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장 황당무계(荒唐無稽) (1)
“유 분타주, 괜찮습니까?”
해원기가 보이자 일어서려고 애쓰는 유항. 이마를 질끈 동여맨 수건 밑의 얼굴이 파리해서 마치 중병을 앓는 사람 같다.
유항이 손짓으로 부축하려던 자들까지 물리면서 얼른 자리를 권했다.
“아,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어서 이쪽으로. 으음, 참으로 뵐 낯이 없습니다.”
인사하는 음성이 침중하다.
머리가 깨지는 듯 지독한 두통보다 소위 개방 장안분타를 맡은 자신이 형편없이 사술에 걸려든 꼴을 보였으니.
해원기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분타주가 적시에 분타의 형제들을 보내준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그리고 저들의 사술이 보통이 아닌지라. 자, 우선 이걸 복용하십시오.”
싸움이 끝나자 곧장 군방대청으로 몰려든 거지 떼. 해원기의 도움으로 겨우 장내를 벗어났던 유항이 그 와중에도 분타의 제자들을 풀어 동향을 살폈기 때문이다.
백화원 군방대청이 완전히 박살 난 거친 싸움이었다.
불야성을 이루는 기루 골목은 바로 번화가의 뒤편. 거듭된 폭음과 비명을 온 장안이 다 들었을 터.
옛 도읍이었던 이 큰 성에는 당연히 어울리는 규모의 관부가 많은 병사로 치안을 유지한다.
동창이 벌인 일이기에 관부가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그대로 머물러있는 건 멍청한 짓.
소위 밀각의 각주가 주국경과 함께 등장하지 않았나. 분명 정해진 때에 뒤를 받치는 자들이 있을 것이요, 고력사의 무덤을 도굴한 무리가 돌아오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분타 제자들의 때맞춘 지원이 해원기에게는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물러날 곳, 제압한 자들을 가둘 장소. 장안이 초행길인 해원기로선 난감한 상황이었으니까.
요대자에서 백초환을 꺼낸 해원기가 고소를 머금었다.
유항이 삽시간에 충직한 종이 되어 묻는 대로 고분고분 비밀을 다 털어놓았던 장면.
꽃밭에서 화향이 진동하고 꽃잎이 흩날리던 그 진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수차제를 통해 유탕섭백대진이라고 추정했었다.
미리 의심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기루의 밀실에서 유항과 밀담을 나눌 때 백초환을 건넸을 것을.
유탕섭백대진에 또 어떤 삿된 술법을 섞었을지. 후유증이 걱정되고.
아울러 가벼워진 약병의 무게가 은근히 한심한 느낌을 준다.
단목정을 만나 새로 얻은 게 언제라고.
“약왕당의 백초환이군요. 그러지 않아도 본 방의 피독단(避毒丹)을 먹긴 했습니다만.”
개방은 본래 독을 다스리는 데도 꽤 조예를 갖춘 문파. 백초환을 단박에 알아본 유항이 바로 받아 삼켰다.
화향과 꽃잎에 혹여 독기가 담겼을까 해서 피독단을 먹었는데도 두통이 심한 상태. 사양할 계제가 아니었다.
유항이 약을 삼키자마자 말을 이었다.
“여기는 번화가와 기루 골목에서 나온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입니다. 워낙 더러운 장소라 누가 와 보지도 않으니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만 잠시 머무르시죠. 날이 밝으면 방도들을 전부 풀어 간밤에 모였던 부호들부터 알아볼 생각입니다.”
토굴과 천막.
지금 해원기와 유항이 마주 앉은 곳은 사방으로 토굴이 뚫리고 곳곳을 더러운 천으로 휘감은 쓰레기 더미 안이었다. 썩은 내가 코를 찌르고, 질척한 바닥에 온갖 날파리가 들끓어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지만.
여기도 다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구역. 번화가와 기루 골목에서 나오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을 가까이서 받아줄 사람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졌다. 천한 이들이 맡는 역할. 새벽녘부터 오물을 모아 천으로 가려두었다가, 한밤중 인적이 드물 때 북문 밖으로 지어 나르면서. 있어도 없는 듯 살아가는 가련한 삶의 터전이다.
한여름에는 악취와 벌레가 더 극성이라 쉬 병이 들고 죽기 일쑤. 그렇다고 누가 알아보려고나 할까.
그런 가련한 이들을 그나마 보살피는 게 개방이었고. 그래서 장안 분타의 숨겨진 은신처이기도 했다.
그나마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주변에는 숯을 뿌리고 향까지 피웠으나 별반 효과는 없는 듯.
해원기가 잠시 미간을 찡그렸으나, 악취나 벌레 때문은 아니었다.
유항에게 설명할 내용이 적지 않았다.
분타주답게 유항의 대처는 노련했다.
장안에서 힘깨나 쓴다는 부호들이 전부 홀렸다가 풀려났다. 그 부호들을 소집했던 이는 장안의 지부대인. 그저 부호들에게 돈을 뜯으려는 게 아니었고, 동창이 주도한 해괴한 짓거리였다. 그것도 동창 내부의 비밀 조직이라는 밀각의 각주가 직접 나선.
유명비 스물이 전부 쓰러진 현장에 밀각 각주와 주국경이 실종된 사실이 알려지면 한바탕 난리가 날 터.
부호들의 하나로 불려갔던 유항도 섣불리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은 장안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고.
해원기에게도 서둘러 행할 일이 있다.
대강의 사정을 듣자 유항 역시 표정을 굳히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해 대협이 끌고 온 저 둘이 바로 밀각의 각주와 주국경이라는 자들. 너절한 이름을 붙이긴 했어도 높은 자리인 건 분명하니 내막을 알아낼 좋은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머무르는 위험도 크군요.”
동창의 고위를 잡았으니 조용히 끝날 리 없다.
당장 고력사의 무덤에 갔던 대부니 현신장이니 하는 자들과 삼백의 관병이 벌써 돌아왔을 수도. 각주가 장안에 있는데 일의 결과가 어떻든 보고를 서두르지 않았겠나.
유항이 이마를 동여맸던 수건을 풀며 말을 이었다.
“애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정록이가 무사히 섞여 들어갔다면, 음, 분명히 저와 연락을 취하려 하겠지요. 그 녀석은 이 은신처를 모르니까.”
역형대법으로 여 대부로 화신한 정록. 아무리 유항과 친분이 있어도 그가 아는 분타는 자은사 옛터뿐이다.
유항이 직접 나서서 살펴야만 한다.
“그렇지만 지금 모습을 드러내는 게…….”
“괜찮습니다. 변장을 하면, 아니, 본래 모습이 거지잖습니까. 후후. 여기에는 눈치 빠른 꼬맹이를 놔두지요. 조금 있다가 쓰레기를 버릴 때 슬쩍 끼어서 나가렵니다. 변화가 있으면 제가 바로 돌아오고요.”
유항이 해원기에게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 옷감을 팔아 치부한 유 장자가 아니라 나이 먹은 거지의 모습을 만든다.
백초환의 약효가 빠르기도 하지만, 시간을 아껴야 한다.
유항이 떠나고 난 후, 해원기가 다른 토굴로 들어갔다.
구석에 처박아놓은 둘. 전신 혈도를 점했는데도 개방 제자들이 또 굵은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아 한심한 몰골이다.
뒤통수가 깨진 호경륭, 갈비뼈가 박살이 나 겨우 숨만 쉬는 첨유진.
해원기가 먼저 첨유진의 앞에 앉아 손목을 쥐었다.
살며시 청정력이 일어나면서 악취와 벌레가 전부 밀려나고, 호흡이 돌아오기 시작한 첨유진이 실눈을 바르르 떤다.
부상이 원체 심해 혈도를 느슨하게 막아놓았고, 그렇기에 해제도 빠르다.
해원기가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통증이 줄고 내상도 가라앉겠지만 다시 심한 고통을 가할 수도 있다. 이제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도록.”
“으으음.”
가벼운 신음과 흐릿한 눈빛. 정신을 차린 듯해서 해원기가 바로 질문을 이어갔다.
“밀각의 구성과 하는 일을 말해봐.”
물어야 할 문제가 아주 많으나, 우선순위를 두고 차근차근 물을 생각.
그런데.
“으으응, 으응.”
첨유진의 실눈이 여전히 흐리고, 해원기의 묻는 말에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만 낸다.
해원기가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조금 주었다.
신왕공 고유의 청정력 대신에 검왕수. 첨유진이 뜨끔하니 놀라는 시늉을 하지만,
“후우웅, 웅웅.”
그 입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희한한 소리.
“허튼짓. 기어이 험한 꼴을 볼 셈이냐? 각주라는 자가 어찌, 음?”
어처구니가 없어 냉엄하게 꾸짖으려던 해원기가 돌연 눈을 치켜떴다.
뭔가 이상한 느낌. 오련칠혼의 비술을 거친 활시인이라고 여겼던 첨유진이다. 비록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진 중상을 입었으나 이렇게 정신을 놓을 리가. 그러고 보니 활시인으로서 체내에 사기를 조금이라도 품었다면 제탁지검이 먼저 발동했을 터.
동시안이 다시 세밀하게 첨유진을 살피려 할 때,
“흐흥, 각주는 무슨. 어쩐지 체신(替身) 같더라니. 퉤엣.”
바로 곁의 호경륭이 눈을 뜨며 침을 내뱉는다.
아직 혈도를 풀어주지 않았건만.
깨운 첨유진은 바보가 되었고, 놔두었던 호경륭이 되레 깨어났다. 첨유진이 진짜가 아니라 모조품이란 소리를 지껄이면서.
연검대초에 맞아 퉁퉁 부어오른 턱을 주억거리며 오만상을 쓰는 호경륭.
“여긴 어디냐? 뭐 이렇게 지독한 냄새가…….”
“체신이라고? 밀각의 각주가 아니다?”
해원기의 왼손이 벼락같이 호경륭의 어깨를 쥐며 말을 자르자,
“윽. 아프다고. 제길.”
호경륭이 진저리를 치며 해원기를 노려보았다. 이미 첨유진의 손목을 힘주어 잡을 때부터 운용된 검왕수. 좁은 토굴 안이 단숨에 삼엄한 기세에 뒤덮인다. 검기핍인이 뜻보다 먼저 펼쳐지기에.
그런데도 해원기를 노려보는 호경륭은 상당히 굴강한 성격이랄까.
불도 밝히지 않은 컴컴한 토굴 속에서 해원기의 동시안이 푸른빛을 흘리고, 노려보던 호경륭이 견딜 수 없는지 시선을 돌리며,
“그래. 각주라는 그 요괴, 체신을 몇 개나 움직이는지 아무도 몰라. 이렇게 붙잡혔을 때, 이미 체신을 버렸을 걸? 뭐, 볼 거 다 보고, 들을 거 다 들은 다음일 테니. 흐, 네 밑천도 이제 다 드러나서 앞으로 고생 좀 해야 할 거다.”
그래도 비웃는 말을 덧붙였다.
무훈으로 주국경까지 올랐다고 자부하던 호경륭이다.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호경륭이 깨어난 건 부상이 심한 첨유진을 깨우려고 청정력을 일으켰기 때문. 즉, 호경륭이 익힌 목왕팔준경이 상당히 순수한 정종무공(正宗武功)이라는 방증이요, 그 어깨를 쥔 해원기의 왼손에서도 제탁지검이 발동하지 않았다.
해원기가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을 바꾸었다.
“지부의 오대마도, 그걸 어디서 어떻게 얻었지?”
각주가 체신을 써서 해원기의 무공을 파악했다는 조롱보다, 그렇게 괴뢰로 부리는 술수라면 역시 사술과 마공일 터.
다그치는 물음에 호경륭이 움찔 어깨를 떤다.
“제, 젠장. 밀각의 패도오경(覇道五經)을 말하는 거냐? 그, 그건 고천자(古天子)의 형벌에서 유래했다고. 문산계(文散階)의 고위에 올라야 비로소. 우리 무훈(武勳) 쪽과는 달라서. 헉, 헉.”
두서없는 대답도 힘이 들어 몰아쉬는 숨.
집중된 검기핍인 아래에선 굴강한 성격도 소용이 없다.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부의 오대마도를 패도오경이라고 일컫고, 상고시대부터 전해진 형벌을 들먹인다. 그러면서 문무(文武)의 반열(班列)은 익히는 공부가 다르다라.
확실히 이 호경륭에게는 마공의 흔적이 없다.
동창의 내부는 참으로 복잡한 구성인 듯. 해원기가 허깨비와 다름없는 첨유진의 손목을 놓으면서 짧게 탄식했다.
“허,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호경륭, 이렇게 당당한 무골(武骨)을 지닌 당신이 어째서 강호의 혼란을 조성하는 거요? 시답지 않은 주국경 직위나 붙이고 요사스러운 술법이나 도와주면서.”
말투가 변하면서 검기핍인의 기세도 조금 누그러진다.
본디 이런 고약한 문초가 달갑지 않은 해원기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기어이 대답하는 호경륭의 기질에 안타까운 심정이 절로 드는데.
호경륭이 다시 시선을 돌리며 코웃음 쳤다.
“흥! 강호의 혼란? 혼란한 강호를 바로 잡으려는 거다. 물론 나도 밀각의 요사스러운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굳이 가릴 때가 아니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나라의 기초가 올바르게 서야만 하지. 시답지 않아도 주국경의 직위가 필요한 이유고. 너야말로 지금 얼마나 그릇된 일을 하는지 아느냐? 절세검왕은 무슨. 퉤엣.”
입을 놀릴수록 얻어맞은 턱이 아픈지. 침을 뱉으며 해원기를 노려보는 시선이 흉흉하고.
“망망신주(茫茫神州)를 품은 정통중화(正統中華). 그 찬란한 춘추(春秋)의 흐름을 거역하는 것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으윽.”
드득.
힘주어 악다문 입가로 뭉클 뿜어져 나오는 선지피. 해원기가 깜짝 놀라 급히 어깨를 잡아당겼으나.
이미 스스로 혀를 깨문 호경륭의 눈이 서서히 뒤집혔다.
생각지도 못한 일. 해원기가 생전 처음 접하는 광경에 멍해져 버렸다.
설마 자결을 할 줄이야.
게다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건가. 정종의 목왕팔준경을 익혀서 딱히 괴이한 사술에 걸린 것도 아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