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폐침망식(廢寢忘食) (2)
낙양성에서 동남쪽으로 빠지는 언덕. 만안산(萬安山) 끄트머리가 이수(伊水)를 만나 끊기는 곳은 우거진 숲으로 덮였다.
아름드리 거목이 빽빽하게 이어져 자칫하면 길을 잃고, 뚝 떨어진 절벽을 만날 수도 있는 험한 지형.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는 누각이나 정자를 세우면 주위의 경관을 한눈에 들일 만한 명당이라.
아주 옛날에는 고관대작이 작은 별장을 지었다고도 하고, 고승의 암자나 성현의 사당이 있었다고도 전해지지만.
낙양성과 가까워서 나무꾼도 함부로 들이질 않으니 자연히 인적이 끊길 수밖에.
인적이 끊기면 짐승이 모이기 마련. 여우가 왕 노릇을 하고, 너구리가 수시로 출몰하며, 객사한 시체를 함부로 버려 온갖 괴이한 풍문까지 떠도는 터라.
낙양 북쪽 망산(邙山)보다 더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거지들이 밤중에 숲 안팎을 왕래하는 걸 누가 알아채겠는가.
우거진 숲의 가장 깊은 곳, 언덕 기슭에 기댄 낡은 건물 한 채.
기둥과 지붕만 간신히 남아 본래 별장이었는지, 암자였는지, 사당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으나.
이 낡은 건물이 바로 개방의 낙양 분타.
하지만, 강호에서 가장 특이한 방파답게 개방은 개봉과 낙양을 번갈아 총단으로 삼는 관례가 있어서.
이번 여름에는 개방의 총단이 된다.
오소민이 건물 앞의 형태만 남은 댓돌에 털썩 주저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여름의 우거진 숲. 따가운 볕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늘이 져서 더위에 지친 거지들에게는 딱 좋은 휴식처.
그나마 이 낡은 건물에서만 손바닥만 하게 하늘이 보인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쨍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어지간하겠네. 슬슬 비가 올 때 아닌가?”
달리 의미를 두지 않은 혼잣말인데,
바로 뒤에서 타박이 날아왔다.
“어따, 거지가 비를 기다려?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끄윽.”
취개 단삼육이 거창한 트림과 함께 오소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까치집 같은 머리에 낡은 거적의 정통 거지. 백의 단삼에 소요건으로 단정하게 머리를 정리한 오소민과는 천양지차의 차림새로,
손때가 반질반질한 호로병을 불쑥 내밀었다.
“한 모금 할래?”
“아, 됐네요. 밤새 홀짝거리더니 아직도 남았수? 젊었을 적엔 덜 취한다고 소취(少醉)라고 했다면서 이젠 작정하고 마시는구려.”
오소민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단삼육이 호로병을 도로 자신의 입으로 당기다가 키득거렸다.
“크크, 그거야, 사부가 불취(不醉)라는 명호니까 나는 좀 줄여서. 아니지, 그때는 젊었으니까 젊을 소(少)를 붙였던 거고. 뭐, 사부가 떠난 후로는 술 마시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잖냐. 게다가 멍텅구리 화상이나 심통쟁이 도사가 어찌나 속을 썩였는지.”
툭하면 나오는 핑계. 다른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오소민이 시선을 돌리려는데.
“해 소협을 놔두고 온 게 마음에 걸리니?”
슬그머니 묻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감추기 어려웠다.
오소민이 어렸을 때부터 돌봐주었던 이사형. 대사형인 방주도 느지막하게 얻은 막내를 예뻐했지만, 단삼육은 거의 업어 키우는 심정이었을까.
이렇게 오소민의 속마음을 잘도 알아차리곤 했었다.
오소민이 얼른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왜. 고구마 대장을. 아, 그리고 계속 해 소협이라고 할 거요? 스물여덟이나 먹은 친구를.”
얼버무리는 걸 본 척도 하지 않는 단삼육. 호로병을 흔들며 시선을 멀리 던진다.
“하긴. 다 큰 어른이니까 이젠 해 대협이라고 해야 하나. 입에 영 붙질 않아. ‘묵 대협’이라고 불렀던 기억 때문이기도 하고,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사부인 묵 대협과는 전혀 다르거든.”
오소민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전처럼 자신을 슬슬 놀려먹을 줄 알았더니, 이 술귀신 사형이 웬일로 분위기를 잡나.
그러고 보니 사부와 사형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얘기는 많았어도, 해원기의 사부라는 그분을 직접 뵌 적은 없다.
“어떤 분이셨는데요?”
“되게 무서운, 이건 좀 어울리지 않지만, 그렇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냉혹하고 까다로우며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고. 그러나, 난 처음부터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지. 그런 평가는 전부 묵 대협을 겁내는, 그런 죄를 지은 놈들이 붙인 거라고.”
“다른 느낌?”
“음. 남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사람. 어려운 이를 돕고, 힘없는 이를 지키고, 믿어주는 이를 아끼고. 그러느라 자신을 돌볼 틈조차 없었던. 사소한 아픔도 보듬어주려고 애쓰다가. 꿀꺽.”
말소리가 가라앉더니 호로병으로 그 입을 막는다.
옛 생각에 울적해졌나.
귀를 기울이던 오소민이 묘한 시선으로 단삼육을 보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럼 해 형은 자신보다 남에게 엄격한 건가? 이건 욕이잖아요.”
전혀 다르다고 했으니.
단삼육이 입에서 호로병을 떼며 다시 키득거렸다.
“크크크, 그렇게 되나. 이 얘기가 아니었는데. 네가 불쑥 묵 대협에 관해 물으니까 얘기가 꼬이잖아. 전부 네 잘못이라구.”
웃다가 눈을 부릅떠 공박하고. 이 정도면 술주정인데.
어이없어하는 오소민을 똑바로 보면서 단삼육이 먼저 말을 이어갔다.
“그게 아니라. 에, 해 소협은 되게 순하잖니.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함부로 손을 쓰지도 않잖아. 오죽하면 네가 고구마 대장이라고 별명까지 붙였을까. 뭔지 모르게 속을 꽉 닫아놓은 것 같달까. 억지로 기운을 내긴 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무림에 나선 이유도 대첨산 화전민 마을의 흉수를 찾아내려는. 쳇, 모르겠다!”
한바탕 설명을 늘어놓을 것 같더니 혀를 차며 돌아앉아서,
까치집 같은 머리를 긁어대는 통에 오소민이 얼른 상체를 젖혔다. 저 더러운 머리카락 속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습관처럼 인상을 쓰려던 오소민이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술귀신 사형이 어정쩡하게 끝내버린 얘기, 워낙 요령부득이라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게 ‘느낌’이라고 했다.
해원기가 그 사부와 다른 점. 그게 단순히 온순함과 냉혹함의 차이 때문인가.
해원기도 어려운 이를 돕는다. 힘없는 이를 지키려 한다. 매년 분하의 막힌 수로를 혼자서 뚫었다고 했잖나.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황하의 범람을 막아내려고.
하찮은 장거리 쾌체 일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요리 솜씨도 늘었겠지. 믿고 맡겨준 이들을 위해서.
무림에 나서지 않았다고 의로운 협행을 저버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속을 꽉 닫아놓았다. 억지로 기운을 낸다. 막연하게.
잘 알지도 못하는 화전민 마을이 몰살당한 일. 우연히 들른 호중객잔에서 마주친 사건에 휘말린 까닭에 그 책임을 지려고.
더러운 단삼육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오소민의 눈이 문득 동그래졌다.
‘음? 화산에서 마 장문인에게…….’
머리를 스치는 해원기의 사부가 해주었다는 말. 그건 분명 차별애(差別愛)의 의미였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입이 저절로 열린다.
“그게, 정(情), 정이라고. 부모, 형제, 자식의 정. 이사형, 해 형의 부모는, 아니, 사부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엥?”
갑자기 묻는 소리에 멀뚱멀뚱하게 돌아보던 단삼육.
뭔 소린가 질문을 되새기면서 오소민의 묘한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허, 그렇구나. 누구도 감히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구나. 이렇게 세월이 지나도록.”
장탄식.
낡은 건물 안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두 사람을 불렀다.
“단 사제, 막내. 그만 들어오너라.”
단삼육을 사제, 오소민을 막내로 부르는 음성.
두 사람이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대 개방 방주인 협개(俠丐) 금정령(琴定領)이다.
네모난 얼굴, 부리부리한 이목구비, 하얗게 센 머리칼을 헤진 천으로 묶고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은 밤송이처럼 삐죽삐죽. 환갑을 지나고도 주름이 별로 없는 얼굴엔 혈색이 불그레하다.
단삼육과 오소민이 예를 갖추자 얼른 손을 내젓고,
“어서 앉거라.”
작은 원탁에 자리를 잡으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깊이 가라앉았다.
단삼육이 손을 풀면서 한쪽 구석을 힐끗거렸다.
“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끝났습니까?”
낡은 건물이라도 벽돌을 고르게 편 바닥. 그 한쪽 구석에만 커다란 나무판자로 덮은 지하실이 있고, 그 지하실이 실제 총단으로서 기능한다.
금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타주 몇을 부르고, 인원을 점검해 연락을 취하는 정도니까. 아직 용문세가의 회답도 오지 않았고. 소림과 무당은 시간이 더 걸리겠지.”
“멍텅구리와 심통쟁이는 평소에 수시로 귀찮게 달라붙더니 막상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먼. 칫.”
불만스럽게 혀를 차는 단삼육을 놔두고,
금정령이 오소민에게 말을 건넨다.
“좀 쉬었느냐? 장안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네가 돌아와서.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탔다고?”
관심과 애정이 질문에 오소민이 머쓱한지 뺨을 긁었다.
“뭐, 오랜만에 상쾌하게 달려본 건데요. 푹 쉬었습니다.”
술귀신 이사형과는 달리 상당히 점잖은 대답. 방주인 대사형은 아무래도 어렵다. 과연 이 대사형의 질문은 끝나지 않아서,
“비합전서(飛鴿傳書)가 무색하게 달려왔지. 우선은 네가 가져온 소식이 중요하기에 잠시 제쳐두었다만, 정말 괜찮은 거냐?”
다시 한번 묻는 말에 오소민이 뺨을 긁던 손을 내려야 했다.
진평현 수차제의 사건부터 시작해서 화산에서의 싸움, 그리고 화청궁에서 겪은 위험까지. 동창이 주도한 일련의 사태, 그리고 밀각의 존재와 괴이한 고수들의 등장 등.
당금 무림의 상황을 파악할 중요한 내용이라고 직접 총단에 보고한다는 이유를 댔지만.
장안에서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타며 달려온 게 평범하게 보일 리 없다.
“화산검협과 청령선고. 화산파와 종남파의 장문인에 비마방의 위 방주도 계셨고. 일월표국의 이 국주에게 부탁해 궁가십걸을 보냈었다. 그런데 막내는 장안분타에 들르자마자 곧장 돌아왔으니. 방주이기 전에 사형으로서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음이 많이 쓰이더구나.”
차분하게 이어지는 금정령의 말에,
오소민은 난감한 표정이, 단삼육은 호로병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거리기 시작한다.
부드러우면서 꼼짝 못 하게 다그치는 말투. 나이를 먹으면서 금정령이 자주 써먹는 화법이었으니까.
결국 오소민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별거 아닙니다. 화청궁에서 오온존자라는 자에게 독상을 입었지만, 바로 해독되었고. 혹여 여러 사람에게 괜히 부담될까 싶어서. 그리고 이 정도의 사태라면 당연히 제가 직접 사형들을 뵙고 의논하는 게 맞지요. 나름 순행장로로서 충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방주이기 전에 사형’이라고 했더니 ‘나름 순행장로’라고.
그럴듯한 대답에도 금정령이 슬쩍 단삼육을 보았고,
단삼육이 한쪽 눈을 찡긋하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소민, 아니, 사매(師妹)야.”
움찔.
오소민이 눈을 크게 떴다. 대사형이 이름을 부른 것도 한참 전, 그리고 사매라는 호칭은 처음 입문할 때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조금 전 단삼육도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더니,
사형들이 왜 이러나.
막내가 변했다.
그걸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단삼육이었고, 오소민이 개봉에서 잠시 총단에 들렀을 때 금정령도 알아챌 수 있었다.
개방 팔선이 마지막으로 키운 제자. 입문할 때, 겁에 질린 눈망울로도 자신의 이름과 처지를 당차게 밝히던 꼬마 계집애. 스스로 여자를 버리고 개방의 일원이 되겠다는 결심도 받아주었지만, 어떻게든 어린 사매를 보호하려고 했었다.
되도록 개방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면서.
그렇게 순행장로인 유룡개가 탄생했다. 개방 내부에서도 신비로 일컬어지는.
오소민도 그걸 알았는지. 그저 명목뿐인 장로, 간혹 사형들에게 인사로 찾아오는 일 외에는 방의 일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그러던 사매가 변했다. 한 사람을 만나고, 함께하면서, 심지어 걱정하다 못해 아예 계속 옆에 붙어 다닐 생각까지.
그 사람이 바로 해원기였다.
‘막내 사매의 나이가 금년에.’
사랑하는 막내를 평생 홀로 살게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사형들이다.
오소민이 크게 떴던 눈을 홱 옆으로 돌렸다.
“이게 무슨. 왜 갑자기…….”
아무리 방주 사형 앞이라도 어처구니가 없다며 투정을 부릴 셈이었는데.
덜컥.
지하실을 덮은 판자가 옆으로 밀리고,
“방주, 경영(鏡影)과 탄석(彈石)의 급보입니다.”
빠른 목소리가 울리자 금정령이 안색을 고쳤다. 경영은 거울 같은 거로 빛을 비추어 소식을 전하는 방법. 탄석은 가까운 곳에서 돌을 던져 경보를 울리는 신호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동시에 급보가 이르다니.
“무엇이냐?”
“용문석굴(龍門石窟)에 돌연 관병 수백이 몰리고. 총단 주위에 수상한 자들이 출현했습니다.”
두 가지.
단삼육과 오소민도 벌떡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용문석굴에 관병 수백이 몰리는 것도 의아한 일이지만,
개방의 총단은 강호에서도 아는 이가 극히 적은 기밀이거늘.
한꺼번에 들이닥친 소식 때문에 사형제, 아니, 사형매(師兄妹)의 중요한 대화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