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28화 (228/410)

제57장 어약용문(魚躍龍門) (4)

한낮의 더위를 피해 퇴락한 사당 안으로 옮겨 앉자,

단삼육이 흔적만 남은 신감(神龕) 뒤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내 들었다.

“흠, 흠. 아직 있었구먼. 역시 사람은 미리 준비를 해야. 흐흐흐.”

흡족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와서 내미는 두 손에.

해원기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쪽 손에는 조그마한 술 단지, 다른 손에는 건량이 수북한 또 하나의 단지. 흙이 잔뜩 묻은 거로 봐서는 땅속에라도 묻어놨던 모양이다.

얘기가 끝나고 무공화상과 부덕도인이 떠나자마자 사당 안에서 쉬자고 하더니.

“이게, 어디서 난 겁니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삼육이 손바닥으로 연신 흙을 털어내며 앞에 앉았다.

“아마 내가 장만했을걸요. 뭐, 꼬마 거지들 시켜서 여기저기 잘 감춰두라고 한 거지만. 호법장로랍시고 총단 주위를 샅샅이 살피는 게 일이라. 그럴 때마다 적당한 장소를 찾으면 장만해두라고 했었다오. 이렇게 딱 써먹을 수 있도록. 에헴.”

헛기침까지 덧붙이며 으쓱대지만, 아마도 총단을 벗어나 혼자 놀 궁리였겠지.

해원기가 미소를 지었다.

배경이야 어떻든 단삼육의 말대로 딱 써먹을 수 있으니 좀 좋은가. 그러지 않아도 갈증 때문에 아까 단삼육의 호리병을 거의 비우다시피 했었고,

바싹 말라 나무토막같이 변한 건량이라도 보자마자 잊었던 허기가 확 밀려든다.

꼬박 이틀. 장안에서 낙양까지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다.

“멍텅구리하고 심술쟁이가 알아서 뛰쳐나갔으니 우리는 여기서 좀 쉽시다. 총단에도 연락이 갈 테니까. 자.”

권하는 대로 해원기가 건량을 받아 입에 넣다가,

아예 씹지도 않고 삼키기 시작하자 술 단지를 열던 단삼육이 짧게 혀를 찼다.

“쯧, 어째…….”

나오려던 말을 삼키며 슬쩍 돌리는 시선.

빈양동 앞에서 잠시 무위를 드러내긴 했어도 해원기의 더벅머리는 온통 흙투성이. 머리칼만이 아니다. 지금은 앞에 앉은 단삼육이 무색할 정도의 봉두구면(蓬頭垢面)이라서, 누가 봤으면 상거지 둘이 마주 앉은 거로 여길 터.

그 모습이 안쓰럽다기보다 어쩐지 해원기의 사부인 그분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강호를 동분서주, 모든 어려움을 혼자서 짊어지고 싸우던 그분.

‘그래도 그때는 맹주, 탁 대협이라도 있었지.’

그뿐이 아니라 차츰차츰 주위에 사람이 모여들었었다. 멀게는 아득한 과거로 치부되었던 거목들부터 가깝게는 새로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이들까지.

그 젊은이 중 하나가 바로 단삼육 자신이었잖나.

그랬던 시절을 생각하면 해원기는 그야말로 혼자.

그분의 후예로서 참으로 누구나 부러워할 인연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막 강호에 들어선 신출내기라는 티가 역력하다.

함께 움직인다고 설치던 오소민도 어쩐 일인지 혼자 돌아왔고.

단삼육이 자신의 호리병에 술을 따르곤 나머지를 단지째 해원기에게 밀어놓았다.

“천천히 드시오. 목메겠소.”

허겁지겁 건량을 먹던 해원기가 멋쩍게 머리를 긁자,

단삼육이 은근히 목소리를 깔았다.

“조금 전에는 워낙 기막힌 내용이라 굵직굵직한 얘기만 했었소만, 이런 급한 내용은 본 방의 장안분타를 쓰면 되었을 텐데. 혹시 우리 막내가 지나치게 설쳐서…….”

“아, 아닙니다.”

해원기가 얼른 입가를 닦았다.

확실히 민감한 문제를 먼저 언급하다 보니 몇 가지 빼먹은 부분이 있고.

또 단삼육의 입장을 고려해서 장안분타의 일을 생략했었는데.

이게 엉뚱하게 오소민을 탓하는 빌미가 될 줄은 생각 못 했었다.

무공화상과 부덕도인이 있는 자리에서 장안분타주 유항이 당한 일을 다 밝히지 않은 게 이런 오해를 일으켰다.

장안 군방대청에서의 일, 그리고 고루의 북소리에 의한 영향.

해원기의 말이 끝나자 단삼육이 입에 대려던 호로병을 급히 뗐다.

“사술의 침습? 호의개는 백협맹에도 참가했던. 허!”

“장안성에 깔린 유탕대진도도 그렇지만, 군방대청에서 부호들에게 펼친 술법은 좀 더 심각하달까.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암암리에 유탕대진도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군방대청의 술법은 세뇌를 더욱 공고히 하는 듯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아직은 그 효용과 이유가 확실치 않지요. 장안을 떠나기 전에 노진인께 살펴봐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무공화상과 부덕도인이 같이 있을 때 이미 나왔던 화제.

양도양경을 비롯한 고성이 동창의 외부 거점이란 것 외에도 이 사술은 분명히 경계할 점이었다.

장안분타를 맡은 유항은 개방 내에서도 상당히 고참에 속하거늘. 해원기를 위해 제때 비합전서를 날리지 못한 이유.

단삼육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쩝, 동창 것들이 양도양경 같은 큰 고을을 회합의 거점으로 삼은 게. 아무래도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되겠군. 그저 전설이나 보물만이 목적은 아니겠소. 이거는, 음, 본 방의 문제로군. 해 소협이 이 거지를 위해준 거구려.”

낙양, 장안, 금릉, 경사, 그리고 제남 등의 큰 고을.

장안에서 고력사의 무덤에 숨겨진 보병을 얻었다고 단순히 보물을 찾아 헤맨다고 여길 수 없다. 물론 큰 고을일수록 높은 관부가 자리하고, 권력을 쥔 동창에게는 편한 환경이겠지.

그러나 유항조차 자신도 모르게 침습될 사술이 설치되었다면.

장안 외에 큰 고을마다 분타를 두는 개방에게 큰 위험이 된다. 남에게 빌어먹는 거지로선 인구가 많은 시정에 모이는 게 당연한 일. 산간벽지에선 걸식할 곳도 없잖은가.

숭산이나 무당산과는 다른 환경.

풍진삼우의 다른 둘 앞에선 주로 사술과 진도에 관해 주의할 부분만 거론했었던 게, 다 개방의 체면을 의식해서였던 거다.

기민하게 알아챈 단삼육이 바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지부나 벽세에서 유래한 술법이라면 방비하기 쉬울 리 없지. 멍텅구리와 심술쟁이가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일. 본 방도 내부를 다시 살펴야겠소. 그러지 않아도 방주 사형이 마침 대공의(大公儀)를 열 계획이라.”

대공의는 개방 전통의 대집회. 내실을 다지기 위해 예전보다 많이 규모를 줄였다고 해도 개방의 모든 분타주가 참석하는 집회라면 상황을 파악하여 대응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불가와 도문, 그리고 약왕당이 함께 하면 어떤 세뇌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복잡해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라. 음, 오형, 에, 오 장로로선 화산의 변고와 밀각의 출현, 게다가 현신장까지 등장한 상황을 직접 전하는 게 우선이었겠지요.”

이 대화의 시작은 해원기가 거지꼴이 되도록 낙양으로 달려온 것.

동행하던 오소민이 저 혼자 부리나케 총단으로 와버렸고, 장안분타는 사술에 홀려서 해원기에게 도움도 주지 못했다.

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소민이 지나치게 설쳐댔다는 엉뚱한 오해는 받지 않았으면.

그런데.

말하다 보니 호칭이 영 어색해져 버렸다.

오 형이랬다가 오 장로로.

눈치 빠른 단삼육이 그 차이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에, 해 소협, 혹시…….”

말을 끌면서 해원기에게 가까이 들이대는 괴상한 표정.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알았소? 막내가, 사내가, 아니란 거?”

해원기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단삼육의 괴상한 얼굴을 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 장로의 독상을 치료하려다가 뜻하지 않게.”

단삼육의 괴상한 얼굴이 휙 뒤로 물러나고,

“그랬구나. 어쩐지 자세한 얘기를 않더라니. 흐음, 이제 보니 숨겼던 비밀이 들통 나는 바람에 창피해서 도망친 거였구먼. 어이구, 깜찍한 것. 크흐흐흐.”

멀쩡해진 얼굴 대신에 웃음이 괴상해진다.

해원기도 뭔가 더 말하려다가 왠지 구차해 보일까 싶어 입을 다물었고,

단삼육은 혼자서 킬킬거리다가 호로병을 벌컥거리며 들이키고.

잠시 사당 안이 묘한 분위기가 되었다.

“커어, 시원하다. 해 소협, 그렇다고 오 장로는 너무한데? 흐흐.”

단삼육이 비로소 웃음을 머금은 채 놀리듯 건네는 말.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귀를 문질렀다.

간지럽게 들리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그럼 뭐라 부르나.

“알리고 싶지 않은, 누구나 그런 일이 있잖습니까. 오 형만의 비밀이었을.”

그저 궁색한 대답만.

그런데.

단삼육의 장난스럽던 얼굴에 희미하게 그늘이 내리고.

또 호로병을 입에 넣어 꿀꺽꿀꺽.

숨이 차도록 들이붓더니,

“푸하, 그래, 해 소협 말이 맞지. 누구에게나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사연 하나쯤. 그래도 이젠 좀 벗어났으면 하는 게 내 심정이라오. 쯧!”

사당이 울리도록 혀를 찬다.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득 담긴 한숨처럼.

그런 단삼육을 해원기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제갈봉이 자신의 내력을 밝히면서 오소민에게도 ‘사연’이 있을 거라고 했었다.

또 정록에게서 오소민이 어렸을 때 역형대법의 기초를 배웠다고 들었다.

스스로 여자를 버리고 개방의 거지로 변해야 했던 사연이 무엇이기에.

“이건 본 방의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소. 본 방에서 막내의 정체를 아는 이는 방주 사형과 나, 이렇게 둘뿐이고. 이제껏 공개한 적이 없으니까. 물론 본 방에 들어올 때부터 막내의 간절한 바람이라서.”

개방의 비밀이라면서.

단삼육은 뭔가 작정한 듯 말을 이어간다.

“막내를 거둔 이는 돌아가신 본 방의 전임 순행장로였소. 무휴분망(無休奔忙) 부자열(傅子悅)이라고. 본 방에선 아주 유명했던, 누구에게나 존경받던 인물이셨지. 천하의 모든 불쌍한 이를 두루 돌보는 게 평생의 숙원이셨는데, 그래서 난리가 나고 전쟁이 터진 곳이라도 꺼리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계집애를 발견한 거요. 온 집안이 도륙당해 피바다가 된 곳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난리가 나고 전쟁이 터진 곳.

해원기가 미간을 조금씩 좁혔다. 오소민의 나이는 스물다섯,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온 집안이 도륙 당했다면.

단삼육은 시선을 멀리 던진 채.

“부 장로로선 키울 재간이 없었지. 그래서 일단 불리관(不理館)으로 데려왔다오. 아, 불리관은 과거 팔선중(八仙衆)의 입구 역할을 하던 음식점이요. 지금은 금릉분타가 되었고. 거기서 팔선 어르신들 눈에 뜨여 입문했는데. 본래는 팔선중의 일원이 되어 세상과 절연한 뿌리로 돌아갈 참이었소.”

말이 길어져서인지 다시 호리병을 든다.

팔선중은 개방의 뿌리. 난세를 견디고 개방이 다시 일어선 후에야 뿌리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법. 개방이 멸절될 겁난이 또 닥치지 않는 한, 뿌리는 세상에서 잊힌 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막내의 속연(俗緣)이 짙어서인지. 팔선 어르신들께선 그 아이를 우리 사형제의 막내로 삼으셨고, 결국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인 유룡개가 되었지요. 주위의 도움을 얻어 남자로 화신하는 법까지 가르쳐서. 그렇게 지금까지 제멋대로에 풍류를 즐기는 특이한 미남 거지로 살았소이다. 금릉분타를 맡은 호식개(好食丐) 오달(吳達)의 친척이라는 신분으로.”

장안에서 유항에게 들은 적이 있다.

거지 주제에 호의호식한다고 욕을 먹는 둘. 장안분타의 유항이 호의개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금릉분타의 호식개 오달.

그런데 오달의 친척이라는 신분이라니. 이것도 거짓이라는 어조.

단삼육의 시선이 천천히 해원기에게 돌아왔다.

언제나 취기가 어렸던 두 눈이 깊이 가라앉아 잠시 말문을 닫다가.

“이제 막내의 신세를 아는 사람이 또 생겼구려. 막내의 본래 성은 방(方), 대학사 방효유(方孝孺)의 유일한 후손이외다.”

소곤대듯 작은 음성.

그러나 해원기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놀랐다.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죽이고 황제가 된 영락제. 그 영락제에게 연적찬위(燕賊簒位)라고 욕하며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충신. 고금에 없던 십족구멸(十族俱滅)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전해지거늘.

오소민이 아니라 방소민. 그녀가 그 아수라장에서 천행으로 살아남은 일점혈육일 줄이야.

그러면서 황연히 깨달았다.

개방의 순행장로치고는 관부나 조정에 대해 지나치게 박식했던 까닭을.

말을 마친 단삼육은 그저 호로병만 홀짝이고.

퇴락한 사당 안의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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