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40화 (240/410)

제60장 감연욕일(甘淵浴日) (4)

오소민이 이마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어, 그런 단목 당주와 소단은, 괜찮았습니까?”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다가 문득 든 생각. 금오혈석이든 아니든 그걸 씻은 물이 수원에 스며들었다면 왕진을 간 단목정과 증명단 역시 해를 입지 않았을까.

아무리 약왕당의 주인이라고 해도 소위 괴질이잖나.

단목정이 가늘게 떴던 눈을 풀어 오소민을 보고,

“염려에 감사하네. 뭐, 우리도 물을 마셨으니 당연히 영향을 받았겠지. 그러나 이미 증상을 알고 방비를 한 바에야. 게다가……·”

손이 슬쩍 해원기를 가리킨다.

“원기의 사부님이 건네주신 의가지보(醫家之寶)가 있으니까. 정수회도 원인을 깨달은 후에는 오리 알 씻기를 그만두었고. 더는 머물 필요가 없어서 바로 떠났다네.”

오소민의 표정이 어정쩡해졌고, 증명단이 처음 듣는 듯 대뜸 머리를 내밀었다.

“에? 그 신통한 구슬을 오라버니의 사부님이?”

해원기의 사부는 백년제일검사라던데 의가지보를 어찌 건네주었을까.

과거의 일을 모르는 둘로서는 그저 희한한 느낌일 뿐.

사람의 신체를 본연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반본귀원신주(返本歸元神珠). 예전에 해원기의 사부가 인연에 따라 기보의 주인을 정해주었던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 의술, 그리고 의가의 기보.

세 가지를 갖춘 단목정에게 괴질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해원기가 자신을 가리키는 손짓을 모른 척 입을 열었다.

“그럼 정수회가 아홉 도적 중의 하나겠군요.”

분위기가 회고의 감상으로 흐를까 저어해서인데.

단목정이 입가를 누그러뜨리며 머리를 가볍게 젓는다.

“그렇게 봐야겠지만. 아직 중요한 부분이 남았구나. 네 얘기를 먼저 듣지 않았다면 선뜻 답을 내기 어려웠을.”

단목정과 증명단이 정수회를 떠났다면서, 아직 중요한 부분이라.

해원기를 비롯한 이들이 다시 화제에 집중하자,

증명단이 재빠르게 끼어들고,

“역시 단목 당주님은 대단하세요. 아홉 개의 금오혈석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 실제는 전혀 다른 물건일 수 있다. 그게 아홉 도적의 겁표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단목정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읊는 모양.

“허! 오는 도중에 했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구나. 소단은 대단해.”

단목정이 감탄하지 않았다면 막무가내로 설쳤을 것이다.

해원기가 시선을 단목정에게서 증명단으로 옮기면서,

천천히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성급함.

증명단의 성격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도 단목정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하나하나 말을 받아주면서 얘기를 이어가는 중.

처음에 풀어놓은 보따리가 많다고 미리 밝혔거늘.

아직 결론을 내기도 전에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었다.

해원기, 오소민, 증명단. 젊은이 세 사람에겐 침착함이 부족하다.

수염을 쓰다듬던 금정령이 입을 열었다.

“강호와 조정을 함께 삼킬 심산이었다면 그에 걸맞은 힘이 필요하겠지요. 힘이라, 권력과 재력이야 이미 갖춘 판이니. 세상에 다시없을 기막힌 무력이 부족했겠군. 동창이 나름 공을 들여 무림을 공부했겠고, 그게 또 그들의 욕망을 한없이 부풀리는 압박으로 작용했을 수도. 흠, 끝내 사일신화에 매달리게 되었나 봅니다.”

단목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혹과 궁리를 거듭한 건 금정령이나 단삼육도 마찬가지.

주제를 흩뜨리지 않으려고 듣기에 열중했으나,

도리어 얘기의 큰 흐름을 정확히 짚어낸다.

단목정이 빙그레 웃으며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네, 그게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낙향하는 상보감의 태감이 아홉 도적에게 빼앗긴 아홉 개의 돌멩이. 일단 금오혈석이라고 칭하죠. 아홉이라는 숫자 때문에 십일병출 신화에 나온 지상에 떨어진 아홉 개 태양이라고 여기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정수회에 있는 금오혈석은 태양지정(太陽之精)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기록에 나온 대로 감연에서 씻기는 흉내를 냈더니 사람들이 화상과 동상에 시달린다? 전혀 맞지 않지요. 그렇지만 괴질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고. 그래서 오는 내내 사일신화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금오혈석은 태양지정. 정수회의 금오혈석은 열병과 동상을 한꺼번에 일으켰다.

그래도 해원기가 가진 것과 동일한 형태이니 아홉 도적에게 빼앗긴 아홉 개 중의 하나. 게다가 사일신화의 초반에 태양을 씻기는 감연욕일(甘淵浴日)로 괴질을 일으켰다.

이 모순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우리가 아는 사일신화가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결락(缺落)된 부분을 염두에 두었더랍니다.”

단목정의 두 손이 찻잔을 감쌌다가 좌우로 벌어진다.

“아홉 개의 태양을 떨구었다. 그 본체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이게 금오혈석이라는 이름의 유래인데. 누가 거두었을까?”

스스로 묻는 말에.

좌중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단목정의 손에 모여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

세 발 달린 까마귀란 걸 누가 보았고, 그게 어떻게 돌멩이로 화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태양의 정화인 그 돌멩이를 그냥 놔두었을 리 없잖은가.

의외의 문제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데, 단목정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상식적으로는 예. 비록 천제(天帝)의 명을 받았으나 열 개의 태양은 본디 천제의 자식. 그냥 버려두었을 리 없습니다. 다시 하늘로 돌아갈 때 돌려드리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서 세상에 해를 끼치는 괴물들을 처치하였고, 음, 그 괴물들을 하늘에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자식을 잃은 천제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에는 부족했던지, 끝내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애처로운 삶을 마감했지만. 예가 처치한 괴물들, 가장 대표적인 육악은 그야말로 태고의 신금괴수(神禽怪獸)라 해야 합니다. 간단히 소멸시킬 수 없는 존재들. 그렇다면 육악을 어디에 봉했을지. 아까 이수에 하백인 빙하를 묶어두었던 예를 통해 보아도.”

활을 쏜 사람이 화살에 맞은 걸 취한다.

사냥꾼이 자신이 맞춘 새를 줍는 건 당연한 도리.

“십일병출로 초토화한 대지를 위해서 수신은 쓸모가 있었겠지요. 신금괴수인 육악은 그 엄청난 능력을 완전히 제압할 감옥이 필요했을 테니. 혹여 금오혈석에 봉하지 않았을까요? 흠, 사실 저 자신도 지나치게 황당한 가설이라 여겼습니다만, 원기의 얘기가 적절한 근거가 되더군요.”

육악지력 중의 셋이 이미 현신장이라 불리는 자들에게서 드러났다.

이유는 또 있어서,

“정수회에 있는 금오혈석. 저는 그게 육악 중에서 수화지재(水火之災)를 일으켰다는 구영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건 진여신승, 음?”

현신장을 겪어본 오소민이 자기도 모르게 말을 받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미파를 점거한 둘. 바람과 독을 쓰는 오온존자는 우강이요, 차갑고 뜨거운 공력을 자유롭게 펼치는 진여신승은 구영이라고 여겼다.

화상과 동상의 괴질과 딱 맞는 부분. 그러나 이미 육악지력을 계승한 자가 있거늘, 구영을 봉한 금오혈석이 엉뚱하게 정수회에 있다니.

하지만, 이미 모든 얘기를 들은 단목정이 허튼 소리를 지껄였을 리 없다.

금오혈석은 아홉 개, 육악지력은 여섯.

이 모순을 풀지 못해 장안을 떠날 때 ‘육피구단, 표리부동’이란 수수께끼를 남겨두었던 오소민이라서,

단목정이 암시하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미끼로?”

입술이 저절로 움직여 토한 단어.

수염을 쓰다듬던 금정령의 손이 멈추었고, 단삼육이 손에서 놀리던 호리병을 움켜쥐었으며,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유일하게 얼떨떨한 증명단이 대뜸 오소민에게 되물었다.

“뭘 낚으려고?”

말이란 게 참 어려워서, 친구끼리 툭툭 주고받는 대화도 오해를 부르기 십상.

단목정의 추리가 뜻밖의 결론을 도출하자 오소민도 말투를 가다듬을 새가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바로 되받은 증명단은 더 무례한 셈이었지만.

누구도 탓하는 이가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이는 단삼육.

“태감의 낙향을 겁표한 도적이 아홉. 물건이 아홉인 거에 맞추어서. 장풍보에 하나, 정수회에 하나, 동북 말씨에 교동 사투리라고 했으니까 사방에 다 뿌려놓았다고 봐야. 이미 육악지력을 얻은 후에 일부러 그런 짓을 꾸몄다. 쓸모가 없어진 돌멩이가 아니라 여전히 육악지력의 일부분이 남은 채로…….”

생각을 정리하는 혼잣말이 차츰 흐려진다.

아홉 도적의 겁표 사건은 의도적으로 꾸며진 사건.

아홉 개의 금오혈석이 미끼, 그럼 증명단의 물음처럼 낚으려는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오소민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숫자가 맞지 않는 게 가장 의심스럽지요. 장안에서 마침 삶은 계란과 피단을 섞어놓고 알아맞히는 장사가 유행해서. 맞추면 여섯 푼에, 틀리면 아홉 푼을 받는 짓이 딱 닮았던데.”

자신이 고민하던 수수께끼가 자연스럽게 나오는데,

“엇!”

오소민의 말이 끝나기 전에 금정령과 단삼육, 단목정과 해원기가 벼락같이 시선을 마주치는 통에.

방안에 돌연 무서운 기세가 어지럽게 회오리쳐서.

증명단이 오한이 든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증명단만이 아니라 오소민조차 감히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

이 분위기가 증명단의 무례한 종알거림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당사자도 알 수 없었다.

금정령이 무거운 목소리를 울렸다.

“닮았군.”

뭐가.

단삼육이 곧바로 호리병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젠장, 똑같은 짓을!”

거친 말투는 거의 욕과 같은데, 단목정은 한숨을 길게 내쉰다.

“후우, 녹판(綠板)의 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군요.”

녹판.

해원기의 꿈틀거리는 눈썹 밑, 시선이 아득히 먼 곳을 향했다.

세 사람의 말에는 과거의 난세를 거쳐 온 지독한 감상이 짙게 배어있어서, 오소민과 증명단으로서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으나.

해원기의 눈앞에는 사부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수백 년간 무림에 전해졌던 전설. 그중에 참으로 복잡하게 꼬여 참혹한 사연을 거듭하게 만들었던 물건.

대우(大禹)의 신화에서는 홍수를 다스리는 식양(息壤)으로, 몽고(蒙古)의 전설에선 주인 없는 하늘(無主天)로, 사한(四汗)의 금지(禁地)에선 사흉(四凶)의 봉인으로, 마도(魔道)로 매도당한 도가의 일맥에선 회생의 중추로.

얼마나 많은 세월, 얼마나 많은 이들을 미혹시켰던가.

바라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에 홀려,

마침내 법도를 바르게 세운다는 본래의 가르침까지 망각하게 했던.

녹판.

회하의 수신인 무지기나 태고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는 촉룡 같은 환상 속의 신수가 등장하고, 그 환상 속의 신수를 문지기로 삼아 봉인했다던 사흉.

녹판은 끝내 맡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도찬, 도올, 혼돈, 궁기라는 사대흉마를 풀어내었으며.

또한 인세에서 완전히 소실되었던 천마지기(天魔之氣)와 사대흉마를 하나로 뭉치는 사황령(邪皇靈)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를 위해 모조품을 만들어 이목을 어지럽히고, 한 쌍이어야 할 녹판을 한 짝씩 드러내 무수한 의혹을 양산했었다.

다섯 쌍의 오한녹판(五汗祿版)이라는 원래 이름도 숨긴 채.

다시 되새기기 싫은 기억이지만, 좌중에 모르는 이가 있기에.

단삼육이 오소민에게, 단목정이 증명단에게 해주는 간명한 설명도 해원기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

흐려지는 초점을 거두어 감으려던 눈이,

오소민의 목소리에 뜨였다.

“구하려고 버린다……. 금오혈석의 단서를 확실히 얻지 못했기에 일부러 세상에 뿌려놓았다는 말씀. 하지만, 육악지력을 전부 해석했다고 해도 상당한 모험이었을 텐데.”

여전히 숫자에 집착하는 어투.

육악을 봉인한 여섯 개의 금오혈석에서 육악지력이 풀려나왔다면. 또 봉인에 쓰이지 않은 금오혈석도 세 개나 된다.

단목정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서 녹판을 떠올린 걸세. 녹판 중의 한 쌍은 나머지 네 쌍을 복원하는 힘이 있다고 추정되었거든. 같은 이치로 적용하면 금오혈석에서 육악의 봉인에 쓰이지 않은 세 개가 혹시. 삼육구(三六九)라는 숫자도 공교롭고.”

뭔가 더 할 말이 있지만 삼가는 눈치.

가설과 추측이 거듭되면 엉뚱한 답을 내리게 된다.

오소민도 그런 이치를 잘 아는지라 더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고,

방안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 가운데 혼자 고개를 이리저리 꼬아보는 증명단. 나름대로 머리를 써보려고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의문 한 가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이런 희한한 계책을 낸 사람은 대체 누굴까?

절령제십오(節令第十五) 백로(白露)

백로는 천지에 한기(寒氣)가 증장(增長)한다는 걸 가리키는 중요한 지표이다.

이때에는 날씨가 서서히 시원해지면서 낮의 햇볕은 비록 아직 뜨겁지만, 일단 해가 지고 나면 기온이 급속히 떨어져 밤낮의 온도 차가 커진다.

초가을에 남아있던 더운 기운이 차츰 흩어지고, 낮과 밤에 열기와 한기가 교차하며, 이 찬 기운이 이슬을 맺게 한다.

옛사람은 사시(四時)를 오행(五行)에 붙였으니, 가을(秋)은 금(金)에 속하고, 금은 또한 백색(白色)이기에 이 가을 이슬을 백로(白露)라고 불렀는데.

또한, 이 시기를 철새의 움직임으로 따지기도 해서 백로삼후(白露三候)라고도 하였다.

즉, 일후(一候)는 홍안래(鴻雁來), 첫 번째 징후는 기러기가 오는 것이요, 이후(二候)는 현조귀(玄鳥歸), 두 번째 징후는 제비가 돌아가는 것이며, 삼후(三候)는 군조양수(群鳥養羞), 세 번째 징후는 뭇 새가 먹을거리를 장만함이라.

생명의 활력이 정점을 지나 죽음을 맞는 기점이라, 이른바 진정한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시작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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