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장 화하신적(華夏神蹟) (3)
진평현을 떠나면서 동강을 돌려보냈었다.
수차제에서 조화부인과의 싸움을 겪은 후에 스스로 마음을 다졌기 때문에.
검왕수랍시고 맨손으로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다. 쾌체 일을 하는 동안 내내 가슴팍에 걸었던 판과까지 삼매마려의 철검으로 써버리지 않았나.
검.
환정곡의 검단에 모셔둔 고죽의 검이 필요하다.
워낙 먼 거리. 세상에 드문 영금이라도 왕복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새 해원기는 더 서쪽으로 오는 바람에.
영교(靈交)가 다시 이어진 건 고력사의 무덤을 빠져나온 후였다.
진즉 장안의 밤하늘을 높이 날고 있었던 동강이,
해원기의 외침에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백화원 군방대루 앞, 유명반혼진의 영향으로 아무리 뛰어난 경공이라도 삼 장 높이를 벗어날 수 없는데.
삐이잇!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던 동강이 날카롭게 울며 돌연 거창한 날개를 활짝 폈다.
촤아아아.
맹금이 지상의 먹이를 덮칠 때는 날개를 접고 급강하하고, 목표 앞에서 순간적으로 날개를 펴면 돌풍과 함께 마치 정지하듯 멈춘다.
동강은 청강주의 일부를 얻은 영금.
그 날개에서 이는 바람은 그냥 돌풍이 아니어서 닿는 걸 모조리 찢는 거대한 톱과 같았다.
지이이이익.
아무것도 없는 공중이 찢기면서,
삼 장 높이에 다다른 해원기의 손이 쭉 뻗었다.
펄럭, 펄럭.
동강이 두 발로 움켜쥐었던 검을 건네고 곧장 거친 날갯짓을 시작했다.
진세의 결계를 찢었던 돌풍이 한 줄기 회오리로 화해 해원기의 전신을 휘감는다.
검을 쥔 해원기가 그 회오리에 맞추어 회전하면서,
유성처럼 떨어지던 동강은 위로 솟구치고, 날아오르던 해원기는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캄캄한 밤하늘, 시야가 아직 적응하지 못한 채로는.
그저 하늘에서 거대한 용권풍이 덮치는 거로 보일 뿐. 더구나 벼락 치듯 순식간에 내리꽂힘에야.
콰앙!
화산이 터진 듯, 담장이 죄 허물어지고 군방대루의 지붕이 박살이 나서 날아갔다.
우직, 와드득.
담장을 허물며 처박힌 유명비들이 인형처럼 삐꺽거리며 움직이지만,
어깨가 부서지고, 팔이 꺾이고, 허리가 뒤틀리고, 다리가 부러져 제대로 일어나질 못한다. 그나마 엉거주춤 자세를 잡은 건 겨우 넷.
서축을 든 진광의 한 쌍과 작두를 든 염라의 하나, 그리고 맨손이 된 전륜의 하나.
‘시왕발옥’의 진결에 가장 늦게 동원된 덕을 보았을까. 그래도 펼쳐 들려던 서축이 갈기갈기 찢겼고, 작두는 절반이나 부러진 채. 허리를 세우지도 못하고,
전신을 가늘게 떨면서 해원기를 바라보는 시선도 같이 흔들린다.
연혼의 술법을 거치면 감정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더니,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충격에 공포심이 되살아난 듯.
단 일격에.
스무 명이 전부 동원된 유명반혼진이 산산이 부서졌다.
휘이이이이.
솜털이 곤두서는 차가운 바람 소리.
담장을 진흙처럼 짓이기고, 군방대루에 기둥만 남겨놓은 건 대체 어떤 힘인가.
진결을 발동했던 첨유진은 뒤로 훌쩍 물러나 오골선을 활짝 펼친 채,
벌떡 일어났던 호경륭은 날아간 지붕과 박살 난 탁자의 파편 속에서 오만상을 쓴 채.
한 자나 내려앉은 꽃밭을 노려보았다.
본래 꽃밭이었다고는 도저히 여길 수 없게 움푹 꺼진 흙바닥.
“검이 어째…….”
“절굿공이처럼 내리찍은 거?”
첨유진과 호경륭 사이의 거리는 이십 장이 넘건만, 믿기 어렵다는 혼잣말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
밤하늘에 뭐가 나타났는지, 어떻게 유명반혼진의 결계를 찢었는지, 검이 어디서 전해졌는지.
의혹투성이였지만, 그보다 당장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사 척에 가까운 길이의 장검.
근래에 유행하는 가늘고 날렵한 모양과는 정반대로 크고 두껍게 보이는 건,
해원기가 검집 째로 쥐었기 때문이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검집, 그리고 그 검집을 휘감아 호수(護手) 부분과 검병(劍柄)까지 한꺼번에 엮은 가죽끈.
저러면 검을 검집에서 뽑을 수가 없잖은가. 그걸 왼손으로 쥐고서 바닥을 힘차게 내려쳤기에 검집 끝이 아직도 한 치나 묻혔으니.
뽑을 수 없는 검으로 그냥 바닥을 찍었다는 거다. 진짜 절구질하듯.
그런데 이 절구질 한 번에,
백화원 군방대루 앞이 화산이 터진 듯 엉망이 되고, 유명반혼진이 깨져 태반의 유명비가 운신도 하지 못한다고?
바라보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
그래서 굉량한 폭음과 거대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훤하게 보이는지를 따지지 못했다.
터져 나간 흙더미나 담장은 둘째 치고,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라도 떠돌아야 정상이거늘.
휘이이이.
‘팔풍팔뢰(八風八雷)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풍뢰동의 석비에서 얻은 기연. 역상정위의 오의인 풍운뇌우를 깨우쳤을 때도 그랬지만, 동강의 힘을 빌려 유명반혼진을 깨면서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보병감로의 정화, 완전한 수정지력을 이루었기 때문인가. 기풍발뢰(起風發雷)가 뜻보다 먼저 이른다.
동강과의 영교도 이전보다 훨씬 단단히 이어져 생각했던 대로 도움을 주고.
유명반혼진을 깨려고 복룡검식의 직도황룡(直搗黃龍)과 붕악검의 쇄정추(碎頂鎚)를 한데 섞은 일격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허리를 세우며 검병에 오른손을 올렸다.
“벽세의 술법에 지부의 마공이라. 내막을 털어놓을 입만 남겨놓고…….”
첨유진과 호경륭을 번갈아 보는 눈에는 신광이 번쩍이고,
검집 째의 검을 쥐는 자세에선 가공할 위세가 일어난다.
그러면서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잇는 말.
“좀 맞자.”
말이 끝나자마자 해원기의 신형이 유령처럼 사라졌고,
곧이어 거친 호통과 기합이 연달아 터졌다.
“이놈잇!”
“합!”
“이야압.”
가장 빠르게 달려든 건 역시 호경륭. 그리고 네 명의 유명비가 다급히 모이는 쪽은 첨유진의 앞. 첨유진의 부채도 어느새 몇 배나 부풀어 올랐다.
해원기가 검병을 쥐고 입을 열면서,
비로소 차가운 바람이 여전히 공간에 맴도는 걸 깨달았고, 그게 자신들 모두를 한꺼번에 노리는 기세란 걸 직감했기에.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따질 새가 없었다.
물론 해원기도 자신의 목소리가 사부 특유의 저음과 닮았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고.
신쾌무비(迅快無比). 비할 데 없이 빠르다.
호경륭의 신법을 형용하는 네 글자. 당대 무림에서 가장 빠르다는 비천무영 황정리도 따를 수 없다고 동창에서 이미 공인한 속도다.
그런 그가 마제철을 네 개나 날리면서 뛰어들었건만,
퍼퍼퍼퍽,
해원기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들지 못하고, 되레 유명비 넷이 동시에 거꾸러지는 광경만 보게 되었다.
전륜의 하나는 팽이처럼 돌아가고, 염라의 하나는 자신의 작두에 머리를 들이박고, 진광의 한 쌍은 아예 서축을 내던져 만세를 부르며 대자로 누워버린다. 이름에 딱 맞는 꼬락서니.
검집 째의 검. 그건 진짜 검이라기보다 몽둥이였다.
허리를 치고, 머리를 때리며, 목을 찌르는 동작이 번갯불 같다.
유명비를 쓰러뜨리고 이미 첨유진에게 이르는 해원기를 보자,
호경륭이 먼저 던진 마제철을 회수할 새도 없이 또 네 개의 마제철을 내던졌다.
티티티팅.
마제철 여덟 개가 어지럽게 부딪치며 더욱 빠르게 해원기의 등을 노리고.
거의 상반신을 가릴 정도로 부풀어 오른 첨유진의 부채가 와락 해원기에게 밀려들었다.
검은 살에 흰 비단. 오골선이 거대한 갈퀴처럼 변했다.
바로 그때.
해원기가 몸을 뒤틀어 단숨에 옆으로 빠진다.
갈퀴로 변한 오골선으로 할퀴려던 첨유진도, 여덟 개의 마제철을 내던지고 또다시 한 쌍을 양손에 꺼내 들던 호경륭도.
순간적으로 멍해질 만큼.
뭐가 이리 빠르냐.
본래 경공신법에 상당한 공을 들였던 해원기다.
검을 쥔 자는 눈이 빠르고, 손이 빠르다지만. 운신(運身)의 경쾌함은 상대적인 것. 사부에게서 배운 신화검형, 사부의 벗인 표풍부운의 비결, 탁 소숙이 일러준 위타과질(韋陀過疾)의 묘법, 이사모가 가르쳐준 봉황우비(鳳凰于飛)의 요령…….
그 모든 것이 풍뢰결에 녹아들었다.
이전에도 약에 당한 황정리 대신 비천무영의 역할을 한 적이 있고, 증명단에게 부동지경을 설명해 준 적도 있고.
아무리 호경륭이 빠르다고 해도 순간적인 변화를 따를 순 없다.
거대한 갈퀴와 어지럽게 날리는 마제철을 보면서,
검집 째의 검, 연검대초(連劍帶鞘)의 고검이 둥근 원을 그린다.
고오오오오.
사방을 휘감은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검으로 빨려들고,
우르르르.
땅속에서 우는 것처럼 우레가 낮게 울리면서.
첨유진과 호경륭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해원기의 입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무도 들을 수가 없었다.
“태초의 혼돈은 뭐라 변별할 수 없나니.”
천손검법 제일초 홍몽무변.
완전한 수정지력이 대지체를 대신하자 팔풍팔뢰가 상상지에 힘입어 갖은 변화를 덧붙였다.
절굿공이로 착각할 검집의 두툼한 끝부분을 따라,
공간이 거대한 와류(渦流)로 조여든다.
처음에 기어병을 담은 한 쌍이 부서지긴 했으나, 해원기의 어검술도 네 쌍의 마제철을 엮어 막아냈었다.
맨손으로 어검을 펼치는 황당한 능력이 놀랍기는 해도, 유휘까지 다섯 ‘마리’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 그렇게 평가했는데.
몽둥이처럼 검집 째로 휘두르는 이건 대체 뭔가.
여덟 개, 네 쌍의 마제철이 제멋대로 엉켜 저희끼리 두들기고. 회수하려던 두 손도 방향을 잡지 못한다. 언제든지 기어병으로 바꿀 수 있도록 전부 공력이 이어지거늘.
호경륭이 다급히 손에 쥔 한 쌍의 마제철에 힘을 모았다.
“초광(超光)!”
좌르르 늘어나는 신형. 분신술을 쓴 것처럼 다섯이나 되는 호경륭이 한편으론 여덟 개의 마제철을 끌어당기고, 한편으론 강대한 경력을 일시에 내칠 셈.
딱딱하게 굳은 첨유진의 얼굴, 하지만 가느다란 두 눈만은 미묘한 빛을 머금었다.
갈퀴 모양으로 부풀린 오골선이 맥없이 줄어들고, 전신이 옥죄어들자 왼손이 급히 품속으로 들어갔지만.
품 안의 물건을 선뜻 꺼내는 대신에 입술을 질끈 깨문다.
입안에 고이는 핏물. 실눈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호경륭을 스치고, 호경륭이 ‘초광’이라고 외치자마자 왼손을 그냥 빼내어 오골선의 뒤에 얹었다.
오골선에 유명공(幽冥功)을 주입하면 검은 살과 흰 비단이 뒤섞여 누런빛이 되고, 그 누런빛은 일체의 내가기공을 흩어버린다.
한 자루 섭선이 이 전신을 옥죄는 기운을 무너뜨리면, 호경륭의 신공이 전세를 뒤집을 터.
그리 마음먹고 기합과 함께 오골선을 힘차게 날리니.
“유혼(幽魂)!”
누런빛이 화르르 일어나고, 다섯 명의 호경륭이 마제철을 향해 쌍장을 떨쳤다.
제법 기백을 실은 두 마디 기합.
그러나 쌍장을 떨치는 호경륭의 안색이 홱 변했고, 누런빛의 오골선을 날린 첨유진의 실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초광이든 유혼이든. 내지른 기합이 무색하게 공간이 확 조여들면서 그대로 터져버렸기에.
콰쾅.
“크엑.”
“으아악!”
팔뚝에 마제철이 세 개나 박힌 호경륭이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나고,
고슴도치처럼 전신에 부챗살이 꽂힌 첨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검을 거두어 가슴 앞에 세우는 해원기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때리기도 전에 먼저 둘을 거꾸러트린 검경(劍勁). 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