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동창성조(東昌聖朝) (2)
낙양 명물의 요리가 올려졌고, 오래 묵은 술이 있고.
그래도 워낙 나눌 얘기가 많아서 젓가락이 집는 건 그저 간단한 교자 한 점, 술잔을 다시 채울 새도 없다.
금정령을 위시해서 나이든 축이 이제까지의 얘기를 다시 정리하는 동안,
함께 오보혜를 호위했었던 젊은이들은 재회의 반가움을 나눈다.
“소림사에 있었다면서요? 그, 이환 소저는요? 개봉에서 그 재수 없는 놈팡이를 진작…….”
“가만 좀 있어봐라. 악 형이 어련히 얘기해줄까.”
“소림이 악 형에게 소식을 전한 모양이군요. 용케 서둘렀소이다.”
질문을 몰아붙이는 증명단을 해원기가 말리고, 오소민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고.
악송령이 이 소란에도 무뚝뚝한 시선을 차례로 돌리더니,
“이렇게 다시 낄 수 있어서 다행이오.”
예의 투박한 말투. 그러나 눈빛과 목소리에는 확실히 전과 다르게 따뜻한 감정이 담겨서.
다들 말을 멈추고 미소로 마주 보았다.
강호의 인연. 뿔뿔이 흩어져 다른 일을 겪었으나 어쨌든 다시 함께 모였구나.
태산에서부터 개봉까지 동행했던 여정이 아주 옛날 같다.
해원기가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그간 좋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비췻빛이 어린 깊은 눈. 악송령이 무공화상을 따라 방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동시안이 달라진 기운을 알아보았다.
“헤, 그거야 이환 소저랑 같이 지냈으니까.”
이걸 또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증명단. 악송령이 미소를 고소로 바꾸면서 얼른 입을 열었다.
“소림사에서 애써주셔서, 이환 소저도 건강합니다. 절에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침 등봉(登封)의 불심 깊은 할머님이 혼자 지내셔서, 저희를 받아주셨고. 음, 뜻밖에 오능선사(悟能禪師)의 가르침도 받게 되었소이다.”
악송령의 내상은 가볍지 않았고, 평범한 여자인 이환의 신체는 상당한 요양이 필요했다.
소림사가 정성을 기울여 이들을 보살핀 듯. 가까운 마을에 거처할 곳을 마련해준 것도 끝까지 신경을 써주어서다. 더구나 소림의 삼장신승(三藏神僧) 중 하나인 오능선사가 특별히 악송령을 지도해주었다니.
조금 더 놀려주려고 눈을 반짝이던 증명단이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칼을 가르친다고? 소림사 스님이?”
아직 오능선사가 누군지, 소림의 공부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철부지.
“음. 집도수계(執刀授戒)의 도리를 강론해주시고, 광명도법(光明刀法)까지 알려주셨지. 그리하여 마침내 연벽도를.”
그래도 묻는 대로 답해주는 악송령의 말에,
오소민이 눈을 크게 떴다.
집도수계란 절에서 머리를 깎고 계율을 내리는 행위지만, 짧은 칼 한 자루가 자르는 건 결코 머리칼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도리가 무엇이든 소림사의 오능선사가 직접 강론해주었다면. 더구나 광명도법은 소림 비전의 절학 중 하나.
태산검파를 이었다곤 해도 칼을 익힌 악송령에게 베푼 것이 심상치 않다.
해원기가 환한 표정으로 기쁨을 표하고,
“완성했군요. 축하합니다!”
“이 모든 게 해 대형 덕분. 무지하고 거친 나는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악송령이 산발한 머리를 탁자에 붙일 정도로 숙이고서야,
오소민 또한 손을 모았다.
“축하드립니다, 악 형. 드디어 동악지검(東岳之劍)이.”
아직 얼떨떨한 증명단.
자신이 계승한 북악지검처럼, 악송령도 동악의 검을 얻었다는 건데.
검이 아니라 칼이건만, 이걸 어떻게 축하해야 하는 건가.
“흐음, 악 시주의 얘기도 얼추 끝난 모양이구려. 아미타부르.”
무공화상 특유의 불호가 끼어들고서야 좌중이 다시 한 자리가 되었고,
단목정이 증명단의 아리송한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흔히 검을 만병지왕이라고, 도를 백병지조라고 한다만 무도(武道)에 어찌 편견이 있겠느냐? 소단의 북악지검도 단지 검에만 그치지 않을 터. 자, 그 얘기는 또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안경의 정수회, 그리고 여기 개봉까지. 함께 한 시간이 제법 되면서 증명단이 뭘 생각하는 지까지 다 아는 듯,
달래주는 말에 증명단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성격이 급하긴 해도 천부의 자질이 뛰어난 그녀.
해원기에게 배웠던 ‘박룡쇄운, 항구장원’의 구결이 단번에 떠올랐다.
검이니 도니.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일 터.
악송령의 길쭉한 환도를 굳이 칼이라고 보는 건 자신의 굳은 눈일 뿐이다.
잠깐 틈을 내 술잔을 비운 단삼육이 입맛을 쩍 다셨다.
“쳇, 이런 자리에선 그저 재미난 무공 얘기나 해야 하는 건데. 또 골치 아픈 화제로 돌아가는구먼. 강호의 참 멋이 갈수록 줄었어.”
사형 앞이라 혼잣말처럼 투덜거리지만,
금정령을 비롯한 나이든 축들이 다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술을 벗 삼아 검을 논하고, 황량한 들판에 노숙하면서도 함께 의기를 북돋던 강호의 멋.
그런 세월은 언제였던가.
무공화상이 다시 희한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부르, 그런 멋을 찾는 것 또한 지금의 할 일. 고생이 있어야 끝에 찾아오는 낙이 귀한 줄 안다지 않나. 자네는 그저 줄어드는 귀한 술이 아까운 게지.”
치승이라고 멍텅구리니 뭐니 해도 선승은 선승.
단목정이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 역시 선기(禪機)가 담긴 말씀이로군요. 자, 그럼 선사가 가져온 고생, 골치 아픈 화제로 돌아가 보죠.”
분위기가 잡히자 금정령이 말을 받았다.
“그럼 소림이 관군에게 포위되었다는 말씀인데. 딱히 이유도 밝히지 않는단 겁니까?”
소림이 포위되었다.
뜻밖의 내용에 해원기의 눈매가 바뀌었다.
이전에 원광과 수진,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날 때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밝혔었는데.
왜 소림이 또 관군에게 포위되었단 말인가.
“예, 금 방주. 마치 훈련이나 수렵을 나온 듯이 굴지만, 그 병력이 대략 삼백여 명. 소실봉과 태실봉의 곳곳에 흩어져 거의 숭산을 포위한 격이고. 도지휘사사 소속으로도 보이지 않는답니다. 일단 방장선사께서는 괜한 충돌을 피하라고 명하셨는데. 음, 그래서 빈승의 연락에 우선 등봉에 있던 악 시주가 나서게 된 것이고요.”
무공화상의 설명에 금정령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본 방의 낙양 총단도 어쭙잖은 무리가 나서는 통에. 같은 맥락일까요?”
묻는 대상은 단목정.
“그렇게 봐야겠습니다. 그자들이 용문석굴에서 일을 벌이는데 방해가 될 만한 곳에 미리 손을 썼겠지요. 풍진삼우 세 분을 목격했다니까. 장안에서 낙양까지 급하게 이어진 행동, 촉박한 상황에서 되는 대로 금의위나 관병을 동원했을 공산이 큽니다. 개방과 소림, 그렇다면 무당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흠, 대담하군요. 아무리 동창이라도 이렇게 표면적으로 일을 키우면 곤란할 텐데.”
금정령의 질문에 답하던 단목정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동창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 광대한 지역에 제멋대로 무력을 사용하긴 어렵다.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짓. 조정에 남은 바른 신하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줄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실각할 우려도 있거늘.
언제나 암중에서 온갖 행패를 부리던 전례와는 사뭇 다른 양상.
단목정이 찡그린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환 소저랬나. 그 소저가 과거에 육악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지?”
해원기가 악송령을 잠깐 보곤 고개를 끄덕였고,
단목정의 손이 관자놀이를 가만히 짚는다.
“어사를 대동한 태감과 삼보별부의 주인이 회동했고, 대화 중에 태상이란 명칭이 거론되었다고. 쯧, 좋지 않군, 좋지 않아.”
이환이 본래 기녀였음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 그래서 단목정이 얼른 자문자답으로 사실만 되짚었는데 뭔가 나쁜 기억이라도 난 듯하다.
자연히 모여든 좌중의 시선.
관자놀이를 짚던 손을 떼고, 찡그린 얼굴을 풀면서 단목정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조금 더 따져봐야 하겠습니다만. 누군가 과거에 배운 걸 다시 시도한다는 예감이 불쑥 드는군요. 아까 제가 말했던 단순한 계산과 유치한 셈법이란 평가는 철회해야겠습니다.”
“음?”
“허.”
좌중이 노소를 막론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지혜를 지닌 단목정. 지금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건을 훤히 밝혀냈건만, 여기서 갑자기 의견을 바꾸다니.
이환이 목격한 장면이 그렇게나 중요한 건가.
좌중의 동요를 모를 리 없는 단목정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근 이십 년, 무림이 다시 정돈되면서 어느덧 흘러버린 시간입니다. 큰 병을 앓고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체력을 회복하고 사람 구실을 하기엔 짧았다고 해야 할까요. 잘 먹고, 잘 쉬고, 틈틈이 가벼운 활동도 병행해야 건강을 회복하는. 억지로 무리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행해야 합니다.”
지자(智者)이면서도 의자(醫者)다운 비유.
“세상도 사람과 마찬가지. 전통을 회복하고 명맥을 되살리면서 또 새로운 활력이 더해지는 게 강호를 이루는 소이이기에 그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백가장(百家將) 어르신이 의도적으로 조직한 회하방(淮河幇)이 난세가 끝나면서 자연히 해산되고, 대신에 휘주의 차상을 중심으로 정수회가 세워진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 그렇지만.”
백가장.
백여 년 전에 속가를 대표했던 절정 고수. 지부와의 격전과 벽세의 음모에 휘말려 황궁으로 피신해야 했고, 나중에 해원기의 사부를 만나 마침내 숙원을 이루로 일생을 마친 영웅이다.
그가 사마의 세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목적으로 만들었던 회하방은 사실 실체가 없는 조직.
증명단과 악송령을 빼고는 다 아는 이름이지만,
그 내막을 사부에게서 자세히 들었던 해원기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썹을 무겁게 내렸다.
황궁으로 피신한 백가장은 친군지휘사사의 교두(敎頭) 같은 역할을 했었는데, 황궁을 떠난 후로 새로이 금의위가 창설되었었다. 그 금의위가 지금은 동창의 수족. 동창이 주도한 그간의 암류와 지금의 상황이 혹시 그때와 연결되는 건 아닐지.
단목정의 얘기도 그쪽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보였던 것이라면? 백가장 어르신 덕에 황궁, 즉 대내의 무공은 훨씬 발전했겠지요. 더구나 역대로 전해오는 황실무학은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고 뿌리가 깊습니다. 하아, 악목(惡木)도 뿌리는 있는 법이라. 삼대(三代)는 확실치 않아도 진한(秦漢) 이래로 계속 이어져 온 황실의 무수한 절학들, 마치…….”
말이 끝나기 전에,
탁.
단삼육이 거칠게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신주영웅회(神州英雄會)! 젠장, 똑같잖아!”
방파의 주인이며 사형인 금정령 앞에서 하기 어려운 언행이지만,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다들 같은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무공화상이 합장하며 눈을 질끈 감고,
“대체 누가? 아니, 아니. 아미타불.”
평소와 다르게 전혀 희한하지 않은 불호.
금정령은 반면에 두 눈을 부릅뜨고 단목정을 보았다.
“뿌리? 설마 남아서 뿌리를 찾은 자가 있다는 거요?”
마치 저지른 잘못을 따지듯 매서운 힐문인데, 단목정이 안색을 바꾸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심근탐원(尋根探源)을 행한 배후가 있다는 느낌. 쓸데없이 나쁜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게 제 병폐입니다만, 어쩐지 그런 예감이 강하군요.”
지혜로운 이는 근심 걱정이 많다.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나쁜 버릇을 지녔다고 했지만, 금정령이 천천히 몸을 뒤로 젖히면서 무겁게 한 마디를 중얼거렸고.
“벽세.”
단목정이 장탄식을 하며 다시 말을 덧붙였다.
“후우, 정확히는 혼세지계(混世之計)가 떠오릅니다.”
이미 깊어가는 밤.
그래도 연묵재의 이 방에는 불을 환히 밝혔고, 낙양수석이라는 좋은 요리와 노두강의 좋은 술이 차려졌으며, 인연으로 맺어진 이들이 함께 했거늘.
어쩐지 불빛도 침침해지고, 무거운 바위라도 내려앉은 듯한 데다가, 얼핏 한기까지 느껴진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증명단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겨우 입을 놀렸다.
“혼세지계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계책인데…….”
그간 단목정에게 들은 바가 적지 않아서,
백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과거의 난세가 어떠했는지 대충은 알게 되었다.
정도의 백대문파가 연합했다는 신주영웅회, 가공할 힘으로 세상을 독패하려던 지부의 마종, 그리고 그늘에 숨어 피어난 독버섯처럼 신주영웅회를 암중에 집어삼키고 무려 백 년에 걸쳐 혼란을 조장했던 사악한 벽세.
신마사(神魔邪)의 얽히고설킨 음모는 듣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했으나.
그래도 어쩐지 황당하고 신기한 얘기 같았다.
그런데 지금 동창을 논하면서 왜 옛날얘기로 돌아갔으며, 당세에 알아주는 대단한 분들이 어째서 이렇게나 우울해하는지.
무공화상이 소림사의 상황을 전하면서부터.
단목정이 자신의 평가를 철회한 이유도 도통 모르겠다.
그런 증명단과 그 옆에 무표정하게 있는 악송령. 이 분위기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두 사람을 보면서 해원기가 짧게 말을 건네주었다.
“벽세의 뿌리를 찾아, 과거의 난세를 재현하려는 자가 있다는 얘기란다.”
황실을 신주영웅회로 삼고,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여러 세력으로 이목을 흐리면서, 마침내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려는 음모.
사부가 겪었던 그 끔찍한 상황이 또 일어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