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폐침망식(廢寢忘食) (3)
오소민이 탁자를 짚으며 눈을 깜빡였다.
“여기, 호림(狐林)은 아예 사람들이 꺼려 왕래도 하지 않는 곳인데. 수상한 자들?”
호림. 여우가 출몰하는 숲이란 건 개방도들이 자기들끼리 이 낙양 분타를 부르는 이름이다. 낙양 북쪽의 공동묘지인 망산보다 더 인적이 없는 장소거늘.
탄석의 경보가 수상한 자들이라고 했으니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는 의미. 그런 자들이 목적 없이 나타났을 리 없고, 더구나 지금은 낙양 분타가 아니라 개방의 방주가 있는 총단이 아닌가.
단삼육도 호리병을 허리춤에 묶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장안 분타의 비합전서를 받은 후로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긴 했지만, 개봉이 아니라 이곳 낙양의 용문석굴이라. 딱히 관부에서 흘러나온 소식도 없었는데. 음, 방주 사형.”
오소민과 단삼육이 번갈아 말하며 쳐다보자,
금정령이 밤송이 같은 수염을 슬쩍 문질렀다.
“그래, 공교롭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느 쪽 손님인지 본 방의 궁가사십팔걸(窮家四十八傑)이 각 분타로 파견된 사실을 아는 걸까? 흐음.”
단삼육과 오소민이 똑같이 인상을 굳혔다.
궁가사십팔걸은 이십여 년에 걸쳐 길러낸 개방의 정예. 그동안 총단 직속으로 노출을 피해왔으나 강호의 정세가 심상치 않기에 얼마 전부터 중요한 분타에 나누어 배치했다.
단삼육이 일월표국의 국주인 일행천리표 이소천을 통해 장안 분타로 보낸 궁가십걸이 화산의 사건에 큰 힘이 된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덕분.
그러나 그렇게 사방으로 지원을 보낸 탓에 총단의 힘은 당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고.
설마 수상한 자들은 이 기회를 틈타 개방의 총단을 직접 건드릴 셈인가.
오소민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개락일통이라고 해도 분타의 위치나 언제 총단이 되는지는 본 방에서도 기밀이고. 강호에서 이름난 정보통이라도 모를 사항…….”
“칫, 강호에서 이름난 정보통보다 더한 자들이 있잖니.”
단삼육이 혀를 차며 말을 끊고,
금정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말이 끊긴 오소민이 잠깐 멍했다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왜 이렇게 멍청해진 거지? 어젯밤까지 사형들과 의논했던 내용을 다 잊어버리고 당황해버렸다.
천하를 모조리 감시하려는 자들. 바로 동창이 있잖은가.
이렇게 멍청해진 건 전부 사형들이 이상한 얘길 꺼낸 탓. 오소민이 단삼육을 홱 흘겨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한 소리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방주 사형이 일어서는데 함부로 입을 놀리긴 뭐해서.
금정령이 건물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누군지 몰라도 거지 소굴까지 친히 왕림하셨는데 주인 된 도리로 나가보지 않을 수 없구나. 호법장로는 나를 따르고, 순행장로는 결승(結繩)과 뇌기(牢記) 양당(兩堂)을 통솔해 총단을 지켜라.”
엄숙한 목소리.
단삼육이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이고,
“예.”
판자 아래의 지하에서,
“방주의 명을 받습니다!”
서너 명이 힘차게 답하는 소리가 나니.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려던 오소민도 할 수 없이 포권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네. 방주의 명을 받습니다.”
낡은 건물의 지하실엔 빽빽한 숲과 절벽으로 빠지는 암도가 연결되어 있고, 그곳에 총단 직속의 사개 당(堂) 중 둘이 각지의 정보를 수합하여 정리하고 있다.
방의 업무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던 오소민으로선 수하를 거느리고 총단을 지키는 임무가 영 불편했지만,
이건 대사형 이전에 방주의 지시.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금정령이 걸음을 옮기며 오소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가까운 일부터 처리해야 하지만, 왜 지금인지도 알아야겠지. 막내의 뛰어난 지혜로 계속해 들어오는 정보를 살피면 그 이유가 드러나리라고 본다.”
한껏 낮춘 음성과 입가에 매달린 미소.
그냥 집이나 지키라는 게 아니었다. 결승은 각지의 제자들을 연결해 소식을 모으는 일, 뇌기는 이렇게 모인 정보를 정리하는 일을 맡는 조직.
수상한 자들은 용문석굴에 많은 관병이 집결한다는 소식과 함께 이 총단 부근에 출현했다.
경영 외에도 연을 날리는 방연(放鳶)이나 쇠를 두드리는 격경(擊磬)의 신호가 이어질 터. 멀고 가까운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이 변화가 어떤 관계가 있을지.
포권의 예를 차리던 오소민이 황연히 깨닫고 눈을 반짝 빛냈다.
“알겠습니다.”
금정령은 오소민을 믿고 일을 맡긴 것이다.
방주를 따라 걷기 시작한 단삼육도 오소민에게 히죽 웃는 얼굴을 보였다.
두 사람이 낡은 건물을 나와 댓돌을 밟자마자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앞에 이르렀다.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사십 대 장한. 짧게 자른 머리칼에 바위처럼 단단한 인상이고, 몸에 걸친 것은 비록 물이 빠지고 곳곳을 기운 남루한 옷이긴 해도 상당히 깨끗한 편이었다.
두 손으로 받쳐 든 건 육 척 길이의 대나무 막대기.
금정령이 그 대나무 막대기를 받아 쥐면서 물었다.
“상황은?”
“호림에 든 자들은 총 육십 명. 흑의에 검은 복면, 손에 든 독특한 경병(輕兵)이 동창의 번역(番役)으로 보입니다. 정확히 이 기슭을 목표로 한 듯하여 오웅(五雄)이 낙양 분타의 형제들을 옆으로 돌리도록 했습니다.”
“수고했다.”
간단히 치하한 후에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사십 대 장한도 냉큼 일어나 뒤에 붙었다.
방주를 호위하는 수신오웅(隨身五雄)의 첫째 정의개(淨衣丐). 간결하고 명쾌한 보고를 들은 단삼육이 허리춤의 호리병을 슬쩍 문질렀다.
“동창이 금의위에서 넘겨받아 키운 것들이로군요. 열두 띠로 이름을 붙여 한 조(組)마다 네다섯 명이라던데, 육십 명이면 십이 개조가 다 나왔을까요. 당두라는 조장급은 검기성형을 이룰 수준에, 꽤 묘한 병기를 쓴다고 들었습니다.”
오소민이 건물 안에서 ‘강호에서 이름난 정보통’이란 말을 했으나,
개방이야말로 당대에 가장 뛰어난 정보력을 지녔다고 해야 한다. 천하 각지에 거지가 없는 곳은 없으며, 하오문까지 동원해 온갖 소식을 다 얻을 수 있으니까.
금정령이 죽장을 품에 안으며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렇다고 번역 육십 명으로 본 방의 총단을 칠 생각을 했을까? 본 방을 지나치게 우습게보았던지, 아니면.”
말을 아끼면서 성큼성큼 보폭을 늘이고,
단삼육과 정의개도 좌우로 나뉘어 그 뒤를 따랐다.
더 따져볼 필요가 없다.
천하제일대방의 방주가 이렇게 직접 나왔으니.
호림은 워낙 빽빽한 숲. 그래도 짐승들이 다니는 길이 있고, 썩거나 부러진 고목 때문에 드물게 좁은 공터가 생기기도 한다.
언덕 기슭에서 일 각 정도 내려가자 벌써 검은 그림자들이 이곳저곳에 보이기 시작해,
금정령이 죽장을 가볍게 땅에 꽂고 손을 모았다.
“길을 잃고 들어왔을 리 없으니. 어디서 온 친구들이요?”
그다지 크지 않아도 기백이 단호한 음성. 주변의 나뭇가지가 우수수 흔들리자, 몰려오던 흑의인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들도 별로 기척을 숨길 생각이 없었던 듯 다들 손에 든 병기로 길을 열며 오던 중.
복면 속의 시선이 일제히 금정령을 향하고,
좌측에서 한 사람이 혼자 가로질러 다가왔다.
“개방의 방주, 협개 금정령이지? 과연 여기가 개방의 총단이 맞군.”
호리호리한 체구에 콧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
똑같이 흑의에 복면 차림이라 딱히 구분되지 않지만, 삼사 장 거리의 좁은 공터를 사이에 두고 금정령의 정면에 섰으니 우두머리일 터.
빽빽한 숲을 미끄러지듯 가로지르는 신법도 평범하진 않다.
금정령이 모았던 손을 풀며 빙긋 웃었다.
“맞소. 이곳이 본 방의 총단이고, 앞에 나선 이 사람이 바로 방주를 맡은 금 모요. 그쪽은 죄다 얼굴을 가려서 아예 내력을 알려줄 마음이 없는 것 같구먼. 그럼 질문을 바꾸지, 뭐 하러 거지 소굴을 찾아왔소?”
말을 하는 도중에도 주위에 차츰 흑의인들이 많아지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
우두머리 흑의인이 복면 속의 눈을 가늘게 떴다.
“흐, 대담하군. 뭐, 거지들의 소굴을 찾아올 이유는 딱 한 가지지. 모르겠나?”
그 또한 금정령에 지지 않을 느긋함을 보이곤, 바로 답을 잇는다.
“더럽고 천한 것들을 구제(驅除)하려는 거야. 흐흥.”
야유의 코웃음까지 섞는데.
그러면서도 별로 손을 쓰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금정령이 미소를 머금은 채 전면을 죽 훑어보았다.
정의개의 보고로는 육십 명, 빽빽한 나무에 가려 다 보이진 않으나 대강 그 정도의 인원이 다 모인 듯하다.
손에 든 건 대부분 길이가 어중간한 검과 도. 십여 명 정도가 맨손이거나 쇠사슬 따위를 감았다. 어차피 이런 숲에서 암기나 쇠사슬은 무용지물. 그래도 우두머리의 도발에 맞춰 공격하려는 자세를 갖추는 자조차 없다.
금정령이 미소를 거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이거 참. 진짜 본 방을 아주 우습게 여겼나 본데. 어이가 없구나.”
그러면서 바닥에 꽂았던 죽장을 뽑아 들고 그대로 몸을 돌리자,
우두머리 흑의인이 조금 놀란 듯.
“에? 뭐야? 내뺄 셈이야?”
급하게 연달아 물음표를 덧붙인다.
금정령이 머리만 뒤로 돌렸다.
“더럽고 천한 거지를 구제한다고 했잖소. 보아하니 대단한 분들 같아서 근처의 유명한 부잣집으로 피신하는 게 낫겠소.”
인상을 쓰며 투덜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거지.
우두머리 흑의인이 눈을 몇 번 껌뻑거리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하, 천하제일대방의 방주요, 당대 무림에서 손꼽는 고수라더니. 그래서 강호의 평가 따위 믿을 수 없다고 하는구나. 뭐? 부잣집으로 피신? 하하하.”
돌연한 폭소에 금정령이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우두머리 흑의인은 손까지 내저으며 조롱을 이어갔다.
“같잖은 것들끼리. 네놈이 지금 용문세가로 도망가려는 거지? 무슨, 전통의 구주정문이 어떻고, 협의니 뭐니 떠들면서. 실은 전부 겁쟁이였구먼. 하하, 소용없는 짓일 게다. 용문세가든 어디든 다들 저희 앞가림도 하지 못할걸. 잘됐다, 오늘 너를 사로잡아 말도 되지 않는 천하제일대방이란 소릴 싹 지워버려야…….”
야유, 조롱. 대단한 고수라고 긴장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서 금정령에 대한 모욕이 점점 심해졌는데.
그러던 우두머리 흑의인이 자기도 모르게 말을 흐렸다.
다시 몸을 돌리는 금정령. 주름 잡힌 미간과 날카롭게 빛나는 안광, 그리고 바위처럼 굳은 표정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그렇군.”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돌연 서늘한 기운이 숲을 뒤덮고.
이어지는 큰 호령에 공간이 흔들린다.
“오웅!”
퍼퍼퍼퍼펑.
연달아 숲 전체로 이어지는 폭발, 빽빽하게 늘어선 거목의 높은 가지에 매달려 잘 보이지도 않던 물건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누런 연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와아!
그리고 함성과 함께 좌우에서 갑자기 들이닥치는 개방도들. 가느다란 대나무 끝을 예리하게 다듬은 죽창과 낫을 붙인 갈고리 창이 수십 자루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린 누런 연기에선 더구나 구역질을 참기 어려운 악취가 풍겨,
흑의인들이 일시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그 사이로 죽창이 찌르고 갈고리 창이 당기니.
검기성형의 고수든, 동창의 독특한 병기든 힘을 쓸 틈을 주지 않았다.
“으악.”
“컥.”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연기 속에서 거듭되는 비명.
그리고 공중에서 단삼육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뒤를 맡겠습니다.”
단삼육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정령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날아갔다. 나무 사이를 헤엄치듯 단숨에 멀어지는 신형.
단삼육이 사라지는 금정령의 뒷모습에 히죽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유룡보(游龍步)를 대성(大成)하셨군. 자, 이 얼뜨기들을 어디까지 구제할까?”
오소민의 외호를 유룡개라고 지은 건 금정령이 창안한 유룡보를 직접 전수했기 때문. 오랜만에 보는 사형의 보법에 흐뭇해하면서 단삼육은 우두머리 흑의인이 지껄였던 구제라는 단어도 잊지 않았다.
진짜 같잖은 것들이 누굴까. 감히 개방의 총단에 기어들어 와 방주에게 시건방을 떨다니.
강호의 예법도, 무림의 도리도 전혀 모르는 작태가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이들이 이 호림을 침범한 건 발을 묶기 위함이었다. 개방만이 아니다. 용문세가도, 가까운 소림이나 멀리 무당에도 같은 수작을 걸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배경은 아마도 용문석굴.
금정령은 오소민이 같은 결론을 얻었을지 확인하기 위해 서둘렀고, 단삼육 역시 마찬가지.
사실보허(瀉實補虛)의 신공을 끌어올리며 취기 어린 두 눈을 부라렸다.
세상 물정 모르고 설치는 동창의 졸개들을 당장 요절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