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14화 (214/410)

제54장 황당무계(荒唐無稽) (2)

해원기가 일단 호경륭의 볼을 쥐어 강제로 입을 벌렸다.

의술을 알지는 못해도 일단 급한 대로 지혈이라도 할 셈.

하지만,

“크으, 너, 너도, 바로…… 내 뒤로, 우움. 아무리, 체신이지만. 쿨럭, 곧 찾아올…… 끄르륵.”

호경륭은 혓바닥이 거의 끊겨서 정확하지 않은 발음에,

뭉클뭉클 쏟아지던 핏덩이가 목구멍으로 들어가 숨이 넘어간다.

스스로 혀를 깨문 독한 심보. 혈도가 다 풀리지 않았고, 전신이 밧줄에 꽁꽁 묶였어도 기어이 자결을 택한 이 독심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한눈에 이미 가망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인데.

호경륭의 어깨와 볼을 쥐었던 손에서 힘이 빠져가던 해원기가 불현듯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어처구니없던 소리를 지껄이던 때와 달리,

마지막 웅얼거림과 동시에 뒤집히던 호경륭의 시선이 얼핏 옆을 보았다는 느낌.

호경륭이 자결을 하든 말든 실눈이 풀린 채 침만 흘리는 첨유진 쪽이었다.

뭐라고 웅얼거렸던가.

‘죽어가면서 남긴 말이 내가 바로 뒤를 따른다는 저주, 그리고 체신이지만 곧 찾아온다는.’

저주에 곁들여 놀리는 내용이었다.

좋지 않은 예감.

해원기가 손을 바꾸어 빠르게 첨유진을 더듬었다. 밧줄로 꽁꽁 묶어놓았기에 오히려 품에 들은 것이 더 쉽게 드러나고,

이리저리 몸을 꼬아대는 첨유진의 품에서 툭 삐져나온 건 철패 하나.

지옥도를 형성했던 철패는 오만 가지 악귀 문양이 있었고, 이미 해원기에 의해 형편없게 우그러졌었다.

첨유진의 품에서 삐져나온 건 조금 더 크고, 산과 강으로 보이는 무늬가 새겨진 듯.

기묘한 기시감에 자세히 보려고 손을 뻗는데.

지이잉.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늘게 떨어대는 철패.

해원기의 표정이 홱 바뀌면서 급하게 몸을 돌렸다. 피투성이로 쓰러진 호경륭과 바보처럼 침만 흘리는 첨유진을 돌아볼 새도 없이.

무서운 속도로 토굴을 지나쳐 유항과 얘기를 나누었던 처음의 더러운 천막으로 향했다.

연락을 위해 남겨놓았다는 어린 거지를 찾으려고.

첨유진의 품에서 나온 철패. 바로 조양신문의 철패와 같은 물건이었다.

제남에서와 마찬가지로 개방의 분타에는 항상 꼬마 거지 하나를 키운다. 무공보다는 영악한 기지와 민첩한 눈치를 지닌 녀석으로.

“어?”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거지가 놀란 소리를 내기도 전에,

해원기가 대뜸 들어 올려 허리에 끼었다.

“분타주께 가야 한다.”

눈치가 빨라야 소개(少丐). 놀란 와중에도 제 책임을 잊지 않는다.

“저 구멍이요.”

자은사 터로 가는 토굴을 가리키며 몸을 잔뜩 웅크려 해원기가 들기 쉽게 하는 것도 보통이 아니지만. 칭찬 한마디 해 줄 겨를이 없었다.

펑, 퍼펑.

갑자기 귀를 울리는 폭음과 확 밀어닥치는 연기. 화탄(火彈) 따위를 무더기로 내던진 모양이라, 해원기가 소개의 얼굴을 소매로 가리면서 토굴로 몸을 날렸다.

과연 술법이 걸린 철패. 상대는 이미 첨유진의 소재를 파악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쓰레기 더미로 숨은 게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토굴의 끝은 오래된 담장 밑에 뚫린 개구멍. 어느 집 정원인 듯 장식으로 꾸며놓은 바위 몇 개가 앞을 가린 좁은 틈으로 소개가 먼저 기어 나왔다.

바위 사이로 그 조그만 머리통이 얼핏 나왔다가 들어가고,

“아무도 없을 거라던데. 이 집 너머 또 골목 두 개를 건너면 동삼가의 북오방(北五坊)이 나오죠. 거기서 남쪽으로 꺾어…….”

소개가 하던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이 둥그레졌다.

어느새 몸을 세운 해원기.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밤눈이 어두운 소개로선 개구멍으로 남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벌떡 일어선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누군가 집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나.

“괜찮다. 이 집은 비었고, 주위에 달리 관병이 있지도 않다. 흠.”

차분한 목소리, 시선을 돌리는 눈에선 신기하게도 푸른빛이 흘러서.

소개가 입을 벌린 채 둥그레진 눈을 껌뻑거렸다.

검왕이라는 어마어마하게 귀한 분이라고 들었고.

그 긴 토굴을 언제 빠져나왔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등에 비낀 검이 없었다면 생김새는 영락없이 남의 집 심부름이나 할 것 같은데. 집이 빈 것과 주위의 사정을 어찌 아는지.

해원기가 가라앉은 눈으로 어둠을 주시했다.

호경륭의 자결과 첨유진의 체신. 생포해서 문초하려던 애초의 생각은 어설픈 처리로 어그러졌으나.

전혀 소득이 없지 않았다.

‘동창의 구성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방대하다. 내부의 조직이라는 밀각 외에도. 밀각 소속은 대부분 대부라는 호칭, 반면에 호경륭은 무훈의 주국경이라는 품계였지. 그럼 아예 그 안에 조정을 꾸려놓았단 말인가. 황제의 직속이 설마…….’

대역죄에 해당한다.

사술에 걸리지 않은 호경륭이 떠들던 황당무계한 주장도 그렇고.

비록 당세 가장 큰 권력이라고는 해도 그저 세상 모르는 환관들이 얼토당토않은 짓을 벌인다고 여겼거늘.

참으로 맹랑한 망상이다.

해원기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보다 드러난 사실에 집중하자. 황량도에서 유래한 기예들, 그리고 체신을 몇이나 부린다면 그건 심마령(心魔令)과 유사한 술법. 각주답게 오대마도의 몇 가지를 터득했다는 건가. 조화부인은 곤혹도의 미심환영, 화산에서 조 대부란 자는 명부도의 명도흑염. 아직 나오지 않은 건 잔인도(殘忍道)와 형해도(形骸道) 둘. 패도오경이라고 했으니 비급 형태로 만든 것 같은데. 대체 누가 어떻게?’

지부의 마공. 특히 마왕(魔王)들만이 지니는 오대마도는 쉽사리 전해지지 않는 것이고.

유일하게 오대마도를 아는 현재의 유일마왕(唯一魔王)은 절대 세상으로 나올 수 없다.

영광종(靈光宗)이 동해의 작은 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오마왕전(五魔王殿) 역시 민월(閩越)의 좁은 산에 처박혀 감히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할 터.

무신(武神)으로 추앙받는 천극 탁관영의 손에 여지없이 목이 날아갈 것이니.

그렇게 과거의 벽세는 벽지(僻地)에, 지부는 지하(地下)에 묶어둔 지 어언 이십 년.

벽세가 세상에 뿌려둔 잔재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지부의 마공만은 유출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무훈의 주국경은 밀각과는 다른 계통. 아련하게 전설로 남은 정종의 신공을 익혔다. 역대 황실의 비전이라지만 그 오랜 세월 잊혔다가 이제야 재현된 이유는 뭔지.

현신장이 익힌 육악지력의 셋과 금오혈석 아홉 개와 연관된 사일신화도 마찬가지.

신화 전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형국이다.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에 어느새 눈썹을 문지르던 해원기가 비로소 손을 떼었다.

‘그리고 조양신문이라.’

또 하나의 단서.

멍청히 올려다보는 소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여기서 북삼방의 황가약포를 거쳐 자은사 터의 다루로 황 분타주를 찾으러 갈 셈이다. 꼬마 거지는 아침까지 몸을 숨겼다가 나중에 움직이는 게 좋겠구나. 만약 내가 중간에 경로를 바꾸게 되면, 흠, 놀라지 말아라.”

소개의 더러운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자,

쉬익.

“으에, 헙!”

소개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던 자신의 입을 부리나케 틀어막았다.

엄청난 바람이 깔아뭉갤 듯 쏟아지다가 홀연히 사라지고,

눈앞에 돌연 등장한 시커먼 물체. 호박(琥珀)처럼 영롱한 빛을 띠는 두 개의 눈이 코앞에 바짝 다가오는 바에야.

그게 자신을 쓰다듬는 해원기의 팔에 앉은 거대한 독수리라는 걸 겨우 알아보았고,

“이 녀석을 시켜 너에게 알려주마. 서로 얼굴 잘 익혀두렴.”

소개가 정신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이 어마어마한 양반을 가리키는 전설 중에는 구천을 나는 독수리가 등장했었어.

정말 신응검왕(神鷹劍王)이 맞구나.

삐잇.

동강이 슬쩍 내는 소리가 마치 웃는 것 같았다.

미앙보식에 부신수영을 섞어 어둠에 싸인 장안성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갔다.

수정지기를 완성한 후에는 공력의 소모가 눈에 띄게 줄었으나, 사부 밑에서 배울 때의 습관 그대로 언제나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한다.

소개에게서 ‘북오방’이란 지명을 들었을 때, 제갈봉을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황가약포는 동삼가의 북삼방. 남쪽으로 향하면 자연히 거치는 길목이다.

고력사의 무덤에서부터 연달아 벌어진 사건에 잠시 잊었지만,

오소민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 후에 일어난 일련의 흐름은 제갈봉이 보낸 짧은 서신부터였다.

반룡령의 위탁으로 해원기의 뒤를 캐던 여인. 마침내 사라진 제갈세가의 후예라는 정체를 밝혔으나. 아직 그녀의 의도와 목적이 선명치 않고.

또 정록에게서 들은 기환요술의 부작용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얼굴을 감추고 신분을 숨기는 이는 믿기 어렵다.

‘일어선다고 성을 바꾸고, 앉는다고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셨지.’

이제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말이지만, 사부와 탁 소숙이 강호를 행도하던 시절에는 떳떳함이야말로 무인이 지녀야 할 기본의 하나였다고 했다.

그 가르침을 오롯이 간직한 해원기로선 제갈봉에게 미덥지 않은 구석이 느껴졌다.

그러나 간단치 않은 상황.

제갈봉은 과연 어떤 소식을 알아냈을지.

‘태릉에서도, 고력사의 무덤에서도 그녀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었다. 황가약포에 선을 대라고 했었지. 그런데 어째?’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서 걸음이 느려졌다.

이미 축시를 넘어 인시로 접어들 시각.

여전히 캄캄한 밤이지만, 지금은 한참 낮이 길 때다. 해가 일찍 뜨는 건 차치하고라도, 이런 큰 도성에서는 남보다 일찍 생활을 시작하는 이도 적지 않을 터.

더구나 기루 골목에서 굉음을 내는 싸움을 벌였고, 부근의 쓰레기 더미에는 화탄이 무더기로 터졌는데.

아무리 멀리 떨어진 구역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조용하다.

지나온 북오방이나 눈앞의 북삼방이나 전부 가난한 이들이 몰려 사는 골목. 번화가 쪽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건가.

기척을 감추려고 미앙보식에 부신수영을 섞었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적막하다니. 심지어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이렇게 큰 장안에도.’

수차제를 치르고도 기억하지 못한다던 진평현 사람들이 떠올랐다.

‘유탕섭백대진.’

이전에 추정했던 답. 남송 때의 영광교가 혹세무민하던 술법. 물론 사교(邪敎)에 모든 걸 갖다 바치게 했던 과거의 유탕섭백대진과는 다른 듯하지만, 이 장안 전체에도 펼쳐 놓았을 줄이야.

진평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규모잖나.

오랜 시간에 걸쳐 세밀하게 진도를 구성하고, 많은 술사와 다양한 보물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할 터. 그 조건을 채우는 건 바로 장안을 다스리는 관부다.

비로소 장안 분타주 유항이 그렇게 쉽사리 홀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암암리에 장안 전체에 영향을 끼친 유탕섭백대진. 기루 골목이든 쓰레기 더미든, 체신이라도 밀각의 각주가 실종된 상황이니 아예 정식으로 발동시켰을 것이다.

해원기가 문득 조바심이 생겨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미 황가약포에 돌아왔다면 제갈봉도, 그리고 분타로 향한 유항도 안전하지 않다.

백화원의 군방대청처럼 또 무슨 일이 생길지.

기척을 감추던 부신수영을 접고 곧장 황가약포를 향하는데.

둥, 둥, 둥, 둥.

갑자기 조용한 장안성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

아직 인시가 되지 않았고, 또 인시에 저렇게 계속 북을 치는 경우는 없다. 외적이 침범한 것도 아니요, 커다란 화재가 난 것도 아니면서 멀쩡하게 잠든 백성들을 죄다 깨울 셈인가.

그러자마자,

펑.

순식간에 다가들던 황가약포의 지붕이 폭발하면서 몇 개의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고,

파파파파.

거친 타격음과 함께 경력이 사방으로 튀었다.

“제갈 소저!”

해원기가 제갈봉을 확인하고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삼 대 일(三對一). 환자에게 침을 놓던 중년 의생, 사람들 줄을 세우고 계산을 도맡던 노복, 약제를 나누고 탕약을 끓이던 청년. 해원기가 황가약포에 들어갈 때 한 번씩 보았던 셋이 제갈봉에게 맹공을 퍼붓는다.

비침이 날고, 장풍과 곤봉이 어지럽게 때리는 속에서 제갈봉이 얼핏 해원기를 돌아보며,

“잠깐만.”

짧은 대답을 끝내기 전에 두 손이 기이하게 공간을 점해 가자, 눈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별 무리.

“할 수 없네. 천성장(天星掌)!”

한숨 같은 기합과 함께 별 무리가 약포의 셋을 뒤덮으며 무거운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퍼퍼퍽.

맥없이 추락하는 셋은 신음도 내지 않고, 제갈봉이 훌쩍 뒤로 물러나 처마 끝에 섰다.

바로 곁에 내려선 해원기,

“이게 어떻게 된…….”

“실책, 실책이었어. 이미 장안을 완전히 장악했을 줄은. 더구나 이런 방법으로. 으득.”

해원기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이를 갈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에게서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풍겨.

해원기의 얼굴도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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