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15화 (215/410)

제54장 황당무계(荒唐無稽) (3)

뭔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 그러나 제갈봉이 바로 돌아보며 장탄식을 하는 통에 그 느낌을 되새길 틈이 없었다.

“하아! 이렇게 참담할 수가 있나. 내 손으로 내 사람을 치도록, 참으로 방비하기 어려운 사술이라.”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 셋은…….”

“응. 황가약포의, 내 오랜 동료들인데. 장안에 오래 머물렀던 게 이런 화를 불렀네. 이건 전부 내 책임이지. 아, 해 소제는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보낸 서신을 받지 못했어?”

비로소 돌아보는 얼굴, 잠깐 새에 처연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되묻는 말에 해원기도 가볍게 혀를 찼다.

“쯧, 받긴 받았지만. 태릉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 워낙 넓은 곳에 종적을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고력사의 무덤인가? 그 부근에 관병들이 모인 걸 확인했으나, 대부나 현신장은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장안으로 되돌아오다가…….”

길게 늘어놓을 상황이 아니요, 또 자세히 설명할 내용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지금의 제갈봉에게는 더 밝히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건 제갈봉도 마찬가지.

바로 말을 받는다.

“지금 장안은 위험해.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랜 시간 장안에 펼쳐 놓았던 사도대법을 발동시켰거든. 장안에 계속 거주하던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이 대법의 침습을 받았을 거야. 해 소제가 방금 보았듯이.”

해원기가 눈썹을 꿈틀했다.

“무슨 대법인지, 왜 발동시켰는지 압니까?”

“정확한 명칭은 몰라. 섭백(攝魄)류의 심성을 조금씩 변화시킨다는 정도. 동창에서 십여 년이나 공을 들였다고 들었지만, 지금까지 특별히 드러난 적도 없어서 어떤 효과를 노린 것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어. 더구나 이렇게 대규모로 직접 발동시킨 건, 음…….”

제갈봉이 잠깐 말을 끊고 해원기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보더니.

“혹시 해 소제 때문일 수도.”

“저 때문?”

“그래. 화산파에서, 또 화청궁에서. 더 따져 보면 내가 반룡령의 위탁을 받았을 때부터랄까. 동창이 해 소제를 주목하기 시작한 때가. 그들, 특히 밀각에서는 이미 해 소제의 신분을 파악했을 거야. 아!”

평소와 달리 빠르게 입을 놀리던 제갈봉이 탄성과 함께 아래로 뛰어내렸다.

약탕을 다리던 뒤뜰에서 약포로 들어갔다가 금세 도로 나오는 손에는 단단하게 꾸린 작은 봇짐이 들렸고,

급하게 서두르면서도 해원기에게 손짓을 잊지 않는다.

“일단 이 장안성을 떠나는 게 좋겠어. 함께 가자. 어서.”

상당히 당황한 눈치. 그러나 해원기는 여전히 지붕 위에서 내려다볼 뿐이다.

“뭐해? 빨리…….”

“이대로 떠나도 되겠습니까? 여기 황가약포, 그리고 개방의 분타.”

해원기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황가약포의 세 사람을 거쳐 장안의 남쪽을 향하자,

제갈봉이 답답한 듯 발을 굴렀다.

“얘기했잖아. 우리 약포의 동료가 저 지경이 되었으니, 개방 분타라고 별다른 수가 있을 리 없어. 이 갑작스러운 발동, 이건 분명 밀각의 고위층이 직접…….”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고지식하다 못해 벽창호라는 생각까지 드는데.

해원기는 제갈봉의 설명과 상관없이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뿐이 아니라 장안 전체를 놔둘 수는 없지요. 빈부귀천을 떠나서 다들 평범한 삶을 사는 이들이잖습니까.”

이게 무슨 얘기?

하던 설명이 끊긴 제갈봉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런 제갈봉을 잠깐 내려다본 해원기.

“제갈 소저, 먼저 가세요.”

평소처럼 맑은 음성이지만 어쩐지 조금 낮아진 듯.

그 말을 그치자 해원기의 신형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쉬익.

마치 독수리처럼.

제갈봉의 미간에 알아보기 어려운 잔경련이 일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해원기의 뒷모습, 시선은 절로 그 뒷모습을 쫓지만, 초점은 전혀 맞지 않고.

“어째서…….”

예쁜 입술이 의아함을 얼핏 표하다가 금방 질끈 씹혔다.

급하게 서두르던 조금 전과 달리 천천히 내딛는 몇 걸음. 다시 혼잣말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무모할 정도로 멍청한 건가? 아니지, 무지한 면은 있어도 바보는 아니야.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 밀각의 대부든 현신장이든, 그래, 아직 본신의 능력을 다 발휘한 적이 없었지. 그래도 이렇게.”

약탕기가 놓인 화로 앞에서 딱 멈춰 서서.

“그렇군. 태릉에서 북쪽을 거쳐 돌아왔으면 기루 골목의 사달이 바로. 섭백의 사도대법이 정식으로 발동한 건 확실히 해 소제 때문. 설마 밀각의 각주가 직접? 흐음.”

아름다운 눈이 반짝거리며 단숨에 추리를 마쳤다.

신산와룡의 제갈세가를 이은 그녀. 해원기의 평소와 다른 과감함을 엿보자마자 그 이유를 짚어냈고, 아울러 머리가 좌우를 번갈아 향했다.

해원기가 날아간 장안의 서쪽, 그리고 먼 동쪽.

“차라리 이참에 밀각의 구상을 죄 뒤집어놓는 것도, 그러면서 해 소제의 실력을 완벽히 재어둬야.”

혼잣말은 다만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일 뿐, 굳이 말을 끝까지 할 필요는 없다.

입을 다문 제갈봉이 전신을 가볍게 흔들자,

졸지에 늙수그레한 장돌뱅이로 화했다. 역시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역용.

역용이 끝나자 제갈봉이 당장 약포 바깥으로 움직였다. 굽은 허리에 맥없는 걸음걸이, 영락없이 긴 여행에 지친 모습이다.

제갈봉은 동창의 내막을 상당히 파악하고 있다.

조직의 구성, 인원의 배치와 동향 등을 제때에 해원기에게 알려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섭백류의 대법이라고 밝혔고.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그런 기밀을 알아낸 건지. 또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암암리에 해원기에게만 알리는지.

오랜 세월 손가락질받았던 가문의 추문을 의식했다고 하지만, 해원기는 그녀의 행동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동료’라고 하면서 황가약포의 셋을 그냥 놔두고 떠나려는 결정에는.

그렇다고 딱히 제갈봉을 의심해 젖혀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장안 전체를 뒤덮는 유탕섭백대진. 제갈봉의 수하 세 사람이 제갈봉에게 달려든 걸 직접 보지 않았나. 당장 개방 분타가 걱정되었고, 그밖에 또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지.

무엇보다 장안의 무고한 백성들이 자칫 해를 입을 수 있다.

남을 돕는 무인이 되고자 했다.

이 의지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둥, 둥, 둥, 둥.

여전히 간격을 둘리고 울리는 북소리. 동강을 통해 그 위치를 알아냈고,

[고루(鼓樓)의 북으로 발동시켰다는 거구나.]

처음 와보는 장안이지만, 명승고적의 명칭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기에 높다란 누각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장안 분타의 소개가 숨은 곳은 기루 골목의 북동쪽. 기루 골목은 번화가의 바로 뒤 구역.

번화가의 중심에 고루가 있다.

해원기가 동쪽으로 빠져 북삼방까지 왔으니 다시 서쪽으로 가야 한다.

휘황한 불빛이 금방 다가오고, 거대한 건축물이 두 개나 눈에 들어왔다.

장안을 들어올 때 지나쳤던 성문보다 더 커 보이는 누각. 작은 성보(城堡)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크기에, 길게 뻗은 겹처마 밑에는 붉은 등롱을 잔뜩 달아서 반짝이는 기와와 더불어 마치 환상처럼 보이는 건물.

‘가까운 쪽이 종루(鐘樓)일 테니, 고루는 바로 그 뒤.’

해원기가 거리를 헤아리며 속도를 줄였다.

종루든 고루든. 책에서 읽은 대로 높이가 십여 장에 기단(基壇)의 한쪽 변도 십여 장, 장안의 사방대로(四方大路)가 교차하는 중심지에 당당하게 자리했고.

이 시각에 적잖은 인원이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누각의 아래뿐 아니라 위에도.

해원기가 조금 남쪽으로 돌아 가까운 지붕 그늘 위에 내려앉았다.

종루와 고루 다 지나치게 환한 탓에 시야를 확보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기단에서 기좌(基座)라고 성벽처럼 쌓아 올린 바탕 위에 사방으로 펼친 누각이 상하 이 층, 정교한 난간이 빽빽이 이어지고, 그 난간을 돌아 올라가도록 만든 선반식 구조, 그 위에 또 겹처마를 얹은 후에 지붕에는 심록색(深綠色)의 유리와(琉璃瓦)를 얹었다고 했다.

상층이 겹처마 중간에 위치해서 북소리와 종소리가 공명을 통해 멀리까지 퍼진다더니.

고루는 아예 거대한 건물 전체가 북이 된 것처럼 장대한 소리를 울려대고,

사방의 난간에는 비단 겉옷을 걸치고 병기를 지닌 자들, 지상에는 창을 세운 관병들. 어림잡아도 수백이나 되는 인원이 고루를 에워싼 상태였다.

반면에 고루에서 대강 백여 장 정도 떨어진 종루에는 그저 몇 개의 그림자뿐.

해원기가 시선을 내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고루의 아래.

횃불이 많이 모인 입구 쪽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자. 꽤 먼 거리요, 머리까지 덮는 회색 두봉(斗篷)을 뒤집어썼으나 해원기는 그가 밀각의 이 대부임을 알아보았다.

이곳저곳을 손가락질하며 주위를 꾸짖는 게 상당히 불쾌한 듯. 그 뒤쪽에 다가온 같은 회색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자는 감 대부일 터.

고력사의 무덤에 들어갔던 자들이다.

‘여 대부로 화신한 정 형은 어디 있을까. 그리고 현신장들이 보이지 않는걸.’

워낙 많은 인원이 사방에 있는지라 잠심침령으로도 기척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눈에 들어오는 건 이 대부와 감 대부뿐. 정록도, 현신장 셋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력사의 무덤까지 이끌고 갔던 관병은 삼백 정도. 그들을 다시 여기에 배치하고 또 금의위까지 동원한 듯하지만,

지휘하는 이가 단지 밀각의 대부 둘이라. 뭔가 구색이 맞지 않는다.

기루 골목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유탕섭백대진을 공개적으로 발동시켰다면, 적어도 주국경 호경륭이나 각주 첨유진에 버금가는 인물이 나올 법한데.

해원기의 의아한 시선이 이 대부를 주시했다.

감 대부가 뭐라 귓속말을 건네고, 이 대부가 급히 몸을 돌려 종루 쪽으로 뛴다.

채 종루의 기단에 이르기 전, 길바닥에 넙죽 엎드려 조심스럽게 두봉을 뒤로 젖히고 민머리를 드러낸 채 우러르는 모습.

종루 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손짓을 하는 것 같더니, 이 대부가 자신의 민머리로 바닥을 때리듯 절을 올리고 벌떡 일어나 돌아서서.

“멈추어라!”

우렁찬 호통.

마침내 북소리가 그치자.

이 대부가 또 종루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인다.

“각하(閣下), 장안의 동서남북 사방대로의 변화는 곧 전부 수집되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옵소서.”

참으로 공손한 언행. 혹여 황제가 친림(親臨)했는가 착각할 정도인데.

아무 대답도 없이 조용한 종루. 각하라는 호칭이라면.

그러나 이보다 해원기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고루 아래의 광경이었다.

북소리가 그치자마자 돌연 흔들리는 관병들의 대오. 손에 쥔 창을 그대로 놓아버리고 흐느적거리더니 하나둘 주저앉는다.

졸병들만이 아니라 중간에 칼을 차고 돌아다니던 군관들까지.

전부 동시에 뭐에 홀린 것처럼 맥을 놓고, 그대로 제자리에 앉아 잠이 든 듯 정신을 잃어버렸다.

고루 위 난간을 지키는 금의위들은 멀쩡하건만.

해원기의 눈에 비췻빛이 짙어졌다.

심상치 않은 광경. 북소리가 그치고 관병들이 전부 정신을 잃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직 유탕섭백대진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하는 편.

그런데 종루에서 먼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허, 꼬박 십오 년이나 공을 들였거늘. 일각을 발동하는 데에 이백오십의 백력(魄力)을 써야 하는가? 참으로 비효율적이로구먼. 쯧쯧.”

안타깝게 혀를 차는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종루의 위를 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느긋한 말투. 그건 백화원 군방대청에서 들었던 첨유진의 목소리였기에. 체신이라더니 여기에 진신(眞身)이 있었나. 아니면, 이 또한 체신일까.

종루의 상층, 어둠에 묻힌 그림자 속에서 첨유진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동시안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일각 동안 울렸던 북소리. 그 북소리를 내곤 이백오십 명 관병이 쓰러졌다. 백력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단어일 터.

그러는 새에,

펑, 펑, 피르르.

장안의 세 방향에서 불꽃이 솟구쳐올랐다. 서쪽과 북쪽은 둥글게 터지는 불꽃, 동쪽은 긴 꼬리를 끄는 불꽃. 이 시각에 선명하게 보이는 폭죽이 오르는 건 분명히 신호.

이 대부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인상을 쓰며 납작 엎드렸다.

“아룁니다! 서쪽과 북쪽은 별다른 이상이 없고, 동쪽에 수상한 동향이 발견되었으며, 남쪽은, 에…….”

목소리는 높였으되 말을 맺지 못하고 우물쭈물.

종루 위의 차분한 음성이 되레 만족한 듯 웃음을 머금는다.

“흐흥, 그래, 발동한 효과는 보았다는 거구나. 그럼 남쪽으로 가볼까나. 그 쓰레기 더미에서 어느새 남쪽까지 빠져나갔을꼬? 감 대부는 다쳤으니까 자리를 지키고, 이 대부가 동쪽을 맡아.”

목적은 해원기.

말이 끝나면서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디이이이잉.

아련하게 전해지는 기이한 울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리였던지 종루의 상층도, 지면의 이 대부도, 심지어 정신을 잃고 주저앉은 고루의 관병들도 움찔거렸다.

남쪽에서 중심지까지 곧게 뻗은 남방대로를 타고 서서히 다가오는 울림. 무엇으로 울렸는지 몰라도 대단히 맑고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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