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30화 (230/410)

제58장 수신음사(水神淫祠) (2)

어색한 침묵이 답답했던지 단삼육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밀각 육학사의 하나면 높은 자리인가? 그것들 도대체 용문석굴에서 뭘 하려는 거지?”

친구끼리 다툴 때 섣불리 화해를 시키려다간 되레 감정만 더 상한다.

마침 지금은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있고.

단삼육이 화제를 바꾸자 오소민이 표정을 고쳤다.

“음, 복잡하게 꼬인 부분이 있지만, 이럴수록 우선순위를 따져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겠죠. 무엇보다 먼저 동창이 이 용문석굴로 급행한 이유부터. 장안에 있는 줄 알았던 현신장 셋이 벌써 낙양에 도착했다라. 나보다 늦게 출발했을 텐데.”

오소민이 말을 갈아타면서까지 급행으로 왔거늘.

장안에서 고력사 무덤을 발굴했다는 현신장이라면 더욱 서둘렀을 터.

아무리 경공이 뛰어나도 쉬 메꿀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물론 ‘무식하게’ 뛰어온 인간이 앞에 있긴 하지만.

해원기도 미간을 좁혔다.

“이유라면 감로보병일 걸세. 그자들이 고력사의 무덤을 떠나 장안으로 돌아오지 않은 게 이상했거든. 정형의 전음을 듣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바로 말을 받을 줄 몰랐던 오소민의 눈꼬리가 올라붙자,

단삼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잠깐 얘기는 했어도. 에, 어떤 공효가 있을지?”

신기역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화. 그것만으로도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보물임은 틀림없겠지만, 동창이 이렇게 화급하게 서두른 이유로는 부족하다.

어차피 막대한 재물과 권력을 지닌 동창 아닌가.

해원기가 흙덩이가 뒤엉킨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넘겼다.

먼지가 날릴까 저어해서라기보다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

“정확히는 모릅니다. 황하지정(黃河之精)을 담는 게 본래의 목적, 그러나 이미 비어버린 빈 병인데요.”

보병정의 계단에 남긴 얘기까지 자세히 할 수는 없다.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완전히 사라져버린 천외육가의 하나. 동정 군산의 보병요를 버리고 스스로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으려 했던 한 줄기 비원(悲願)은 설사 해원기라 해도 함부로 밝혀선 안 된다.

건드리기 어려운 미묘한 부분이란 걸 짐작했는지 오소민이 짧게 혀를 찼다.

“쯧, 선인(先人)의 유물이 무엇인지 지금 알기는 어렵지. 그저 그 이름이 감로보병, 그리고 이걸 용문석굴로 가져온 두 가지 사실로 추측할 수밖에. 공통점이 있거든.”

해원기와 단삼육의 시선이 오소민을 향했다.

공통점이 있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공통점?”

단삼육이 되뇌는 물음에 오소민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물이죠. 신기역 보병요에 대해서 이전에 들은 얘기로는, 동정 군산에 있었다며요? 거기도 물, 감로보병에서 감로라는 것도 물, 그리고 여기 용문석굴의 앞에는 이수가 흐르니까. 실은 이하(伊河)가 정확한 명칭이야.”

마지막은 해원기에게 들으라는 말.

황하지정이라고 했으니 용문석굴 앞의 물도 마찬가지로 하(河)라는 글자를 쓴다는 거다.

물이라는 공통점.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신기역 보병요라고 하면 그저 불 때는 가마만 연상하기 십상. 과거에 사부도 동정호 안의 군산이 보병요라는 걸 상당히 의외로 여겼었다고. 실상 온갖 신기한 물건을 만드는 데에는 불과 물이 반드시 어울려야 하는 법.

기억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오소민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한 가지.

“고력사의 무덤 안에 감로보병의 별명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정형이 보았다고 했네. 항아월백이라는 이름이라더군.”

서둘러 말하자마자,

“뭐야, 빼먹을 걸 빼먹어야……, 쩝.”

오소민이 당장 눈을 세모꼴로 만들다가,

가운데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단삼육을 의식해 소리 나게 입맛을 다신다.

불만을 억지로 참는다는 티를 내면서.

다시 회복한 풍류공자의 모습 그대로 사내 같은 언행. 어딜 봐서 여자런가.

“항아월백이면 달의 여신에 관한 얘기니까. 막내야, 이건 물이랑 상관없잖으냐?”

단삼육의 화제에 집중하자는 질문.

오소민이 세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뜻밖에 더해진 정보가 자신의 추측과 이어지는 점을 찾으려고.

“어.”

관자놀이를 짚었던 손가락이 금방 떨어졌다.

“항아분월(嫦娥奔月)의 전설이 있잖아요. 이게 또, 십일병출(十日竝出) 이후의 예(羿)의 행적이…… 으잉, 또 물이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확 높아지고,

“예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상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수(惡獸)를 처단하는 일련의 행동, 거기에 등장하는 악수들이 육악(六惡)이잖나.”

눈이 커지고 볼에 붉은 기가 돌아서 꽤 흥분한 모습.

갑자기 깨달은 걸 설명하느라 해원기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댄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해원기의 미간도 깊이 파였다.

한꺼번에 열 개나 뜬 태양, 불타오르는 세상을 구하고자 하늘에서 내려 보낸 예가 신궁(神弓)으로 아홉 개를 떨어뜨리는 것이 사일신화의 전반부고.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인간이 되어 육악을 처단하는 고단한 생활 끝에 부인이 원망하여 서왕모가 선사한 불사약을 혼자 훔쳐먹고 달로 도망가는 게 후반부다.

처음 정록에게서 항아월백이란 별명을 들었을 때도 이미 따져보았던 내용. 십일병출에서 화살에 맞아 떨어진 아홉 개가 변했다는 금오혈석 때문에 사일신화에 관계된 부분을 소홀히 여길 수는 없으나.

후반부는 금오혈석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더구나 물이라니.

“고서에는 육악만 나오지. 그러나 다른 전설에는 예의 부인 상아가 왜 남편을 버렸는지 그 배경이 될 만한 내용이 있거든. 바람을 피웠다나. 흐흥.”

여기서 기묘한 웃음을 머금는 것도 전혀 여자답지 않다.

해원기의 눈썹이 어색하게 여덟팔자가 되려는데,

단삼육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토했다.

“허, 사일신화의 예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 바람을 피웠다고? 처음 듣는다.”

단삼육만이 아니다. 해원기도 마찬가지.

오소민은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들었을까.

두 사람의 반응이 오소민의 흥을 돋운 듯.

“초사(楚辭) 천문(天問)과 조식(曺植)의 낙신부(洛神賦)에 그 편린이 보인다고. 아주 어렸을 때 배운 건데 용케 기억이 나네. 에헴.”

초사의 천문편이나 조식이 지은 낙신부나.

학문을 깊이 익힌 선비들이나 들먹일 글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제대로 학문을 배운 해원기라도 그저 제목이나 들었을 뿐. 그러나 어깨를 으쓱거리는 오소민의 말을 가만히 듣게 되었다.

이제는 오소민의 내력을 알잖는가. 대학사 방효유의 유일한 후손.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배운 거라면.

“천제(天帝)께서 이예(夷羿)를 내리셔 백성들을 구하셨다는데, 어이해 하백을 쏘고 낙빈(雒嬪)을 처로 삼았는고? 여기서 이예는 대궁(大弓)을 지닌 동이(東夷), 즉 동쪽의 해 뜨는 곳에서부터 내려온 예를 말함이요, 하백은 곧 물을 다스리는 대신(大神)이며 낙빈은 그의 부인. 천문은 제목처럼 하늘에게 질문하는 글이라 위대한 예가 어찌 남의 부인을 빼앗았겠느냐는 사실에 대한 의혹을…… 하하, 대강 그런 이야기더라고요.”

야물지 않은 머리에 꼭꼭 새겨두었을 가르침.

열심히 되살리다가 얼핏 분위기를 눈치 채곤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단삼육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호로병을 흔들었다.

“바람을 피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의 마누라를 빼앗았다? 이거 갈수록…… 아니, 옛날얘기의 진위야 어쨌든. 이게 그래서 물이랑 연결된다고?”

신화의 영웅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게 영 마뜩찮은 듯.

결론을 재촉하는 물음에 오소민이 웃던 입매를 씰룩였고.

“아, 좀. 이제 막 초사만 풀었잖아요. 조식의 낙신부에는 낙빈이 바로 복비(宓妃), 낙수(洛水)에 빠져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그 아름다움을 묘사한 명문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복비가 비록 복희 씨(伏羲氏)의 딸이지만, 물에 빠져 죽었다고 낙수의 신이 되었다? 우습잖아요, 복희 씨 딸이면 아예 물에 빠져 죽질 않아야. 에, 이따위 소릴 했다가 야단을 맞긴 했구나. 하여튼, 이 부분은 행간을 살펴야 한답디다.”

과거의 기억이 교차해서 말이 꼬이기 시작하자,

오소민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백은 물을 다스리는 대신. 그러나 대신 이전에 악신(惡神)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짙습니다. 하백취부(河伯娶婦)라는 얘기, 많이 들어봤잖아요. 멀리는 상고(上古)에서 가까이는 송원(宋元)에 이르도록, 수신(水神)을 달래려고 처녀를 바쳤다는.”

“으잉?”

단삼육이 갑작스러운 비약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모를 수가 없다.

시대를 따질 필요도 없이 이 시대에도 무지몽매한 이들을 홀리는 미신은 도처에 성행하는 판이니까.

해원기가 머리를 끄덕이다가,

“황하가 범람하는 걸 아직도 수신의 재앙이라고 여기는. 흠, 그렇다면 하백이 복비를 일부러?”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질문으로 바꾸었다.

몇 년이나 황신을 막으려고 혼자서 수로를 팠던 경험. 당연히 처녀를 제물로 바치려는 촌락도 있었다. 미신은 미신.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수신은 처녀를 얻으려고 재앙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

오소민이 해원기를 보며 히죽 웃었다.

“하하, 맞았어. 그게 행간을 보는 거지. 하백은 악한 수신, 복희씨의 딸을 탐내 강제로 낙수에 가두었는데. 육악을 처단하던 예가 우연히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하백을 징치하고 복비를 구출했지. 그랬더니 이 복비가 자기를 구해준 영웅에게 홀랑 반해서…… 뭐, 여기부터는 전부 상상이고. 그보다 예가 육악을 처단한 장소가 또 묘하게 들어맞아.”

“들어맞는다, 하백과?”

“그래.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이 강가 아니면 늪, 심지어 수사(修蛇)는 동정호라고 기록되어 있단 말이야. 이 악수들은 본래 물속이나 늪에 살았다는 것이지.”

“육악이 전부 하백의 일가붙이라는 말로 들리는군. 그러나 복비가 낙수의 신인 낙빈이라는 것까지는 물과 연관되지만.”

“항아분월과 어떻게 이어지는가가 문제지. 확실히 여기에는 명확하게 설명한 근거가 부족해. 복비가 예를 쫓아다닌 게 항아로 하여금 예가 바람을 피웠다고 오해하게 한 원인이라고 해도. 서왕모가 선사한 불사약을 자기 혼자 다 먹고선 천궁(天宮)으로 비승(飛昇)하다가 남편을 저버린 도둑 소리가 두려워 달로 도망갔다는 민담도 별 도움이 안 되네. 월백이니까 음(陰), 그래서 물과 어울린다는 것도 억지고. 흐음.”

관자놀이를 짚었던 손가락이 이번엔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오소민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해원기 역시 머리를 기울여 생각에 잠겨서,

빠르게 주고받던 대화가 뚝 끊겼다.

그런 둘을 번갈아 보면서 호로병을 기울이던 단삼육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린 것도 모른 채.

딱, 따그르르.

세 사람의 머리가 확 들렸다.

누가 퇴락한 사당 지붕에 조그만 돌멩이라도 던졌는지.

딱 한 번 울린 소리에 오소민이 즉각 몸을 날리고, 해원기가 단삼육에게 묻기도 전에 다시 돌아왔다.

“사형, 방연이 떴습니다.”

단삼육이 끙, 하며 자리를 털고.

“해 소협, 뭔가 동정이 있는 모양이오. 나가봅시다.”

개방에는 비합, 탄석, 격경, 방연 등 온갖 연락 방법이 있다더니. 멀리서 지붕에 던진 조그만 돌멩이가 탄석일 터.

얼른 사당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길을 잡은 시각. 미시도 지나 신시에 접어들었고, 구름이 꽤 늘었다.

동쪽 구름 끝에 매달린 조그만 연 하나.

단삼육이 두 손을 눈가에 세우면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용문세가에서 보낸 소식, 관림(關林)에서 일단의 무리가 남쪽으로 출발, 인원 삼십여, 느린 보행이라. 유시 전에는 석굴에 도착하겠군. 꽤 느긋한데?”

방연의 의미를 풀어내고는 몸을 돌린다.

관림은 용문석굴의 북쪽에 있는 명승지. 느린 보행이라도 한 시진이면 도착한다.

오소민이 옷자락을 추슬렀다.

“관병을 동원하느니 강호의 관례에 따르겠다는 뜻일까요. 오히려 싸움터를 넓히겠다는 의미 같고. 느긋한 행차도 어느 정도 유인이겠죠. 어차피 현신장이 해, 형을 봤으니까.”

호칭이 좀 머뭇거린다.

해원기도 오소민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

일부러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저들은 내가 감로보병을 쫓아 장안에서 왔다고 여길 테지. 서른 명이면 충분히 지킨다는 건가?”

아직 상대의 구체적인 정보를 모르지만, 딱딱하게 따지는 말투에.

오소민이 픽, 하고 웃었다.

“어이, 무섭게 왜 그래, 검왕 나리. 서른 명이 다라고 생각하지 말자고. 용문세가에서 보낸 소식이 거짓은 아니겠지만, 이 또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저들도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머리를 굴렸을 거 아냐.”

단삼육이 호로병을 허리에 묶다가 눈을 껌벅였다.

“에? 어쩌려고 그러냐? 우리도 총단에 연락은 보내야 하잖아.”

용문세가에서 총단에 보낸 소식이 방연으로 올랐으니, 이쪽도 적절하게 답을 해야 한다.

오소민은 여전히 웃는 낯.

“아직 여유가 있고 방법도 생겼는데요, 뭐.”

이 현장고리가 용문석굴과 그리 멀지는 않아도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던 단삼육이 오소민의 눈짓에 저절로 해원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당사자도 모르는 건 매일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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