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동창성조(東昌聖朝) (1)
금정령이 좌중을 둘러보고 몸을 뒤로 젖혔다.
“단목 당주의 말대로 정말 이야기보따리, 그것도 어지간히 복잡한 보따리라서 여간해선 끝이 나기 어렵겠소. 그런데 먼 곳에서 달려오느라 피곤하지 않으시오? 또 해 소협은.”
안경에서 대별산 약왕당을 거쳐 낙양까지.
보통사람이라면 벌써 지쳐 나가떨어졌을 여정을 거친 단목정과 증명단이고,
해원기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신화에나 나올 괴물과 맞서 싸우지 않았던가.
차 한두 주전자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사안이 중대하고 논의가 심각하긴 해도, 개방의 방주로서 제대로 대접도 못 해서야.
단삼육이 얼른 표정을 바꾸어 웃음을 덧붙였다.
“하하, 이거 호법장로가 야단을 맞을 일이로구먼. 죄송합니다, 방주 사형. 지금이라도 간단하나마 주효(酒肴)를 내오도록 하지요. 사람이란 배가 비고 지치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법이라.”
취개 아니랄까 봐 대뜸 술부터 들먹이고,
“괜찮습…….”
“아아, 그거 좋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허기가 졌거든요. 그렇지, 소단?”
사양하려는 해원기보다 단목정이 먼저 동의를 표하자,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지쳤다고요.”
증명단이 축 늘어진 시늉을 하는 데에야 더 말할 게 있나.
오히려 오소민이 단삼육에게 인상을 썼다.
“이 시각에? 더구나 여긴 고동가라고요.”
“뭔 상관이냐. 오히려 밤이 깊을수록 남 눈치 안 봐서 좋지. 그리고 연묵재든 뭐든 우린 거지잖아. 우리한테는 배고프면 끼니요, 목마르면 우물인데. 너, 내일 바쁜 일 있어?”
인상을 쓰든 말든.
단삼육이 아무 때나 먹고, 아무 데서나 마신다는 거지의 속담까지 대면서 받아치자,
“킥.”
증명단이 살짝 웃음을 터뜨리는 통에,
해원기도 오소민도 그만 맥이 풀렸다. 사실, 지치기도 했고.
미리 준비를 했었던 것처럼 연달아 상 위에 오르는 요리를 보며 증명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큰 접시에 담긴 요리만 여덟 개. 전부 처음 보는 것이고, 밥과 국수에 교자까지 한꺼번에 나오는데.
“다섯, 여섯…… 에? 어째 전부 탕(湯)이지?”
처음 나온 건 뭔지 모를 시꺼멓고 기다란 게 국물 안에서 퉁퉁 불은 요리. 그것부터 시작해서 여덟 번째까지 죄다 국물이 그득하다.
따로 술을 챙기느라 바쁜 단삼육 대신에 개방의 제자들을 지휘해 상을 차리던 오소민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려다,
“소단은 처음이겠구나. 좀 신기하지만, 난 그다지. 그래, 해 형은 알려나?”
슬쩍 해원기에게 미루고,
증명단도 얼른 호기심이 가득 담긴 시선을 돌렸다.
이 절세검왕이 음식과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이미 알기에.
금정령과 단목정이 잠시 자리를 비운 터라 하릴없이 눈만 껌뻑이던 해원기다. 오랜만에 만난 증명단의 활달함이 반갑기도 해서,
손가락으로 처음 나온 요리를 가리켰다.
“가해삼(假海蔘)이라고 한다. 밀가루와 고구마 가루로 해삼 모양을 만들고, 돼지비계와 목이버섯 등을 으깨어 섞은 다음에 향신료를 넣어 끓이지. 다음은 초작환자(焦炸丸子). 튀기고 지진 환자를 산랄탕(酸辣湯) 안에 넣어서…….”
과연 기대했던 대로 설명이 술술 나오는데.
재료가 채소든 고기든, 먼저 굽고 삶든 튀겨서 볶든, 요리 이름이 어떻든 간에.
“마지막 여덟 번째는, 그렇지, 연자탕(燕子湯) 혹은 연와탕(燕窩湯)이지만, 생선살과 닭고기를 무채와 똑같이 얇게 써는 독특한 모양. 여기서는 낙양연채(洛陽燕菜)라고 부른다지.”
“그런데 왜 다 탕이에요? 여덟 가지가 몽땅.”
성격 급한 증명단이 제대로 귀담아들을 리 없다.
가장 궁금한 것. 탕만 여덟 가지를 내는 게 무슨 의미인가.
“아, 이 팔도채(八道菜)는 전부 낙양의 유명한 전통 요리, 이른바 낙양수석(洛陽水席)을 편하게 차린 거란다.”
“낙양수석?”
또 모르는 단어. 확실히 해원기는 대화의 요점을 짚는 게 부족하다.
기껏 요리를 설명하면 뭐하나. 정작 중요한 단어를 풀어주지 않고서야.
해원기가 그제야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핵심을 놓쳤구나. 음, 낙양의 전통 요리는 흔히 탕탕수수(湯湯水水), 뜨끈하게 데우면서 또 국물이 많다고 일컫는다. 그래서 낙양수석이란 이름이 붙었고, 당나라 초기의 원천강(袁天綱)이란 점쟁이가 측천무후가 황제에 오를 걸 암시하면서, 그 권세가 이십사 년에 이를 것이라고 스물네 가지 요리, 즉 이십사도채(二十四道菜)로 구성했다는데. 그건 그냥 민간에 전해지는 얘기지. 낙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큰 강 하나를 제외하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 건조한 편이라서 사람들이 자연히 국물 요리를 즐기게 된 걸 거다.”
“오호!”
요리가 스물네 가지나 된다니. 큰 잔치에나 나올 법한 대연석(大宴席)이다.
증명단이 탄성을 올리며 새삼스럽게 상 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 오라버니는 좀 답답한 편이지만, 모르는 게 없다. 특히 요리와 무공에 관해서는.
해원기의 손가락이 수북하게 쌓인 밥으로 옮겨졌고,
“요리가 주로 신맛과 매운맛이라, 주식은 좀 달게 먹는 편이다. 이 팔보반(八寶飯)도 다른 곳의 팔보죽(八寶粥)보다 상당히 달콤할걸. 보통은 고구마 맛탕과 탕수 잉어가 나오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장면(醬麵)과 교자로 입가심을 하는 순서지.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 역시 조금 놀란 눈치.
낙양 고동가의 연묵재가 개방의 비밀 거점이란 것도 의외지만, 이 밤중에 이렇게 풍성한 요리상이 금방 차려질 줄이야.
아무리 개방 방주라고 해도 거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렇게 요리에 눈이 팔려서 오소민이 힐끔거리며 소리 없이 웃는 걸 깨닫지 못했다.
“개방이 부호방(富豪幇)이 되었습니까? 아예 낙양에 눌러앉아야겠는걸요.”
단목정의 놀림에 금정령이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럴 리가 있겠소. 본래 해 소협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따로 준비를 시켰었는데. 이래저래 밥 한번 같이 먹을 여유가 없더구려. 그러다가…….”
“엥? 그럼 저와 소단은 곁다리입니까? 아, 이거 원기 덕을 단단히 보는구나.”
“허, 그리 말하면 내가 무안하지. 단목 당주야 언제나 본 방의.”
“하하,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방주를 만난 반가움에 절로 농이 나온 거지요.”
단삼육도 같이 킬킬거리고,
“크흐흐, 단목 당주는 어렸을 때 아주 장난꾸러기라고 들었지. 자자, 요리도 요리지만 낙양에서 알아주는 노두강(老杜康)도 아낌없이 가져왔다고. 술도 다 채웠으니, 장문 사형, 시작하시지요.”
말과는 다르게 아까운 듯 따라주는 술.
풍성한 요리에 좋은 술, 그리고 함께 한 인연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든다.
“그럼. 단목 당주, 해 소협, 증 낭자. 좋은 일로 모시지 못한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강호의 삶이란 게 본디 일없이 어울리긴 어려운가 보오. 그래도 잠시나마 마음을 놓고 회포를 풀어봅시다. 이렇게 어쭙잖은 지주 노릇이 어색하더라도 이해하시고.”
잔을 권하는 금정령을 따라 모두가 한 마디 사례와 함께 술을 들었다.
“청(請)!”
겸손한 주인의 권주사(勸酒辭). 일이 생겨야만 서로 만나는 강호인의 애환이 담겼으나,
해원기는 조금 어색하게 술을 삼켜야 했다.
어쩐지 무림을 외면했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노두강의 진한 술맛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잠깐.
격식을 차리지 않는 떠들썩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나이가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사는 곳도 다 다르지만, 모두가 험난한 강호를 살아가는 무인들이었으니까.
“아까 들어오면서 얼핏 들었더니. 해 소협은 낙양수석에 대해 잘 알더군요. 예전에 온 적이 있었습니까?”
금정령이 말을 건네고, 단목정도 궁금한 듯 고개를 돌린다.
“그건 우형도 의외였다. 장거리 쾌체 일을 했다더니, 그거 식도락을 위한 핑계였나? 흐흥.”
대답은 당연히 증명단이 먼저.
“어, 모르셨어요? 오라버니는 각지의 유명한 음식을 좌악 꿰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뚝딱 만들어내는 솜씨도 대단해서…….”
해원기를 더욱 머쓱하게 만드는데.
요리보다는 술에 더욱 열중하던 단삼육이 문득 술잔을 멈추었다.
“흠, 꼭 요럴 때 온다니까. 방장 사형, 멍텅구리가 찾아왔답니다.”
퉁명스러운 표정이지만,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고.
금정령이 얼른 표정을 고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었구먼. 사제가 선사를 어서 모시게.”
단삼육이 일어나 방을 떠나고, 단목정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짓는다.
단삼육이 멍텅구리라고 할 사람은 무공화상뿐.
개방의 거점이 바뀌었지만, 용문세가의 오보혜가 맡았다는 연락이 비로소 효과를 낸 듯.
다들 새로 온 이를 마중하려고 얼굴을 들었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면면에 증명단이 벌떡 일어났다.
“아미타부르, 개방의 방주를 뵙습니다…….”
“어, 악 대협!”
무공화상이 특유의 불호를 외며 정중하게 인사를 올릴 새도 없이,
증명단이 대뜸 소리를 지르는 건 참으로 무례한 짓이었으나.
해원기와 오소민도 그만 반가운 얼굴로 따라 일어서는 통에 장내가 어수선해진다.
금정령과 단목정은 미리 이럴 줄 알았던 듯,
차분하게 일어나 무공화상과 처음 보는 장한을 미소로 맞이했다.
무공화상과 함께 온 장한, 바로 악송령이었다.
오소민 옆에 무공화상, 증명단 옆에 악송령.
새로 자리를 더 붙이고 앉은 후에도 증명단은 억지로 간지러운 입을 다무느라 애를 쓰고.
개봉에서 헤어지고 얼마 만인가.
약왕당에서 해원기가 찾으러 떠난 이후의 사연이 궁금해 죽을 지경.
그러나 함부로 입을 놀릴 자리가 아니란 것쯤은 이제 알고 있어서 꾹꾹 참는 중이다.
무공화상과 해원기가 번갈아 소개를 마치자 금정령이 다시 악송령을 보았다.
“호, 동악검파(東岳劍派)를 이은 도객(刀客)이라. 범상치 않은 내력이로군.”
시선이 탁자에 기대놓은 악송령의 환도를 스친다.
과거의 오악검 중에서 현재까지 이어진 곳은 소림과 화산 둘.
그런데 이 자리엔 북악 항산의 증명단에 이어 동악 태산의 명맥을 이은 악송령까지. 드문 인연이다.
게다가 악송령이 익힌 것은 태산의 검이 아니라 칼. 기특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금정령이 고개를 끄덕이곤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지 않아도 기다리던 참. 제대로 연락이 전해진 게 다행이구려, 선사.”
용문세가의 오보혜가 맡은 연락책. 무공화상은 백마사, 부덕도인은 노군산으로 향해 각기 소림과 무당에 전갈을 보냈을 것이고, 다시 이렇게 연묵재로 찾아올 수 있음도 오보혜가 계속 움직인 덕분이다.
상대는 동창이니 도처에 있을 감시의 눈을 피하기가 수월치는 않았을 터.
무공화상이 자신의 민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출가인은 낮이든 밤이든, 산이든 들이든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팔자인데. 밤도둑 흉내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여기 악 시주가 조금 불편했겠으나, 흠, 용문 목우대가 고생했지요.”
소림사에 머물던 악송령이 동행했으니 본사에는 이미 통보가 되었다는 뜻.
연묵재로 찾아온 것도 용문세가의 목우대가 때를 놓치지 않고 상황을 알렸기 때문이다.
무공화상의 시선이 단목정을 향하고,
“오 소저도 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만, 이렇게 단목 당주를 만나니 빈승은 마음이 놓이는군요. 아미타부르.”
처진 눈매가 미소를 머금자, 단삼육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머리 쓸 사람이 늘어서 좋다는 건가? 하긴, 심술쟁이도 그랬겠지.”
오보혜가 용문세가의 지낭으로 알려졌지만, 단목정은 과거 천하제일지자의 후대. 무공화상이 나름 반가운 심정을 드러내면서 잔잔한 미소가 흘렀으나.
그만큼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란 거다.
용문세가의 오보혜, 무당의 부덕도인까지 온다면 이 연묵재는 이미 무림의 주요 문파가 모인 성회(盛會)와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