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장 감연욕일(甘淵浴日) (1)
해원기와 오소민이 은신했던 향산사 쪽에서 남쪽으로 치닫는 몇 개의 그림자.
전부가 대단한 속도의 경공을 펼쳐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도 쉽지 않다.
무수한 거품이 일어나는 강심을 피해 남쪽의 이궐교를 건너려는 듯.
해원기는 그중 가장 앞의 인물이 단목정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머리에 쓴 순양관이 삐딱하고, 삼각 수염은 노랗게 물들었으며, 소매가 터질 정도로 바쁘게 내젓는 두 팔.
어지간히 다급한 모습이요, 그만큼 이궐교를 단숨에 넘어 다가온다.
“주, 죽이면 안 된다. 헉, 헉.”
경공에 전력을 기울이면서도 말을 그치지 않아서,
철컥.
해원기가 길게 숨을 내쉬며 고검을 거두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을까. 헤어진 지 꽤 시간이 지났고,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 지혜로운 형님이 이유 없이 해원기를 제지할 리 없다.
단목정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도 시선은 강심을 떠나지 않는다.
부글부글.
물거품과 시퍼런 기운이 여전한데.
비로소 해원기 앞에 내려선 단목정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우, 다, 다행이다. 그나마 최악의 상황이 되기 전에. 에효효.”
마지막엔 앓는 소리까지 덧붙이곤,
“형님.”
다가오는 해원기를 본체만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어깨에 멘 작은 포대를 마구 쏟아낸다.
“일단 저 괴물부터 진정시키고. 어이, 개방의 오 장로지? 동굴 안의 상황, 특히 불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겠나? 원기는 내 곁에서 호법을!”
진짜 바쁜 건 지금부터란 건가.
빠른 말투로 정신없이 지시를 내리더니,
포대에서 나온 온갖 잡동사니를 앞에다 주욱 늘어놓고 단정하게 자세를 잡아서.
해원기가 의아한 심정을 참고 얼른 단목정의 뒤에 섰다.
이전에 대별산에서 산소라는 괴물을 처치할 때도 단목정은 기이한 술법을 시전했었다.
빙이를 그런 식으로 진정시킬 모양.
만일을 위해 호법을 서야 한다면, 해원기도 소모된 공력을 빨리 회복해야만 한다.
눈을 가늘게 떠 강심을 주시하면서, 잠심침령에 집중하는데.
오소민은 해원기처럼 냉큼 상황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우당탕.
불현듯 몰아친 돌풍에다 연이어 전해지는 충격.
정신을 잃은 소녀 셋을 혼자서 업고 끼고, 이리 뛰고 저리 피하느라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중동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면서 흙과 돌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마침내 동굴 한쪽이 폭삭 내려앉기까지.
그게 마침 북동의 벽이었던지.
오소민은 소녀들과 함께 북동 안으로 나동그라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동굴 안에 갇혀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몇 배나 답답하고 불안해서. 주변을 살필 새도 없이 북동 입구 쪽으로 머리를 내밀어야 했다.
연달아 터지는 굉음, 귀청을 찢을 듯한 우렛소리, 날카로운 검명과 괴물의 비명.
초조함과 궁금함이 겹쳐 북동 앞에 현신장들이 있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무너진 입구에 구멍을 뚫었고,
그 덕에 황 학사와 현신장 셋이 빙하의 뿔 조각을 주워 냅다 몸을 날리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한 상황. 빙이가 쓰러진 강심 쪽엔 아직 괴이한 분위기가 이어지건만, 불쑥 등장한 이 중년인은 누굴까.
시야가 불편해 또 누가 이르는지 확인도 되지 않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영 얼떨떨한 기분.
그래도 워낙 영민한 오소민이다.
‘해 형이 형님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럴 사람은 단 한 명. 게다가 해원기가 아무 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호법을 서잖나.
“네엡! 알겠습니다, 단목 당주님!”
목청을 높여 힘차게 대답하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북동 안의 불상, 아미타불의 상태를 살피려고.
동물의 뼈, 썩은 나무뿌리, 그리고 당최 추측하기도 어려운 괴상한 것들.
단목정이 앞에다 펼쳐놓은 물건들을 힐끗 살핀 해원기가 가늘어진 눈매를 다시 강심으로 돌렸다.
물거품과 시퍼런 기운이 뒤엉켜 강물이 점점 끈적해지는 느낌.
단목정이 두 손을 교차하며 기묘한 소리를 웅얼거리더니 짤막하게 기합을 외쳤다.
“결(結)!”
스슥.
늘어놓은 잡동사니들이 벌떡 일어나 이수로 튕겨 나가고, 그런 잡동사니가 육중한 바윗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변에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다.
촤아아아.
술법이 시작되었음을 인지한 해원기가 두 손을 좌우로 펼쳤다. 호법을 맡았으니 이제부터 사소한 변화라도 단목정에게 미치지 않도록 할 셈.
물보라가 일자 검왕수가 자연스럽게 유리광한의 모습을 취한다. 오행의 시원인 수(水), 강가에 바짝 붙어 앉은 단목정에게는 물보라가 아니라 물방울 하나도 닿지 않을 터.
단목정이 조그맣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리 엄격히 다스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맞은편 향산에 미리 심어둔 진도(陣圖)와 연결한 것뿐이니까. 이궐용문은 원래 대단한 힘이 담긴 곳이라. 봐라, 아까보다 많이 가라앉았지?”
향산사에서 그냥 해원기를 부르며 달려온 게 아니란 뜻. 건너오기 전에 동산인 향산에 진도를 설치했기에 이제 이수 전체를 감싸는 힘이 발동했다.
과연 물보라가 그치자 해원기의 눈에 강심의 물거품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게 보였고, 끈적거리는 느낌도 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남은 시퍼런 기운.
단목정이 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말을 잇는다.
“지금은 그저 수기(水氣)를 보충하기 바쁠 게다. 뇌택(雷澤)으로 바꾸려는 걸 다시 순류(順流)로 돌렸거든. 그럼 이제 무엇으로 진압하느냐는 건데.”
설명은 해원기에게 해주면서 시선은 북동쪽으로.
뭔가 기다리는 눈치에 응하듯 오소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상, 아미타불의 불상은 맞는데. 손목이 다 달아났고…… 에, 부서진 조각을 대강 살폈더니 남동이랑 모양이 다른데요? 이게.”
불빛도 없는 동굴 속에서 불상의 파손된 흔적을 용케 찾아낸 듯.
파편을 살피는지 목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하는데,
“어떤 수인인지 대충 설명해보게!”
단목정이 다그치자 오소민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왼손은 여원인과 비슷, 그런데 팔을 더 구부린 것처럼. 오른손이, 엥? 이런 수인은 처음 보는. 무명지와 소지는 바짝 감아쥐고, 나머지 세 손가락이 고리 모양이면. 부처가 할퀴는 조법(爪法)을 익혔을 리가…….”
감로보병과 연관되는 무량수불이 단서.
오소민도 빙이의 출현에 아미타불의 불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측했기에 나름 신경을 써서 살펴보았으나.
파편을 제대로 찾았나 싶을 정도로 의아한 심정이 말끝에 고스란히 담겼다.
불상의 두 손이 취하는 수인을 거의 다 알지만, 이런 건 본 적이 없어서.
응조(鷹爪)나 계조(鷄爪)처럼 손가락 세 개로 고리를 만드는 수인이라니.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목정이 머리를 크게 끄덕였고,
“역시 그랬군! 수고했네. 도움이 되었어.”
이어서 해원기에게 말을 걸며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다.
“원기야, 이제 내가 진도를 만궁세(挽弓勢)로 잡아 역류(逆流)를 일으킬 거다. 그러면 네가 바람으로 빙이를 가두고, 연환금쇄(連環禁鎖)로 이어지면 곧장 내리눌러라. 벼락이 치듯. 검은 뽑지 말고. 뭔지 알겠지?”
진도지학에 관해서는 공부를 꽤 한 해원기지만,
단목정의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검을 뽑지 말고 맨손으로. 바람으로 가두고 벼락 치듯 누른다라.
빙이를 처치하려는 걸 단목정이 왜 저지했는지도 아직 모른다.
그렇지만, 형에 대한 믿음.
천하제일지의 제자로 만사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지녔잖은가.
“알겠습니다.”
다부진 대답과 함께 신왕공을 한껏 끌어올렸다.
잠깐이었지만 공력이 많이 회복되었다.
“견(牽)!”
쿵.
단목정이 진결을 외치며 땅바닥을 힘차게 때리자 이수가 뭐에 걸린 듯 덜컥거리고,
순류로 빠르게 흘러가던 강물이 마구 파도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만궁세는 활을 잔뜩 당기는 형세. 동산과 서산을 엮어 이룬 진도가 강물을 좌우로 끌면서 흐름을 거꾸로 뒤집는다.
콰르르, 콰르르.
몸부림치는 강물이 거친 신음을 토하고,
해원기가 그대로 몸을 날리면서 양손의 검왕수로 팔풍지력을 쏟아냈다.
휘잉, 휘이이잉.
역류하는 이수, 그 위로 쏟아지는 바람. 강심이 졸지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공중에 뜬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소용돌이 가운데 드러나는 빙이. 해원기의 건곤차륜참에 찢긴 몸뚱이를 가리느라 꼬리가 소머리까지 돌돌 말려 잔뜩 웅크린 모습인데.
소용돌이가 빙이를 중심으로 돌면서 시퍼런 기운이 도로 빙이에게 모여든다.
상처 입은 몸뚱이에 보충하려던 수기가 소용돌이로 밀려났지만, 자신이 흘린 시퍼런 기운이 되돌아오는 바람에 어리둥절한 듯.
해원기가 쏟아낸 팔풍지력이 역류와 어울려 거대한 울타리가 되었다.
‘물에 바람이 어울린 수풍정(水風井). 이수를 강이 아닌 우물로 만드셨구나. 그리고 만궁세로 역류를 일으켰으니까.’
이제야 이해가 간다.
활을 잔뜩 당긴 형세는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순류를 역류로 뒤집는 것도, 강물을 우물로 만드는 것도 전부 이치를 거스르는 현상.
바로 그때, 단목정이 또 진결을 외쳤다.
“발(發)!”
활을 잔뜩 당기면 화살을 쏘아야 하는 법.
우르르르.
역류가 본래의 순류에 휘말리고, 우물이 도로 강이 되면서 이수가 한꺼번에 빙이를 덮쳤고,
그게 연환금쇄의 변화임을 직감한 해원기가 손을 모아 내리쳤다.
꽈릉!
일성뇌정(一聲雷霆).
검을 뽑지 말라는 의미에 맞추어 검왕수를 대우신장으로 바꾸었고, 공간을 밀어내는 힘이 수면을 통째로 짓눌렀다.
마치 하늘이 크게 꾸짖는 듯한 우렛소리에 파도가 왕관처럼 치솟고,
쏴아아.
해원기가 몸을 틀어 파도 위에 올라탔다. 지친 몸으로 전력을 다한 풍뢰결, 그나마 수정지력이 해원기를 보살펴 강변까지 조심스럽게 모셔준다.
“하하, 잘됐네, 잘됐어.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 원기야.”
웃는 낯을 보이곤 아예 뒤로 누워버리는 단목정.
그리고 뒤미처 강변에 이르는 이들.
그중에 펄쩍펄쩍 뛰는 낯익은 얼굴에 해원기의 표정도 풀어졌다.
“오라버니! 어어, 오 장로님?”
해원기를 보고, 북동에서 몸을 빼내는 오소민을 찾고.
증명단이다.
단목정과 증명단은 무당에서 해원기의 소식을 전달받았고, 북상하면서 바로 개방에 연락을 넣었기에 목적지를 낙양으로 정했었다.
마침 개방의 총단이 총출동한 때. 곧장 이 용문석굴로 달려왔고,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향산사로 넘어온 것.
같이 온 이들은 바로 개방 방주인 협개 금정령과 수신오웅, 그리고 취개 단삼육이었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다 나누기도 전에,
혼자서 부리나케 북동 안을 둘러보고 온 단목정이 손을 흔들었다.
“자, 금 방주, 일단 자리를 옮깁시다. 할 얘기는 많은데 여기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고. 너무 지쳤소.”
일부러 힘든 표정을 짓지만, 지쳤다는 게 단목정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도착하면서부터 계속 해원기에게 시선을 두었던 금정령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단목 당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인사도 얘기도 뒤로 미루지요. 단 사제가 앞장서고, 수신오웅은 소녀들을 맡아라. 음, 막내는 괜찮으냐?”
쉬지 않고 강행군을 거듭한 단목정과 증명단도 어지간히 지저분하지만, 오소민은 그야말로 흙구덩이에서 갓 빠져나온 몰골과 다름없었다.
빈양삼동 안에서 이리저리 구르다시피 했으니.
단삼육이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이제야 본 방의 장로답구먼. 그러고 보니 해 소협이 제일 멀쩡하잖아. 흐흐.”
오소민도, 증명단도 자신의 모습을 살피다가 해원기를 보면서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사람들도 묘한 쓴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해원기만이 젖은 머리를 긁을 뿐.
왜 웃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