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장 수신음사(水神淫祠) (4)
황 학사와 요술사가 대화하는 중에 북쪽에서부터 달려온 삼십여 명이 도착했으나,
황 학사는 그들을 등진 채 인사를 받을 생각도 없고.
요술사가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존자가 남동, 신승이 북동, 내가 중동. 각각 열 명씩 데리고 입구에 제단을 설치합시다. 그리고…….”
황 학사의 심사가 좋지 않은 걸 눈짓으로 알리면서 빈양동 위쪽으로 양손을 흔든다.
휘익!
미리 빈양동 위의 용문산에 숨어 있던 자들. 커다란 포대를 짊어진 셋이 빠르게 내려서자,
요술사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너희는 제단이 만들어지면 바로 제물을 올려라. 자, 어서!”
관림에서 출발한 무리를 이끌었던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이 눈치껏 인원을 나누어 각자 남동과 북동으로.
요술사는 남은 인원을 몰아 곧장 중동 앞 바닥을 가리켰다.
“길이는 다섯 자, 폭은 두 자, 높이는 석 자. 그 정도면 된다. 단단히 다지는 걸 잊지 말고.”
열 명의 수하도 분위기를 살피는 감은 갖추었는지.
허리만 굽실, 대답도 줄이고 즉시 흙을 파내어 쌓기 시작한다.
중동 앞만이 아니라, 남동과 북동도 마찬가지.
용문석굴에서 가장 유명한 빈양동 앞, 저물녘에 돌연 희한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단(壇)이란 본디 흙을 쌓아 높게 만든 자리를 말한다.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 편하게, 또는 지시를 내리기 쉽게 만들기도 하지만.
본래의 용도는 제사. 그래서 ‘제단’이다.
나름대로 꽤 무공을 익힌 자들이 열 명씩. 석 자 높이의 제단 따위는 눈 깜짝할 새에 만들고.
신을 받드는 제단이니 당연히 공물(供物)을 올려야 한다.
빈양삼동 앞에 세 개의 제단이 생기자마자 용문산에서 뛰어내린 자들이 곧장 커다란 포대를 풀어내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서 나온 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녀들.
열너댓 살 정도일까? 셋 다 깊은 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남의 손에 들려 제단에 눕히는 동안 수초처럼 흐느적거렸다.
이 소녀들이 제물이란 말인가.
황 학사의 날카로운 시선과 요술사의 재촉에 전부 재빠르게 이어진 행동.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나신의 소녀를 제각각 제단에 올린 셋이 뒤로 빠지자,
제단을 만든 자들이 각각 자신들이 만든 제단을 둥글게 둘러싸는데,
딩, 디잉.
기다렸다는 듯이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 그저 빈양삼동 앞에만 퍼지며 귓가를 간질이는 종소리는 바로 요술사의 손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꺼내 든 낙혼금종.
요술사는 소리가 커지는 걸 저어하는 듯 한쪽 손바닥을 펴서 낙혼금종을 감싸고, 가늘게 뜬 눈에 입속으론 뭔가를 중얼거리는 중.
남동의 오온존자, 북동의 진여신승이 인상을 조금 찡그리고.
나신의 소녀를 제물로 바친 셋은 아예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잔뜩 웅크리지만.
요술사 바로 뒤의 황 학사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시선만이 바쁘게 남동과 북동을 살필 뿐.
이 무슨 해괴한 짓인지.
그런데.
종소리가 울리자 각각의 제단을 둘러쌌던 수하들이 비틀거리더니 하나둘씩 맥없이 주저앉고,
빈양삼동 앞에 괴이한 기운이 스멀스멀 퍼진다.
용문산은 서쪽이니 다른 곳보다 먼저 빛이 들지 않는다 쳐도, 갑자기 이곳만 어둠이 깔리는 듯.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거늘.
“멈춰라!”
벽력같은 고함이 터지지 않았다면 빈양삼동 앞은 아예 캄캄해졌을지도.
얼마나 매서운 고함인지 용문산 전체가 흔들리고 석굴마다 흙먼지가 흩날린다.
요술사의 울려대던 낙혼금종이 그쳤고,
황 학사와 현신장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다 눈을 크게 떴다.
촤촤촤촤.
이수는 이궐을 지나 이 용문석굴 앞에서 가장 폭이 좁아지지만, 그래도 족히 백 장은 넘는 거리.
그 이수를 평지처럼 치달리는, 아니, 그야말로 이수를 가르며 닥쳐드는 인영.
물보라가 좌우로 미친 듯이 솟구쳐 맞은편 강변에서 나룻배에 마구 장력을 쏟아내는 다른 인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으음?”
황 학사의 얼음장 같던 얼굴이 비틀렸다.
막대한 공력을 쌓고,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면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백 장을 뛰어넘을 수 있다.
소위 능공허도(凌空虛渡)니 무력답공(無力踏空)이니 하는 경공.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반드시 힘을 받을 곳이 있어야 하고, 당연히 그만큼 공력도 더 소모되며 속도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백 장을 넘는 넓은 물을 건너는 데에는 일위도강(一葦渡江)이나 등평도수(登萍渡水)라고 물 위에 뜰 정도로 가벼운 능력을 일컫지만, 실상 능공허도와 무력답공에 이른 절정의 고수에겐 어차피 같은 경지의 다른 활용에 불과하다.
그런데 물 위를 달려서, 백 장이 넘는 강물을 가르는 경공이라니.
들어본 적이 없고, 눈으로 보기도 처음이다.
더구나 이수를 가로지르면서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듯,
고함의 여운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더벅머리를 휘날리는 얼굴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해원기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기는 했어도.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이 즉각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타앗!”
“합!”
화청궁과 고력사의 무덤에 이어 세 번째. 해원기의 능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인지한 만큼 단주를 내던지는 오온존자도, 두 팔을 마구 휘두르는 진여신승도 다부진 기합을 넣었고.
쉬이이잉.
츄아아아.
위에서는 해원기의 머리를 노리는 단주의 맹렬한 선풍,
아래에는 해원기의 아랫도리를 집어삼키려고 버쩍 솟구치는 파도.
해원기에 못잖게 신속한 반격이라 피할 곳도 마땅치 않고, 막으려 했다간 경공이 흩어져 이수에 빠질 터.
하지만 해원기의 두 눈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더벅머리가 뒤로 넘어간 탓에 훤히 드러난 이마와 그 아래의 두 눈. 번갯불 치듯 신광이 번뜩이고.
“흥!”
가소롭다는 코웃음이 바로 이어지면서,
비스듬히 누워 오온존자의 선풍을 받으려는 왼손과 다독이듯 진여신승의 파도를 덮는 오른손.
그건 마치 검병을 쥐고 검신을 문지르는 행동 같았다.
부딪치는 모든 걸 짓이길 듯 선풍을 이끌고 회전하던 단주,
파삭.
해원기의 왼손에 끌려가며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오온존자가 걸친 가사가 훌떡 그 머리로 뒤집히면서, 차분히 닦아 낸 검신처럼 선풍이 그대로 소실했다.
아랫도리를 집어삼키려던 파도 역시.
쓰스스.
검병을 쥐는 듯한 해원기의 오른손을 따라 파도가 도르르 말리면서, 경력을 펼쳐 낸 진여신승이 되레 힘쓸 곳을 잃어 강변으로 왈칵 고꾸라질 뻔했다.
그리고,
황망히 가사를 찢어 낸 오온존자와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진여신승이 똑같이 눈을 부릅떴다.
쿠르르르.
기이한 소음과 함께 꼿꼿이 일어서는 물기둥.
물보라가 아니다.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의 협공을 상대하느라 해원기는 이미 걸음을 멈추었고,
그렇게 멈추어 선 해원기를 이수의 강물이 기둥을 이루어 받쳐 들고 있으니.
공중으로 삼 장이나 일어나서,
빈양동 앞의 공터와 같은 높이.
해원기가 물을 박차면서 두 손을 벼락같이 합쳤다.
콰앙!
엄청난 경력이 터지면서 물기둥이 폭우가 되어 빈양동 앞에 쏟아졌다.
동시안을 계속 운용하지 않았다면, 잠심침령을 잠깐이라도 풀었다면.
빈양삼동 앞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짓을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던 광경. 산 사람을, 나이 어린 소녀를 셋이나, 나체로 포대에 넣어 와서, 제단에 올린다?
그리고 장안에서 봤었던 그 사술. 고루의 북소리가 요술사의 낙혼금종으로 바뀌었을 뿐, 이른바 백력이라는 걸 바치고 주저앉은 자들까지.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부처를 모시는 석굴 앞에서 요사스럽기 그지없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이 벌어질 판이다.
향산사를 그대로 날아 내려와 곧장 이수로 뛰어들었다.
해원기의 경공이라면 능공허도나 등평도수도 가능할 터. 혹여 공력이 조금 부족해지면 청정점수(蜻蜓點水)로 중간에 물을 차면 된다.
그러나 자신이 목격한 광경에 분노한 나머지 앞뒤를 잴 겨를이 없었다.
오죽하면 오소민이 급히 뒤를 따르며 ‘나룻배’라고 외치는 소리까지 듣지 못했을까.
거의 무턱대고 이수로 몸을 날린 셈인데.
이전에 제남의 대명호에서 겪었던 것처럼 물은 해원기를 따른다. 하물며 그때와 달리 지금의 해원기는 완전한 수정지체(水精之體)를 이루었잖나.
해원기의 노기를 고스란히 담은 이수. 단숨에 빈양삼동 앞까지 길을 틔웠다.
그런 해원기를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이 바람과 물로 막으려 한 건 참으로 어리석은 짓.
바람은 바람으로, 물은 물로.
단주에 담긴 붕익천강의 선풍을 팔풍지력으로 뒤집고, 열폭노도의 파도를 수정지력으로 다스린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이룬 건,
검왕오형의 네 번째 역상정위였다.
딱히 검상을 구현하지도 않았건만, 바람(風)이 우레(雷)로 변하고, 물(水)이 비(雨)로 화했다.
역상정위에 담긴 오의는 바로 격물궁리(格物窮理).
만물의 규율을 밝혀 그 이치를 끝까지 찾아낸다.
일진뇌우(一陣雷雨)를 이끌고 해원기가 빈양삼동 앞에 내려섰다.
“이놈!”
함빡 젖어 가사가 착 달라붙은 몰골의 오온존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한바탕 땅바닥을 뒹군 진여신승의 얼굴에는 시뻘건 화기(火氣)가 달아오르는데.
빈양동의 남쪽과 북쪽 끝까지 밀린 둘이 다시 자세를 잡기 전에.
“과연 절세검왕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능력이야. 구경 잘했고, 덕분에 수고를 덜었구먼. 고마워해야 하나?”
황 학사의 냉랭한 음성이 먼저 해원기의 발을 묶는다.
물기둥을 박차고 빈양동에 내려서면서 곧장 제단으로 가려 했었다. 황 학사든 요술사든 일단 소녀들을 구하는 게 먼저.
그런데 오 장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해원기를 쳐다보는 황 학사.
그러고 보니 그의 주변에는 한 점의 물기도 없다.
동이로 붓듯 쏟아진 일진뇌우를 완벽히 막아 냈다는 뜻이고, 게다가 해원기에게 건네는 말이 수상하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해원기의 번뜩이는 시선이 똑바로 돌아오자 황 학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왼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제단에, 제물에, 낙혼금종으로 백력을 부리는 임시방편까지 동원해도 확신은 없었거든. 이곳 용문석굴에 원체 불력(佛力)이 서렸고, 특히 빈양동은…… 흠, 빈양동이 무슨 뜻인지는 아나?”
가리키는 대로 눈길을 옮기던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빈양삼동 앞에 하나씩 만들어 놓은 제단.
남동 앞은 멀쩡한데, 중동 앞의 제단은 절반이 주저앉았고. 북동 앞의 제단은 아예 뭉그러져서 나신의 소녀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엎어진 채.
이건 일진뇌우 때문이 아니다.
황 학사가 지껄이는 말에 어울릴 생각도 나지 않지만,
“빈(賓)은 손님이니 접대한다는 뜻이요, 양(陽)은 밝음이니 해를 말하지. 떠오르는 광명을 맞이한다는 의미라. 허튼소리는 그만하고, 그래, 불력이 서린 이곳에서 요사스러운 제사까지 지내게 한 그 어처구니없는 귀신은 누굴까? 물가에서 어린 처녀를 바치는 거로 봐서는, 에, 혹시 음탕한 물귀신이요?”
해원기의 뒤에서 대신 나오는 목소리.
나룻배 한 척을 부수고 그 파편으로 이수를 건넌 오소민이 해원기의 허리 쪽에서 장난스럽게 얼굴을 내밀자,
황 학사의 냉정한 얼굴에 살짝 경련이 스쳐 갔다.
오소민이 대뜸 되묻는 말에 꽤 놀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