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36화 (236/410)

제59장 우두용신(牛頭龍身) (4)

산처럼 솟은 강물, 그 속에서 내려다보는 거대한 소머리.

담력을 갖춘 무인이라도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기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원기는 도리어 굽혔던 무릎을 펴 몸을 일으켰다.

상상을 뛰어넘는 크기. 올려다보는 목이 아플 정도요, 짓눌리는 착각에 절로 옹송그리는 게 사람의 본능이건만,

검을 등 뒤로 돌려 차분하게 묶는다.

“뇌고(雷鼓)의 기, 하백인 빙이라. 알유 또한 물귀신이니 통하는 데가 있나 보군.”

“어? 응…….”

자기에게 건네는 말이란 걸 겨우 알아챈 오소민이 굼뜬 대답보다 눈을 치떠야 했다.

뭘 하는 건가.

북동에서 나온 황 학사와 요술사가 주고받은 얘기. 봉인이 어떻고 무량수가 무엇이고, 조령종성이니 약수지음이니.

영민한 오소민이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리 없다.

북동에 새겨진 아미타불의 불상이 이 거대한 물귀신을 진압한 일종의 봉인이었다는 것. 황 학사가 감로보병을 써서 그 봉인을 파괴했으며, 육악 중 알유의 능력을 지닌 요술사가 낙혼금종으로 부릴 수 있게 된 상태인 듯.

오소민의 추정대로라면 이 물귀신은 기.

그러나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가 있다 해도, 신화에나 나오는 엄청난 괴수가 흉흉한 시선을 보내는 데에야.

심장이 벌떡거리고 오금이 저릴 판인데.

등 뒤에 기다란 검을 빗겨 맨 해원기가 힐끗 돌아보았다.

“소녀들을 데리고 동굴 안쪽으로 가게.”

무슨 소린가 싶어 오소민의 치뜬 눈이 바르르 떨었다.

“자네는, 뭐…… 하려고?”

더듬거리는 반문에 해원기의 입가가 얼핏 올라가는 듯.

그게 쓴웃음이라는 건 오소민도 알아볼 수 없었다.

“다스려야지.”

휘이이이이잉.

해원기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동굴 입구에 일어나는 돌풍.

정신을 잃은 소녀 셋과 오소민까지 모조리 안으로 밀어내는 거센 바람이 대체 어디서 일어났는지.

“아앗!”

자욱한 흙먼지에 휩싸여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소녀 셋을 챙기느라 허둥지둥.

시야에서 해원기를 놓쳤다.

쾌체 일을 하면서 육 년이나 황하의 범람을 막으려고 고생했었다.

산서에서 혼자 물길을 뚫고, 산동에선 황신을 미리 알려 피하도록 하고.

그렇게 무고한 백성들이 수해를 입지 않도록 애썼는데. 이렇게 신화에 나오는 하백과 정면으로 싸우게 될 줄이야.

치수(治水)가 업보인 듯싶어 해원기가 고소를 지었던 건데.

“으읏, 이 바람은?”

놀라기는 북동 앞도 마찬가지. 구석에 부딪힌 돌풍이 회오리치며 무너진 흙과 돌을 마구 날린다.

빙이에게 울린 조령종성을 피하지 못해 똑같이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졸개 셋은 중심도 잡지 못하고 비틀비틀.

육악 중 우강의 힘을 지닌 오온존자가 찢길 듯 펄럭이는 가사를 황망히 움켜쥐었다. 우강의 별명은 대붕(大鵬) 혹은 대풍(大風). 자신도 바람을 부리는 능력이 장기지만, 이런 돌풍은 겪어보지 못했다.

서둘러 황 학사의 앞을 막아서려는데,

풍, 풍.

빙이의 콧구멍에서 물안개가 뿜고, 거대한 파도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쏴아아아.

목표는 중동 앞. 해원기를 향하던 졸개 셋을 단번에 집어삼키고, 곧장 해원기를 덮친다.

그 순간,

사방으로 뻗던 돌풍이 질풍처럼 모여들어 폭풍이 치듯 회오리쳤다.

펑!

파도가 산산이 부서져 물보라가 자욱한데.

그 물보라가 그대로 바람에 빨려드는 듯, 파도가 모조리 해원기의 주위를 휘돌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시퍼런 형상.

와자작.

꿈틀대며 바닥을 쪼개는 건 바로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꼬리였다.

두 아름이 넘는 두께에 파란 비늘이 가득하고, 끝에는 삼각형의 지느러미가 달렸지만, 어쩐지 땅바닥에 패대기친 물고기마냥 펄떡거리며.

다급히 강물의 벽으로 말려 들어간다.

물을 모두 뺏겨서 맥이 빠졌나.

그래도 상당한 충격에 중동 입구 한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북동과 나누어진 부분이.

해원기의 눈썹이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상대는 신화의 괴물.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검을 뽑을 셈이었다.

빙이가 출현한 후로 보인 능력은 두 가지. 채찍처럼 후려치는 파도와 콧구멍에서 터지는 굉음.

그렇다면 방어는 바람으로, 공격은 벼락으로. 풍뢰결을 단단히 마련했는데.

팔풍지벽(八風之壁)이 파도를 모조리 빨아들일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 드러난 빙이의 몸뚱이는 과연 용과 같아서. 소머리에 용의 몸. 오소민이 말한 대로다.

‘청룡(靑龍)의 일종인가?’

시퍼런 비늘에 얼핏 그런 생각이 들지만, 지금의 자신도 거의 용의 형상으로 화했다는 건 알 수 없었다.

슈르르르릉.

전신을 휘감은 팔풍지벽이 거꾸로 세운 폭포처럼 또 하나의 거대한 물기둥을 이루면서,

빙이가 세운 강물의 성벽까지 흔들어댄다.

용권풍(龍捲風)이 아니라 용권폭(龍捲瀑)이라 해야 할까.

완성된 수정지력(水精之力).

모든 물이 복종한다.

빙이도 해원기와 거의 동시에 이유를 깨달았던지, 꼬리를 완전히 말기도 전에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두웅!

전신을 갈가리 찢는 뇌고성(雷鼓聲).

그러나 해원기도 벌써 두 손을 나누었다.

빙이를 가리키는 오른손은 검지 하나, 옆으로 바짝 당긴 왼손은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세운 형태.

광한(廣寒)의 검결인(劍結印)을 따라 수정(水晶)처럼 투명해진 물기둥이 진짜 폭포처럼 쏟아졌다.

퍼퍼펑!

뇌고성과 맞부딪친 물기둥이 폭음과 함께 흩날리고 주위가 순식간에 몽롱해졌다.

빙이의 꼬리에 뭉쳤던 파도, 그 파도가 해원기의 물기둥이 되었고, 또 충격 때문에 비와 안개로 화해서 공간을 온통 수막(水幕)으로 덮지만.

해원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빙이를 노려보았다.

천강만하(千江萬河)가 일시에 내달리듯, 뇌고성뿐 아니라 빙이가 세운 강물의 성벽까지 무너지기 시작한다.

크에에.

괴성을 토하며 두 뿔을 이리저리 흔들고, 콧구멍에선 연달아 물안개를 쏟아내는 빙이.

조그만 인간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자신이 되레 밀리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모양.

그런 꼴을 감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치잉!

빙이의 괴성 속에서도 선명하게 울리는 검명.

공간을 몽롱하게 뒤덮었던 수막이 놀란 듯 사라지고,

두 손을 모으는 해원기의 등에서 한 줄기 빛이 화살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손도 대지 않았건만,

검이 뽑혔다.

오른손은 검지를 구부리고 나머지 손가락을 편 금광(金光), 왼손은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뻗고 나머지를 한데 모은 진화(眞火).

상생의 금광섬삭(金光閃爍)과 상극의 폭령진화(爆令眞火)가 동시에 검결인을 맺자,

위이이이이잉!

귀청을 찢는 기음과 함께 공중에 뜬 검이 태양으로 변했다.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고, 도로 한낮이 된 것처럼 주위를 달구는 열기.

해원기가 땅을 박차면서 단호한 기합을 토했다.

“군림어검!”

명을 받은 군림검이 그대로 빙이의 머리통으로 떨어진다.

크에에엑.

두두두둥.

괴성을 지르며 머리통을 내젓는 빙이. 강물의 성벽이 한꺼번에 왈칵 넘어지고 뇌고성이 마구 울리지만.

콰앙!

화산이 터진 것 같은 엄청난 굉음에 귀가 멍해지고, 폭발한 강물이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쏴아아아. 덜컥.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폭우. 그 속에 뭔가가 북동 앞에 떨어졌지만,

공중을 치달려 이수 위로 날아오른 해원기는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쿠르르릉.

머리통을 맞은 빙이가 뒤로 넘어간 채 강심(江心)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이수 전체가 몇 길이나 치솟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빙이의 용틀임에 동산과 서산만이 아니라 이궐까지 모조리 범람할 기세.

상생과 상극을 동시에 전개하는 군림검의 오행어검은 막대한 내공을 소모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

오른손이 엄지와 소지를 벌리고 세 손가락을 모은 등목(藤木)으로, 왼손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대괴(大塊)로 바뀌었다.

상생은 등목구룡(藤木九龍)이니 검이 가리키는 강물이 덩굴처럼 빙이를 옭아매고, 상극은 대괴무극(大塊無極)이니 치솟는 이수를 도로 강바닥으로 찍어 누른다.

촤르르, 철썩.

검극을 따라 날뛰던 이수가 빙이에게 쏟아지고, 퍼지던 물결이 강심에서 소용돌이로 모여드는 순간,

군림검을 낚아챈 해원기가 수레바퀴처럼 맹렬히 회전했다.

“차압!”

케에에엑!

콧구멍 아래부터 십 장이나 몸뚱이가 갈라진 빙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시퍼런 액체를 뿜어냈고,

마지막에 건곤차륜참(乾坤車輪斬)까지 펼친 해원기가 급히 몸을 뒤집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공력을 사용했다.

한 줄기 남은 수정지력으로 강물을 번갈아 차면서 간신히 시퍼런 액체를 피하고, 표풍결에 의지해 너울거리며 강변으로 돌아가는데.

해원기의 바위처럼 굳은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탁 소숙에게 배운 무량참(無量斬)의 비전까지 펼쳤지만, 과연 신화의 괴물을 완전히 죽였을지.

태양이 무색하던 군림검의 빛이 사그라지면서 주위가 다시 어두워진다.

비록 부력답수의 경공을 지녔어도, 그건 공력이 충일했을 때의 얘기.

풍뢰결에 수정지력, 군림어검대법에다 무량참까지 시전했으니 일시간 공력이 허탈한 걸 면키 어렵다. 더구나 완전한 수정지력이 빙하를 만나자 풍뢰결과 어울려 해원기가 배운 적도 없는 천강만하의 용권폭을 이루었잖은가.

박대정심을 목표로 한 해원기는 그것이 신기역 보병요에서 대대로 전해졌던 신공, 분류천강장공(奔流千江掌功)의 원형임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강변에 발이 닿자마자 호흡을 가다듬으며 재빨리 옆으로 돌았다.

강심의 빙이가 완전히 소멸했는지도 중요하지만, 빈양북동 앞에는 아직 현신장들이 있다.

약수의 능력으로 조령종성을 울린 요술사가 또 무슨 수작을 벌일지.

그런데.

북동을 향하던 해원기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음?”

빙이와의 싸움 때문에 꽤 손상을 입은 중동과 입구가 거의 막혀버릴 정도로 무너진 북동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오소민이야 소녀들을 데리고 중동 안으로 피신했을 터. 설마 황 학사와 현신장들도 그 뒤를 따랐을까?

가슴속에 불쑥 치미는 불안. 해원기가 급히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날리려는데,

“제길, 놈들이 튀었어! 빙이의 뿔을 가지고…… 어? 해 형!”

와르륵.

북동 입구를 헤치며 머리를 내민 오소민이 버럭 소리를 높인다.

무슨 얘긴지 헤아리기보다 경각심에 벼락같이 몸을 돌린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부글부글.

강심에 헤아릴 수 없는 거품이 떠오르고, 시퍼런 기운이 자욱하게 퍼진다.

아직 끝내지 못했나.

과연 신화 속의 괴물이라고 감탄하기 전에, 빠르게 내부를 점검한 해원기가 이를 악물었다.

끼이이이잉.

면면부절의 수정지력이라도 회복에는 시간이 걸린다. 지금의 상태로 군림어검대법은 무리, 그렇다면.

나사관천으로 돌기 시작하는 고검을 똑바로 눕혀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어검대법이 어렵더라도 풍뢰결로 몸을 날리면서 탄환관천(彈丸貫穿)을 펼치면 같은 효과를 낼 것이다.

사부와 달리 체내에 삼산(三閂)이 생성되지 않아 대지체의 힘을 빌릴 수 없는 게 이처럼 안타깝기는 처음.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는데,

“멈춰라, 원기야!”

별안간 강의 반대쪽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에 해원기의 눈이 커졌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목소리, 단목정의 음성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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