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장 민민불락(悶悶不樂) (1)
첨유진의 입매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그늘 속의 인물도 똑같이 믿기 어려운 심정인 듯.
“풍운책에 이미 죽었다고 기록된…….”
마찬가지로 말을 맺지 못하지만, 저 아래의 노인은 그런 혼잣말도 전부 들리는지 뒷머리를 긁으며 끄덕였다.
“그래, 그래. 노도의 이름이 바로 영락이란다. 뭐, 이미 죽은 거나 진배없지. 함께 같은 길을 걷던 벗들이 다 세상을 떠났는데도 용케 버티는 이유를 모르겠거든. 저런 돌대가리들 신경 쓰는 것도 피곤하고, 장문인을 시켜도 못된 성질 고칠 줄 모르는 계집애는 더 골치 아프고. 아 참, 너 아까 우리 돌대가리들이 무슨 수법을 썼는지 궁금해 했었지? 어이구.”
쉰 목소리가 갈수록 우렁차고, 굽은 허리에 손을 얹어 억지로 펴면서 앓는 소리를 내더니.
텅.
희한한 지팡이를 가볍게 짚으며 말을 잇는다.
“별거 아냐. 중들이 사자후(獅子吼)니, 천룡선창(天龍禪唱)이니 하면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거나, 목탁을 두들기면서 불경을 외치곤 하잖아. 우리도 그 비슷한 게 있거든. 저기 서북쪽으로 가면 영종진사(靈鐘鎭邪)라는 게 있었다고 해서 흉내를 좀 내봤단다. 돌대가리들은 쓸데없이 겉멋만 들어 태을검명(太乙劍鳴)이라고 한다만. 흠흠, 어쨌든 웬만한 사도의 방술에는 잘 먹히지. 암.”
별거 아니라면서 은근히 자랑하는 투.
허리를 편 김에 종루를 보기가 더 편해진 노인이 짓무른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그런데 이거 유탕섭백대진 같더구나. 화산에서 엉뚱한 짓을 벌인 게 장안에다 이따위 수작을 펼치기 위해서였어? 에, 그럼 우리 종남은 화산보다 신경이 덜 쓰였다는 얘긴데. 너, 좀 내려오너라.”
텅.
이번엔 화가 났을까. 노망 난 것처럼 감정이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또 지팡이로 땅을 치는데.
똑같이 가벼운 소리.
그러나 종루 상층의 첨유진이 급히 오골선을 펼쳤다.
팡.
작은 북을 친 것처럼 경쾌한 음향이 울면서 두 걸음이나 물러선 첨유진. 펼친 오골선을 접을 생각도 못 하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진짜, 영락검선(永樂劍仙).”
노인의 ‘노도’라는 자칭, 그리고 은한삼자를 애들 대하듯 꾸짖고, 이 거리에서 이런 경력을 가볍게 쏘아댄 놀라운 능력.
죽은 줄로만 알았던 종남의 영락검선이었다.
나이가 구십을 넘어 백에 가까울 텐데.
첨유진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꿈틀꿈틀하더니.
“흐음. 어차피 해결할 문제지. 아예 이렇게 나와준 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툭 내뱉는 말에 그늘 속에서 바로 대답이 나온다.
“그러지 않아도 예부(禮部)가 대기하고 있던 참입니다. 저 늙은이가 설사 진짜 영락검선이라도 사대낭중(四大郎中)과 좌우시랑(左右侍郞)까지 함께 하면.”
은한삼자를 바로 알아보던 그 목소리. 첨유진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럽시다. 은한삼자는 이 대부와 감 대부면 될 터. 이거, 기름진 말 한 마리 잡으려 했더니 늙은 사슴이 걸린 셈이네. 쩝.”
오랜 시간을 들여 장안에 설치한 유탕대진도를 발동한 건 본래 절세검왕을 잡기 위해서였다.
종남파가 갑자기 훼방을 놓을 줄은,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영락검선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 밖.
마침 장안에 집결한 동창의 정예를 이렇게 쓰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입맛이 쓰지만.
이백오십의 백력을 그냥 버릴 수도 없는 일.
첨유진의 허락이 내리자 그늘 속에서 여섯 개의 그림자가 화살처럼 몸을 날리고,
단번에 공중을 뛰어넘어 이 대부의 앞에 내려섰다.
예부의 좌우시랑과 사대낭중. 벼슬 이름을 고스란히 썼으나 당금 조정의 실제 관원일 리 없다.
과연 둘은 허리에 장검을 비껴 찼고, 넷은 각각 칼, 도끼, 단창, 방패를 들어서 자못 흉흉한 기세.
장검을 찬 둘 중에 키가 큰 자가 이 대부에게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이 늙은이는 우리가 맡겠소.”
딱딱한 말투에 이 대부의 표정이 일그러지지만, 이미 첨유진의 말을 들은 이상 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렇게 감 대부와 함께 옆으로 비키려는데.
퍼퍼퍼퍼펑.
그야말로 설날 폭죽처럼 연달아 터지는 굉음.
모두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돌아가고, 시야에 산산조각이 난 유리가 들어왔다.
고루의 지붕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고루의 상층에는 마흔 명이나 되는 금의위를 배치해놓았다. 그중 절반은 동창에 속해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로.
밑에는 이백오십 명의 관병과 대부 둘, 바로 맞은편에는 첨유진과 밀각의 지시를 받는 동창의 고수들. 중간에 걸리는 곳도 없으니 여차하면 바로 고루로 날아가면 그만.
종루와 고루에 훤하게 불을 밝혔으니 몰래 스며들 수도 없을 터.
그런데 지금 고루의 상층을 지키던 금의위들이 짚단처럼 넘어지고, 굉음과 함께 지붕을 뚫고 솟구친 그림자가 그대로 종루를 덮쳐든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첨유진과 그늘 속에서 대답하던 인물이 황급히 손을 뻗지만,
끼이이이잉.
귀청을 찢는 듯 소름 끼치는 소음. 거대한 기운이 무섭게 회전하며 곧장 무찔러 들었다.
쾅!
종루가 통째로 흔들릴 만한 충격. 첨유진이 기댔던 난간이 박살이 나고,
“각주!”
기겁한 자들이 그제야 미친 듯이 종루로 몸을 날리는데.
반면에 종루에서 공중을 휘돌아 영락검선 쪽으로 내려서는 그림자 하나.
그야말로 질풍신뢰와 같아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노진인,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낭랑한 음성과 함께 예를 취하는 더벅머리 청년. 깊이 숙인 등 뒤에 고색창연한 검 한 자루가 매달렸다.
영락검선이 짓무른 눈을 홉뜨다가 무성한 수염 속의 입을 크게 벌렸다.
“하아, 과연 회주, 회주구려! 왓하하하하!”
다 죽어가는 늙은이라더니 어디서 이런 기력이 솟구쳤는지.
장안 전체를 울릴 듯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옹송그리며 다가온 은한삼자는 본체만체. 오른손에 짚었던 묘한 지팡이도 되는대로 은한삼자에게 내던지고는 대뜸 해원기를 부둥켜안았다.
“아이고, 이렇게 키가. 어느새 이리 컸소? 세상에, 세상에나.”
주름투성이 얼굴이 허물어질 것처럼 늘어졌고.
잃어버린 손주라도 되찾은 양, 연신 해원기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어쩔 줄을 모른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까지 숙였던 해원기는 고스란히 작은 체구의 영락검선 품에 안긴 처지.
얼떨결에 지팡이를 받은 은일자가 주위를 살피며 조그맣게 불렀다.
“사, 사존(師尊). 지금은.”
그제야 고개를 든 영락검선.
“엥? 아, 그래. 이거 참, 화산에서 못된 계집애, 아니, 우리 장문인이 화급한 전갈을 보냈기에. 그래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 에고, 에고, 어쩐 일이라오?”
부둥켜안고 어깨를 쓰다듬던 손은 풀었지만, 여전히 포권한 해원기의 손을 꼭 쥔 채.
노진인이 아니라 노파 같다.
해원기가 비로소 허리를 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일찍 찾아뵙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화산을 떠나 여러 가지 일이 겹쳤지요. 그러다가 사술의 중심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저도 노진인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열여섯 소년일 때 만나고 십이 년이 지났다.
그간 단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미안함이 절로 사무치는데.
영락검선이 빙그레 웃으며 해원기의 손을 놓았다.
“이렇게 보니 참 좋구려. 그나저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장문인 전갈에는 동창의 밀각이 대놓고 설치기 시작한다고 썼고, 여기 은일이는 장안 관부에 이상한 기미가 있다고 해서, 노도가 장안을 거쳐 화산으로 갈 셈이었다오.”
잃어버린 손주를 되찾은 노파의 모습도 잠시.
간략하게 자신의 사정부터 얘기하는 영락검선의 시선이 어느새 종루 쪽을 향하고,
해원기도 포권을 풀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골선을 쥔 자의 이름은 첨유진. 동창 밀각의 각주랍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저자와 싸워 제압한 적이 있지요. 저자와 주국경이란 자가 이 북쪽 기루 골목에서 부호들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사술을 부리더군요.”
“결과는 어떻게 되었소?”
“동창의 내막을 알아보려고 두 명을 생포했습니다만. 주국경이란 자는 자결했고, 저자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를 찾던 자들이 화탄을 던지며 닥쳐들더군요.”
“각주와 주국경이라면서. 생사를 돌보지 않고 화탄을?”
“네.”
이상한 얘기다. 더구나 바보가 되었다는 첨유진은 조금 전까지 바로 종루 상층에서 입을 놀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영락검선은 일체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간다.
“둘의 무공은 어땠소?”
“주국경은 정수는 아니지만, 목왕팔준경을, 각주는 오련칠혼을 거친 활시인에, 음, 황량도의 일부분을 구사했습니다.”
“으흠?”
영락검선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목왕팔준경이나 오련칠혼도 쉬 듣기 어려운 비결이지만, 황량도라니.
은일자에게서 지팡이를 받아들며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잡는다.
“똑같은 놈이 멀쩡하게 나온 건 체신. 그래도 황량도를 흉내 낼 체신은……. 어째 심마령이 연상되는구먼.”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탕섭백대진. 여기뿐이 아니라 유사한 상황을 이미 몇 차례 겪었지요. 마침 세 분이 나서주셔서.”
해원기가 잠깐 시선을 돌려 은한삼자에게 목례를 보내곤,
“고루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과연 진도의 축이 있었고 파괴하자마자 노진인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축을 파괴했다고 간단히 지워지긴 어려울 사술. 흐흥, 이 늙은이가 걱정되었나 보오?”
왜 해원기가 불쑥 튀어나왔는지 이유를 알았다.
슬쩍 웃음을 띠자 해원기가 머리를 긁었다.
생강은 묵을수록 맵다고. 강호의 속담대로 영락검선은 짧은 대화로 상황을 단숨에 파악한 듯.
이백오십 명의 백력을 써서 장안 전체를 뒤덮은 사술. 황가약포에서는 제갈봉이 자기 사람에게 공격당하는 것까지 목격했었기에.
은한삼자에게 주의가 집중된 틈을 타서 우선 고루에 들어섰다. 오랜 세월 기괴한 수단을 더해 펼친 사도의 술법. 진평현의 수차제를 겪고 나서 유탕섭백대진이라고 추정했으나 여기는 유탕대진도라고 했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파악할 여유가 없어서 우선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깨뜨리긴 했지만.
장안은 여전히 괴괴한 적막에 파묻힌 상태.
그때 첨유진이 영락검선을 치려고 했기에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각주란 놈과 예부니 어쩌니 같이 노닥거리던 놈. 그리고도 또 둘을 남겨놓은 것 같구먼. 흠, 사술의 축이 고루인데도 종루에 머무른 게, 아무래도 특별한 의미가 있겠지요?”
영락검선이 지팡이를 들어 가리키는 종루의 아래.
이 대부와 감 대부, 예부의 좌우시랑과 사대낭중, 그리고 난간에서 떨어져 내린 첨유진과 당당한 체구에 화려한 금포를 걸친 초로의 인물까지.
전부 열 명이 그새 횡으로 늘어서서 이쪽을 노려본다. 해원기의 예상치 못한 급습에 놀란 토끼처럼 달려갔던 자들이 전부 화난 표정을 짓지만, 어쩐 일인지 도로 달려들지는 않고서 되레 종루 앞을 지키는 형태.
영락검선이 노련하게 짚어낸 대로 고루에서도 멀쩡한 금의위가 두셋씩 종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섭백대진도의 축은 고루에 있거늘, 이제는 종루가 더 중요하다는 듯이.
첨유진과 예부를 운운하던 초로의 인물 외에도 종루 상층의 그늘에는 아직도 둘이 남아있고.
해원기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바로 뚫겠습니다.”
눈앞의 첨유진이 진신이라면 놓쳐서는 안 된다. 또한, 이렇게 삿된 술법을 오래 놔뒀다간 무슨 후유증이 생길지.
더구나 영락검선은 세수(歲數) 백을 바라보는 고령. 해원기가 싸움을 도맡을 셈인데.
턱.
영락검선이 지팡이를 짚으며 부른다.
“회주.”
돌아보는 해원기에게 빙긋 웃어 보이는 영락검선.
“이 돌대가리들, 아, 우리 은한삼자에게 노도가 뭐라고 꾸짖었는지, 혹시 들었소?”
“아, 네.”
뜬금없는 질문에 해원기가 눈을 껌뻑이자, 지팡이가 냉큼 해원기를 가리킨다.
“그럼 끌고 가서 좀 가르쳐주구려. 주둥이만 놀리는 이 늙은이보다야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검왕이 굳은 머리를 깨우는 데에는 백배 나을 터. 헐헐.”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