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장 민민불락(悶悶不樂) (3)
첨유진이 영락검선을 대화 상대로 삼았기에, 해원기는 그 사이 상황을 다시 살필 셈이었다.
연검대초로 발검제형, 아울러 풍뢰결을 섞어 은한삼자를 어검탕마세로 이끌고서 단숨에 들이친 종루. 그 기세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경운종을 때렸다면 첨유진의 말대로 종이 깨졌거나 아예 종루 밖으로 날아갔을 것이지만,
당나라의 국종을 그렇게 훼손하긴 싫었다.
그런데 들이닥치자마자 끝까지 남아있던 둘이 급하게 경운종이 매달린 바닥 판을 후려갈기는 게 눈에 들어왔고.
어검탕마세를 이끈 장대한 찌르기. 그 엄청난 기세에도 자신을 지키기보다 바닥을 부수는 게 먼저란 건가.
순간적으로 검세를 수발여의의 오의로. 먼저 둘을 무찌르고 나서 거두는 힘으로 종을 울렸다. 바닥을 부숴 경운종을 아래로 떨어뜨릴 셈이었을까.
뭔가 또 다른 야료를 부리려고 끝까지 두 명을 남겨두었던 듯.
혹시 놓친 것이 있는지 싶어 장안을 덮은 사기가 물러가는 걸 끝까지 확인하려 했는데.
첨유진이 이를 갈자, 적도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좌우시랑이니 사대낭중이니, 게다가 상서까지 나왔으니 그렇다면 금포인은 예부상서란 얘기. 어처구니없는 이름들이지만, 실력을 모르는 자들 일곱이 횡으로 늘어서 부서진 난간까지 뛰어오르고,
첨유진과 대부 둘은 영락검선을 노린다.
황량도의 일부를 익힌 첨유진만이 아니라 제왕군림신공과 영사태화까지. 이들을 상대할 영락검선은 혼자다. 더구나 근 백 세의 고령이잖은가.
우선 은한삼자로 첨유진 들을 막도록 하고서,
해원기가 두 손으로 검병을 잡았다.
양수악검(兩手握劍). 변화를 버리고 힘을 높이려는 뜻.
일곱 명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생각으로 공력을 끌어올리자, 연검대초의 검집이 거대한 강기로 뒤덮인다.
예부상서라는 금포인의 당당한 어깨가 불끈 일어나면서 두 주먹이 전광처럼 뻗고, 좌우시랑의 검이 시퍼런 강기를 한 자나 뿜는다. 게다가 사대낭중이란 자들은 전부 싯누런 밧줄을 휘둘러 내던질 태세.
종루의 돌벽에 바짝 붙어 달려들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떨어져 내린 해원기의 연검대초는 거대한 기둥 같았다.
권력이든, 검강이든, 네 가닥의 밧줄이든.
위이잉.
펼쳐지기 전에 무지막지한 검강의 기둥이 아래를 횡으로 휩쓸었다.
퍼엉!
“으윽.”
“큭.”
좌우시랑이 팔랑개비처럼 돌며 떨어져 나가고, 좌우 끝의 사대낭중 넷은 아예 돌벽에 파묻혀버렸다.
검강이 깨지고, 밧줄은 거꾸로 자기들을 휘감은 채.
그러나,
떨어져 내리던 해원기의 신형도 옆으로 비스듬히 튕겨나가고, 예부상서가 돌벽을 차면서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검집 째의 강기라 예리한 맛이 부족하다곤 해도 그야말로 거대한 기둥으로 후려친 격이건만,
예부상서란 자 혼자만이 막아낸 정도를 넘어 튕겨냈다.
달려드는 예부상서의 부릅뜬 눈에는 기이한 문양이 떠오르고 두 주먹은 전광처럼 더욱 빠르게 다가든다.
해원기의 입이 단호한 한일자가 되었다.
팔꿈치까지 쩌르르한 충격을 참으면서 검병을 쥐었던 두 손이 서로 엇갈리고,
끼이이잉.
강기의 여력이 검신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는 소리. 연검대초가 또다시 맹렬하게 회전하며 곧장 예부상서에게 뻗었다.
신창삼대절예의 하나인 나사관천. 검이 창이 되어 그대로 꿰어버릴 듯.
하지만, 예부상서가 머리를 크게 흔들자 두 주먹이 단숨에 십여 개로 불어나 우박처럼 쏟아진다.
나사관천의 찌르기와 우박처럼 쏟아지는 주먹질.
쾅!
폭음과 함께 기단 근처의 돌벽이 박살나는 가운데,
해원기와 예부상서가 동시에 바닥에 내려섰다.
종루의 남서쪽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십여 장의 거리.
인상이 굳어진 해원기의 입술이 뒤틀렸다.
“이건, 나타육비(哪咤六臂)? 어찌…….”
믿기 어렵다는 어투. 그 말에 예부상서가 크게 웃어젖혔다.
“커허허, 그걸 알아보나? 나이답지 않게, 그래, 절세검왕이라더니 과연 본관이 나설 만하구나.”
껄껄대는 얼굴이 불그스레하니 더욱 힘이 나는 듯.
그 뒤에 추락했던 좌우시랑이 삐꺽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사대낭중은 꿈틀거리며 돌벽에서 몸을 빼내니.
신음을 토하고 비명을 질렀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지만, 다시 예부상서를 향해 천천히 모여드는 여섯의 눈에도 기괴한 빛이 일렁거린다.
나타육비는 신화에나 나오는 신능(神能)의 하나. 삼두육비(三頭六臂)의 신통력이라나.
오랜 세월 동안, 무공으로 이를 구현하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으나 맨손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이론으로 여겨졌고.
그나마 병기를 통해 그 경지를 확립한 것이 창이었다.
신창삼대절예 중의 또 한 가지인 다비농창(多臂弄槍).
그런데 예부상서라는 금포인은 두 주먹으로 나타육비를 펼쳤으니,
나사관천이 뚫지 못한 게 당연하다.
상승의 기예는 상응하는 신공의 도움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박처럼 쏟아진 주먹질이 나타육비라는 건 알아보았지만, 그 바탕을 이루는 신공은 대체 무엇이기에.
난제를 만난 해원기지만, 시선은 앞이 아니라 옆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눈앞의 일곱 명과 드잡이질 하면서 내력을 알아보는 것보다 영락검선 쪽의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은한삼자가 제때 가로막았는지, 영락검선은 괜찮은지.
그러나 눈을 돌리기 전에 검을 먼저 휘둘러야 했다.
쨍!
쇳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철필 한 자루.
그다지 대단한 힘은 아니지만, 얼굴을 노린 기습을 쳐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 감히 또 훼방을……. 상서 대인, 각하를 속히, 으으으.”
쇠약한 음성이 신음을 삼키며 전해지고,
고루 밑 그늘에서 전신 곳곳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인물이 어렵사리 나서며 다급한 표정을 짓는다.
바로 여 대부였다.
함부로 싸움에 끼어든 기습이요, 고작 철필 한 자루를 내던진 한심한 꼬락서니지만,
예부상서가 웃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각의 대부가 이리 충성스러운데 뭐가 문제일꼬. 염려하지 말게, 각주가 괜히 본관을 불렀겠나?”
의젓하게 받아주면서,
자신의 좌우로 늘어서는 좌우시랑과 사대낭중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는다.
좌시랑이 검을 세우든, 우시랑이 검을 눕히든. 사대낭중이 누런 밧줄을 풀어 양손에 감아쥐든. 전부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두 손을 천천히 올리더니.
“주국경을 주살한 게 고천무쌍의 검이랬지. 어디 한번 볼까?”
한 차례 손을 나누면서 자신이 붙었는지. 얼굴을 더욱 벌겋게 물들이며 기세를 올리는 모습.
말을 마치는 순간에 여섯 명의 수하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검강의 기둥에 두들겨 맞은 건 다 잊은 듯이.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락검선의 상황을 살피는 것보다 당장 이 괴상한 일곱 명에게서 벗어날 수나 있을까.
이미 군방대루의 일을 아는 예부상서, 그리고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다시 멀쩡하게 움직이는 수하들.
첨유진과 호경륭을 제압한 해원기라도 아무 문제없다는 건가.
그런데.
따당.
귀청을 울리는 쇳소리와 더불어 영락검선의 쉰 목소리가 전해졌다.
“허, 못된 황량도는 다 어따 팔아먹고 엉뚱한 수작이냐? 불알도 없는 것이 순양기공(純陽氣功)을 익혔다? 이런 고약한!”
어이없다 못해 욕지기가 나오는 말투.
그와 함께 해원기가 퍼뜩 뒤로 물러나고,
예부상서와 여섯 수하가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마치 영락검선의 음성이 신호인 양.
파파파팡.
영락검선 쪽에서 연달아 터지는 폭음을 분간할 틈도 없이 예부상서의 열두 개로 변한 주먹이 해원기를 짓이기려 들고,
어깨와 허리를 노리는 좌우시랑의 검강, 사지를 얽어매려는 사대낭중의 밧줄.
미끄러지듯 물러나던 해원기의 검극이 빙글 원을 그렸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공세를 그 작은 원 하나로 충분히 당해낼 수 있는 것처럼.
그러자 예부상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면서 주먹들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두 줄기 검강, 네 가닥 밧줄을 거침없이 쥐는 손 여섯, 와락 펼쳐져 경력을 떨치는 손바닥 여섯.
전면이 전부 검강과 밧줄로 꽉 채워져 예부상서를 비롯한 일곱의 신형조차 보이지 않는다.
해원기의 검극이 원을 그리는 걸 기다렸다는 거다.
군방대루에서 펼쳤던 홍몽무변의 초식이라고,
기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해원기의 굳게 다문 입은 전혀 열리지 않았다. 천손검법이라면 음검병시를 운용했을 텐데.
아무리 등롱을 환히 밝혔다고 해도 거대한 종루 아래쪽은 그늘이 지기 마련.
연검대초의 검극이 그린 작은 원이 돌연 찬란하게 빛날 줄은 누구도 몰랐으리.
번쩍.
‘음?’
순간적으로 목표를 놓친 예부상서가 눈살을 찌푸리는 짧은 시간,
해원기는 잔뜩 웅크린 자세로 검을 거꾸로 쥐었고,
돌아보지도 않고서 연검대초를 뒤로 찔러 넣었다.
펑!
전력으로 펼친 제왕군림신공의 옥새사인이 산산조각이 나고, 독사처럼 바닥을 훑으며 찔러오던 영사태화가 형편없이 무너졌다.
“꺽.”
“에엑.”
가슴이 뚫린 이 대부와 목이 부러진 감 대부. 그 둘을 번갈아 밟은 힘으로 훌쩍 솟구쳐 오른 첨유진이 오골선을 정신없이 흔들어댄다.
영락검선과 은한삼자를 한껏 밀어내고서 해원기의 등을 노렸건만.
절세검왕은 등에도 눈이 달렸단 말인가.
연검대초에는 검기는커녕 바람조차 일지 않았거늘, 공중으로 날아오른 첨유진의 장포 자락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해원기는 영락검선의 목소리가 경고의 의미라는 걸 바로 눈치 챘다.
보지 않아도 이 대부와 감 대부를 은한삼자가, 영락검선이 직접 첨유진을 상대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고.
아울러 첨유진이 황량도가 아닌 순양기공으로 영락검선의 청령진기와 맞섰기에 쇳소리가 났을 터.
과연 미묘한 열기가 등 뒤에서 느껴졌고, 첨유진 들이 거꾸로 협공한다는 걸 예감했다.
게다가 예부상서의 돌발적인 공격.
체신이든 아니든 첨유진은 확실히 군방대청에서 해원기가 펼친 검법의 위력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검대초로 다른 검을 꺼내 들었다.
예부상서가 맨손으로 나타육비의 기예를 연성한 데에는 분명히 비밀이 있겠지만, 박대정심으로 온갖 무학을 접했던 해원기다.
앞뒤의 협공을 아예 하나의 공간으로 묶어 한꺼번에 쳐부수면 그만이다.
검의 결계, 즉 검역(劍域). 양강하고 복잡한 공격을 일거에 잠재우는 데에 가장 어울리는 검은,
수미전단검법의 조사검결(祖師劍訣).
삼조원광(三祖圓光)이 예부의 일곱을 저지하고, 오조전법(五祖傳法)이 불시에 배후의 적을 제압했다.
그리고 팔풍팔뢰를 이끌어 다시 전면을 가리키는 검극.
가볍게 흔들리는 육조심동(六祖心動) 한 초식이 나타육비를 모조리 휩쓸어버렸다.
콰앙!
“으아악!”
팔이 여섯 개면 뭐하나. 양쪽 어깨와 두 무릎이 전부 부서진 예부상서가 분수처럼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지고, 좌우시랑과 사대낭중이 엉망으로 구겨져 여 대부가 있는 고루까지 데굴데굴 굴렀다.
날이 없는 연검대초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