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26화 (226/410)

제57장 어약용문(魚躍龍門) (2)

탁 소숙 흉내를 낸다.

뛰어난 무공을 지녔고, 무림에 들어선 이래 적지 않은 싸움을 겪었지만.

아직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사부에게서 들었던 그 많은 얘기밖에는 기댈 곳이 없었다.

아들은 아비를 닮고, 제자는 사부를 닮는 법.

당연히 해원기는 자신이 들었던 얘기 속의 사부처럼 말하고, 자신이 상상했던 사부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울 리 있나.

특히 싸움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모범이 필요했다.

장안에서 낙양까지 자지도 먹지도 않고 달려온 길.

천하유일의 신왕공을 익혔고, 풍뢰동과 신기역의 기연을 입었다고 해도 지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쇠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낙양에 들어오면서 일단 동강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본래 하늘을 날며 아래쪽에는 별 관심도 없는 녀석이고, 아무리 신통한 영금이라도 세상의 지리를 사람처럼 외우지는 않는다.

그나마 녀석 눈에 익은 오소민이나 단삼육을 찾도록 했다.

오소민이나 단삼육이 있는 곳이 바로 개방 총단일 터.

그런데 심부름을 내보내자마자 바로 알려오는 감응. 동강이 가리키는 방향을 그대로 따르다 보니 용문산을 고스란히 뛰어넘게 되었고,

동시에 주변이 어떤지도 순간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무수한 관병과 현신장의 기척만으로도 장안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적의 수는 열하나지만. 많은 관병을 허깨비 보듯 할 수도 없는 노릇. 이쪽은 풍진삼우 셋뿐이다.

현신장 셋과는 이미 손을 섞어본 적이 있고, 처음 보는 다른 자들 역시 만만하게 여길 수 없는 기운을 흘리니.

비록 장안에서 유명비를 거느린 첨유진과 호경륭을 제압하긴 했으나 현신장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이 만약 그 정도의 힘을 지녔다면?

해원기 자신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고, 풍진삼우만이 여기에 나타난 이유도 모른다.

대뜸 맞붙어 싸웠다가 혹여 일을 그르치면, 자칫 이 정보를 일러준 정록에게도 피해를 주게 될 텐데.

이럴 때는,

일단 상대를 도발하라고 했다. 꽉 막힌 상황을 풀어나가는 실마리는 의외로 상대에게 있다고.

‘속을 박박 긁어놓으면 눈이 뒤집힌 것들이 제풀에 허점을 드러낸다고 하셨지. 두들겨도 그럴 때 두들기는 게 훨씬 쉽다고…….’

기억 한 자락을 되짚으면서 결정을 내렸다.

탁 소숙처럼 해보자.

현신장 셋 중에 가장 성격이 모난 이가 오온존자.

황 학사가 손을 내저어 말려도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이놈! 어디서 터진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그러지 않아도 역마를 갈아타면서까지 낙양으로 급행하는 통에 쌓였던 부아가 벌컥 터지고,

같은 아미파의 진여신승도 눈을 부라리며 당장 뛰쳐나갈 태세.

그러자 해원기가 기다렸다는 듯 또 힘껏 발을 구르니,

둥.

커다란 북을 친 것처럼 땅이 울리면서,

“호오, 아미산을 더럽힌 패류(悖類) 둘이 먼저 나서려고? 우강과 구영인 척하는 솜씨 좀 볼까?”

짧은 소매를 일부러 둥둥 걷어붙인다.

황 학사가 질색하며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 좀 있게나! 지금 노부와 말을 나누고 있잖은가!”

본래 윗사람이 대화하는 중에 아랫사람이 끼어드는 건 무례한 일.

그러나 황 학사가 이 자리에서 굳이 윗사람 행세를 하려는 건 아니어서,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에게 번갈아 눈짓을 보내고.

바로 해원기를 보며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어흠, 확실히 무림인이란 자들은 거칠어서 대하기 어렵구먼. 더구나 해 소협은 한창 혈기방장할 때라. 그러나 노부가 이렇게 온 것은 황상의 명에 따른 것. 함부로 남에게 밝힐 수는 없지. 이전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느꼈던 건데, 대체 해 소협은 무슨 이유로 이렇게 황실의 중요한 일을 계속해서 방해하는 거요?”

점잖게 내리깐 음성.

상대방을 무시하던 조금 전의 얼굴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의젓하게 품위를 갖춘 모습이다.

해원기가 팔을 천천히 늘어뜨리며 표정을 고쳤다.

“황실의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 황실과 조정의 행사가 백성의 뜻에 어긋나서는 안 되오. 하늘이 높다고 해도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가뭄과 홍수요, 땅이 넓다고 해도 사람은 자기 입에 풀칠하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없소. 그 안에서 부대끼며 시비와 선악이 얽히고설켜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는 가련한 삶. 그래서 협의를 중시하고, 또 협의를 실행할 힘이 필요할 뿐이지. 방해라고 했소? 그럼 스스로 따져보시오. 그간 동창이 각지에서 벌인 일이 과연 옳은 것인지. 내 아직 미숙하지만, 습무지도(習武之徒)로서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라고 배운 적은 없소이다.”

의기늠연(意氣凜然).

의지가 바르고 기상이 씩씩하여 거칠 것이 없다.

하늘같이 귀하다고, 광활한 땅을 모조리 가졌다고 남의 위에 서려는 자들. 그들을 꾸짖어 경고하며 그 행패를 절대 묵과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백하게 밝히자.

“푸하하하하, 이거 좋군! 정말 좋아!”

“참으로 속이 시원한 말씀! 남몰아미타부르, 남몰아미타부르.”

“푸엣취! 이렇게 통쾌할 수가 있나. 무량수부르. 젠장, 멍청아, 나까지 헷갈리잖아!”

풍진삼우가 남북에서 한꺼번에 큰소리로 감탄을 표했다.

남쪽 경선사, 북쪽 잠계사, 그 가운데가 빈양삼동.

세 사람의 호탕한 탄성이 용문산을 타고 퍼지는데.

황 학사가 아무 말 없이 수염만 쓰다듬는다.

해원기의 늠름함에 기가 죽었을까.

뛰어난 머리에 예리한 분석력. 황 학사가 밀각 육학사에 오른 이유다.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을 말리고 의젓한 소리를 지껄인 건 다 생각할 시간을 얻기 위함.

해원기가 ‘우강’과 ‘구영’을 언급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안에서 각주와 주국경을 상대한 게 분명해. 유탕대진도와 백력까지 들먹였으니까. 현신장 셋과는 화청궁에서 한 차례, 고력사의 무덤에서 한 차례 마주쳤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멀쩡하게 달려온 걸 보면 확실히. 제남의 일도 그렇고, 반룡령이 손을 옴츠린 거 하며, 진평현의 일, 팽 천호가 당한 것까지. 역시 영세검주라는 문제로 귀결되나. 그런데 왜 하필 이즈음에 등장했을까? 그리고 어디까지 아는 걸까? 서둘러 일을 처리하려던 게 엉뚱한 시비를 낳았구나. 그렇다면…….’

풍진삼우의 커다란 탄성 따위는 듣지도 못한 양.

길게 탄식하며 수염을 털었다.

“허어, 무림인이 시비곡직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함부로 나라의 법령을 범한다는 옛말이 괜히 있었을까. 뭐, 한낱 강호의 무부가 왕호(王號)를 붙인 것부터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 그래, 황명을 받든 노부가 이렇게 미복(微服)으로 나온 게 실수라면 실수. 여민(黎民)이 살아가는 이 용문석굴을 억지로 봉쇄한 것도 실책이라면 실책.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기엔 꼴사납고. 노부가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법도에 맞춰서 다시 올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을 멈추고 손짓으로 남북에 나뉜 자들을 부르더니.

“그 빌미라도 건져야 체면이 서겠지. 뭐, 천박하게 우르르 개싸움을 할 마음은 없고. 해 소협이 아까부터 우리 현신장 셋을 자꾸 물고 늘어지던데. 어떻소?”

해원기의 외호는 절세검왕.

왕이란 글자를 붙였다고 시비를 걸고, 미복이니 여민이니 학사에 어울리는 관화(官話)를 쓰더니.

마지막엔 다시 물고 늘어지는 개라고 야유를 덧붙이고선.

슬쩍 물러나 손바닥을 펼친다.

“감히 황실을 능멸할 만한 솜씨인지 한번 봅시다.”

스윽.

그러지 않아도 참고 있던 판이다.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이 동시에 앞으로 나서고, 한 발짝 뒤처져 요술사가 신중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구구절절 말재간을 부리더니 결국은 한바탕 해보자는 것.

처음부터 해원기의 논리 정연한 얘기에 휘말렸고, 거듭되는 도발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마음대로 관병을 동원해 백성을 침해하고, 나아가 동창의 그간 행사가 강호를 짓밟는다고. 황명이든 뭐든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논리조차 져버렸다.

남은 건 무력뿐.

그런데 또 황 학사는 조양신문과 무명천의 인물들은 도로 물리면서, 현신장 셋만 내보내니.

해원기의 미간이 살짝 모였고.

탄성으로 기세를 올렸던 풍진삼우도 얼굴이 굳어졌다.

멍청하고 심술궂고 마냥 술에 취했다고 하지만.

풍진삼우 세 사람은 과거의 난세를 헤쳐 나온 노강호들. 황 학사의 도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즉각 느꼈다.

이렇게 거의 동시에 용문석굴에 나타난 건 사실 우연. 사태가 기묘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닫고 일단 상황을 살피고자 먼저 서둘렀던 게 비슷하게 맞아떨어졌을 뿐이었다.

용문석굴을 남북으로 봉쇄한 관병을 힘으로 뚫기는 난감한 일. 원군이 이르려면 천상 용문산을 타고 넘어야 하고, 그러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동창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 그러나 종적이 노출되면 다음으로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런 판에 정말 뜻밖으로 해원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등장했고.

그 호기와 늠름한 언행에 참으로 가슴 뿌듯한 감정을 느꼈지만.

막상 상대가 해원기를 지목해 싸우자고 하니 와락 걱정이 되었다.

열하나. 그중에 풍진삼우가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단삼육은 오소민을 통해 들은 게 있어서 아미와 공동을 집어삼킨 현신장 셋을 짐작이라도 했으나. 밀각 육학사의 하나는 뭐고, 조양신문이니 하는 자들은 또 누군가.

더구나 자기들을 상대하려던 일곱이 도로 한 무리가 되어서.

황 학사가 현신장 셋으로만 해원기와 싸운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못된 것들은 평소에 그럴듯한 포장을 즐기지만, 일단 궁지에 몰리면 온갖 삿된 수작을 아끼지 않는 족속이다.

무림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해원기.

‘그분’의 하나뿐인 후대로 천하를 뒤져도 찾기 어려운 기재(奇才)지만,

이런 싸움. 괜찮을까?

세 사람의 기억 속 해원기는 십이 년 전 태산에서 보았던 모습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급히 빈양동 앞으로 움직이려는데,

싸움은 벌써 시작되었다.

황 학사가 몰래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몇 마디라도 허튼소리를 지껄일 법한 자들이 입도 벙긋하지 않고서 대뜸 몸을 날렸으니.

오온존자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이동하면서 거친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고,

진여신승은 왼쪽으로 바짝 붙어 두 손을 뒤집었다.

스스스스.

오온존자가 일으킨 거친 바람을 타고 공간에 스며드는 괴이한 기운. 차고 매운 기운이 흙먼지에 섞여 주위를 단숨에 어둡게 한다.

그리고,

뎅그렁.

가려진 시야 넘어 불현듯 울리는 종소리. 위치를 종잡을 수 없는 요술사의 낙혼금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청궁에서 이미 해원기의 능력을 접했던 자들. 보고에는 칠색천막 때문에 놓쳤다고 했지만, 실제로 칠색천막이 없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제왕군림신공을 익힌 이 대부까지 합세했건만, 중독된 오소민을 끼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공격을 막아내고. 맨손으로 가공할 위력을 드러내서.

현신장들은 단 한 번도 득수하질 못했었다. 아니, 오히려 칠색천막이 터지기 직전 공간이 옥죄는 압력에 시달리기까지 했잖은가.

오온존자의 붕익천강은 처음부터 십성(十成)을 넘었고, 그 붕익천강에 열폭노도를 심은 진여신승은 손을 뒤집어 시뻘건 손톱을 세웠으며, 낙혼금종의 소리는 마치 커다란 범종을 때린 것처럼 무겁다.

선발제인(先發制人). 아예 해원기에게 틈을 주지 않고 일거에 꺾어버릴 셈.

그러나.

화라라라락.

기묘한 소음이 연달아 터지면서 거친 바람이 회오리치며 치솟았다.

단번에 시야를 가렸던 흙먼지가 날아가면서,

해원기가 내던졌던 검을 검집 째 도로 끌어당기는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가슴 앞에 묶었던 검대. 현신장이 달려드는 순간에 바로 검대를 풀었으나 꼼꼼하게 검집을 묶을 여유는 없었기에.

검대의 한쪽 끝을 쥔 채로 그대로 내던졌다.

사부가 지부의 작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우연히 썼던 방법. 검대가 한쪽 끝으로 몰리면서 검집이 팽이를 내던질 때처럼 맹렬히 회전하고, 다시 당길 때는 검대를 따라 거꾸로 되감긴다.

마치 긴 줄에 가운데가 뚫린 공을 끼워 좌우로 당기면서 붕붕 소리를 내는 유류구(溜溜球) 같이.

여기에 팔풍지력을 덧붙이면 연검대초가 주위의 공간을 모조리 집어삼키게 되니.

사부는 해원기만이 쓸 수 있는 이 수법을 제라섭풍(提羅攝風)이라고 이름 붙였다.

흙먼지에 시야가 가리고, 붕익천강에 열폭노도가 섞여들었으며, 기운을 빼는 낙혼금종이 무겁게 울렸지만,

해원기가 연검대초를 손에 쥐는 순간, 현신장 셋은 전부 그 검이 집어삼킨 공간, 즉 검역 안에 빠져들었다.

오른쪽으로 어깨높이에 이른 오온존자, 왼쪽 지면을 타고 달려드는 진여신승, 가운데 뒤쪽에 잔뜩 웅크려 낙혼금종을 끌어안은 요술사.

해원기의 두 발이 춤추듯 지면을 밟고 검이 좌우를 번갈아 휘저었다.

“두 개의 기틀은 서로 얽히나니.”

구결을 다 읊기도 전에 천지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

붕익천강을 통째로 빼앗긴 오온존자가 단주를 낀 손을 급하게 쳐내고, 진여신승의 두 손에서 화염이 좌악 일어나지만.

쾅!

“크억.”

둘이 공세를 펼치기 전에 폭음과 비명이 먼저 터지면서. 요술사가 땅바닥을 세 바퀴나 굴러 뒤집힌 거북이처럼 나가떨어졌다.

천손검법 제이초 양의상전.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건 해원기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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