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황당무계(荒唐無稽) (4)
이백오십 명의 백력을 써서 일 각 동안 발동한 사도대법. 그 때문에 거대한 장안성 대부분은 어둠보다 더욱 깊은 적막에 휩싸였고,
종루와 고루를 휘황하게 밝힌 불빛 덕에 중심가를 제외한 사방의 대로는 더 어스름하게 보이는 상태.
그렇게 어스름한 곳을 벗어나 널따란 남방대로의 밝은 곳으로 세 사람이 천천히 걸어들어온다.
머리에는 모두 혼원관(混元冠), 늘어뜨린 머리칼은 하얗게 세었으며, 주름진 얼굴에 흰 수염. 전신에는 푸른 도복을 단정히 걸치고 가슴 앞에는 예기가 흐르는 장검을 꼿꼿하게 세웠다.
전부 육십은 되어 보이는 노도사 셋.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보조를 맞추어 다가오다가 고루를 보며 걸음을 멈추더니,
왼손이 올라와 꼿꼿이 세운 장검을 차례로 때린다.
딩, 디딩, 디이이잉.
한 자루, 한 자루, 또 한 자루. 검신이 우는 소리가 겹쳐져 마침내 맑은 검명(劍鳴)이 세 사람의 주위로 잔잔히 퍼져나가고.
그러면서 빛과 어둠도 깨어난 것처럼 선명해졌다.
한밤중에 빼든 검을 울리며 걸어온 세 명의 노도사. 무슨 제사라도 지내는 듯 엄숙하고 기특한 모습이지만,
이 맑은 검명을 불쾌하게 느낀 이들도 있었다.
막 고루를 지키라는 지시를 받은 감 대부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네놈들은 누구고, 이건 무슨 짓거리냐?”
이 대부의 눈치를 보는 게 먼저였겠지만, 고루 주위로 잠든 것처럼 쓰러졌던 관병들이 움찔거려서 어지간히 당황한 듯.
이 대부도 뒤이어 소리를 질렀다.
“뭐야, 남쪽을 맡은 건 누구지? 장(張) 영반! 어떻게 된 거…….”
고루 난간을 채운 금의위를 올려다보며 목청을 높이는데.
“잠깐!”
종루의 상층, 첨유진의 나긋한 음성이 감 대부와 이 대부의 입을 봉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밤. 무수한 인원이 몰렸던 장안의 중심가가 조용해지자, 비로소 종루의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인물.
남색 사방건에 남색 장삼, 가는 실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웃는 듯 마는 듯 말쑥한 얼굴은 군방대청에 나타났던 첨유진 그대로.
똑같은 모양의 오골선을 부치다가 아래를 가리키며 씩 웃는다.
“유탕대진도(遊蕩大陣圖)를 흐트러뜨리며 중심축까지 찾아온다라. 어째 종남에서 온 도인들 같은데 무슨 수법인지 알려주겠소?”
지면에서 마주한 대부들은 그저 노도사 셋이 어깨를 나란히 한 줄 알았지만,
높은 곳에 있는 첨유진은 은근히 품(品) 형을 이루었다는 걸 알아보았다.
종남.
그 단어에 가운데의 조금 앞으로 나온 노도사가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빈도가 지부대인과는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소만. 흠, 감히 장안 한복판에서 이런 희한한 짓을 벌이는 그쪽은 대체 누구신지?”
짙은 눈썹과 각진 얼굴에 의아함이 드러난다.
잠에 빠진 듯 주저앉은 수백의 관병. 이상한 광경이지만 일단 이 중심가에 관병 수백을 동원하려면 장안을 다스리는 지부의 직위여야 하거늘.
종루에서 말을 건네는 낯선 인물을 똑바로 쏘아보자,
탁.
오골선을 접은 첨유진이 예의 느긋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부정은 하지 않으니 종남산에서 내려온 게 맞구먼. 자, 보자,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은 여자라고 했으니 세 분 다 장문인은 아니고. 그러면서 장안지부와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꽤 지위가 있다는 뜻이잖아. 장문인과 비슷한 지위에 육십은 족히 된 나이, 에, 누가 있더라?”
기억을 더듬듯 머리를 갸웃거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종루의 어둠 속에서 답이 나온다.
“종남파 장문인 청령선고의 후견인 노릇을 하는 늙다리 셋이 있습니다. 은일(銀一), 은중(銀中), 은몽(銀夢)이라는 도호를 쓰는 은한삼자(銀漢三子). 지금 입을 놀리는 게 은일자입니다.”
은일자라는 가운데 노도사 외에 좌우를 살피던 은중자와 은몽자의 시선도 홱 종루를 향했다.
단숨에 자신들의 내력을 알아낸 것도 놀랍지만, ‘늙다리’니 ‘입을 놀리는 게’라니. 아주 하찮게 보는 말투.
그러든 말든 첨유진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종남파의 장로인 은한삼자였구나. 아, 요새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자질구레한 이름은 자꾸 잊는다오. 이해하시구려, 은일도장. 그런데 어째 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 걸까? 가르쳐주기 싫소?”
종남파의 장로 셋이란 걸 알고서도 여유가 넘친다.
처음에 던진 질문은 유탕대진도를 흩트린 수법.
그러나 은일자도 거저 은한삼자의 첫째가 된 건 아니어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흐음, 지부대인을 거론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시니. 그렇다고 포정사로 보이진 않고. 수염도 그럴듯하게 기른 분을 환관으로 취급하기도 어렵고. 참으로 난감하구나. 이런 요사스러운 곳은 되도록 피하시는 게 좋다고 권하려 했건만. 태상노군, 태상노군.”
되레 풍자를 섞은 혼잣말에 도교의 신명(神名)만 거듭 외우면서,
수법이 아니라 화법(話法)조차 밀릴 생각이 없다.
첨유진의 입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수백의 관병이 백력을 바치고 쓰러졌다 해도, 아직 많은 금의위가 고루를 지키는 중. 종남파의 장로랍시고 겨우 셋이 온 주제에 뭘 믿고 저리 까부는가.
짜증이 난다.
첨유진의 오골선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였다.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끼어들어 피곤하게 하네. 아무래도 남쪽이 수상하던 판에. 이 대부와 감 대부 둘이 좀 치워주겠나?”
그러지 않아도 눈치를 보고 있던 판이라.
“존명!”
이 대부가 냉큼 몸을 돌리고, 감 대부가 바로 뒤를 따른다.
그들이 있던 고루 아래에서 은한삼자까지는 사십 장이 넘는 거리. 이 대부가 성큼 나서며 인상을 쓰고.
“은한삼자? 장문인이라는 년도 별 볼 일 없던데, 기껏 장로 따위가, 합!”
한심스럽다는 표정과 혼잣말, 발을 내딛자마자 기합을 지르며 쌍장을 떨친다.
우우웅.
첨유진의 명령대로 한꺼번에 치울 셈인지 무지막지한 장력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곧장 공격할 줄은 몰랐던 은한삼자. 얼핏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그러면서도 세 사람의 위치는 전혀 변하지 않고.
꼿꼿이 세웠던 검이 기이하게 휘어져 한 점에 모여든다.
펑.
풀썩 일어나는 먼지 속, 장력을 막아낸 은한삼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먼 거리에서 손목이 울릴 정도의 강한 장력을 펼칠 줄이야. 더구나 먼지가 내려앉기도 전에 이 대부의 신형은 거리를 절반이나 줄여서 닥쳐든다.
위잉위잉.
거침없이 내뻗는 두 손을 따라 공중에 도장처럼 찍히는 장인(掌印). 태산처럼 밀려드는 무거운 압력에 은한삼자가 급히 위치를 바꾸었다.
가운데의 은일자가 왼쪽으로, 왼쪽의 은중자가 오른쪽으로, 오른쪽의 은몽자가 가운데로. 휘청거리며 또 하나로 모이는 검에서 새파란 검기가 폭죽처럼 터졌다.
따앙!
망치로 쇳덩이를 때린 듯.
“으음.”
누군가의 입에서 새어 나온 신음과 함께 은한삼자가 전부 한 걸음 밀려나는데.
충격을 풀어낼 겨를도 없이 세 사람이 또 동시에 검을 휘둘러야 했다.
채챙.
불똥을 튀기는 은일자와 은몽자의 검. 불현듯 찔러든 예기를 막아냈건만, 어찌 된 노릇인지 은중자가 크게 휘청거리는 통에 세 사람이 한꺼번에 주르르 밀려났다.
“흐흥, 이거 검진이로구나.”
코웃음을 치며 빠르게 달라붙는 감 대부. 두 손에는 이 척 길이의 새까만 송곳을 쥐고 전신을 뱀처럼 비틀어댄다.
이 대부의 제왕신공 뒤에 숨어 영사태화로 기습을 가했고, 은일자와 은몽자가 검으로 막아낸 경력을 고스란히 되돌리자 은중자가 흔들렸기에. 은한삼자가 일종의 검진을 펼쳤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세 사람이 위치를 바꾸기 전에 뒤를 휘감아 또다시 은중자를 노릴 셈.
여기에 이미 십 장까지 접근한 이 대부가 두 손의 모양을 현란하게 변화시킨다.
주먹과 손바닥, 손가락과 갈고리. 공중에 고스란히 모양을 남겨 겹쳐지면서 그대로 찍어 누르는 힘.
안색이 변한 은한삼자가 다급히 떨어져 각기 검을 내질렀다. 일단 막는 데 급급해 검진을 유지할 수가 없다.
퍼펑!
대로에 깔아둔 석판이 깨지면서 뽀얗게 솟구치는 흙먼지.
그 한쪽을 뚫고 은한삼자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더니,
“윽.”
기어이 가슴을 부여잡고 한쪽 무릎을 꿇는 운중자. 은일자와 은몽자도 머리에 쓴 혼원관이 날아가 낭패한 모습이다.
그러나 우세를 점한 이 대부와 감 대부도 계속 공격하는 대신에 훌쩍 뒤로 물러났으니.
불현듯 날아든 기운에 장력과 송곳이 죄다 비틀어져서. 놀란 시선이 은한삼자를 넘어 그 뒤를 향했다.
“으이구, 돌대가리들. 그러니까 진주(陣主)를 정하는 게 아니라고 골백번 일러주었건만. 쌤통이다, 쌤통. 기껏 제왕군림신공의 중첩인흔(重疊印痕)과 영사태화의 잔재주에 끙끙거리는 꼬락서니하곤. 쯧쯧쯧.”
고루와 종루의 불빛이 미치는 범위 밖. 어둠 속에서 쉰 목소리가 불만스럽게 혀를 차고.
운중자를 부축해 일으키던 은일자와 은몽자가 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아직 상대가 멀쩡하게 앞에 있거늘.
이 대부와 감 대부가 눈을 부라리며 다시 달려들려다가.
“호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지?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첨유진의 목소리에 주춤 멈춰 섰다.
난간에 기대어 내려다보던 첨유진이 오골선을 눈썹 위에 대고 살피는 시늉.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하지만, 실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어둠 속의 쉰 목소리는 첨유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저건 제왕군림신공의 기초를 이제 갓 뗀 수준. 권장지조로 어지럽기는 해도 겨우 수법에 국한되었잖냐. 그럼 인흔을 남기는 강기라도 중첩되기 전에 손을 찌르면 풀어지기 마련이지. 게다가 영사태화가 아무리 희귀한 비법이라도 화자결(化字訣) 밖에 없는 송곳에 휘둘려? 희대의 검진을 익히고도 써먹지를 못하니. 한심하다, 한심해. 그간 뭘 배웠을꼬?”
여전히 은한삼자에게 불평을 거듭 쏟아내는 통에,
내상을 입은 운중자나, 낭패한 모습의 나머지 둘이나. 꾸중 들은 어린애처럼 허연 머리를 푹 수그린다.
이렇게 한바탕 야단을 친 쉰 목소리가 서서히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섰고,
첨유진뿐 아니라 종루의 그늘에 가려진 그림자도 눈에 힘을 주어 살폈다.
종남파 장문인의 후견인 노릇을 한다는 육십 대 장로 셋을 이렇게 꾸짖는 이가 대체 누군가.
본래 작은 키에 어깨와 허리가 굽어 더욱 작아 보인다. 왼손으로 슬슬 긁는 머리에는 이미 머리칼이 하나도 남지 않았고, 대신에 수염으로 기운이 다 갔는지 바닥에 닿을 듯 길다. 구부정한 자세를 지탱하려고 오른손으로 짚은 지팡이가 상당히 묘한 모양인데, 자세히 보니 대여섯 자루의 검집을 한데 뭉친 것. 아무렇게나 꽂힌 검병은 단 하나고, 끝에 달린 푸른 검수(劍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대체 얼마나 나이를 먹었을까. 낡은 도복을 걸치고 조심조심 걷는 모습이 위태롭기만 하고, 슬쩍 종루 쪽을 올려다보는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 노인.
짓무른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다 죽어가는 늙은이를 올려다보게 해? 고약한 것들이로고. 하긴, 불알도 없는 것들에게 예의를 따지긴 그렇구나. 에이그.”
땅이 꺼질 듯 탄식하는데.
첨유진이 실눈을 깜빡이다가 뒤를 돌아봐도 아무런 답이 나오질 않는다.
노인의 말대로 이 다 죽어가는 꼬락서니의 정체가 무엇인지.
첨유진이 입맛을 다시며 물어야 했다.
“은한삼자에게 사부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고. 노인장은 뉘시오?”
평소에 봤다면 눈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이 장소. 은한삼자를 꾸짖어 가르치면서 희한한 지팡이를 짚고 나선 이 늙은이가 평범할 리 없다.
일단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 그렇게 묻자마자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클클클, 노도(老道)가 누구냐고? 가만있자, 불알 없는 것들이 이렇게 까불게 된 게 누구 덕분이더라? 그래, 그 조카 죽이고 권력을 잡은 못난 임금 있자? 너희는 그 못난 임금을 아주 조상처럼 받들어 모신다고 하던데. 노도가 재수가 없어서 똑같은 이름을 쓰니까, 그래, 네 조상이다. 크흐흐.”
이 무슨 황당한 얘기? 참으로 대놓고 욕을 하는 것과 같아서,
첨유진뿐 아니라 앞에서 노려보던 이 대부와 감 대부의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조카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못난 임금.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얘기지만,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동창을 설치해 환관들이 득세하게 만든 이전의 황제. 성조(成祖)라는 묘호(廟號)보다 연호를 붙인 영락제(永樂帝)라는 이름이 더 흔하게 쓰였으니.
똑같은 이름을 쓴다는 이 늙은이는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