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장 화하신적(華夏神蹟) (4)
초식의 뜻을 읊으며 검을 펼치는 음검병시(吟劍並施).
천손검법의 제일초 홍몽무변을 그렇게 쓴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상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호경륭의 실력은 이미 겪었던바. 검왕오형의 네 번째까지 오의를 깨우쳐서 검상에 구애받지 않고 군림어검의 금광섬삭까지 펼쳤었지만,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었다.
분신술로 착각할 정도로 빠른 신법을 구사하는 데다가, 수가 늘수록 위력이 증가하는 마제철이란 희한한 병기는 또 몇 쌍이나 지녔을지.
그리고 연혼의 술법을 거친 유명비 스무 명을 움직여 유명반혼진이란 진법을 포설한 첨유진 또한 가벼이 볼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진세의 바탕이 일단 지부의 오대마도 중 황량도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니.
과연 유명반혼진을 부수자마자 호경륭이 득달같이 달려들고, 첨유진의 오골선이 몇 배나 부풀어 갈퀴로 변했다.
무공 내력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고수 둘을 상대하면서 어찌 조금이라도 방심할 수 있으랴.
그런데 비록 완성된 수정지기로 대지체와 상상지를 깨운 셈이긴 해도.
위력이 지나치게 강하다.
본래는 연검대초로 둘을 꼼짝 못 하게 속박하고 몽둥이찜질을 하려 했건만.
이러다간 내막을 토해낼 입부터 망가지게 생겼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았다.
핏, 핏.
“퉤, 좋아. 이거 재미있는데?”
무너진 담장 근처까지 밀려났던 호경륭이 피를 내뱉고 일어서자 팔뚝에 꽂혔던 마제철이 저절로 뽑혀나갔다.
무훈의 주국경이라더니. 형편없이 나가떨어져 꿈틀대기만 하는 첨유진과 달리 다시 달려들 투지를 일으키고.
그 양쪽 팔뚝에서 쇳소리가 연달아 울리면서 오사모 아래의 풀어헤친 머리칼이 뻣뻣이 일어선다.
촤르르르.
퍼렇게 굳은 얼굴과 제멋대로 흔들리는 은의는 마치 그 쇳소리에 호응이라도 하듯.
대단한 기세가 일더니.
번쩍.
은광이 눈을 홀리는 순간, 해원기의 정면으로 들이닥쳤다.
“초영초광(超影超光)!”
그림자를 뛰어넘고, 빛을 뛰어넘는다는 외침. 신형이 좌르르 늘어져 어느 게 진짜인지. 분신들이 두 줄로 이어져 해원기를 감싸고,
“절지(絶地)! 분소(奔霄)!”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연달아 터뜨리는 기합에.
그야말로 미친듯한 경력이 쏟아졌다.
엄청난 속도로 들이치는 공격, 눈이 핑핑 돌 정도라 막기도 버거울 판이라. 처음에 이런 식으로 해원기를 몰아세웠던 때보다 더욱 빠르다.
그러나 그때는 해원기가 맨손으로 상대했었다.
해원기가 미간을 좁힌 채 고검을 슬쩍 내밀고,
우웅.
공간이 깜짝 놀라 일렁이는가.
호경륭의 분신이 모조리 기우뚱 중심을 잃더니, 단번에 검집 끝으로 끌려온다.
분신을 이룰 정도로 빠르다 해도, 어찌 검집 끝이 까딱 움직이는 것보다 빠르랴.
호경륭의 어깨를 찍고, 복부를 찔렀다가 턱으로 튀어 오르는 한 동작.
퍼퍼퍼퍽.
“컥.”
쿠당.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호경륭이 펄쩍 뛰어 땅바닥에 뒤통수를 들이박았다.
얼마나 세게 나가떨어졌는지,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서.
누가 옆에서 보았다면, 호경륭이 저 혼자 해원기의 검집에 들이박고 뒤로 쓰러진 줄 착각했을 터. 감연히 일으켰던 투지가 무색하다.
홍몽무변이 압축해서 터뜨렸던 공간. 그 공간에는 아직도 수정지기의 여력이 존재했다.
물결이 퍼지기만 하나? 퍼질수록 다시 오므라드는 힘이 생기는 법.
더구나 발검제형의 오의인 수발여의가 자연스레 담겨있음에야.
호경륭은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 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투두둑.
그런 호경륭의 양쪽 소매에서 마제철 조각들이 맥없이 흘러나오는 모습에.
해원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검을 거두어 두 손 위에 눕힌다.
환정곡 검단 위에 모셔두었던 형태 그대로. 검집과 검병을 검대의 끈으로 꼼꼼하게 묶은 연검대초.
얼마 만에 다시 쥐는 이제검인지.
그러나 훑어보는 해원기의 눈에는 아련한 감정보다 차분한 이지의 빛이 떠올랐다.
“역대 왕조가 대대로 전승하는 황궁비전(皇宮祕傳)이 있다더니. 그 마제철은 바로 목왕팔준경(穆王八駿勁)에서 유래한 것이구나. 진수(眞髓)로 보이진 않는다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호경륭의 무공이 무엇인지 간파했으나, 그보다 먼저 따질 문제가 있다.
몸에 지녔던 마제철이 모조리 파괴되고,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는 호경륭은 이미 기절한 상태.
해원기가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웅크린 첨유진을 향했다.
과거에 탁 소숙이 일러주었던 고사 중 하나.
천중산(天中山)에서 오절간(五節鐗)과 서권송긴현공(舒捲鬆緊玄功)을 익힌 자를 상대했던 얘기였다.
송나라 때 천하의 모든 병기를 깨뜨리기 위해 만든 오절간이란 기병, 그리고 풀고 조이는 힘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심오한 공부.
전부 황궁에서 은밀하게 전해지는 비전이라나.
그러면서 관계된 풍문과 전설을 다 가르쳐주었었지.
호경륭이 보인 엄청난 속도와 마제철을 이용해 광마처럼 날뛰던 힘. 그건 훨씬 옛날인 주(周)나라의 전설과 이어진다.
주목왕(周穆王)이 아득히 먼 서천(西天)을 순행해 서왕모를 만나는 전설에, 그 마차를 끌었다는 여덟 마리 신마(神馬).
그런 무공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지만,
신기한 무공에 정신이 팔려 일의 순서를 잊을 리 없다.
해원기의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첨유진을 보았다.
여기저기 부챗살이 꽂힌 채 꿈틀거리는 모습.
“유명반혼진만이 아니라. 마지막에 오골선을 던진 기예, 거기에 담긴 힘은 황천유혼(黃泉幽魂)의 검력(劍力)이었다. 너는 확실히…….”
닿는 걸 모조리 깎아 먹는다는 지부의 황천유혼검력. 이제는 기억하는 이도 드문 공포스러운 무공의 이름을 언급하던 해원기의 말이 흐려지고.
문득 전해지는 위화감.
발을 멈추고 이제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량도뿐 아니라 황천유혼검력까지 드러낸 이상, 분명히 지부의 마공과 깊이 이어졌을 첨유진에게서 기묘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부스스.
자다 일어난 것처럼 일어나는 첨유진의 전신에는 여전히 예닐곱 개의 부챗살이 꽂힌 채.
흙으로 더러워진 남삼을 툭툭 털면서,
“과연 절세검왕이라고 해야 할까. 글로 읽은 것과 달리, 흠, 황천유혼검력까지 알아보는구먼. 그래, 그게 바로 혼천검경과 신마조화검을 무너뜨렸다는, 고천무쌍(孤天無雙)의 검법이요?”
늘어진 눈썹과 수염이 싱긋 미소까지 머금는다.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홍몽무변에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던 자가 멀쩡하게 일어나다니. 고슴도치같이 전신에 꽂힌 부챗살을 빼내지도 않고. 그러고 보니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해원기가 이제검을 횡으로 눕힌 자세 그대로 첨유진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오련칠혼(五煉七魂)을 거쳤나? 사람이 아니로군.”
등장할 때부터 그랬다. 기척을 알아채기 어려운 유명비들보다 한층 더 감지할 수가 없었던 이유.
사람으로서의 모든 감정과 기운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지독한 사법(邪法). 연혼의 최후 비술이라는 오련칠혼을 거치면 강시(僵尸)와 다름없는 활시인(活屍人)이 된다던가.
해원기의 반문에 첨유진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호오, 참으로 박식하시네. 그저 검 하나만 믿고 힘으로 윽박지르는 성격으로 상상했는데.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대화를 좀 해봅시다. 대강 제남에 보낸 첩 형부터 해 대협의 신경을 거스른 듯한데. 굳이 곳곳에서 우리 일을 훼방 놓을 이유라도 있소? 아무리 영세검주의 후예, 절세검왕이라고 해도 당세의 황명을 거역해서는…….”
길게 늘어진 눈썹 밑의 실눈이 힐끔 눈치를 본다.
황명.
동창 밀각의 각주로서 당금 최고의 권력을 들먹여 해원기를 떠보는 수작.
해원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동감이라도 표하는 듯한 동작에 첨유진의 눈에 이채가 스치는데.
“그렇군.”
해원기의 낮은 음성이 흐르고,
왼손이 검집을 닦는 것처럼 스윽 미끄러졌다.
뭐라고 떠들든 첨유진의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처음의 ‘고천무쌍의 검법’이라는 소리에는 실소가 나올 뻔했으나.
글로 읽었다고 했었지. 이들이 아는 게 정확하지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혼천검경과 신마조화검이란 이름도 그저 기록에 의했을 뿐. 신마조화검도 옳은 명칭이 아니다. 천마가 펼친 검은 신마조화경(神魔造化境)에 근본을 둔 천부지검(天符之劍). 사부가 직접 상대한 천마거늘 어찌 틀리겠는가.
천손검법이란 이름도 모른다. 어디서 어떻게 헷갈렸기에 ‘고천무쌍’이라고 부를까.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첨유진의 입에서 들으면 그만이다.
호경륭을 쓰러뜨리고 나서 왼손에 검집을 올려 횡으로 눕혔던 이제검. 왼손이 검집을 쓸고 나가 원을 그리고, 연검대초가 그 가운데를 무찔렀다.
검왕오형의 첫 번째, 발검제형. 정식으로 펼쳐본다.
위잉.
검 하나만 믿고 힘으로 윽박지르는 성격이라 했나? 그 말대로 맹렬한 기운이 거대한 창처럼 뻗었다.
입을 놀리면서도 첨유진의 실눈은 결코 해원기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 핏물을 삼켜 오련칠혼을 발동시킨 건 끝까지 그 능력을 살피기 위함. 호경륭이 미친놈처럼 검집에 머리를 들이박고 나가떨어지는 것도 놓치지 않고 살폈었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듯 중얼거릴 때,
재빨리 품에서 뭔가를 꺼내며 전신을 크게 흔들었다.
“에잇!”
촤아악.
몸에 꽂혔던 부챗살이 화살처럼 튀어나오면서 실처럼 이어지는 핏줄기. 그 핏줄기가 전면을 가리고 품에서 꺼낸 물건을 중심으로 퍼진다.
손바닥만 한 사각 철패(鐵牌). 해괴하고 징그러운 문양이 가득 새겨진 그 철패가 핏줄기를 끌어 단숨에 문짝의 형태를 이루었다.
철패에 새겨진 문양이 그대로 부풀어 투영되듯, 수많은 악귀가 뒤엉킨 채 이빨을 드러내어.
연검대초의 발검제형을 한꺼번에 물어뜯을 듯.
펑!
멀쩡하게 버텨내는 문짝.
“그 정도로는 지옥도(地獄圖)를, 허윽?”
검집을 퉁겨내고 비웃음을 더하려던 첨유진의 목소리가 홱 뒤집혔다.
문짝의 형태를 이루던 핏줄기가 돌연 먼지처럼 부서지고,
도로 원형으로 돌아간 철패가 제멋대로 해원기 쪽으로 날아가니.
와작.
철패가 종잇장처럼 우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무지막지한 힘이 첨유진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뻑.
“끄아악!”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지는 소리보다 더욱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간 첨유진이 무너진 담장에 처박혔다.
“후우. 사부님, 어째서 귀역(鬼域)을.”
해원기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은 그저 검집을 바라볼 뿐. 처참하게 날아간 첨유진을 살필 생각도 나지 않는다.
연검대초로 몽둥이찜질을 하려고 했잖은가. 죽이지 않고 살려서 제압한 후에 원하는 답을 얻어낼 입이 죄다 비명만 토해내서 말이나 제대로 해낼지.
황궁비전의 목왕팔준경도, 지부의 마왕들이 공통으로 썼다는 절대 방어의 지옥도도.
전부 제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호경륭의 경지가 아직 낮아서, 첨유진이 마공에 편법이 많이 가미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연검대초의 이제검을 거두는 해원기의 두 손에 어쩐지 힘이 없다.
검왕수의 두 손.
오의를 깨우친 이후, 검을 쥐어도 검왕수가 유지되어서.
어떤 기예를 펼쳐도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이 맞물린다. 그건 바로 검이 미치는 공간에 검기핍인이 그대로 작용한다는 뜻.
설사 연검대초라도 상대하는 자는 자신도 모르게 일성(一成) 이상의 힘이 감쇄하고,
공간을 다루는 천손검법에는 삼성(三成)까지 약화된다.
수발여의의 발검제형은 인력(引力)과 척력(擲力)이 갈마들면서 두 배가 될 터. 편법의 지옥도 따위가 어찌 버틸 수 있겠나.
결계검(結界劍). 그것도 혼자서 검진을 이루는 단순한 결계검을 넘어서서.
본래 이제검에 깃들었던 한 자루 검의 능력이었다.
사부가 자신을 희생해 남은 생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라진 원혼의 검, 귀왕검.
그 귀왕검이 완전히 발현할 때 귀왕천형(鬼王天刑)을 펼치는 결계를 귀역이라고 불렀다는데.
지금 해원기는 바로 그 귀역과 유사한 능력을 발휘했다.
예상보다 과한 결과.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았다.
사부는 대체 왜 이런 능력을 부여했으며, 무엇 때문에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