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어약용문(魚躍龍門) (1)
대체 얼마나 흙구덩이를 뒹굴면 저렇게 될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뽀얗게 뒤덮인 흙먼지, 빈양동 앞에 내리꽂히면서 전신의 흙덩이가 조금 떨어지긴 했으나 온통 회색으로 변한 모습 때문에.
얼핏 이 용문석굴 어딘가에 새겨진 조상(彫像)으로 착각할 뻔했다.
빈양삼동 안의 부조(浮彫) 중 하나를 도둑질해서 용문산으로 도주하던 도둑놈이 관병을 보곤 놀라 냅다 내던졌다거나.
비로소 가라앉기 시작하는 흙먼지를 보면서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한 등장.
하여간 사람 목소리가 났으니 모여든 시선이 저절로 신원을 파악하려 들었고,
풍진삼우와 현신장 쪽에서 거의 동시에 탄성이 올랐다.
“어, 해 소협!”
“뭐야, 설마, 검왕?”
해원기가 내려선 곳은 빈양북동 쪽으로 휘어지는 지점. 자연히 잠계사 쪽에서 나온 단삼육이 가장 먼저 그 목소리를 확인했고, 곧이어 막 빈양남동 앞으로 올라서려던 요술사가 눈을 부릅떴다.
거지가 무색하게 엉망으로 헝클어지긴 했어도 본래 더벅머리. 그리고 흙먼지로 덮인 덕에 두 개의 길고도 깊은 눈매가 더 또렷하게 보인다.
외모만이 아니다. 고수에겐 특유의 기세가 있기 마련이고, 더구나 용문산을 훌쩍 넘어 날아 내린 엄청난 경공을 보였잖은가.
해원기 가볍게 머리를 흔들자 우수수 흙먼지가 날렸다.
“단 대협 덕분에 위치를 찾기는 했는데. 흠, 과연 이자들이 여기에 와있군요.”
일부러 목청을 조금 높여서 경선사 쪽에도 들리도록 하곤,
주변을 훑는 시선이 빛을 머금기 시작한다.
현신장 앞에 선 늙은 학사, 단삼육을 향하던 세 명의 거한, 그리고 무공화상과 부덕도인을 상대하려는 중년인 넷.
“밀각이라. 정말 동원력이 대단하네. 저쪽은 태산 부근에서 본 조양신문인 듯한데, 이쪽은 또 어디서 나왔을까?”
현신장 셋과는 이미 손을 섞어본 적이 있지만, 나머지는 다 처음 보는 얼굴들. 그래도 동시안이 단숨에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걸 간파했고.
버릇처럼 혼잣말로 상황을 정리하자,
가만히 해원기를 주시하던 황 학사가 넓은 소매를 가볍게 저으며 혀를 찼다.
“쯧, 이건 진짜 예상 밖이구먼. 화산에서 화청궁, 그리고 태릉에도 나타나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는 얘길 들은 게 바로 얼마 전이거늘. 설마 여기까지 쫓아왔을 줄이야. 한번 물면 끝까지 놓지 않는, 그런 독한 사냥개 같네, 그려. 흠, 이름이 해원기라고 했지?”
얼굴의 잔주름이 죄다 일어나도록 인상을 쓰며 묻는 말에,
해원기의 시선이 돌아왔다.
남북으로 갈라져 풍진삼우에게 향하던 일곱을 빼고, 현신장 셋을 거느리고 앞에 선 황삼 노인. 이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남의 이름을 물을 때는 먼저 자신부터 대는 게 옳은 순서지. 밀각에서 왔소?”
누구에게나 겸손해서 ‘고구마 대장’이란 소릴 듣지만,
본래 남에게 쉽사리 굽히는 성격이 아니다.
특히 초면에 ‘사냥개’라고 하면서 머리 위에 올라앉으려는 작자들에게는 더욱.
황 학사의 짓무른 눈가가 조금 흔들리고,
“호오, 절세검왕이니 뭐니, 새파랗게 어린 것이…… 그래, 노부의 성은 황, 밀각 육학사(六學士)의 하나란다. 네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기를 쓰는 이유가 뭔지. 여기에도 또 작란(作亂) 질을 치러 왔는고?”
천방지축 나대는 젊은 녀석의 무례함에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짓.
일부러 점잔을 빼며 고풍스러운 말투로 받아주는 게 낫다.
먼지투성이 해원기의 입매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작란이라. 그러지 않아도 얼마 전에 난신적자라는 말도 나왔었군. 그럼, 남북으로 관병을 둘러쳐서 백성들을 놀라게 하는 건 뭐라고 해야 하나. 동창의 권세가 나라를 기울일 정도라 수군거리더니, 이제는 기껏 저희끼리만 유람하기 위해 명승고적을 독점한다? 이거야말로 작란이 아닐까. 어지간히 배웠기에 학사가 되었을 텐데, 황 학사는 어찌 생각하시오?”
역시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반문.
황 학사의 늙은 눈썹이 불끈 치솟았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참았던 화가 부글거려 이를 갈며 욕설부터 나오려는데.
퍼억.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해원기의 전신에서 흙먼지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통에.
황 학사의 입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기세.
돌풍이 일듯 사방으로 퍼지는 기세가 흙먼지로 유형화되었던 것.
해원기가 두 눈을 똑바로 떴다.
“얘기나 나누자고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니지. 동창이 무슨 목적으로 여길 찾았는지 모르겠소만, 나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요. 조금 전, 내가 화산, 화청궁, 태릉에서 훼방을 놓았다고 하던데. 아직 장안의 일은 모르는 모양이구려.”
서서히 신광이 맺혀가는 두 눈.
남북으로 나뉘었던 조양신문과 무명천의 일곱은 발이 묶인 듯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고,
현신장 셋과 황 학사의 표정도 쓴 약을 입에 넣은 듯 일그러졌다.
주위를 짓누르는 기세. 그래도 황 학사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장안의 일? 무슨 소리를 할 셈이냐?”
“당신이 밀각 육학사의 하나라면 적어도 각주와 주국경이 호된 꼴을 당한 건 알아야 할 텐데. 그 이름이, 각주는 첨유진, 주국경은 호경륭이었던가.”
“……!”
“가, 각주를…….”
“무훈의 호 대인이 어찌?”
황 학사와 현신장뿐 아니라, 어정쩡하게 지켜보던 나머지 일곱이 자신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내야 했다.
밀각 각주와 무훈의 주국경. 이 두 사람의 이름까지 대는 건 분명히 직접 상대했다는 증거. 그런데 호된 꼴을 당했다고?
이게 무슨 얘기인지.
해원기가 양손을 가볍게 털며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밀각의 학사, 공동과 아미의 현신장에 그럴듯한 일곱을 더하면 각주나 현신장보다 나을까? 아니, 용문석굴을 봉쇄한 남북의 관병들을 믿고? 그러나 나도 지금은 혼자가 아니지. 풍진삼우 세 분이 계시는데 겁날 게 뭐 있겠소. 아무래도, 흠.”
말을 끌면서 성큼 내딛는 한 걸음.
휘이잉.
또다시 빈양동 앞에 질풍이 바닥을 쓸며 퍼져나가고.
“대내에만 있어서 강호의 도리를 잘 모르는 모양이외다. 마침 이곳은 이궐, 누가 용문에 오르는지 바로 시험하는 것도 좋겠소만.”
쿵.
밟힌 땅이 소리 내어 울면서 강변까지 진동이 이른다.
분명한 위협. 해원기는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기세를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등용문(登龍門)의 고사를 빗대어 을러대니.
황 학사를 비롯한 열한 명이 얼굴을 굳힌 채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가까이서 지켜보던 단삼육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해원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풍진삼우조차 해원기가 이렇게 대뜸 시비를 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절세검왕에 대해서는 먼저 기록으로, 다음에는 최근에 알려진 여러 소식으로 인지했으나.
그래 봤자 이십 대의 애송이.
이십여 년 전에 사마의 대란을 혼자서 청산했다고만 전해지는 영세검주의 기록도 믿기 어려운데. 그 제자라고 했잖나.
아직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젊은 놈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랴. 본시 강호의 소문은 허풍이 태반 아니었던가.
당장 화청궁에서 갑자기 제갈세가의 칠색천막이 나오지 않았다면, 고력사의 무덤에선 기관진세의 방해가 없었다면.
현신장 셋의 손아귀에서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없었을 터.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마주 대하니 이전까지 가볍게 여기던 마음이 싹 가신다.
용문산을 그대로 날아 넘은 놀라운 경공, 전신이 온통 흙투성이인 건 장안에서부터 달려왔다는 방증이다. 장안에서 낙양이 얼마나 먼 거리인가. 현신장이 감로보병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위에서 거듭 재촉하는 바람에 말을 다섯 번이나 갈아타면서 주야배도(晝夜倍道)로 달려오게 했거늘. 관부의 대지급(大至急) 역마(驛馬)를 총동원하고서도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걸 그냥 경공으로 주파했다고?
게다가 장안에서 첨유진, 호경륭과 드잡이질을 벌였다고 하면.
대체 이게 사람인가 싶은데.
사방으로 거침없이 뿜어대는 기세는 또 사람을 절로 주눅 들게 하니.
마냥 싸움에 들뜬 젊은 혈기라고만 치부할 수 없었다.
‘이런 젠장! 이 미친놈이 대체 뭘 믿고…….’
황 학사가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고선 눈을 치떴다.
“흐음, 그렇다면 해 소협, 해 소협은 여기서 한바탕 신수를 발휘해 볼 요량인가? 해 소협과 풍진삼우 네 사람으로 그리 만만치는 않을 텐데. 더구나 이 주변에 깔린 관병이 얼마나 되는지, 또 노부가 그저 관병만 동원했을지…….”
일부러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으려는데,
“장안에 펼친 유탕대진도 따위는 보이지 않더구먼. 뭔가 다른 술법을 쓴다 해도 기껏해야 관병들 재우고 백력이나 갈취하는 정도, 어차피 황 학사가 믿는 건 현신장 셋뿐이잖소. 여기서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라도 그리 쉽게 끝나진 못할게요. 더구나 여기 풍진삼우 세 분만 염려하면 될까? 백주 대낮에 용문석굴 앞에서 소란이 그치지 않으면 구경하러 오는 이들도 적지 않겠지.”
해원기가 곧장 말을 가로채자,
황 학사의 일부러 지었던 표정이 도로 굳어졌다.
조양신문과 무명천으로 풍진삼우를 상대하는 정도만 상정했었지, 자신과 현신장의 걸음이 막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일찍부터 서두른 건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것과 어울리는 술법을 고르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여겼기 때문.
그런데 이 더벅머리 젊은 놈이 마냥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다면. 또 마지막에 한 말처럼 다른 힘이 끼어든다면. 필경 풍진삼우는 소림과 무당, 그리고 개방 출신이다. 미리 수를 쓰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발을 묶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속을 뜨끔하게 한 부분은.
유탕대진도와 백력을 알 줄이야.
‘설마…….’
의혹과 주저가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허어, 이게 다 중요한 국사(國事)의 일환이란 걸 어찌 알리오. 혹시나 하는 염려에 미리 백성들을 피하게 했고, 되도록 조속히 일을 마칠 생각이었거늘. 해 소협의 이런 언행은 관위(官威)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횡행하는 강도와 다를 바 없소. 감히 황명을 받들어 일하는 노부 앞에서, 어흠, 썩 물러나지 못하겠소!”
꽤 기운을 끌어올려 위엄을 부려보지만, 냉랭하던 목소리 끝이 갈라지고.
말투도 어느새 평배를 대하듯 바뀌었다.
그러든 말든.
해원기가 두 손을 올려 가슴 앞을 가로지른 검대를 어루만졌다.
“관복을 갖춰 입은 자도 없고, 국사를 증명할 물건도 없이 입만 놀리다가, 이제야 관위를 등에 업고 황명을 사칭한다? 허, 그래도 공동과 아미를 강탈한 현신장 셋이라면 이쯤에서 무인답게 나설 줄 알았소. 한, 심, 하, 군!”
말을 분지르듯 뚝뚝 끊어 꾸짖으니,
그야말로 당장 맞붙어 싸우자는 도발.
당연히 현신장 셋의 안색이 변해 뛰쳐나갈 참인데.
황 학사가 얼른 손을 내저어 뒤를 말리면서 오만상을 썼다.
대체 뭘 믿고 저러나? 절세검왕이랍시고 정말 저 혼자서 현신장 셋을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아무 소리 없이 구경만 하는 풍진삼우도 영 의심스럽고,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평소에 뛰어난 머리를 자부하며 냉정하게 사물을 대하던 황 학사도 일순간 어찌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해원기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도발을 거듭하는지 미처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