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장 감연욕일(甘淵浴日) (3)
더하기다.
“백 년의 난세를 조성했던 벽세도, 모든 마공의 원류로서 가공할 능력을 보였던 지부도 전부 실패했습니다. 헛된 야망을 품은 자는 대개 머리가 나쁜 편이라. 과거의 사실에서 훈계를 얻기는커녕 유치한 셈법에 기대기 마련이죠.”
단순한 계산, 유치한 셈법.
좌중에서 과거의 사실에 가장 무지하고 단순하게 사물을 따지는 이는 증명단이다.
“벽세와 지부로는 부족했으니까 거기에다 신화지력만 얹으면 이번엔 성공이다? 에, 그 신화지력이 뭔데요?”
단목정의 말을 그대로 받으며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이미 알잖냐. 여기로 북상하기 전에 겪어놓고선.”
단목정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깨우쳐주자 황연히 알아챈 듯.
“아, 금오혈석! 아니, 그건 신화지력이라기보다는…….”
“그래. 그건 조금 있다가 얘기하기로 하고. 그 금오혈석이 어디서 나왔더라?”
주제가 자칫 어긋날 수 있기에 얼른 질문을 던지는 단목정.
복잡하고 무거운 화제를 증명단과의 대화로 풀어가려는 모양이다.
“그거야, 낙향하는 태감이 도적을 만나서, 음, 황궁이요.”
“그렇지. 황궁에 간직되었던 물건이지. 상보감의 장인태감이나 되어야 접할 수 있는. 그게 대체 언제부터 황실에 전해졌는지는 몰라도 누군가 그 가치를 알아본 때부터 작금의 사태가 시작되었을 거다. 물론 완전히 비밀을 풀어내진 못했을 터.”
“십일병출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아홉 개. 그런데 아니었잖아요?”
“흠, 그 얘기도 뒤로 미루자. 그래도 사일신화와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해. 조금 전에 원기의 얘기에도 현신장이란 자들이 나타났으니까.”
금오혈석은 신화지력.
지상으로 떨어진 아홉 개의 태양.
그렇게만 단정했던 증명단이 눈을 깜빡거렸다.
단목정을 따라 남쪽에서 겪었던 일이 어떻게 해원기의 얘기와 이어지는지 생각하면서.
“그, 육악이라는 괴물?”
기대하던 답을 내자 단목정이 미소를 짓는다.
“맞았다. 원기가 상대했던 현신장 셋은 각각 알유, 우강, 구영에게서 비롯된 능력을 지녔고. 벌써 그런 자들로 공동과 아미를 강탈하기까지 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신화지력을 찾았던 게 확실하다. 그러면서 더 욕심이 났겠지.”
“더?”
증명단이 대화에 빨려들어 말이 짧아졌지만,
단목정은 개의치 않고 시선을 바로 돌렸다.
“신화지력을 모조리 얻고 싶은 욕심. 그리고 진짜 신화가 되고 싶은 욕심. 마침 모략과 능력을 나름대로 갖춘 판이니.”
얘기가 갑자기 비약하는 듯.
그러나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는 증명단 하나뿐이었다.
좌중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진다.
단목정과 증명단의 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나.
오소민이 곧장 말을 받았다.
“모략은 벽세, 능력은 지부. 동창은 신화지력의 단서를 얻은 후에 아예 무림을 제압할 욕심을 품었다는 거군요. 더불어 황권(皇權)조차.”
영민한 만큼 단숨에 알아들었고, 단목정이 미소를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예로부터 모략과 힘, 이 두 가지를 갖추면 엉뚱한 마음을 먹기 쉬우니까. 더구나 황제의 측근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실습까지 거쳤잖은가. 왕망(王莽)을 본받기에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을 걸세.”
한(漢)나라를 중간에 찬탈한 왕망. 누구나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근거였다.
무림을 제압하는 것보다 황권을 먼저 노렸을 수도 있으나,
단목정의 말대로 그 순서는 중요한 게 아니고.
“나라랑 싸우느냐는 소단의 말이 좋은 지적이었거든. 조화부인이니, 밀각의 대부니, 주국경에 무슨 상서, 게다가 이 낙양에는 육학사의 하나. 어지간히 관직을 모방한 티가 나잖나.”
오소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연. 대부의 벼슬은 주로 문산계(文散階), 장군의 직함은 무산계(武散階). 부인은 내명부, 주국경은 무훈이고 상서는 육부(六部)의 책임자니까.”
“밀각이란 이름도 짐작할 수 있지.”
“밀각은, 바로 내각(內閣)을 고스란히 흉내 낸 거로군요. 이런 가소로운!”
오소민이 탄성으로 말을 그치자,
단목정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하지만, 그럴 법하달까. 황궁 안에서 내시로만 지내온 자들로선 높은 관직이야말로 선망의 대상일 걸세.”
두 사람에게서 똑같이 전해지는 어처구니없다는 느낌.
해원기의 얘기에서 동창의 심리를 엿볼 단서를 찾았다는 건데.
좌중의 나머지는 그리 쉽게 동감을 표하기 어려웠다.
천하제일대방인 개방의 방주와 호법장로,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검왕과 북악의 검을 계승한 항산파의 장문제자.
대단한 수식어를 붙여도 어차피 강호에서 살아가는 무인에 불과하다.
당장 ‘내각’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본래 황제의 자문기구였다가 영락제 때부터 다시 실권을 되찾아서 마침내 조정 최고의 권위를 장악한 조직. 그 위세는 능히 육부를 능가하고, 보신(輔臣) 여럿을 거느린 내각의 수보(首輔)는 명실상부한 재상(宰相)이라고 할 만했다.
분위기를 눈치 챈 오소민이 짤막하게 설명을 더하고 나서야,
좌중은 이 대화의 시작을 다시 되새겼다.
‘나라랑 싸운다.’
맹랑한 소녀의 한 마디가 바로 핵심이었고,
그 핵심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흐음, 참람(僭濫)하게 관위(官位)를 사칭한다? 그건 어쩐지 역모(逆謀)로 들리는구먼.”
금정령이 수염을 쓸며 미간을 좁히자, 단목정이 짧은 한숨을 덧붙였다.
“후, 그렇습니다. 함부로 단정하긴 이르지만, 동창의 꿍꿍이는 우리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 같더군요. 그저 강호를 어지럽히려는 암류라고만 여겼던 게 실수, 아니, 방만했습니다.”
방만.
자책의 표현이었으나, 그 단어가 나오면서 단목정과 같이 표정이 무거워진 두 사람.
“단목 당주만이겠는가. 우리가 모두…….”
단삼육이 얼른 말을 받자마자, 금정령이 무거운 시선을 해원기에게 향했다.
“참으로 볼 낯이 없군. 강호를 살아가는 이로써.”
표정보다 더 묵직한 음성. 그건 부끄러움이 담긴 사죄여서,
오소민과 증명단은 되레 어리둥절할 수밖에.
비록 해원기가 혼자서 동분서주, 동창의 내막을 밝혀낸 게 적지 않지만.
여기서 개방 방주가 갑자기 왜 해원기에게 사죄를 하는지.
해원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과거를 겪은 이들의 심정을 모르지는 않지만, 여기서 사죄를 받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니까.
“황권을 차지하는 거로 진짜 신화가 될 수 있을까요?”
본래의 화제로 돌아가야 이 어색한 분위기도 풀리겠지.
단목정이 그런 해원기의 마음을 알아채고 빙긋 웃었다.
“하긴, 역모든 뭐든 그거야 주황실(朱皇室)이 걱정할 문제구나. 황제가 된다고 해서 신화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욕심이란 이미 정상적인 심리에서 벗어난 거거든. 끊임없는 탐욕, 그에 따른 질시, 마침내는 말도 되지 않는 망상에 빠지니까.”
불가에서 삼독(三毒)이라 하는 탐진치(貪瞋痴)를 들먹이곤,
“자, 여기서 원기와 헤어진 후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낫겠네. 조금 돌아가지만, 결론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으니. 괜찮겠습니까, 금 방주?”
과거에 천하제일지자로 알려졌던 천문노인의 유일한 후대다.
결론을 구한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금정령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금 모를 깨우치는 귀한 얘기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겠습니다.”
겸손한 대답에 단목정이 웃으며 증명단을 가리켰다.
“하하, 귀한 얘기라. 이건 소단, 아니, 우리 증 낭자 덕분에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될 터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항산파 장문제자의 신분을 생각해서 굳이 ‘낭자’라고 해주지만,
단목정의 웃음과 함께 증명단의 얼굴이 묘하게 변해서 절로 좌중의 관심을 끌었고,
자연스레 무거운 분위기도 걷힌다.
“발단은 원기를 만나 약왕당으로 돌아온 날부터입니다. 돌연히 정수회의 이회주라는 자가 괴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가져오면서.”
지난 얘기를 빠르게 풀어낸다.
정수회의 총회가 있는 안경(安慶).
이회주 정일건이 괴질에 걸린 두 명을 데리고 약왕당으로 왔다가, 절로 호전되는 기특한 상황을 맞아 그저 치료에 감사하고 떠난 후에,
불쑥 단목정이 안경으로 찾아왔으니 정수회가 놀랄 법도 했다.
그래도 당대의 신의가 직접 원인 불명인 괴질의 뿌리를 기어이 뽑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미 두 명이 신세를 진 바에야.
약왕당의 주인 단목정과 그 수제자로 분장한 증명단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정수회 총회에 머물며 조사를 시작했는데.
과연 신의가 몸소 치료해서인지,
짧은 시간 내에 괴질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연구와 처방에 바쁜 단목정을 대신해서 시침(施鍼)과 안마를 두루 베풀어준 수제자의 솜씨가 대단했다나.
“내가 적은 약방문은 대강 상한증(傷寒症)의 치료에 알맞은 것이지만, 실제 시침과 안마는 엉터리였지요. 환자의 상태와 시각에 따른 기혈의 흐름에 맞추어 증 낭자에게 적당히 큰 관계가 없는 혈도 근처를 건드리게 했거든요.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면서 괴질의 증상이 사라졌으니, 흠, 처음의 추측이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의 추측은 정수회 총회에 괴질을 일으키는 물건이 있다는 것.
그 물건만 제어하면 괴질 또한 사라질 터.
그게 혹시 겁표 때 사라진 금오혈석의 하나가 아닐까.
“정수회의 총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 인원으로만 따져도 개방에 그다지 뒤지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총회에는 엄밀한 경계가 펼쳐졌으나, 일단 안에서는 돌아다니기 어렵지 않았고.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곳곳을 살필 기회도 얻었지요. 물론 총회이니만큼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금지가 몇 군데 있었는데.”
빠르게 이야기를 풀어가던 단목정이 잠깐 말을 멈추면서 자신의 찻잔을 앞으로 밀었다.
“그중 하나가 아주 묘했습니다. 증 낭자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미 빈 찻잔.
새로 온 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찻잔을 채우는 동작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어 좌중의 시선이 궁금해지는데.
엉터리 시침과 안마를 해주었던 증명단이 불퉁하니 입을 열었다.
“목욕탕 같지도 않은. 그것도 밤중에 그런 해괴한 짓거리. 떠올리기도 싫어요.”
“하핫, 의원의 수제자라면 병독(病毒)에 찌든 천들을 직접 빨아야 하지. 그 핑계로 데운 물을 구하려다가 발견한 거잖아? 홀딱 벗은 여인네들이 물장난이나 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니.”
“치료해준 사람 중에 여자는 딱 하나라서 물어보기 편했다고요. 그녀가 밤중에 몰래 그 근처로 가면 데운 물이 넉넉히 흘러나온다고 가르쳐줘서. 아유, 남장이 얼마나 고역인 줄 아세요? 칫.”
장소가 어떻던, 화제가 무엇이든 타고난 성격이 변할 리 없다.
처음 만난 개방의 방주 앞에서도 입술을 삐죽거리는 증명단.
이야기를 듣던 해원기가 이 막무가내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어째 주의를 시키려던 시선이 엉뚱하게 맞은편을 향한다.
묘한 금지. 목욕탕이 왜 금지인지보다 ‘남장’이 더 귀에 걸려서.
오소민은 그 고역을 계속할 셈인가.
증명단의 투정으로 이야기를 끌 생각은 없던 단목정이라.
“증 낭자가 기겁한 얘기는 나중에 본인에게 자세히 듣지요. 하여간 그 덕분에 괴질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게 되었고, 동시에 아홉 개의 오리 알, 제가 금오혈석으로 추정했던 물건 중 하나가 정수회에 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바로 말을 맺으며 새로 차를 따른 찻잔을 가만히 당긴다.
아직 물이 뜨거웠는지 모락모락 오르는 김.
“정수회의 회주가 누군지는 끝까지 밝히지 못했습니다만, 무릎까지 오는 얕은 목욕탕에 나신의 여인들을 번갈아 풀어놓고 훔쳐온 오리 알을 밤중에 씻기도록 지시를 내리던 세 명의 복면인. 그들 중의 하나일 테고, 아울러 사일신화를 상당히 아는 자입니다.”
들을수록 기묘함을 넘어서 기괴한 내용.
재미있다는 건 아마 증명단이 엉터리 수제자 역할을 하고, 밤중에 우연히 희한한 목욕탕을 발견한 대목인 모양인데.
그보다 괴질의 발생과 금오혈석이 어떻게 이어지는 건지.
모락모락 오르는 김을 보는 단목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일신화보다 더 먼저 나오는 태양에 관한 기록. 어미인 희화(羲和)는 열 개의 태양을 낳고 자식들을 감연(甘淵)이란 못에서 씻었다고 하지요. 혹은 낮에 하늘을 달린 태양이 밤이 되면 몸을 씻는 곳이라고도 하고. 어떻든 금오혈석의 진위를 판별하고 그 힘을 끌어낼 방도를 신화에서 끌어낸 셈입니다. 그 목욕탕의 물이 총회의 수원에 스며들어 괴질을 일으킬 줄은 모르고서.”
빨라진 말.
중간에 단목정이 그 광경을 엿본 부분은 생략했지만,
이제 좌중의 시선은 단목정을 지나 해원기에게 모여들었다.
감연이 나오는 신화의 내용도 처음 듣지만, 무엇보다 괴질을 일으킨 것과 같은 물건이 지금 해원기의 품속에 있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