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장 감연욕일(甘淵浴日) (2)
낙양성 안의 고동가(古董街). 성 중심지에서는 남서쪽으로 조금 기운 곳이지만, 뛰어난 서화나 오래 묵은 골동품들이 주로 거래되는 곳이라 꽤 묵향(墨香)이 감도는 거리랄까.
밤이 되어도 입구에 작은 등을 달아 상점의 편액을 밝힌 집이 적지 않고, 그중 연묵재(硏墨齋)라는 곳은 주변에 큰 나무들이 많아 그윽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 연묵재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방.
둥근 탁자가 가운데 있고 의자가 빙 둘러서 내실이라고 여기기엔 크기나 구조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이 또한 낙양에 비밀리에 둔 개방의 거점.
용문산을 떠나 낙양의 중심가, 그것도 상당히 분위기를 갖춘 거리로 왔고. 골동품상이 개방의 거점이란 걸 알고 신기해하는 이는 증명단 하나뿐이다.
헤어졌던 이들이 다시 만난 반가움, 처음 보는 이들과의 정중한 인사.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반드시 치러야 할 과정이 끝날 때까지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단목정이 탁자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협개 금정령이 가운데, 좌측으로는 단삼육과 오소민이. 우측으로는 자신과 해원기, 증명단이 차례로 앉았다.
둥근 탁자에는 아직 빈 의자가 몇 개 남았으나 더는 올 사람이 없는 듯.
주인 격인 금정령이 단목정과 시선이 마주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름 지주 노릇을 해야 할 본 방이 부끄러운 모습만 보였구려. 일단 단목 당주, 해 소협, 증 여협께 감사를 드려야겠소.”
정중한 인사말에 단목정이 미소를 지었다.
“원, 이렇게 훌륭한 점포에서 격식까지 차리시면 저조차 주눅이 듭니다. 할 얘기가 산더미인데 편하게 하시죠.”
금정령의 시선이 힐끗 해원기와 증명단을 스치고. 수염을 쓸면서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옳은 말씀. 해 소협과 증 여협을 만난 기쁨에 내가 지나치게 흥분했나 보오. 허허.”
‘그분’의 유일한 제자인 해원기.
몇 년이나 황하의 범람을 막으려고 애썼다는 사실은 이미 알지만, 이렇게 무림에 등장한 실물을 직접 보니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다.
더벅머리에 평범한 용모. 다른 곳에서 스쳐 지나갔다면 이 새파란 젊은이가 ‘절세검왕’이라고는 여기지 못했을 터.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금정령이다. 당장 단목정과 함께 온 묘령의 소녀, 증명단도 잊혔던 항산검파의 장문제자이지 않는가.
‘확실히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을 품고 있다. 게다가…….’
해원기의 등 뒤에 비스듬히 걸린 한 자루 검.
어찌 잊겠는가. 바로 ‘그분’의 검이거늘.
굳은 표정의 해원기와 상기된 얼굴의 증명단을 위해 일부러 웃음소리까지 덧붙였다.
“그럼 편하게 하지요. 에, 이번에 본 방은 피동에 몰려 놀아난 꼴이라. 그저 뒤에 처진 구경꾼이었을 뿐이외다. 아무래도 단목 당주가 이 논의를 주지하는 게 좋겠소이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먼 길을 급행한 것도 다 이유가 있을 터.
그제야 곁에 앉은 단삼육이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사형이 무게를 잡으면 여러 사람 불편하거든. 단목 당주는 옛날에 이야기꾼도 했었잖아. 어서 보따리를 풀어보라고. 궁금한 게 많아.”
이야기꾼.
한때 사마의 음모를 깨뜨리고자 평범한 이야기꾼으로 분장해 강호를 돌아다녔던 과거를 들먹이자,
단목정이 피식 웃곤 얼른 표정을 고쳤다.
궁금하긴 자신도 마찬가지.
남쪽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무당의 부덕도인에게 우선 간략한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해원기는 그간 어떤 일을 겪었을지.
속히 화제를 진행해야 한다.
“보따리가 몇 개는 되는 듯하니. 원칙을 정하겠습니다. 가까운 시점부터, 직접 당한 일부터 풀어보지요. 그러면 먼저 조금 전의 용문석굴. 제가 귀 방의 총단을 찾아오다가 단 장로를 만났고, 원기와 오 장로가 용문석굴로 향한 걸 알았지요. 동창이 뭔가 괴상한 짓을 벌인다, 사라진 보병파에서 유출된 감로보병을 가지고서. 저는 듣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서둘렀던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원기가 하백 빙이를, 흠.”
단목정의 시선이 옆에 앉은 해원기를 향하고.
“흔히 빙이라고 일컫지만, 이수에 봉인된 건 기로 보이더군요. 물론 신화에 나오는 뇌수 본신이라기엔 무리가 있어도. 같은 종류거나, 혹은 몇 대째의 자식이거나. 뭐, 어떻든 수신 하백임은 틀림없을 겁니다. 시비선악에 대해선 굳이 따질 게 아니고, 하여튼 그건 이수의 수신, 함부로 죽였다간 상당히 곤란해질 가능성이 있어서. 이수의 수문(水文)이 바뀌지요. 이수의 수문이 바뀌면 낙양의 지기(地氣)도 변하고, 낙양의 지기가 변하면 황하의 흐름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이궐이니 등용문이니 하는 이름은 전부 이 우두용신의 물귀신 덕에 얻은 거라.”
해원기의 눈썹 한쪽이 꿈틀했다.
물고기가 역류를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는 등용문의 전설, 용문이라는 지명도 그래서 붙었고, 그 용문으로 들어가는 이수의 좁은 물길을 이궐이라 붙인 건 마치 제왕의 궁궐 같기 때문인데.
낙양은 역대 왕조가 두루 도읍으로 삼았던 터전. 낙양의 왕기(王基)가 바로 그 물귀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태고의 사정이야 지금에서는 알 길이 없으나, 당시에 중원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터를 만들기 위해 수신을 봉인하지 않았을까요? 태양이 열 개나 떠서 모조리 불타버린 땅덩이 위에. 그래서 육악을 모조리 처단하면서도 빙이는 이수에 봉인했던 모양입니다. 아홉 개의 태양을 떨군 예가.”
“네?”
“예?”
오소민과 증명단이 놀라고, 다른 이들도 미간을 접을 정도로 의외의 내용.
이런 반응을 이미 짐작한 듯, 단목정이 고개를 오소민에게 돌렸다.
“오 장로도 봤잖은가. 북동 안의 불상이 취한 수인. 당나라 때에 불교가 성행한 탓에 무량수불, 아미타불의 모양을 새기긴 했으나, 그 수인은 사실 부처의 수인이 아니지.”
오소민이 눈을 깜빡이다가,
“아! 반지(搬指)…….”
깨달은 듯 탄성을 토하자, 단목정 또한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호오, 희귀한 단어를 다 아는구먼. 맞아, 엄지손가락에 끼어 활시위를 당기는 데에 쓰는 도구, 바로 반지를 형상화한 걸세. 그래서 나도 이수에 펼친 진도를 만궁세로 운용할 마음을 먹었다네.”
북동 안에 파괴된 불상. 오소민은 그 파편을 찾아 원래의 모양을 단목정에게 알려줬었다.
여원인처럼 보이지만 더 구부린 왼팔, 그리고 반지를 형상화한 오른손. 그건 바로 활을 당기기 직전에 취하는 자세였다.
반지는 학문에 열중한 이들이나 알 법한 단어다.
단목정이 특이하다는 듯 오소민을 다시 한번 보곤 말을 이었다.
“북동의 불상은 고력사가 새겼다지. 고력사는 천외육가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신기역 보병요의 가신이었을 터. 천외육가라면 이수에 하백이 봉인된 사실을 아는 것도, 그 봉인을 다시 조성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거야. 자, 여기까지가 제가 원기에게 손을 멈추게 한 이유입니다.”
오소민에게 낮추었던 말투를 다시 높이면서.
단목정이 앞에 놓인 차를 들었다.
자신이 밝힌 원칙대로 첫 번째 보따리를 푼 셈. 신기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라 좌중이 이해하고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한다.
아울러 자질구레한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해 화제가 지나치게 방만해지지 않도록.
예를 기려 새긴 아미타불, 그리고 이를 숨기기 위한 동굴. 태양을 영접한다는 빈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까지 떠들 필요는 없다.
오소민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고력사가 새긴 불상을 찾으려고, 하백 빙이라고 추측했기에. 제단을 만들고 소녀들을 제물로 준비……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정을 예측하셨는지?”
황 학사가 꾸민 수작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는데. 단목정은 ‘불길한 예감’이라고 했었다.
완곡한 질문에 단목정이 빙그레 웃었다.
“오 장로도 들어봤을 텐데. 과거에도 물귀신이 난리를 친 적이 있거든. 회하의 무지기라고. 아, 물론 그 물귀신은 이번과 달리 인위적으로 길러낸 요물이었지. 그래도 그 여파가 상당해서 최근에도 원숭이 괴물들이 대별산으로 몰려들더란 말일세. 회하는 장강, 신기역 보병요가 사라지고 그 유풍이 장강의 보병파로 잠시 존재했었고, 마침내 버려진 터전이 엉뚱한 자의 손에 넘어가서, 음, 다 지나간 일이구먼. 하여간 똑같은 상황이 황하에서도 벌어지지 않을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할까. 다행히 이번에는 큰 탈 없이 다시 봉인한 셈이고.”
시선이 도로 해원기에게 돌아간다.
큰 탈 없이 다시 봉인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해원기 덕분이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이들도 다 목격한 광경. 거대한 풍뢰를 일으켜 이수를 통째로 진압하지 않았던가.
해원기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형님이 계셨기 때문에…….”
“됐다. 이다음은 네 얘기야. 네가 약왕당을 떠나 지금까지 거쳤던 사정들, 특히 오 장로와 서쪽으로 갔을 때부터 자세하게 말해주렴. 그러고 나서 내가 다시 그간 증 낭자와 겪었던 일을 얘기하마.”
논의의 원칙.
현재부터 거꾸로 올라가며 서로가 겪은 일을 설명하는 거다.
순서를 일러주던 단목정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 네 말솜씨로는 시간을 너무 잡아먹겠지? 오 장로가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금 방주, 괜찮겠지요?”
“좋습니다.”
일부러 금정령의 허락을 구하는 건 오소민의 명석함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래도 ‘네 말솜씨’라니.
해원기가 좀 겸연쩍게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들었고,
마침 자신을 보던 오소민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오소민도 어쩐지 어색해하는 표정. 금정령이 흔쾌히 승낙하는 것도, 단삼육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도 모른 체 눈만 깜빡거린다.
빈양삼동의 급박한 상황에선 서로 거리를 두지 않고 예전처럼 움직였지만,
이렇게 자리를 나누어 마주 보니 다시 거북해진다.
중요한 논의가 오가는 자리라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눈만 굴려대는 증명단도 부담스럽고.
진평현의 수차제까지는 해원기가, 진평현을 떠나서 화산을 거쳐 장안까지는 오소민이, 다시 장안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은 해원기.
오소민이 자신과 관계된 얘기는 요령 있게 잘 넘어갔지만, 나머지는 해원기가 혼자 겪은 사건들이라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단목정이 중간 중간 끼어들지 않았다면 하염없이 길어질 뻔한 얘기.
차 한 주전자가 다시 탁자에 오르고서야 끝이 났고, 장내가 잠시 조용해졌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지칠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내용. 이제는 찻잔에 손을 대는 사람이 없다. 지쳐서가 아니라 심각하게 따져볼 부분이 많아서.
하지만,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고, 억지로 참고 앉았던 인내에도 한계가 온 증명단이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뭐야, 그럼 지금 나라랑 싸우는 거예요?”
복잡한 얘기는 딱 질색. 대충 들어보니 해원기가 싸웠던 자들 태반이 뭔지도 모를 고관대작인 것 같잖나.
방안의 침묵이 깨지면서 절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데.
탁.
단목정이 무릎을 치며 웃기 시작한다.
“하, 그래, 그 말이 정답이구나. 역시 소단, 아니, 증 낭자라니까. 하하하.”
증명단을 부르는 호칭이 중간에 바뀌는 건 이 자리를 고려해서. 금정령도 항산파 장문제자라는 위치를 생각해 증 여협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불쑥 입을 연 증명단뿐 아니라 탁자에 둘러앉은 모두가 단목정의 말을 바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뭐가 정답이라는 건가.
단목정이 웃음을 거두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자천려(智者千慮)에 필유일실(必有一失)이라. 선사께서도 항상 경계하시던 걸 내가 또 잊어먹은 모양이네. 음, 지나치게 말단에 몰두하다 배경을 볼 줄 몰랐으니. 쯧쯧.”
지혜로운 이는 너무 많이 생각하다가 반드시 한 가지를 놓치지 마련.
경구를 들먹이며 혀를 차고는,
“이제야 뭔가 그림이 되는 듯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근 십여 년, 강호 저변에 흐르던 암류가 동창이란 건 이미 밝혀졌지만, 그 동기를 알 수 없었지요. 벽세가 세상에 뿌려놓은 화근, 지부에서 비롯한 불길한 기운. 둘 다 작지 않은 문제라도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무슨 목적으로 꺼진 잿더미에서 불을 다시 일으키냐는 것이었습니다. 영광종과 오마왕전이 감히 세상에 나설 수 없는 이 국면에서.”
표정도 목소리도 평소의 활달함과 달리 무거워졌다.
동창이 무림을 범하는 동기. 동창의 누가, 왜 무림을 침범하는가.
칭찬을 받았다고 으쓱해진 증명단이 냉큼 가벼운 입을 놀린다.
“천극 탁 맹주가 계시니까.”
그동안 단목정을 따라다니면서 들은 게 많은가 보다.
묻지도 않은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벽세와 지부의 잔재인 영광종과 오마왕전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꼼짝 못 하고 있는 건 이십여 년에 걸쳐 탁관영이 그들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무림의 회생을 위한 그의 위대한 희생을 모르는 이는 없다.
단목정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과거의 역사를 피상적으로 아는 자들. 구중심궐에 앉아 그저 기록으로만 무림을 읽고서, 천하를 쥐겠다는 야망을 품었겠지요.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최고의 권력을 얻으려고, 그들이 아는 힘을 어떻게든 얻으려고 기를 썼습니다. 벽세와 지부를 합치고, 그 위에 신화지력(神話之力)을 더하면 충분하다는 단순한 계산으로.”
단순한 계산.
동창을 가리킨다는 건 분명한데, 단목정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