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폐침망식(廢寢忘食) (1)
턱.
영락검선이 괴상한 지팡이를 탁자에 기대놓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원기가 유항을 따라 들어왔던 그 다루의 내실.
“허어, 요즘 거지는 참 다르구먼. 종남산에 있는 노도의 방보다 훨씬 고상하잖아. 좋은 옷 걸치고 비싼 차 마시는 거지라니. 흠흠, 개방도 많이 변했네.”
따라 앉은 해원기가 묵묵히 탁자를 쳐다보자,
영락검선이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너무 염려하지 마오. 분타주가 해롱거리는 바람에 큰 변고 없이 지나갔고. 음, 장안 전체의 사술은 이미 깨진 판. 혹시 모를 후유증은 나중에 노도가 정리하리다.”
비로소 정신이 든 듯 고개를 쳐든 해원기.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그런데 노진인께 지나친 폐를 끼쳐서.”
만면에 송구한 기색이 가득하다.
분타주 유항이 군방대청에서 술법에 걸렸던 탓일까. 유탕대진도가 시작되자마자 정신을 잃었다가 해원기와 영락검선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깨어났고.
분타의 제자들도 장안의 상황을 살피려고 전부 각지로 흩어진 덕분에 황가약포처럼 서로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대로 무공을 익힌 이들, 개방의 분타주를 맡은 자까지 버티지 못한 사술. 비록 깨닫지 못한 채 오랜 시간에 걸쳐 술법에 당했기 때문이라지만, 그만큼 술법이 강력하다는 방증이다.
영락검선이 손수 청령진기와 태을검명으로 삿된 기운의 잔재를 씻어주지 않았다면, 개방 분타는 완전히 마비되었을 터.
큰 도움을 받은 유항은 지금 뒤처리에 눈코 뜰 새도 없어서,
해원기가 영락검선을 이 내실로 안내해야 했다. 그러나 차 한 잔 대접할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무공만이 아니다. 영락검선이 평생을 수련한 도행(道行)이 없었다면 이리 쉽게 개방 분타를 복구하지 못했을 것이요, 또 이후의 일에도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
백세를 바라보는 고령의 도인에게.
비로소 식은 찻물이라도 찾으려고 일어서려는데.
“그냥 계시오. 못난 제자들 앞에서야 엄살을 피우지만, 노도는 아직 멀쩡하다오. 그보다 회주는.”
영락검선이 말리며 해원기를 똑바로 보았다.
“바로 갈 셈이요?”
해원기가 엉거주춤하다가 표정을 고쳤다.
“네.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정 형이 전해준 소식도 그렇고…….”
맺지 못한 말. 영락검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낙양이 또 이 장안처럼 될 수 있으니까. 음, 현신장이라고 했지요? 그자들이 갔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외다. 그나저나 사천 쪽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걸 전혀 모르고 지냈다니. 요 계집애, 아, 장문인이 오면 한소리 해야겠구먼.”
해원기는 영락검선과 오는 동안 그간 겪었던 일들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했고.
과거의 난세를 겪었던 노도인의 감각은 남다른 면이 있달까, 대번 중점을 잡아낸다.
공동파의 요술사, 아미파의 오온존자와 진여신승. 동창에서 현신장이라고 불리는 이 셋이 고력사의 무덤을 발굴한 직후에 장안을 떠난 건 분명히 더욱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전혀 몰랐던 사실을 처음 들으면서도 영락검선은 놀라기보다는 그 의미를 찾으려 했고,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강호의 상황에 무지했던 종남파의 현실이 답답했던 듯.
“우리 장문인은 본디 당가의 직계. 그러나 노도 밑에서 출가를 결심했을 때부터 당가와는 인연을 끊고자 했소이다. 그렇게 눈길을 돌리고 귀를 막았던 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았구려. 쯧쯧.”
굳이 핑계를 대려는 게 아니었다. 사람마다 각자 어려운 사정이 있기 마련이요, 청령선고 당민지에 관해서는 해원기도 충분히 들었던 내용. 영락검선이 혀를 차는 배경은 따로 있었다.
“근래에 당가가 예전의 성세를 되찾는 듯하단 소문을 얼핏 들었으나. 그러다 보면 그저 자기만 생각하다 시야가 좁아지기 십상이지. 당 가주가 젊은 만큼 고집이 세기도 할 거고. 육(陸) 형이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게 아쉬울 따름이오.”
육 형.
과거의 난세에 영락검선과 함께 사마와 대적했던 노검객 중의 한 명. 파사검(破邪劍) 육지상(陸之常)은 난세가 종식되자마자 기진맥진한 것처럼 세상을 떴다고 했다. 제대로 된 후대도 남기지 못하고.
해원기가 엄숙한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나치게 심신을 혹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육 노협을 뵙지 못한 저로서도 아쉬움은 크지만, 당세의 일은 당세에서 책임을 져야 마땅하겠지요. 이렇게 늦게 노진인을 뵙고 귀찮음만 가져온 저를 꾸짖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정중하게 다시 사죄의 심정을 밝히자,
영락검선이 얼른 손을 내젓는다.
“아니, 이건 회주의 오해지, 오해. 나 원,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노도가 나이를 먹으니 말이 자꾸 헛나가는 모양이요. 태상노군, 태상노군.”
무색한 얼굴로 연신 신명을 외우지만, 역시 얼굴엔 한 줄기 비애가 스쳐 간다.
무너진 문파와 집안을 되살리려는 상황이 종남파라고 다르랴.
사천 쪽에 육지상이 있었다면 하는 헛된 바람이 불쑥 드는 것도 세월이 어느새 물 같이 흘렀기 때문이다.
신명을 외우던 영락검선의 입에서 기어이 한숨이 나왔다.
“후우, 장문인으로선 이 늙은 사부를 걱정해서 숨겼겠으나. 노도는 공손 형이 죽은 것도 다 안다오. 교 형도 떠났고 남방 먼 곳으로 숨어버린 황 형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눈 한 번 껌뻑하면 십 년, 눈이 두 개니까 이십 년이란 걸까. 그렇게 잠깐이었는데도 어느새 세상은 과거를 다 잊어버렸소. 수문대관에서 묵 대협이 베풀어주었던 검주포무(劍主布武)의 은혜조차. 결국…….”
입맛을 몇 번 다시면서 기다란 수염을 가볍게 턴다.
“또 회주만 동분서주하게 되었잖소. 허허허, 괜한 소리는 이 정도만 하지요. 자, 일단 낙양은 여기보다 나을 거외다. 소림, 무당, 개방이 다 멀쩡하니까. 회주는 되도록 이들과 먼저 연락을 취하시오. 가능하다면 약왕당의 단목 당주를 조속히 만나 의논하시고. 에.”
세상을 오래 산다는 게 이런 의미일까.
위욱경이 마린에게조차 숨겼던 공손무원의 죽음도 알면서 모른 척. 과거의 동료를 다 떠나보내고 늙은 몸을 이끌어 다시 강호에 발을 디뎠으면서도 그저 대국(大局)을 살피면서 해원기의 앞길을 알뜰하게 챙기려고만 한다.
처음 해원기를 만났을 때처럼 도로 노파로 돌아간 듯.
괴상한 지팡이를 짚고 먼저 일어나면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무엇보다 믿음직한 벗을 항상 곁에 두셨으면 좋겠소. 검주에게 맹주가 있었던 것처럼. 따라가지 못하는 노도의 노파심이지만.”
영락검선도 자신이 노파처럼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생각 같아서는 낙양까지 같이 가고 싶지만, 청령선고와 마린을 기다려야 장안을 수습하고 전력을 정비할 방안이 서지 않겠나.
떠나기로 한 사람을 더 붙잡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원기를 보내는 안쓰러운 마음이 드러났을 뿐.
해원기가 장안성벽을 넘으며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남의 진평현에서 오소민과 넘어온 길을 거꾸로 되짚어가는 셈이지만, 화산을 들를 필요가 없으니 곧장 상락(商洛)을 향하는 게 더 빠르다.
아직 새벽이 되기 전이라 짙은 어둠이 경공을 펼치기엔 더 적합해서,
성벽을 넘자마자 속도를 올리는 해원기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그자들이 고력사의 무덤에서 감로보병을 찾았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 감로보병이 뭐에 필요하기에? 어째서 장안에 들르지도 않고 낙양으로 급행하라는 명이 떨어졌을까?’
정록의 전음이 가장 먼저 알린 소식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해원기에게 마지막 수정지력을 전하고 보병정 바닥에 나뒹굴었던 그 작은 병. 지하의 종유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면서 틀림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여겼거늘.
혼란한 와중에도 어떻게든 손에 넣었던 모양. 그렇지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당나라 이백이 마련한 장소였다. 해원기가 발견할 때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지나서 심지어 종유굴의 지하 기관이 수명을 다했을 정도. 그런데도 단 한 방울의 황하지정 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신기역의 지식도 없으면서 수정지력을 기대한단 말인가.
더구나 고력사의 무덤에서 지휘하던 이는 이 대부. 대부들은 도로 장안으로 돌아왔으면서 현신장만 따로 움직였다.
현신장 셋의 출현은 아직 섬서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공동과 아미를 거점으로 하는 자들을 섬서는 몰라도 다시 하남의 낙양까지 불러들이다니.
장안으로 돌아온 정록도 그저 현신장 셋이 낙양으로 급행한 것만 알았을 뿐, 그 이유는 이 대부에게도 비밀이었다고 했고. 상부의 지시라고 다들 복종하는 분위기에서 상부가 어딘지 물을 수도 없었을 터.
당장 떠오르는 건 장안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예상이었다.
양도양경은 밀각의 대부와 현신장이 몇 번이나 회합했다는 곳. 낙양은 특히 근처 개봉의 삼보별저가 회합 지점이었잖나.
‘설마 낙양 근처에도 신기역과 같은 보물의 소재지가 있다는 걸까? 그래도 현신장 셋만 불러들이는 건 이상해. 아무리 황제가 화청궁에 행차한다고 해도. 그렇게 따지면 밀각의 각주, 주국경에 예부니 공부니 하는 자들이 장안에 우글거린 이유도 불분명하다.’
아직 장안 전체에 공들여 베푼 유탕대진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동창의 움직임을 이해하기엔 여전히 모호한 점이 많고, 사안을 예측하고 대비하기엔 시간도 인원도 태부족.
휴식도 없이 밤을 도와 달리는 해원기의 얼굴이 펴질 수가 없다.
더구나.
불쑥 편지 한 장으로 작별을 고한 오소민이 향한 곳이 바로 개방 총단. 낙양 쪽이다.
화청궁에서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했었잖은가.
밤중에도 더웠던 한여름. 생각에 몰두하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해가 훤하게 뜨기 시작한다.
날이 밝아지면 더위도 더 심해지겠지.
그러나 해원기는 방향과 지형을 따지면서 되도록 인가를 피해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장안에서 낙양까지는 대충 계산해도 천 리가 넘는 먼 거리.
아무리 절정의 고수라도 쉬지 않고 달릴 수는 없다.
그래도 해원기의 시선은 앞을 향한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수정지력, 미앙보식, 풍뢰결, 신화검형, 그리고 체득한 온갖 기예를 다해 몸을 날릴 뿐.
‘현신장 셋이 어떤 길을 택했을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해야 한다. 노진인의 말씀대로 주위에 미리 알릴 필요도 있고.’
화산과 종남산이 동쪽과 남쪽으로 뚝 떨어져 있고, 성내에는 개방의 분타 외에 이렇다 할 문파가 없던 장안.
낙양은 다르다.
개락일통이라고 개봉과 낙양에 번갈아 총단을 두는 개방, 가까운 등봉현에는 소림사가 있고, 더 남쪽으로는 무당과 이어진다. 또 용문세가는 낙양 자체를 터전으로 삼는 집안.
사전에 대비하게 되면 큰 도움이 된다.
장안에서는 실로 아무런 준비도 할 새가 없었다. 제갈봉이 아니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터.
‘그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와룡제갈세가의 후인이라는 신분을 알게 되었지만, 어쩐지 이전보다 더 모호한 느낌이 든다.
오명을 뒤집어쓴 가문의 명예를 되찾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힘이 돼줄 협사를 찾아다녔다고 했으나.
유탕대진도에 당했다는 황가약포의 동료 셋을 서슴없이 쓰러뜨리던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오 형이 은근히 경계하기도 했지. 흐음.’
자신이 여자란 게 탄로 난 오소민이라 일부러 쌀쌀맞게 대했을 수도 있지만.
해원기가 입가를 살짝 내렸다.
문득 자신이 여전히 오소민을 ‘오 형’이라고 부른다는 걸 깨닫고서.
그럼 뭐라고 부른담.
‘오 소저? 오 낭자? 아니면 정 형처럼 오 소매? 허 참.’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 머릿속인데, 별걸 다 고민해야 한다.
생각이란 게 어떤 경우에는 한쪽에 몰려 계속 꼬리를 물기 마련.
제갈봉에게 거리를 두는 듯했던 오소민.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 유룡개라서 굳이 남자인 척해야 했을까. 과거에 방송서를 통해 정록에게 역형대법의 기초를 배워가면서까지.
제갈봉은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오소민이 남에게 밝히기 어려운 사연을 지녔을 거로 추측했었지.
그러고 보니 오소민은 특이하게 관부나 조정의 구성을 잘 알았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남자로 살아야 했고,
해원기에게는 끝까지 숨길 작정이었나. 누구보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라고 여겼는데.
친구.
불현듯 작별을 고한 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뜻일까? 여자라서?
‘우연히 만난 정 형은 오히려 선뜻 친구가 되어주었거늘. 터놓고 얘기하면 될 일을……,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정록을 떠올리면 생각의 초점이 바뀔 줄 알았는데,
달리면서 자신이 머리를 흔든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