진도에 침습당한다고 했으니, 거꾸로 옥석을 가려볼 심산인가 보군.”

무공화상도 눈을 가늘게 뜨며 목에 건 염주를 쥐었다.

“영광교에서 쓰던 사법. 단목 당주는 그걸 뒤집어썼구려. 과연, 목탁반야(木鐸般若)의 법결을 시행했다간 도리어 위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라. 아미타부르.”

해원기의 급한 경고에 따라서 정신을 집중하자 무공화상도 당장 삿된 기운이 퍼지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불력을 북돋아 목탁반야를 펼치려 했으나, 훨씬 빨랐던 단목정의 대응.

더구나 정법(正法)보다는 외도(外道)에 가까운 술수다.

단목정이 히죽 웃었다.

“선사와 노신선께 배운 것이지요. 벽세의 사술이라면 지긋지긋하게 여기셨던 두 분이니. 원기야, 괜찮다.”

신속하게 호법을 서려던 해원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여유까지.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증명단과 악송령은 그저 어리둥절하지만, 오소민이 미간을 모으며 혀를 찼다.

“쯧, 일부러 독산에서 부른 목우대가 눈에 뜨였겠군요. 아무리 역용변장을 해도 용문세가를 빈번하게 드나드는 이들을 놓칠 리 없겠죠. 해 형이 장안에서 겪었던 유탕대진도라면…….”

장안이라는 광대한 지역을 뒤덮었다는 사술. 낙양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침습당한 백성들은 마치 잠든 것처럼 정신을 잃고, 무공을 지닌 자는 본래의 신분도 잊는다고.

게다가 관병들을 허깨비처럼 만들어 사술의 동력으로 삼는 건 빈양삼동 앞에서 직접 목격했었다.

본래 낙양분타에 속했던 방도와 총타의 인원은 전부 맹진에 모이도록 했으나, 사술의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이상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동창이 유탕대진도를 발동한 이유는 보나 마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찾기 위함.

단목정이 왼손으로 계속 갑자를 짚어가며 시선을 벽 쪽으로 돌렸다.

“장안에서 고루와 종루를 이용했다고 했지. 그러나 여기서는 달리 들린 게 없었다. 어디서 무엇으로 발동했는지 궁금하군. 흐음, 섭백을 이런 식으로 변용한다라.”

뜻밖의 역습을 당한 셈.

그러나 단목정은 오히려 접촉한 사술에 흥미를 느낀 듯.

해원기가 그제야 의자를 당겨 옆에 앉으면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섭백류는 대개 신지(神志)를 바꾸어 조종하거나, 아예 공력으로 흡취하는 특성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탕대진도는 대단히 넓은 범위에 오랜 시간을 들여서 설치한 형태, 은문진이나 둔법의 가능성도 있고, 음, 저들이 오대마도에 닿은 것도 신경 쓰입니다.”

직접 유탕대진도를 상대한 건 해원기 혼자.

그간 배웠던 진도지학에 따라 나름대로 해석한 내용과 함께 참고해야 할 부분을 일러주는 건,

단목정을 염려해서이다.

천하제일지를 계승한 단목정이 어찌 못 알아들으랴.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원기의 말이 맞다. 유탕대진도를 그저 유탕섭백대진의 모사품 정도로 경시해서는 안 되겠지. 흠, 일단 금 방주가 돌아오고, 사술이 시행된 지점을 추정할 수 있으면.”

말을 잠깐 멈추는 건 대화의 상대를 바꾸었기 때문.

“오 장로, 이 자리를 떠나야겠는데 맹진 쪽도 살피지 않을 수 없겠구려.”

쏟아진 찻물의 흐름을 쫓으면서도 주변 상황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설사 사술의 근원을 찾아냈다고 해도 개방의 총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 또한, 해원기의 조언처럼 적이 거꾸로 습격했을 때 몸을 뺄 퇴로를 확보해야 한다.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주도면밀하게 머리를 짜내는 게 지자의 할 일.

그러지 않아도 맹진의 방도들을 염려하던 오소민이 자기도 모르게 방문 쪽을 살피는데,

무공화상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맹진이라면 빈승이 함께하지요. 목탁반야의 법결도, 여차하면 범음선창(梵音禪唱)으로 목청껏 소리를 지를 수 있으니까. 바로 개봉으로 빠질 수도 있고. 험, 험.”

그렇다고 미리 목청을 가다듬을 필요는 없건만.

그게 목탁반야를 뛰어넘는 음공을 익혔다는 은근한 자랑이란 걸 깨닫기 전에,

단목정이 돌연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촤악.

벽을 타고 거꾸로 치솟는 찻물. 이제껏 지켜보던 단목정이 인상을 쓰며 일어섰다.

“이런. 이건 유인하는 복진(複陣)이었구나. 제법인데. 서두릅시다. 멀지 않은 곳에 은문진이 열렸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술의 변화. 비로소 자신이 알던 유탕섭백대진과 차이가 난다는 걸 알았지만, 어차피 정법으로 막든 외도로 뒤집어쓰든 똑같은 결과를 냈을 것이다.

기척을 가린 것도, 사술의 근원을 찾는 것도 헛된 일이 되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은하게 전해지는 싸움 소리.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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