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장 수신음사(水神淫祠) (1)
건량을 씹고, 술을 마시고, 한 시진쯤 쪽잠을 잤을까.
꼬박 이틀을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온 해원기에게 허락된 휴식은 딱 그 정도.
단삼육과 자리를 나누어 쉬었던 이 퇴락한 사당의 이름은 현장사(玄奘祠)라고 했다. 용문석굴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이 작은 촌락이 그 유명한 현장법사가 태어난 고향이라나.
그 잡담을 귀에 담을 새도 없이 곯아떨어졌으나,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기척을 놓치는 법은 없다.
누군가 빠르게 접근하는 느낌에 저절로 눈이 뜨였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우당탕.
낡은 문짝이 날아가도록 소란스럽게 들이닥치는 그림자.
“해 형! 뭐야? 무슨 일이 났기에 이렇게 부리나케. 엥?”
버럭 질러대는 고함에 해원기의 반사적으로 들리던 손에서 힘이 빠졌고,
잠이 깬 단삼육이 눈을 비비며 인상을 썼다.
“막내냐? 어째서 네가 온 거지? 아흠.”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해대는 단삼육. 한쪽 구석에서 엉거주춤 머리를 든 모습의 해원기.
지저분한 바닥에서 뒹굴던 상거지 둘을 확인하자.
오소민이 눈을 껌뻑이며 입맛을 다셨다.
비로소 자신이 지나치게 성급했다는 걸 깨달아서.
이 현장사는 낙양 곳곳에 설치된 개방의 비밀 거점. 단삼육과 해원기는 몸을 숨긴 채 쉬던 중이었잖나.
이전처럼 백삼의 준미한 공자로 보이는 오소민.
소식을 듣자 부리나케 찾아 나온 건 바로 자신이었고, 그런 초조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격이라.
입이 딱 붙어서 열리질 않는다.
다시 만난 해원기에게 고함만 질러댔지, 반가운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이미 용문석굴에서 낯짝을 다 보였는데 동창 것들이 가만히 있었겠냐? 멍텅구리와 심술쟁이가 직접 총단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용문세가를 통해서 연락했을 테니까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다. 그래, 그 둘은 어디로 간다더냐?”
일단 단삼육이 오소민을 끌어다 앉히고 얘기를 시작했다.
지친 해원기를 보살피는 일은 단삼육이, 주변의 상황을 살피고 필요한 소식을 전하는 임무는 무공화상과 부덕도인이 맡기로 했었다.
개방의 총단이 기습 같지도 않은 기습을 당했다고 했으니. 소림과 무당도 조속히 본산과 연락을 취해야만 한다.
비록 해원기의 등장으로 물러나긴 했으나, 수백의 관병을 동원해 용문석굴을 봉쇄했던 동창이 가만히 있겠는가.
대담하게 소림, 무당, 개방, 용문세가의 눈을 가리는 수작을 펼쳤는데도 풍진삼우가 기어이 끼어들었으니.
검왕과 풍진삼우 전부 감시의 대상이 되었겠지.
단삼육이 개방 총단이 아닌 이 현장사로 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흙바닥에 털썩 앉은 오소민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바보 스님이야 백마사(白馬寺)일 테고, 심통 도사는 노군산(老君山) 쪽이라고 하더군요. 오 소저가 직접 쓴 서찰을 목우대(牧牛隊) 노인장 한 분이 변통(便桶)까지 매고 가져왔고. 그래서 방주 사형이 얼마 전에야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백마사는 소림사와 긴밀한 관계. 노군산은 낙양의 서남쪽 복우산(伏牛山) 줄기에 속하고, 많은 도관이 있어서 또한 무당과 연락이 가능하다.
무공화상은 낙양 성내로, 부덕도인은 낙양 밖으로 방향을 서로 나눈 셈.
게다가 용문세가에 청을 넣어 개방에도 소식을 전하도록 했는데. 꾀주머니란 별명을 가진 오보혜가 분위기를 모를 리 없다.
“흠, 목우대의 노인장이라. 변장이라고 해도 똥통까지 든 건 역시 오 소저의 머리에서 나왔겠지. 일단 우리 행적이 쉽게 드러나진 않겠다. 방주 사형이 뭐라고 하시더냐?”
일반 문파의 장로원(長老院)에 해당하는 용문세가의 목우대. 여간해선 외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마지막 저력이 이렇게 연락을 맡은 건 전부 오보혜의 결정일 터.
“워낙 기민하고 총명한 아가씨잖아요. 기밀 유지에 상당한 신경을 써준 건데, 흠, 역시 시간이 좀 지체된 감이 있지요. 우선 정예를 모아 맹진(孟津)으로 이동하면서 낙양분타의 방도는 전부 주변 분타로 보내셨습니다. 타구령(打狗令)을 대기하도록. 다른 연락은 제가 맡았죠.”
개를 두들겨 팬다는 타구령. 이건 개방의 소집령이다.
기존의 낙양분타와 총단의 인원이 아니라, 아예 주변 분타의 방도까지 전부 불러 모은다는 뜻.
단삼육이 눈을 껌뻑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작정을 하셨군. 자칫하면 모반(謀反)의 대역죄를 뒤집어쓸 거야. 후훗.”
거지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게 뭐 그리 대단하랴.
그러나 괜스레 거적 깃발이 올랐다고 민란(民亂)으로 부풀리면 개를 두들겨 패기는커녕 개처럼 두들겨 맞을 터.
그럴 위험이 다분한데도 단삼육은 즐거운 듯 히죽거리더니.
금방 표정을 고치면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급히 보고할 게 생겼다. 이건 특히 본 방이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야. 설마 방주 사형이 알고서 분타의 제자들을 낙양 밖으로 보내진 않았을 테지만, 걱정거리는 좀 줄었구먼.”
해원기에게 따로 들었던 유탕대진도에 관한 내용.
장안에서 분타주인 유항조차 당했으니 낙양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본래 낙양분타에 속한 방도들을 타구령으로 전부 내보낸 게 그나마 다행.
그러면서 해원기가 장안에서 겪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오소민이 갑자기 떠난 후의 사건들.
그러는 동안 해원기는 그저 옆에서 두 사람을 보고만 있었는데.
오소민은 어째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는지.
단삼육의 얘기가 끝나자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오소민.
“네 생각은 어떠냐?”
급히 보고할 문제라면서.
그런 오소민을 보며 단삼육이 슬쩍 의견을 물어도 들리지 않는 듯.
한참을 뭔가 궁리하더니 돌연 고개를 홱 돌린다.
“그래서 죽어라 뛰어온 거야? 감로보병 때문에?”
잔뜩 찡그린 얼굴에 날 선 목소리.
야단이라도 치는 듯한 질문을 불쑥 던지는 통에 해원기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니, 그게. 음, 그런 셈인가. 정 형이 주의해야 할 물건이라고…….”
“그 요물단지 말이라면 다 믿나? 그 요물단지는 또 왜 끼어들어서, 밀각의 대부로 화신했다며? 아주 말썽이로구먼. 그렇다고 혼자 와? 그렇게 자신 있나?”
요물단지는 정록을 부르는 별명이겠지.
쏟아지는 질문에 갈피를 잡기 어렵다.
“자신이 있든 없든 당장…….”
“당장은 장안의 뒷수습이잖아. 굳이 밀각의 각주를 놓아줄 필요도 없었고, 노진인까지 나오셨는데 그냥 떠나면 되나. 화산과 종남의 장문인 두 분이 다 있었으니 함께 의논했으면. 으이구, 답답해!”
오소민은 해원기의 대답은 아예 듣지도 않고 가슴을 퍽퍽 쳐대고는.
여기서 끝이 아니어서,
“자네 돌았나? 대부로 화신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요물단지가 전후 사정을 다 파악하진 못했을 거 아냐. 그 안에 또 함정이라도 파 놓았으면 어쩔 뻔했어. 그리고 길도 어두운 주제에 낙양이 어느 쪽인지, 또 낙양에서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아무 계획도 없이, 나 참,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이젠 해원기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는다.
“동강 있잖아, 동강. 그 영금이면 훨씬 빠르게, 그 발목에 간단하게 몇 자 적어서 보내면 될 걸. 생각도 못 했지? 이런 바부탱이. 도대체 무슨 심산으로 혼자서? 그거 미친 짓이라고! 게다가 오자마자 용문석굴에서 현신장 무리와 싸워? 아휴우우.”
아예 미친 짓이라는 욕이 섞이더니 한심스러운 탄식까지.
한바탕 된서리를 맞은 듯,
해원기가 얼떨떨해서 단삼육을 쳐다보자, 단삼육도 기가 막힌 표정을 짓다가 얼른 호로병을 입에 쑤셔 넣었다.
어디 불이라도 난 듯 야단법석인 오소민의 말투.
괜히 불똥이 튈까 딴청을 피우는 거다.
해원기의 천성은 순후하다.
본래 남과 다투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쾌체 일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굳이 사람을 사귀려고 하지도 않았다.
무림과 엮이는 걸 피하려고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닫아걸었건만, 어찌 사람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기묘한 사건에 휘말려 마침내 무림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인연의 굴레에 얽매였다.
옛 인연, 새로운 인연.
그래도 무력을 써서 싸우는 일이 아니라면, 되도록 자신을 낮추고 말을 삼갔다.
설사 ‘바부탱이’, ‘고구마 대장’이란 소리를 들어도.
그러나 연약하진 않다.
도리어 견강(堅剛)하여 굽히지 않으며, 겉보기와 다르게 여간해선 지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 오소민에게 한바탕 꾸중(?)을 들으면서 속이 슬슬 부글거렸다.
허리를 곧게 펴고 양손을 무릎에 얹었다.
한탄을 끝낸 오소민을 똑바로 보는 두 눈.
“자네, 화났나?”
짧게 묻는 말에 이번엔 오소민이 움찔.
인상을 쓰지만, 해원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화가 난 사람은 나야. 육 년이나 쾌체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루 한 끼에 들판에서라도 잠은 잤었지. 이번처럼 기를 쓰고 경공을 펼친 건 처음일세.”
그리 빠르지도 않고. 음성이 높아지지도 않았지만.
그저 평범한 말투 같은데 평소와는 다른 느낌.
인상을 쓴 오소민이 눈썹을 불끈불끈하면서도 얼른 말을 받지 못하고.
“돌지도, 미치지도 않았지만, 막무가내로 죽어라 달리기는 했군. 장안의 뒷수습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리고 동강은 전서(傳書)로 쓰기 어려워. 사부님께서 인세에 관여하는 걸 되도록 금하라고 하셨거든. 언제나 하늘 높이 날면서 지리에도 어둡지.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아 둔 것도 드문 일이야. 자네…….”
해원기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드문 일일 터.
오소민이 쏟아낸 말을 고스란히 되새기더니,
문득 맥이 빠진 듯 목소리가 쳐진다.
“내가 왜 왔는지 모르나?”
그늘이 지는 눈가는 지치고 피곤하기 때문은 아닐 터.
한참 부리던 성질을 참고서 해원기를 험상궂게 노려보던 오소민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화났냐고? 화야 났지.
그런데 이 고구마 대장은 되레 자기가 화가 났단다.
남의 말을 꼬박꼬박 따지고 들어 속을 더 뒤집어놓으면서.
그런데.
해원기가 기를 쓰고 낙양까지 달려온 게 화가 나서라면.
왜 화가 났지?
설마.
“거봐, 친구란 건 이렇게 투덕거리기도 하는 거라고. 막내는 매번 우리 셋을 흉본다만, 그래도 풍진삼우 아니더냐. 난 두 사람이 친한 게 보기 좋기만 하네. 크흐흐.”
딴청을 피우던 단삼육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웃어대는 통에.
해원기도, 오소민도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든 말든.
단삼육이 자기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지 않아도 네가 갑자기 총단으로 돌아온 게 영 수상했어. 저 혼자 설치고 나서면서 해 소협은 냅다 팽개친 거 아닌가 싶어…….”
“아, 누가 누굴 팽개쳐요?”
오소민이 빽 소리를 지르지만, 그런다고 입을 닫을 단삼육인가.
“어이쿠, 귀청 떨어지겠다. 하여간 그놈의 성질머리. 아, 조금 전에 내가 얘기했잖아. 네가 급거 귀환한 후에 해 소협이 줄줄이 겪은 사건이 죄다 만만치 않았다고. 해 소협 혼자서 어디 의논하기도 마땅찮았을 그런. 에, 노진인이 제때 나와주셔서 다행이고. 그러고 보면 역시 사람은 인복이 있어야 해. 해 소협이 인복이 있는 편인가? 흐.”
엉뚱하게 말머리를 돌리며 호리병을 든다.
단삼육에게 남은 화를 쏟아내려던 오소민이 눈을 깜빡이다가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신이 장안을 떠난 후에 해원기가 겪은 일. 이미 다 들었잖나.
정록과 만나 고력사의 무덤에서 기험(奇險)한 상황에 부닥쳤었고, 홀로 장안에 돌아와서는 군방대청이니 종루 고루니. 게다가 중간에 개방의 비밀 거점을 거쳐 제갈봉의 황가약포에도 들렀다며.
오소민 자신에게 위해를 끼쳤던 밀각의 대부와 현신장. 게다가 밀각 각주에 주국경, 예부상서까지 나왔단다.
해원기 혼자서 싸웠다. 옆에 아무도 없이.
의논할 친구가 정말 필요할 때 곁에 있지 않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잖아.
총명한 오소민이 어찌 모를까.
고개를 돌린 채로 불퉁하게 중얼거리는데.
“인복은 있죠.”
마침 해원기도 머리를 저으며 툭 내뱉는 말.
“그런 거 없습니다.”
동시에 서로 다른 말을 한 둘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다. 어이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