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33화 (233/410)

제59장 우두용신(牛頭龍身) (1)

해원기의 출현에도 여유를 부리던 황 학사의 입이 멈추었지만,

오소민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용문석굴은 주로 서산석굴을 가리키는데, 그게 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기 때문이라. 제일 큰 불상, 그거 무측천(武則天)이 자기 이름을 고스란히 따서 만든 노사나불(盧舍那佛)이잖소. 소위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보신불(報身佛). 이렇게 보조광명(普照光明)의 뜻이 가득한 이 용문석굴에서 물귀신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네.”

빈양동의 뜻을 풀고 나서,

황 학사의 반응을 더 확인하려고 굳이 용문석굴에 대한 내용을 덧붙였다.

미리 감로보병, 혹은 항아월백이라는 물건이 어떻게 쓰일지 논의할 때, 여자를 수신에게 바치는 얘기가 나오긴 했어도,

설마 진짜로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당장 눈앞에 보이는 나신의 소녀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해원기와 마찬가지지만,

동창의 해괴한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빈양삼동 앞에 제단을 만들고, 소녀들을 올려놓고서, 자기 수하들에게 술법을 걸어 백력이라는 걸 갈취하다니.

감로보병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수를 가로질러 장쾌하게 뛰어든 해원기의 덕을 보았다는 너스레.

대체 무슨 속셈인가.

황 학사의 얼굴이 다시 냉랭한 무표정으로 돌아가고,

“멀끔한 외모에 뛰어난 경공.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라는 유룡개가 이렇게 박식할 줄은 미처 몰랐군. 뭐, 꽤 공부는 한 모양이다만, 세상에는 본래 어이없고 기막힐 일이 많은 법이지. 궁금하면 조금 더 지켜보든가.”

서슴없이 몸을 돌려 발을 내디딘다.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을 일거에 밀어낸 해원기에다가 개방의 장로인 유룡개까지 나타났거늘.

여전히 안하무인의 언행.

곧장 걸음을 옮기는 황 학사 뒤에서 요술사가 기다렸다는 듯 낙혼금종을 힘차게 흔들었다.

땡, 땡, 땡, 땡.

동시에 좌우에서 밀어닥치는 무서운 경력.

오온존자의 붕익천강이 벌떼처럼 시커멓고, 진여신승의 두 손에선 시뻘건 불줄기가 분수처럼 뿜는다.

황 학사는 현신장 셋이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뭉그러진 제단과 나뒹구는 소녀가 있는 곳. 빈양북동을 향한다.

머리만 빼꼼 내밀었던 오소민이 급히 해원기의 뒤로 돌아가 양손을 맞부딪쳤다.

화청궁에서 쓴맛을 본 적이 있고, 품 안의 보패로 막을 수 없었던 괴이한 독.

본신의 항룡진기를 끌어올려 옥판장(玉板掌)과 철적수(鐵笛手)를 빠르게 엮는다.

따다다닥.

낙혼금종의 귀를 찌르는 종소리가 무색하게 둔탁한 소음이 이어지면서,

은은한 기운이 해원기까지 덮기 시작하니.

옥판과 철적으로 이룬 어고경성(魚鼓警醒)의 호신강기.

팔선 중에서 방어에 치중한 조국구(曹國舅), 한상자(韓湘子), 장과로(張果老)의 기예를 한데 뭉친 절학이다.

공력을 약화하는 낙혼금종을 저지하고, 웬만한 경력을 퉁겨내며,

오온존자의 괴이한 독기를 완전히 막지는 못해도 몸을 지키기엔 부족하지 않을 터.

현신장과의 싸움이 시작되면 무조건 뒤로 물러나라는 해원기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다.

독기 때문에 뒤로 빠지는 처지가 영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괜히 고집을 피워 해원기의 발목을 잡는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해원기를 뒤에서 돕기로 했는데.

휘르르르.

어고경성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해원기의 등에 비스듬히 걸렸던 검이 전면을 휩쓸었다.

검대 끝을 쥔 오른손은 제라섭풍, 활짝 편 왼손은 대우신장.

검집이 공간을 거침없이 누비면서 붉은 화염과 검은 벌떼를 가르자,

파파파파.

두 가지 기운이 뒤엉킨 공중에 무수한 불꽃이 튄다.

본래 독기는 불과 상극. 그러나 해원기는 연검대초를 회수하자마자 대우신장을 밀어내고.

무수한 불꽃이 일 장이나 치솟았다.

“흐흥.”

낮게 코웃음을 머금은 오온존자의 가사가 부풀면서 또 한 줄기 강풍이 일었다.

쇄애액.

마치 칼날처럼 베어드는 강풍. 무겁게 떨치던 붕익천강과는 다른 경력이고, 그 속에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희뿌연 연기까지.

아울러 진여신승은 대우신장의 여파에 휩쓸린 것처럼 뒤로 돌면서 또 팔을 흔드는데. 이번에는 불줄기가 아니라 열폭노도의 서늘한 기운. 그것도 해원기가 아니라 어쩐지 오온존자 쪽이다.

연검대초를 쥔 해원기도 곧장 손목을 뒤집었다.

흔들거리는 검에서 파도처럼 검기가 겹겹이 밀려든다.

해운파랑검의 절초로 또다시 강풍과 열폭노도를 몰아낼 셈.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듯이 면밀한 검기가 밑에서 위로 용솟음친다.

빈양동 앞의 공간이 꽤 넓은 편이긴 해도,

앞에는 삼동 앞마다 제단에 제물로 올려진 소녀들이 있고, 뒤에는 오소민이 있다.

함부로 상대의 힘을 되돌렸다간 소녀들이 해를 입을 터. 오온존자의 독기에서 오소민도 보호해야만 한다.

그런 이유로 거듭해서 위쪽으로 흩으려는 동작을 취하던 해원기.

츠츠츠츠.

시야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들어오자 빠르게 검을 당겼다.

해운파랑검의 파도에 쓸린 오온존자의 칼날 같은 강풍과 진여신승의 서늘한 열폭노도가 순식간에 엉겨 붙는다.

처음의 벌떼처럼 시커먼 기운과 불줄기가 섞인 불꽃이 아직 공중에 있는 채로.

‘서리, 아니, 얼음?’

반짝이는 것이 하얀 얼음이라고 인지하는 순간에,

화악.

전면이 온통 회색으로 물들어 장막처럼 내려앉으면서 어찔한 느낌.

해원기가 가슴으로 당긴 연검대초에 왼손을 얹어 훑으면서 팽이처럼 회전했다.

위잉.

“어어?”

얼마나 빠르게 돌았는지 뒤에서 호신강기를 펼치던 오소민이 속절없이 끌려들고,

그 상태로 해원기가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끼이이잉.

연검대초 또한 나사관천. 장막처럼 내려앉는 회색 기운을 모조리 검극으로 휘감고서.

삼 장 높이까지 이르자 왼손으로 쥐었던 오소민의 어깨를 풀고, 오른손이 부르르 떨었다.

“오 형!”

펑!

홀연히 검극에서 이는 폭발과 함께 오소민이 내던진 것처럼 밑으로 떨어졌다.

파팍.

중동과 남동 앞의 소녀 둘을 재빠르게 양쪽 겨드랑이에 낀 오소민이 훌쩍 물러나고,

해원기가 뒤따라 그 앞에 내려서는데.

데엥.

잠잠했던 낙혼금종이 또 어울리지 않게 큰 종소리를 울린다.

그리고,

어느새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싼 무리를 확인한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소녀 둘을 낀 오소민도 좌우를 훑어보며 인상을 썼다.

“이건? 잠들었던 걸 깨웠나?”

오소민의 말처럼.

제단을 만들고 소녀들을 올린 후에 맥없이 쓰러졌던 서른 명. 섭백으로 잠이 든 것 같던 자들이 기척도 없이 일어나 몰려들었다.

“체, 음양회멸장(陰陽灰滅帳)에도 멀쩡하잖아. 진짜 백독불침(百毒不侵)인가?”

오온존자가 흉하게 눈을 부릅뜨고, 진여신승 역시 자신의 두 손을 번갈아 보며 불만스러운 표정.

낙혼금종을 울린 요술사가 뒤로 물러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어떻든 낙백갑사(落魄甲士)로 묶어두었으니. 그러고 보니 저놈의 검…….”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선 셋의 시선이 전부 해원기의 손에 모인다.

해원기가 이전과 달리 손에 검을 쥐었다는 사실. 그게 또 검집 째로 묶인 이상한 형태란 게 이해할 수 없었기에.

화청궁에서, 고력사의 무덤에서. 다 제대로 맞붙어 싸우지는 않았으나, 상당히 골치 아픈 상대라고 뇌리에 각인이 된 상대. 맨손으로 검왕이라더니 이번에는 또 뽑지도 않은 검집이라니.

그런 주제에 현신장 셋을 매번 힘겹게 한다.

낙혼금종의 약화는 아예 무시당하고, 붕익천강과 독기에다 구화분염(九火噴炎)과 열폭노도를 더한 음양회멸장도 전부 소멸시켰다.

뭐, 이런 놈이 있나.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데, 황 학사의 냉정한 음성이 셋을 불렀다.

“뭣들 하는가? 뒤는 무명삼야(無明三夜)와 조양사수(朝陽四秀)에게 맡기고 빨리 따라오게.”

북동 앞.

제단이 뭉그러지는 바람에 바닥을 뒹구는 나신의 소녀는 본체도 하지 않고서,

황 학사가 구석에 눈짓을 보내곤 바로 동굴로 들어간다.

빈양삼동에서 가장 허술한 북동. 중동과 남동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여기저기 허물어진 곳도 많아서, 입구 역시 반쯤 무너진 상태. 그 구석에 소녀들을 포대에 담아 왔던 셋이 일찌감치 피신해 있다가 비로소 호각을 불어댄다.

삐익, 삐익.

시끄러운 소리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지지만, 현신장 셋이 쓴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해원기에게 독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황 학사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다.

그들이 북동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빈양삼동의 남북에서 적지 않은 인영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명천의 세 거한, 조양신문의 중년인 넷을 포함한 오십여 명.

단단히 준비해놓았다.

남동의 입구.

“괜찮은가?”

해원기가 돌아보지 않고 묻는 말에 오소민이 자신의 옆구리에 낀 소녀들을 번갈아 살폈다.

“응, 몽혼약 따위에 당한 것 같아. 달리 이상은 없고, 독기에도 닿지 않았네.”

앞에 선 해원기의 어깨가 조금 풀리는 듯.

오소민이 인상을 쓴 채로 짧게 혀를 찼다.

“쯧, 저 둘이 합공(合攻)까지 할 줄은. 함께 아미파를 집어삼켰으니 그쯤은 예상했어야 했는데. 해 형, 자네는?”

음양회멸장이란 이름은 처음 들었지만,

오온존자가 붕익천강을 변화시키면서 두 가지 독기를 펼쳤고, 진여신승이 이에 맞추어 음양의 기운을 더했다는 걸 알아보았다.

육악지력 중 바람과 독을 다루는 우강, 물과 불로 해를 끼치는 구영. 두 가지 능력이 합해질 줄 몰랐고, 해원기가 제때 대처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멀쩡하지 못했을 터.

해원기는 호신강기를 펼쳤던 오소민까지 보호하면서 음양회멸장이란 독기를 전부 공중으로 끌어올려 폭발시켜버렸다.

소녀들뿐 아니라 오소민까지 염두에 둔 대응.

‘이래서야 도움은커녕 진짜 발목만 잡는 꼴이잖아.’

한심하고 답답하고.

그런 오소민의 심사를 알 리 없는 해원기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화독(火毒)과 수독(水毒)을 함께 쓰는 건 처음 보았네. 그래도 제탁지검에 풍뢰결을 더하면 완전히 소멸할 수 있군. 그런데…….”

누가 무공수법을 물어봤나.

엉뚱한 대답이 거슬리긴 해도, 오소민이 일단 주변 상황에 집중했다.

낙백갑사라는 서른 명. 슬금슬금 주위로 몰려드는 자들이 치켜 뜬 눈에는 검은자위가 아예 없다.

허리에 찬 병기를 꺼내지도 않고, 정말 넋이 빠진 것처럼 터벅거리는 걸음.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어쩐지 시체를 보는 듯한 느낌이고.

그 뒤로 빠르게 모여드는 자들이 또 수십. 맨 처음 중동 앞에 도착한 거한이 커다랗게 탄식을 토한다.

“아아, 이런! 이제야 힘 좀 써보나 했더니 겨우 문지기 노릇이나 하라는 건가.”

연이어 옆에 내려서는 자들.

무명천의 거한 셋과 조양신문의 중년인 넷을 필두로 꽤 뛰어난 경공을 뽐낸다.

“학사 대인의 분부시오. 현신장 셋도 어지간히 신경을 쓰던 자,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조양신문의 우두머리 격인 중년인이 냉담하게 받자, 무명천의 거한이 한심스럽다는 듯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건 지나치잖아. 낙백갑사를 서른이나 일으켜놓고는, 삼십육조양진(三十六朝陽陣)에다 우리 무명천의 십이지주(十二支柱)를 다 불러내다니. 그러면서 황 학사는 대체 무슨 일인지 일언반구 알려주질 않지. 음형사가 너무 괄시받는 기분이라서. 조양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조양신문의 중년인이 날카롭게 거한을 노려보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는다.

거한이 말한 대로 불쾌함을 느끼는 판이라.

그러나 서로 공감하는 바를 확인하기 전에,

모두의 시선이 저절로 모여들었다.

고오오오오.

동굴 때문인지 더욱 아득하게 울리는 기음. 빈양남동 앞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떠오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