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35화 (235/410)

제59장 우두용신(牛頭龍身) (3)

처음에는 땅이 꺼지는 것 같던 지진.

그리고 용문을 빠르게 흘러가던 이수가 돌연히 마구 끓어올랐고, 이어서 강변을 빨아들이며 높이 일어섰다.

휘이이이이이.

폭풍을 등에 업은 광란의 물결이 해일로 화한 듯이.

그 광경을 확인한 순간, 해원기의 머릿속에 사부에게 들었던 얘기가 확 떠올랐다.

‘고우호(高郵湖)의 한경루(寒鏡樓).’

과거에 그곳에서 벌어졌던 기이한 싸움.

온갖 세력들이 몰린 곳에 전설의 괴물까지 출현했다고.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나 놀랍고 황당해서 믿기 어려웠지만, 사부의 말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더구나 사부가 그 전설의 괴물을 처치하는 걸 교 노인이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음에야.

쿠르르르.

한 길, 두 길. 강물이 까마득하게 치솟아서,

강가에서 비칠거리며 물러서는 조양신문과 무명천의 생존자뿐 아니라, 중동에서 지켜보던 해원기와 오소민까지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빈양삼동이 자리한 용문산을 그대로 덮칠 듯한 높이.

거세진 바람 속에서 강물로 성벽을 세운 듯한데,

그 가운데가 정말 성문처럼 열리기 시작하고, 거대한 형상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왔다.

집채만 한 크기에 길쭉한 모양. 넓적한 바위가 콧잔등을 이루었고, 그 탓에 양쪽으로 멀찍이 떨어진 두 눈은 시퍼런 빛을 뚝뚝 흘리며, 한참 아래에 뚫린 두 개의 콧구멍에선 물안개가 뿜어져 나온다.

얼굴? 폭이 이 장이요, 길이가 삼 장이 넘는 얼굴이라니. 게다가 얼굴 양쪽에 뚝 떨어진 눈알 바로 위, 쇠뭉치처럼 달린 혹에서는 각각 우람한 뿔이 기둥처럼 뻗었다.

“소, 소머리?”

기가 막힌다는 오소민의 말과 함께 숨결이 귀를 스치지만,

해원기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그때의 괴물은 원숭이 모습이었다고. 그런데 이건 소머리라.’

원숭이 모습의 괴물. 사부가 처치한 괴물은 회하(淮河)의 수신(水神) 무지기(無支祁)였다고 들었는데.

지금 해원기가 마주친 이 물귀신은 소머리를 들이밀었다.

뿔에서 콧구멍까지 족히 오 장은 될 듯한 엄청난 크기의 소머리다.

세상에 이런 괴물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이 괴물은 뭘까.

풍, 풍.

소머리의 거대한 콧구멍에서 물안개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두 개의 시퍼런 눈이 아래쪽을 훑자.

쏴아아아.

빨려 들어갔던 강물이 돌연 한 줄기 커다란 파도가 되어 강변을 후려쳤다.

퍼펑.

“크아악!”

“우웩.”

해원기의 검세를 겨우 버텨냈던 스무 명이 그 파도에 휘말려 비명을 질러대고, 찢긴 육체와 핏물로 물든 파도는 그 비명까지 남김없이 삼켜버린다.

그래도 우두머리급은 조금 다른지.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뻗으며 반사적으로 몸을 날린 몇이 겨우 그 파도를 피했다.

조양신문의 둘과 무명천의 하나. 중동 앞에 해원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상관하지 않고서 도로 빈양동 앞으로 물러서려는데,

소머리의 거대한 콧구멍이 마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닫혔다가 열렸고.

두웅!

어마어마한 굉음.

“컥.”

숨이 막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마치 살 맞은 새처럼 뚝 떨어지는 셋.

퍼퍼퍽.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 육신이 벼락 맞은 고목처럼 터져버렸다.

끔찍한 광경이지만, 대체 어떻게?

“음.”

해원기가 급히 숨을 멈추며 왼팔을 옆으로 뻗었다.

신왕공에 잠심침령, 게다가 연검대초로 검왕오형을 시전하면서 검왕법신과 검기핍인의 기세가 아직 신변에 감돌건만.

갑작스럽게 덮쳐온 무지막지한 압력.

바로 뒤의 오소민과 소녀 셋. 그들을 지키려고 검왕법신의 기운을 퍼뜨린 탓에 전신이 부르르 떨린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힘. 해원기의 신광 어린 시선이 소머리의 거대한 콧구멍을 주시했다.

이 무지막지한 압력은 바로 저 콧구멍에서 비롯되었다.

그래도 일도월극을 지휘하던 조양신문의 둘과 장야연성의 권법을 펼치던 무명천의 우두머리가 저렇게 무력하게 처참한 꼴이 되다니.

“우린, 괜찮구…먼. 응?”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하며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뒤로 돌았다. 동굴 벽에 기댄 소녀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잠에 빠졌고,

희한한 목소리를 낸 오소민이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갑자기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저 괴성(怪聲)이 어째 동굴 안까지는, 가만! 저놈들도 멀쩡하잖아?”

해원기가 퍼뜨린 기운 덕을 보긴 했어도, 오소민뿐 아니라 정신을 잃은 소녀들조차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더구나 오소민이 목소리를 높이며 가리키는 곳.

북동 앞의 무너진 흙더미에 웅크리고서 호각을 불었던 세 명. 처음에 소녀들을 포대에 담아 왔던 그 세 명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니.

빈양북동은 중동과 남동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크기.

게다가 처음부터 잘못 지어졌는지, 혹은 보존을 소홀히 해서인지 입구가 반이나 무너진 상태였다.

그래도 그 흙더미는 중동 앞의 해원기보다 조금 더 강변으로 나온 위치.

포대를 들쳐 메고 용문산에서 빈양삼동으로 내려설 경공이니 제법 무공을 익혔겠으나, 요술사의 종소리에는 귀를 틀어막았고, 호각으로 조양신문과 무명천의 무리에게 신호를 보낸 후에는 포위 공격에 끼어들지도 않았던 셋이다.

그런 자들이 조양신문과 무명천의 우두머리조차 맥없이 당한 괴성을 버텼다고?

쿠르르르.

소머리 괴물의 시퍼런 눈알도 이를 알아챘는지, 성벽처럼 일어선 물결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위세.

그 와중에 오소민이 빠르게 입을 놀렸다.

“동굴, 이 빈양삼동은 불력이 충만한, 특히 남동과 북동에는 아미타불을 모셨…… 그런데 남동만 드러나고 북동은 가려져서. 이곳은 서산석굴이고, 아미타불은 서방정토를 건립하고 무변중생(無邊衆生)을 제도하는 무량장엄공덕을 성취한 부처니까. 그런 아미타불이 둘. 그렇다면 고력사가 만든 진짜 무량수불은…….”

머리에 담긴 지식과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마치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왜, 왜 무량수불이지? 당나라 때는 측천무후 때문에 대일여래를 숭배하는 기풍이. 무량수불은 또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불리는 대승(大乘)의, 아니, 아니야. 이건 단지 현교(顯敎)에서 일컫는. 남동의 아미타불이 취한 자세는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의 평범한 모습. 그러나 북동의 아미타불이 어떤 모양인지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어?”

이 빈양삼동에 오기 전, 무슨 얘기를 했었던가.

사일신화와 수신 하백에 관해서 떠들었잖나.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

입을 놀리면서 해원기를 향하는 오소민의 눈에 혜광(慧光)이 반짝인다.

“밀교(密敎)에서 아미타불은 대일여래의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상징한다지. 그래서 만다라(曼茶羅)에서는 서쪽 월륜(月輪)의 가운데에 거처하는, 이름이 감로왕(甘露王)! 이, 이건.”

사일신화와 무량수불이 이어지는 부분.

감로보병의 다른 이름이 항아월백인 이유.

해원기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리는데.

오소민이 목이 삐끗할 정도로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이렇게 이어질 수는. 그렇지만, 저 소머리가 만약 용의 몸뚱이를 지녔다면.”

정신이 없다.

해원기가 빠르게 말머리를 잡았다.

“해석은 나중일세. 저 괴물이 뭔지 알겠나?”

황 학사가 현신장 셋을 이끌고 북동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이 소머리 괴물의 출현과 반드시 밀접한 관련이 있을 터.

그러나 그 내막을 따질 틈은 없다. 자칫하다간 이 빈양삼동이 모조리 수몰되고, 겨우 구한 소녀들을 포함해 모두가 큰 곤경에 빠질 위기.

다그치는 물음에 오소민이 눈을 마구 깜빡이면서 더듬거렸다.

“우, 우두용신(牛頭龍身)의 하백. 빙이(氷夷), 또는 풍이(馮夷)라고도 하는. 기(蘷)…….”

해원기도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산해경(山海經)에서 일컫길,

동해 칠천 리 유파산(流波山)에 살고, 물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비바람을 일으키며, 울음이 마치 우레가 치는 것 같아서. 황제(黃帝)가 이를 잡아 북을 만들어 치자 그 소리가 오백 리 밖까지 울려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는.

신화에 나오는 뇌수(雷獸).

해원기도 어렸을 때 읽은 기억이 있지만, 지금 눈앞의 이 괴물이 바로 그 기라니.

오소민이 자신이 지닌 지식을 모조리 동원해 정신없이 괴물의 정체를 추정하던 그 짧은 순간에.

상황은 또 급변했다.

뎅, 데엥, 데엥.

기라고 추정되는 소머리 괴물 때문에 조그만 종소리 따위는 잘 들리지도 않지만,

북동 앞에 웅크리고 있던 세 명이 뭐에 홀린 것처럼 일어나서는, 슬금슬금 앞으로 나서고.

그 뒤로 현신장을 앞세운 황 학사가 조그만 목갑을 받쳐 든 채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생각을 뒤집은 게 맞았군. 불상은 바로 봉인(封印), 불사약은 무량수를 빗댄 표현이었고…… 음?”

동굴 안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습.

그런 황 학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호위하듯 붙은 현신장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성질 급한 오온존자의 거친 입이 대뜸 열린다.

“저놈이 아직 살아남았다니! 어떻게.”

“잠깐!”

황 학사가 바로 말을 끊었지만, 낙혼금종을 울리는 데 온 신경을 쓰던 요술사나, 강물의 성벽에 걸린 괴물의 모습에 입을 벌리던 진여신승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낙백갑사를 일으키고 조양신문과 무명천의 무리를 불렀었다.

도합 팔십이 넘는 인원. 어떤 고수라도 쉽사리 뚫기 어려운 포위망이다. 비록 이기지는 못해도 발을 묶기에는 충분하다고 여겼거늘. 손해를 봤더라도 절반은 남았으리라 예상했거늘.

전부 사라지고 보이는 건 해원기.

북동 앞에 웅크리고 있다가 홀린 듯이 일어선 세 명의 졸개도, 중동 안에 소녀들과 함께 있는 오소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굴 안에서 황 학사의 지시를 받아 여러 술법을 펼치느라 밖의 동정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기는 했으나.

비로소 태고의 비밀에 닿을 실마리를 얻은 이 순간에.

하필 검왕만이 멀쩡하게 살아있다니.

“신술사, 어떤가?”

뜻밖의 상황에서도 황 학사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목갑을 받쳐 든 자세를 바꾸지 않고서 빠르게 묻는 말에.

온 신경을 낙혼금종에게 쏟아 붓는 요술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령종성(操靈鐘聲)이 제대로 들리는 모양입니다. 약수지음(弱水之音)에 귀를 기울이는 걸 보면 빙이가 확실하군요. 다만.”

데엥, 뎅.

끊길 듯 말 듯 계속해서 낙혼금종을 울린다. 전력을 기울인 탓에 요술사의 얼굴은 땀범벅.

그러나 황 학사는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았다.

“됐네. 마침 불러낸 제물도 같이 있으니, 되찾으라고 하게.”

드르릉, 디링.

하려던 말이 끊겼어도 기진맥진할 지경인 요술사가 지체하지 않고 종을 흔들자,

더욱 나긋해진 종소리와 함께.

홀린 듯한 졸개 셋이 중동을 향해 와락 몸을 돌렸다.

아니, 그 세 명만이 아니라,

쿠르르르르.

강물의 성벽이 무너질 듯 떨어대니.

소머리 물귀신의 콧구멍에서 두 줄기 폭포가 쏟아지고, 시퍼런 눈알이 흉측하게 중동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지시를 내린 황 학사와 현신장 셋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비록 북동 안에서 빙이를 불러냈다고 확신하긴 했으나,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괴물.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도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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