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18화 (218/410)

제55장 민민불락(悶悶不樂) (2)

머리와 수염이 허연 노인 셋이 쭈뼛거리며 나서는 모습은 흔히 보기 어렵다.

은한삼자는 수십 년씩 검을 닦은 종남파의 장로.

영락검선이 돌아와 종남파를 중건하면서 그간 어지럽게 꼬였던 배분 문제를 일거에 정리하는 통에 마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 다시 사부를 모시게 되었고,

몇 가지 비결과 이치를 배우긴 했지만, 실상 영락검선의 위세에 꼼짝 못 하고 끌려 다닌 셈이랄까.

평소에는 장문인과 얽히지 않으려고 수련을 핑계로 산속에 처박혀있기 일쑤였으나.

이렇게 영락검선의 명으로 오랜만에 장안으로 나설 때는 나름 실력을 자신하는 면이 있어서.

장문인이 괜히 화산에 갔다고. 화산파는 자기 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연로한 영락검선까지 굳이 나설 필요가 있냐고.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불만이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삿된 진세의 기세를 태을검명으로 물리치는 게 고작. 상대 두 명이 나서자마자 자부하던 검진이 당장 무너져버렸다.

적의 우두머리조차 깔보았던 늠름함이 무색할 지경이요, 게다가 곧바로 영락검선으로부터 한바탕 욕까지 먹었다. 적도들의 눈앞에서.

육십 대의 나이에도 전부 입이 댓 발이나 나올 판인데.

여기서 또 새파란 애송이에게 배우란다.

예전에 검왕의 소문을 들은 적이야 있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나?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 발걸음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그건 해원기도 마찬가지.

생판 처음 보는 종남파의 장로 셋을 데리고 뭘 가르치라는 건가.

영락검선이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돌대, 우리 장로 셋이 워낙 친한 사이라 절묘한 검진 하나 해보라고. 노도가 신경을 써서 전해주었건만, 아직 그 오의가 무엇인지 헷갈리나 보오. 더구나…….”

말을 끌면서 힐끗 종루를 보자 짓무른 눈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신광.

누가 그 무서운 눈빛을 보고 다 죽어가는 늙은이라 여기랴.

“진도의 축이 깨지고도 이렇게 버티는 사술, 그 약점은 아무래도 저기 있는 모양이니. 아직 이른 시각이지만 새벽종을 힘차게 두들기는 게 좋겠구려.”

해원기의 눈썹이 바짝 일어섰다.

과연 영락검선. 고루에서 진도의 축을 깨뜨렸는데도 소위 유탕대진도라는 게 아직 유지되는 이유를 대번에 짚어낸다.

첨유진을 비롯한 밀각의 고수들이 종루를 지키듯 모인 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

종루에 매달린 종이 당나라의 국종(國鐘)이었던 경운종(景雲鐘)이라는 보물이라서가 아니다.

이른 시각의 새벽종은 서두르라는 뜻.

그러려면 종루 밑에 모인 열 명, 그리고 고루에서 연달아 뛰어내리는 금의위들부터 처리해야 한다.

상황을 파악한 은한삼자가 불편한 마음을 접고 내공을 끌어올리는데.

바로 앞의 해원기가 취하는 행동에 그만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등에 멘 검을 풀더니 검집과 손잡이를 검대로 칭칭 묶기 시작하잖나.

싸우기 전에 검을 뽑기 어렵게 묶는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절로 영락검선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해원기의 해괴한 행동을 본체만체,

영락검선이 손에 쥔 지팡이로 힘차게 땅을 찍었다.

“합(合)!”

쉰 목소리가 우렁찬 기합을 토하고, 은한삼자가 반사적으로 검을 품에 안았다.

검진을 처음 배울 때부터 익혔던 구결. 신검합일(身劍合一)로 어검세(馭劍勢)를 취하라는 호령이다.

해원기도 그 호령을 기다렸던 것처럼,

왼손이 전면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오른손에 검집 째로 쥔 검이 그 원을 맹렬히 찌르면서.

위이잉.

몸이 검집을 따르듯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가고.

그 기세가 은한삼자를 그대로 휘감아 이끌었다.

‘엇?’

놀랄 새도 없이 해원기의 뒤를 따르는 셋, 수십 장을 단번에 뛰어넘는데.

해원기의 검집이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걸 볼 틈이 없었다.

은일자가 은중자, 은중자가 은몽자, 은몽자가 은일자의 위치로 정신없이 바뀌기 시작했기에.

고오오오.

사방의 기류가 한 점으로 빨려드는 듯.

해원기를 중심으로 은한삼자의 검이 찬란한 빛을 뿜으며 공간을 꿰뚫는 거대한 송곳으로 화한다.

열 명.

첨유진과 금포인이 지면에 내려서자 이 대부와 감 대부는 첨유진 옆으로, 예부의 좌우시랑과 사대낭중은 금포인 주위로 모였지만,

어차피 상대가 소수이기에 한 덩어리로 모인 상태였다.

영락검선이 등장하고, 고루에서 해원기가 불시에 출현했기에 그들도 대비할 시간이 필요했을 터.

첨유진이 금포인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시선을 돌리는 순간에 거대한 송곳 같은 검세가 이미 들이닥쳐서.

첨유진의 명령을 기다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얍!”

이 대부가 다급히 튀어나와 제왕군림신공을 쏟아내고, 좌우시랑이 황망히 검을 뽑으며,

감 대부와 사대낭중이 어떻게든 첨유진과 금포인 앞을 막으려 하는데.

좌아아악.

비단 폭을 길게 찢는 듯한 기음.

해원기의 검집이 장력이든 검기든 모조리 쪼개면서 불쑥 위로 치솟는다.

이제는 검집만이 아니라 맹렬히 회전하는 은한삼자가 전부 나선형을 이루어,

상대의 경력을 끌처럼 깎아내곤 그 힘을 빌려 눈 깜짝할 새에 종루 상층까지 날아올랐다.

“으응?”

첨유진과 금포인이 깜짝 놀랄 변화.

해원기와 은한삼자가 화살처럼 부서진 난간을 통과하고,

더욱 예리해진 검기가 종루의 상층을 그대로 무찌른다.

떠엉!

귀청을 울리는 웅장한 종소리.

곧바로 이어진 폭음과 신음은 이 웅장한 종성에 파묻혀버렸다.

퍼펑.

“크윽.”

은한삼자가 부서진 난간 위에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두 개의 신형이 피를 토하며 밑으로 떨어진다.

헛손질한 이 대부와 좌우시랑보다 첨유진과 금포인의 인상이 흉하게 일그러졌고, 감 대부와 사대낭중이 멍청하게 바라보는 동안 그래도 떨어지던 두 개의 신형을 받아든 건 금의위들.

“괜찮습니까?”

“어어, 이거.”

고루 상층을 지키다가 해원기에 의해 태반이 충격을 받아서 그나마 종루로 뛰어내릴 여력이 있었던 금의위는 겨우 십여 명이었고. 그들이 받아든 둘은 걸친 옷이 갈기갈기 찢겨 인사불성이라 어쩔 줄을 모른다.

본래 끝까지 경운종을 지키도록 배치되었던 둘.

금포인이 일그러진 인상을 첨유진에게 돌렸다.

“이게 무슨. 아무리 절세검왕이라고 해도. 공부(工部)의 주부(主簿) 둘이 이렇게…….”

뭐라 말을 잇지 못하자 첨유진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상서(尙書)를 급히 부른 이유가 뭐겠소? 하지만, 종남이 낀 건 정말 예상 밖이었고, 흐음.”

슬금슬금 종루 밑을 물러나는 움직임.

도로 고루 쪽으로 물러나야 종루의 상층을 볼 수 있다.

아직도 종성의 여운이 주위를 울리는 가운데 은한삼자가 기세등등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 뒤에서 해원기가 천천히 사방을 둘러본다.

솨아아아아.

바람도 불지 않는 무더운 여름밤. 그런데 마치 종성을 중심으로 바람이 인 것처럼 장안 전역으로 탁한 기운이 밀려나는 광경.

마침내 유탕대진도라고 하던 삿된 술법이 파괴되었다.

그런 해원기를 발견한 첨유진의 입술이 씰룩대지만, 그보다 먼저 영락검선의 호탕한 웃음이 종성의 여운을 이었다.

“왓하하하하, 그렇지, 그렇지. 바로 그거야. 돌대가리들이 이제 눈이 뜨였네.”

해원기 앞에선 굳이 ‘우리 장로’라고 해주던 은한삼자가 도로 돌대가리로. 그만큼 흐뭇해서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고루에서 시작된 유탕대진도를 해제할 요해가 바로 종루의 종이라는 건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는 듯.

첨유진이 실눈을 찡그리며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경운종이 유탕대진도의 약점이란 걸 용케 알아챘구나. 더구나 종을 깨지 않고 울릴 줄은.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는 걸까?”

장력과 검기를 깎아내는 힘으로 상층까지 치솟아 그대로 경운종을 향한 검형. 해원기와 은한삼자가 어울려 이룬 그 거대한 기세라면 경운종뿐 아니라 종루의 상층을 통째로 부술 정도였는데.

공부의 주부 둘에게 중상을 입히고도 힘을 조절했기에 가능했을 터. 영락검선이 미리 안배한 계획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인 유탕대진도가 파괴되어 분통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느라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절로 뾰족해진다.

영락검선이 웃음을 머금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허, 늙은 생강이면 양기가 넘쳐서 좋은 거로구나. 그렇게 봐줘서 고맙긴 하다만, 그게 어찌 노도 혼자의 힘으로 되었겠느냐? 너, 밀각의 각주라는 놈, 지금 뭐에 당했는지도 못 알아봤지? 흐흐.”

지팡이를 짚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자세는 여지없이 다 죽어가는 늙은이.

첨유진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은한삼자라는 것들이 같잖은 검진을 꾸리더니. 그래도 절세검왕이랍시고 하나가 더 가세하니까 위력이 크게 오르더군. 그게 그리 자랑스럽더냐? 남의 힘에 기대어 잘난 척은. 구주정문이라는 종남의 이름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노망이 났군, 노망이 났어.”

아예 영락검선을 비아냥거리기 시작하지만.

“응, 그려. 노망이 날 나이는 맞는데. 네놈이 우두머리 같다만, 뭐 아는 게 별로 없나 보다. 그 주제에 어떻게 이따위 사달을 일으켰을꼬. 에효효, 그저 무지한 것들 보면 어떻게든 일러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아마 이게 노망이겠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영락검선이 되레 첨유진을 놀려대면서 거침없이 질문을 던진다.

“유탕대진도든 유탕섭백대진이든 그 근본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느냐? 아니, 진도가 뭔지는 알고?”

“종남에 전진의 유산이 가장 많이 남았다는 얘긴 들어봤을까? 그럼 종남에 남은 전진의 가장 큰 유산은 뭐게?”

“우리 은한삼자가 이룬 검진의 바탕은 보이더냐? 검진이란 게 아무나 한 사람 더 낀다고 위력이 확 늘든? 아무리 절세검왕이라고 해도. 쯧쯧.”

답이 나오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으면서, 첨유진을 보며 안타깝게 혀를 차고.

텅.

지팡이를 또 바닥에 힘주어 꽂더니.

짓무른 눈이 예의 새파란 신광을 번뜩인다.

“애송이, 까불지 말아라. 네 주제로는 이 요사스러운 진도를 복구할 수 없고……, 그따위 허술한 둔법(遁法)으로는 턱도 없느니라.”

움찔.

첨유진이 전신을 떨며 실눈을 찢어지라 떴다.

영락검선과 대화를 시작한 건 해원기의 주의를 흩뜨리기 위함. 말을 주고받는 중에 은밀히 유탕대진도를 복구하고 여차하면 미리 설치한 둔법을 발동시키려고 위치를 조금씩 바꾸었는데.

이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귀신같이 알아챘다.

이를 가는 사이로 참았던 답이 새어 나온다.

“으득, 십절경화도해(十絶瓊華圖解)…….”

영락검선이 퍼부었던 질문의 답. 몰라서 가만있었던 게 아니다.

해원기도 묵묵히 장안의 상황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세 분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삼화진결(三和陣訣)에 익숙해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습니다만, 어검탕마세(馭劍蕩魔勢)는 완벽하군요. 분합지기(分合之機)를 다루는 건, 음.]

은한삼자에게 동시에 들리는 전음.

하던 말이 끊기자 은한삼자 셋이 전부 조심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왜 영락검선이 자신들을 돌대가리라고 불렀는지, 왜 이 더벅머리 청년에게 배우라고 했는지. 이제는 환히 깨달았고.

아울러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과거 전진의 보물이었던 십절경화도해. 천하의 무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열 장의 그림에서 창안한 어검탕마의 검진은 그들이 생각했던 경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오의를 단 한 차례 검진을 이끌면서 전부 깨우쳐주다니.

검왕은 그저 헛된 이름이 아니었구나.

이 어검탕마세를 바탕으로 정진하면 과거에 영락검선이 이르렀다던 세심삼화(洗心三和)의 체득도 그리 멀지 않을 터.

해원기의 설명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데. 왜 말을 끊는지.

[세 분은 그대로 노진인께 가십시오. 지금!]

해원기의 말이 빨라진 이유를 따질 틈도 없이. 이르는 대로 은한삼자가 난간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위이이잉.

해원기가 없는데도 세 사람이 팽이처럼 돌면서 거창한 검기가 절로 이루어지자.

해원기는 곧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느새 밑의 무리가 두 패로 나뉘어 상서라고 불린 금포인이 좌우시랑과 사대낭중을 이끌고 달려들고,

첨유진이 대부 둘과 함께 영락검선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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