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20화 (220/410)

제55장 민민불락(悶悶不樂) (4)

휘리리릿.

육조심동을 펼친 해원기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등 뒤에서 공격하던 이 대부와 감 대부를 무찌르고, 전면에서 나타육비를 펼치던 예부상서의 무리까지 날려버린 수미전단검법의 조사검결.

부드러운 듯 강하고, 느린 듯 빠른 이 연결은 바로 적멸검의 구현이었거늘,

연검대초가 이룬 검역의 한 점이 얼핏 흔들렸다.

그건 바로 해원기의 오른쪽으로 뛰어 공간을 기묘하게 벗어난 첨유진의 기척.

가슴이 뚫리고 목이 부러진 두 대부를 발받침으로 삼아 오조전법의 기세를 피하고선, 오골선으로 결계를 흩트린 듯.

다섯 번이나 공중제비를 넘는 독특한 신법을 확인하는 순간에 이미 나가떨어진 예부상서의 훨씬 뒤쪽으로 내려섰다.

종루에서 시작된 싸움. 해원기는 서둘러 영락검선 쪽으로 가려 했었기에 예부상서의 무리와 맞붙으면서부터 남쪽으로 움직였었다.

중간에 암습이랍시고 철필을 날렸던 여 대부가 그새 꾸역꾸역 앞으로 나왔던지.

고루와 종루의 중간쯤.

첨유진은 바로 여 대부의 곁에 내려섰다.

부채를 접으면서 일그러진 시선이 서너 걸음 앞에 널브러진 예부상서를 훑는다.

당당한 체구에 화려한 금포 차림이었던 예부상서가 마치 거대한 폭풍에 휘말리기라도 한 듯이, 전부 부러진 사지, 갈기갈기 찢긴 금포, 인사불성이 되어 입으로는 피를 줄줄 흘리니.

첨유진의 실눈이 바르르 떨다가 해원기를 향했다.

“예부제신(禮部諸臣)이 전부 당했고. 게다가 공부의 주부 둘까지. 피해가 막심하군. 과연 고천무쌍이란 이름에 걸맞은 검법이라고 해야 하나? 흐음.”

경운종을 지키던 둘은 공부의 주부, 나타육비를 펼쳤던 일곱은 예부의 상서부터 낭중까지.

전부 관직 이름을 붙였다고 여러 신하라고 하는 건가.

해원기가 검을 비스듬히 내리며 말을 받았다.

“밀각을 뺄 수는 없지. 이제 대부 하나와 각주가 남았다.”

등 뒤에 쓰러진 이 대부와 감 대부. 아직 고루 아래에 금의위 몇이 남았지만, 해원기의 눈에는 오직 여 대부와 첨유진뿐.

착 가라앉은 음성이 머리끝을 쭈뼛하게 하는데.

떨리던 첨유진의 실눈이 되레 차분해진다.

“내가 직접 나서고도 엄청난 손해를 봤으니 큰일일세, 큰일이야. 소위 각주라는 내가, 허, 벌써 두 번이나 당한 셈이잖나. 역시 풍운책보다는 용호방에 더 주목했어야. 예전부터 기록이 영 부실하다고 여겼거든. 특히.”

접은 부채 끝이 들려서.

“영세검주라는 부분 말일세. 도대체 검문십팔로(劍門十八路)와 만검지존(萬劍至尊)이 영세검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 오늘 비로소 조금 이해가 간달까.”

해원기와 영락검선을 번갈아 가리키며,

목소리와 말투도 평소로 돌아왔다.

오래 공들였던 유탕대진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데려온 고수들을 모조리 잃은 처지가 아무렇지도 않나.

허리가 굽어 지팡이를 짚고 조심조심 걷는 늙은이라더니.

영락검선이 어느새 해원기 옆에 지팡이를 세우며 피식 웃었다.

“허허, 그놈 참 희한하네. 이 지경이 되어도 또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가? 아 참, 불알 없는 놈이라고 한 건 취소다. 노도의 지팡이를 견딘 그 오골선에는 분명히 순양의 기운이 담겼으니까. 그 나이가 되도록 짝을 찾지 못했는지, 거의 동자공(童子功) 수준이던걸.”

해원기 대신에 대화를 맡으려는 게 아니다.

아직 젊은 검왕이다. 경험이 부족한 탓에 혹여 놓치는 구석이 있을까 해서 알뜰하게 챙겨주려는 마음.

전혀 궁색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첨유진에게 유의해야 하고. 또 해원기에게 미리 들었던 것과는 달리 순양기공을 지녔다는 사실도 넌지시 일러주었다.

황량도의 일부를 익혔다더니 어려서부터 동정(童貞)을 유지해야 하는 동자공 수준의 지극한 순양기공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해원기는 영락검선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나 보다.

“대부라는 칭호부터 그렇지만, 예부상서니 시랑이니. 동창에는 아예 육부(六部)를 차려놓았더냐? 감히 역심을 품었다. 이렇게 읽힐 짓거리로군.”

엄숙한 얼굴로 꾸짖는 말. 첨유진을 붙잡아 문초라도 하려는 건가.

과연 첨유진이 실눈을 깜빡이다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훗, 역심? 아아, 역시…… 흠, 이거 실례했구먼. 절세검왕이라고 해도 어느 수준으로 놓아야 할지 막막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실례에 실수까지 한 셈이지. 그러나 실책이 거듭되어서야 어디 밀각을 맡을 면목이 서겠나. 다음에는 실망하지 않도록 애를 써보겠으니. 그럼.”

실례, 실수, 실책, 그리고 실망.

잃을 실(失) 자를 어지간히 들먹여서가 아니라 작별을 고하는 말투라 해원기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다음?”

여기서 도주할 셈이냐. 해원기와 영락검선 앞에서 그런 망상을 품다니.

하지만.

스스스.

돌연 첨유진의 발밑부터 어둠이 확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첨유진과 여 대부를 집어삼키는 광경.

“헛! 어떻게 둔법이?”

해원기 곁에서 경계를 풀지 않고 있던 영락검선이 놀라서 급히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데.

“뒤처리는 부탁합니다. 하하하하…….”

두 사람을 집어삼킨 어둠이 그대로 흩어지면서 첨유진의 웃음이 아스라이 사그라들었다.

눈 깜빡할 새.

첨유진과 여 대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팍.

뒤늦게 바닥을 찍는 지팡이. 영락검선의 주름진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노도가 이미 진도를 봉쇄했거늘, 이게 어찌 된 노릇, 어?”

이제껏 여유롭던 말투가 확 뒤집힌 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구나 해원기 앞에서 멀쩡하게 상대를 놓친 꼴이니 당장 노기가 치솟을 판인데.

힘줄 솟은 영락검선의 손을 가만히 감싸는 해원기의 손.

“괜찮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말리는 통에,

영락검선의 얼굴이 이상하게 굳어버렸다. 화를 내야 하나, 같이 웃어줘야 하나.

뒤처리를 맡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장안의 중심가, 고루 아래에는 수백의 관병이 정신을 잃고 곯아떨어진 상태. 종루는 난간이 심하게 부서졌으며, 종루와 고루 사이에는 널브러진 몸뚱이와 핏자국이 낭자하다.

몇 명 남은 금의위가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뛰는 걸 본 이상, 여기서 더 머무르는 건 바보짓.

밀각의 대부든 예부상서든 일을 벌인 쪽이니 뒤처리도 그쪽에서 알아서 할 터.

해원기가 남쪽을 가리켰다.

“일단 자은사 터로 가시지요. 개방의 분타가 걱정됩니다.”

이 자리를 속히 피하면서 유항의 상황도 확인해야 한다.

영락검선이 얼른 표정을 고치고 지팡이를 들어 은한삼자를 가리켰다.

“너희 셋은 속히 동쪽으로 빠져서 장문인을 찾거라. 노도가 회주와 함께 가마. 괜스레 형적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장문인에게도 단단히 일러!”

쉰 목소리가 단호하게 명을 내리자 은한삼자가 급히 고개를 숙이곤,

“그럼 회주, 아니, 해 대협.”

“해 대협께 폐를 끼칩니다.”

“사존을, 아, 해 대협께 감사드립니다.”

자기들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 엉망으로 뒤섞이다가,

몸을 돌려 바로 몸을 날린다.

“이 돌대가리들이. ‘명심 봉행하겠습니다’라는 소리도 안 해? 나이는 전부 어디로 처먹었는지. 으이구.”

영락검선이 기가 막혀 탄식을 내뱉을 못난 꼴을 보이지만,

해원기는 오히려 미소를 더욱 짙게 머금었다.

“저 혼자 노진인을 모시는 게 불안하겠죠. 부럽습니다. 그럼, 제가 앞장서지요.”

머리 허연 육십 대라고 해도 백 세 고령의 영락검선에게는 그저 ‘돌대가리’로 불리는 제자들일 뿐. 시키는 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도 늙은 사부를 염려하는 순수함이 고스란히 보인다.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도, 영락검선이 곧장 해원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코웃음을 쳤다.

“흐흥, 부럽기는. 저것들이 처음에 회주를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친 격이라. 제대로 얼굴을 볼 낯짝도 없으면서. 맨날 산속에 처박혀있으면 절로 도리를 깨우칠 줄 아는 바보 멍텅구리들이라고.”

바보 멍텅구리.

자주 해원기를 놀려대던 단어. 얼핏 오소민을 떠올리게 했지만,

“음, 그 첨유진이란 놈. 회주가 일부러 놓아준 거요?”

바로 이어지는 영락검선의 질문에 해원기가 얼른 정신을 집중했다.

“알아보셨군요. 본래 어떻게든 생포해서 동창 밀각의 속셈을 알아볼 생각이었습니다만.”

“왜 생각을 바꾸었소?”

“놔주라고 하더군요. 친구가.”

“엥?”

기민하게 상황을 눈치 챈 영락검선이 주름진 눈을 껌뻑이는 걸 보면서 해원기가 목을 긁었다.

설명을 제대로 해야지. 말재주도 없는 주제에.

오소민이 있었다면 대번 타박을 주었겠다.

철필을 내던진 여 대부의 암습. 그건 사실 해원기의 주의를 끌려는 신호에 불과했다.

전신에 붕대를 감고 억지로 등장한 여 대부는 바로 정록이었으니까.

고력사의 무덤에서 중상을 입었다는 핑계를 대고 장안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뒤로 빠져있었지만,

해원기가 나타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여 대부로 화신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알게 된 사실이 적지 않았고,

이를 적시에 해원기에게 전해줘야만 했다.

현신장 셋이 고력사의 무덤에서 나오자마자 장안으로 돌아오지 않고 어디로 갔는지.

장안에 왜 밀각의 각주가 고수들을 이끌고 왔는지.

해원기가 군방대청에서 벌인 사건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첨유진을 여기서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걸.

그런 까닭에 어설픈 암습 후에는 감히 싸움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인 척하면서,

전음을 쉬지 않았다.

어떻게든 영락검선에 의해 봉쇄된 둔법을 복원하려고 했고.

본래 고사사예(古士四藝) 중 고화문(古畵門)의 절학을 이은 주장선의 전인. 역용뿐 아니라 진도에도 밝은 편이라 해원기가 검역의 결계를 폈을 때 충분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해원기가 정록을 위해 영락검선이 막아놓은 기운을 슬쩍 풀어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렇게 첨유진과 함께 암둔(暗遁)으로 도주한 것이었다.

영락검선이 엄청나게 긴 수염을 아예 한쪽 소매에 말아 쥐었다.

“호오, 그러고 보니 언뜻 들은 기억이 나는구려. 철금선생이 우연히 찾아냈다고, 직접 가르칠 여유가 없어서 방 원주에게 부탁했다더니. 벌써 그렇게 컸나? 아주 걸물이 되었구먼. 보통 담량이 아닌걸.”

거푸 고개를 끄덕여 감탄하고는,

“그런데 이놈들이 이번엔 낙양에서 또 사고를 칠 셈이다? 그럼 장안처럼 낙양에도 미리 수작을, 아니지, 회주의 말대로라면 양도양경에다 전부 삿된 술법을 걸어놓은 것 아뇨?”

해원기에게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인다.

해원기의 얼굴도 굳어졌다.

“여기 장안에 설치한 유탕대진도라는 게 좀 다르게 보이긴 해도 바탕은 유탕섭백대진일 겁니다. 정 형도 아직 다 알아내진 못했다고. 하여간 당금 황제의 행차까지 마음대로 정하는 게 동창이니. 고루의 북소리로 장안 전체를 홀리던 사술, 그러기 위해 관병 수백의 백력(魄力)을 썼다고 하더군요. 화청궁을 복원해 황제의 피서(避暑) 행궁으로 쓴다…… 무슨 암계가 숨어있는지 모르겠지만, 백력이란 게 영 귀에 거슬립니다.”

탁 트인 남방대로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빠른 속도.

사술이 깨졌어도 아직 장안은 괴괴한 적막에 빠진 상태고, 두 사람 다 상황이 급박하다는 걸 알기에.

그러면서도 대화는 멈추지 않는다.

“백력. 기백(氣魄)이란 좋은 말과는 달리 흉한 뜻이겠지. 사교(邪敎)의 섭백대진에서 파생되었을 테니. 하여간 사람의 혼백을 가지고 노는 놈들은 죄다. 흥! 그나저나 구주정문을 아주 우습게 여기나 봅디다. 신공이니 마공이니 일단 얻기만 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져서. 쯧. 그런데 어째 이리 덥노?”

낮에도 그렇더니 한밤을 지나 새벽이 가까워지는데도 더위가 여전하다.

종남산에서 오랜만에 내려와서 그런가.

해원기도 문득 가슴팍과 겨드랑이가 젖었음을 깨달았다.

싸우는 도중에는 전혀 몰랐다.

고력사의 무덤을 빠져나오면서 한바탕 목욕(?)을 한 셈. 그리고 장안으로 들어와서는 격변의 연속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더운 날.

더위와 추위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고수라도 공력을 지나치게 소모하면 땀을 흘리기 마련.

지금 찾아가는 개방 분타는 괜찮을까. 혹시 황가약포처럼 서로 칼을 겨누지는 않았을까.

정록 덕분에 내막을 엿볼 실마리를 얻기는 했지만, 대체 동창은 언제부터 어디까지 무슨 짓을 벌여놓은 건지. 무슨 목적으로.

과거의 사마에게서 유래한 무공들, 더불어 신화나 전설에 실릴 법한 희귀한 기예들. 어디서 어떻게 얻었으며,

과연 이 모든 일의 배후는 누구란 말인가.

게다가 금오혈석 아홉 개. 해원기로 하여금 무림에 발을 들이게 한 이 오리 알의 진짜 가치는 무엇이기에.

푹푹 찌는 날만큼이나 골치 아픈 문제들.

이럴 때 시원하게 한마디 해주던 친구도 없으니 그야말로 민민불락(悶悶不樂)이라.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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