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장 우두용신(牛頭龍身) (2)
앞에서는 시체 같은 느낌의 서른 명이 몰려들고,
등 뒤에는 나신의 소녀 둘을 양쪽 팔에 낀 오소민이 있다.
상황을 살피느라 몇 걸음을 물러났더니 완전히 남동 입구에 포위된 처지.
게다가 조양신문과 무명천의 인원 오십이 더해졌다.
아직 북동 앞에 나뒹구는 소녀가 남았고, 황 학사와 현신장은 벌써 북동 안으로 들어간 듯.
오소민의 목소리가 빠르게 해원기의 귀에 전해졌다.
“뭔가 달라 보여도 어차피 사술. 용문석굴, 특히 이 빈양동 앞에선 오래 가지 않을걸. 시간을 끄는 것 같아.”
그리고 등으로 전해지는 맑은 기운.
그게 오소민이 지닌 하화의 기운이란 걸 금세 알아차렸다.
두 소녀를 구하면서 어고경성의 호신강기는 이미 풀어졌으나, 빈양남동에 들어서면서 오히려 강해진 보패의 힘. 깨닫자마자 해원기에게 일러준 것이다.
머뭇거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 빈양남동에는 아미타불을 새겼다고 했지.’
그렇다면 수미전단검법이 어울릴 터.
그런데 초조면벽(初祖面壁)을 펼치려던 해원기가 살짝 놀라 검병을 두 손으로 잡아야 했다.
선문(禪門)의 일체개공(一切皆空)을 바탕으로 하는 고요한 검결이,
홀연히 무지막지한 강기를 끌어모으기에.
연검대초로 검집째 들었다 해도 사 척을 넘지 않는 길이의 이제검이 무려 일 장이 넘는 거창한 강기를 뿜는다.
커다란 기둥 같은 두께에 찬연한 빛까지 머금으며.
초조면벽이 채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낙백갑사라 불린 서른 명이 죄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버둥거리자,
해원기가 마음이 가는 대로 힘차게 검을 내질렀고.
찬연한 빛을 머금은 거창한 강기가 일시에 폭발했다.
퍼엉!
초조면벽에 이은 이조입설(二祖立雪).
낙백갑사 서른 명이 한꺼번에 뒤로 나가떨어지고, 강기의 파편이 눈발이 날리듯 떨어진다.
“으읏?”
“이런!”
무명천의 거한과 조양신문의 중년인이 내지르는 놀란 음성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십이지주든 삼십육조양진이든 눈발처럼 떨어지는 강기를 막아내기에 급급한 판.
북동 앞으로 몰려들었던 포위망이 사방으로 확 벌어진다.
무명천의 거한이 두 주먹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장야연성(長夜連城)!”
윙윙.
팔뚝까지 드러난 두 손에서 쏟아지는 패도적인 권력. 좌우에 있던 자와 십이지주라 했던 장한들이 좌르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똑같이 주먹을 휘두르고,
새까맣게 이어지는 권력이 눈발 같은 강기를 전부 으깨버린다.
조양신문도 뒤질세라,
“일도월극(日刀月戟)!”
차창.
우두머리의 외침소리 한 번에 열여덟 자루의 칼과 열여덟 자루의 극이 한꺼번에 뽑혀 좌우로 빠르게 뒤섞인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번쩍이는 살벌한 예기.
낙백갑사를 전부 쓰러뜨렸어도 주위의 압력은 오히려 심해졌다.
더구나,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던 낙백갑사들이 일어서려고 어기적거리니.
한 걸음 성큼 나서던 해원기의 눈에 신광이 맺히고,
내질렀던 연검대초를 고쳐 쥐었다.
유구한 세월 동안 빈양동에 서린 불력(佛力). 해괴한 사술이 발동한 반동인지 오소민의 하화라는 보패를 만나자 불현듯 깨어났고,
해원기의 수미전단검법이 시작되자 일시에 현현해버렸다.
그 바람에 적멸의 검역을 이루려던 연검대초가 강기로 폭발했으니. 이른바 호법항마(護法降魔)의 매질이랄까.
하지만, 눈발로 펼쳐지던 검역을 기어이 벗어던지는 새까만 권력. 칼과 극을 어지럽게 엮어 살벌한 예기를 뿌리는 병진(兵陣). 그리고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상했을 텐데도 강시가 무색하게 일어나려고 어기적대는 낙백갑사들.
간단히 돌파할 수가 없다.
그 순간에 또 오소민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번엔 전음.
[드잡이질할 때가 아니야. 어서 북동 앞의 소녀부터!]
맞는 말이다. 사람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 북동의 제물로 바쳐졌던 소녀는 아직도 땅바닥에 엎어진 채.
해원기가 공력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살짝 꺾었다.
끼이이이잉.
오른손에서 맹렬하게 돌아가는 연검대초. 나사관천의 소음이 시작되자마자 오소민이 옆으로 몸을 날리고,
해원기는 두 발을 번갈아 뒤집어 밟으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호선(弧線)을 그리며 오소민을 가리는 움직임.
검집을 뒤덮은 강기 때문에 연검대초는 검이 아니라 창으로 바뀐 듯, 곧게 뻗은 창날이 팔방을 찌르는가 싶더니 손을 바꾸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보기엔 검왕오형의 단순한 연용(連用) 같지만,
오른손의 발검제형은 유리검, 왼손의 재단경위는 본연검의 상(相).
촤촤촤촤, 위이이잉.
재단경위가 저사직금의 오의를 드러내며 공간을 뒤덮자, 발검제형도 수발여의의 오의대로 끊임없이 갈마든다.
유리검이 신왕검으로 바뀌고, 본연검이 추상검으로 변한 것도 느끼지 못하고서.
눈이 어릿할 속도로 양손을 오가는 연검대초.
어느 손이 찌르고 어느 손이 베는지 구별조차 되질 않는다.
연검대초가 두 자루, 아니, 어느새 해원기의 두 팔이 십여 개로 불어난 듯한 착각까지. 연검대초가 대체 몇 자루나 되는지.
장안의 고루 앞에서 예부상서란 자가 펼친 나타육비는 수미전단검으로 깨뜨렸으나.
지금 해원기가 구사하는 것은 그 나타육비를 몇 배나 능가하는 다비농창.
강기가 팔풍으로 팔방을 가득 채운다.
더구나 연검대초가 양손을 오가면서 검기핍인의 기운은 더욱 강해졌고, 아울러 검왕오형이 또 다른 경지로 나아가는 듯.
퍼퍼퍽, 콰작.
강시 같은 몸놀림의 낙백갑사들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부서지고, 마른 풀잎처럼 흩날리며.
마침내 검림소연의 수주개와로 확장된 검세가 무명천과 조양신문까지 집어삼키려 한다.
검으로 이루어진 공간. 빈양삼동의 앞은 바로 그 공간에 갇혔다.
우르르르르.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에 멍하니 보기만 하던 자들.
공간을 울리는 우렛소리에 얼핏 정신을 차렸다.
“장야연성! 암(暗)!”
“일, 일월쟁휘(日月爭輝)!”
무명천과 조양신문의 우두머리가 급히 내지르는 고함이 갑갑하게 막힌 건 그만큼 당황했다는 의미다.
십이지주를 포함한 무명천의 열다섯. 서른 개의 주먹이 단숨에 먹장구름을 쏟아내고,
삼십육조양진의 일도와 월극이 동시에 빛을 토했다.
낙백갑사들이 휘말리든 말든 상관할 여유도 없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구별도 되지 않는 해원기를 찾을 새도 없이.
일단 덮쳐오는 검세부터 저지하려는 본능.
먹장구름과 눈부신 빛이 미친 듯이 용트림 치는데.
콰쾅!
“으에엑.”
“커억.”
빈양동 앞을 거대한 대패로 밀어버린 듯,
갖가지 비명이 뒤섞이며 먹장구름과 눈부신 빛이 모조리 날아갔다.
풍덩, 풍덩.
낙백갑사부터 시작해서 무명천이든 조양신문이든 태반이 이수에 빠져버리고, 겨우 물가에 발을 걸친 자들은 스무 명 남짓.
“이,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무명천에서 멀쩡한 자는 겨우 다섯, 조양신문은 그나마 일도와 월극을 교차한 열댓 명이 버텨냈지만.
몸에 걸친 의복이 갈기갈기 찢겼고, 일도와 월극은 죄다 휘어져서 하나도 제 모양을 갖춘 게 없다.
검을 뽑지도 않은 검집째로 이런 위력이라니.
낙배갑사 서른, 무명천 열다섯, 조양신문 서른여섯. 세 겹으로 포위한 인원 중에 육십 명이 쓰러진 셈.
물가에 선 스무 명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유룡개라는 외호대로 오소민의 신법은 진짜 용이 노니는 것 같았다.
남동에서 중동으로, 옆구리에 끼었던 소녀 둘을 동굴 안에 눕히고, 다시 북동 앞에 쓰러진 소녀를 둘러업어 도로 중동으로.
해원기의 연검대초가 빈양동 앞을 휩쓰는 순간에야 비로소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
“괜찮은 것 같아. 숨이 가늘어진 게 조금 염려되지만.”
북동 앞에서 구한 소녀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오소민의 목소리가 들리자 해원기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빠지세. 어느 쪽이 나을까?”
힐끗 둘러보는 눈매가 일그러진다.
흙으로 쌓은 제단에 올려졌던 소녀들, 실오라기 하나 없는 나신이 지저분해졌고. 특히 북동 앞에서 구한 소녀는 아예 흙구덩이에 뒹군 것처럼 가련한 모습.
민망해할 때가 아니어서 검을 재빠르게 등 뒤로 돌리며 쪼그려 앉았다.
“한 명은 내가 업지.”
가공할 위력을 보였던 연검대초를 나신의 소녀를 받치는 용도로 쓸 셈.
오소민이 묘한 눈길로 해원기의 등을 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쯧, 이대로 물러나나. 옆의 북동은…”
나신의 소녀를 제물로 바친 해괴한 짓거리. 게다가 북동 앞의 제단만이 완전히 무너졌었다.
감로보병을 지닌 황 학사가 뭔가 수상한 수작을 부렸음이요, 현신장 셋도 전부 싸움을 피하고 뒤를 따랐다.
본래 감로보병을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확인하고 미리 부수는 게 목적.
그러나.
말을 끌던 오소민이 빠르게 머리를 흔들고는,
“남쪽. 아까 말한 노사나불이 있는 쪽으로.”
흙투성이가 된 소녀를 얼른 해원기가 뒤로 돌린 검집 위에 앉혔다.
감로보병이든 뭐든 무고하게 해를 입은 이 소녀들보다 중요할 리 없다.
아직 물가에 남은 스무 명이 넋이 빠졌을 때, 이수에 빠진 자들이 허우적대며 경황이 없을 때, 방해를 받지 않고 신속하게 이 자리를 물러나야 한다.
혹시라도 사술의 영향이 남았다면 거대한 불상이 또 도움이 될 터.
그렇게 오소민은 도로 소녀 둘을 양쪽 허리에 끼려고 몸을 굽히는데.
쿠쿵.
땅이 크게 흔들린다.
“어어?”
소녀를 양쪽 허리에 끼려던 오소민이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땅이 흔들렸어도 유룡개가 중심조차 잡지 못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해원기의 등에 업혀주었던 흙투성이 소녀가 미끄러져 내리는 것도 몰랐다.
쿠쿠쿵.
또 한 번의 진동. 이제는 중동 천장에서 흙이 우수수 떨어지고,
지면이 수면으로 바뀐 것처럼 출렁거린다.
“지진? 여기 용문에? 말도 되지 않.”
유구한 세월을 지내며 규모를 확대한 용문석굴이다. 애당초 지진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땅이거늘.
무공의 고수조차 비틀거리게 만드는 땅 울림이라니.
그런 의문을 표하던 오소민이 말을 맺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등에 업힌 소녀가 미끄러져 내렸건만, 여전히 앞을 응시하는 해원기. 검을 천천히 앞으로 돌린다.
“우아악!”
“에엑.”
돌연 합창처럼 전해지는 비명. 이수가 미친 듯이 끓어오르고 물에 빠진 자들이 한꺼번에 물거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시뻘건 핏물이 자욱하게 번져가는 끔찍한 광경.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해원기의 등에 바짝 붙었다.
“저게 뭐야…”
당혹스러운 건 오소민만이 아니어서.
물가로 밀린 스무 명은 정신없이 빈양동 쪽으로 물러나는 판이다. 해원기에게 등을 훤히 보이면서.
방금까지 싸웠던 대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쿠르르르르르.
끓어오르던 이수가 이제는 용문석굴을 덮칠 듯 일어서기 시작해,
물가가 전부 쓸려 들어간다. 강물에 어찌 해일이 일어나는가.
해원기가 해일 같이 일어나는 강물을 겨누고 검을 내밀었다.
동시안이 신광을 번쩍이고,
“저 안에 뭔가 거대한 형상이 있네.”
목소리가 대단히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