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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210화 (210/410)

제53장 화하신적(華夏神蹟) (2)

홀린 듯 비밀을 털어놓던 유항, 그리고 취한 듯 어린 듯 넋이 빠진 부호들을 구하려고 처음에 풍뢰결을 썼었다.

홍종을 울리는 듯한 고함과 맹렬한 돌풍. 덕분에 유항은 정신을 차렸으나, 돌풍은 부호들을 절반으로 나누었던 유명비에게 이르자 힘을 잃었었다.

꽃밭을 포함한 군방대루의 전면에 술법이나 진법이 펼쳐져 있었을 터. 그러나 돌풍을 풀어낸 건 바로 스무 명의 유명비들이다.

유항을 데리러 왔을 때부터 특이했다. 가까이 이르지 않으면 기척을 느끼기 어려운 소녀들.

그런 유명비 스무 명이 담장 위에 늘어설 때까지 몰랐고,

포설했다는 유명반혼진이란 것도 처음 들어보는 진법.

그보다 첨유진의 혼잣말이 신경을 건드려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나지 않는다.

혼천검경과 신마조화검.

이 명칭을 아는 자는 과거에도 극히 드물었다고 들었거늘.

고죽의 비전, 천손검법을 상대하고자 만들어진 두 가지 검법.

그냥 형태를 흉내 낸 조잡한 수준이 아니라고.

검의(劍意). 이른바 검에 담긴 뜻이 능히 천손검법에 비견될 만한.

대체 동창 밀각의 각주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다.

“호 주국께선 조금 물러나 구경이나 하시는 게?”

“흥, 그러지 않아도 피곤한 참이라…….”

첨유진의 가벼운 권유에 어느새 멀어진 호경륭의 음성. 유명비가 나타난 순간에 이미 군방대루의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떡하니 앉은 모습이다. 지독히 빠른 그 신법으로.

그리고 호경륭이 있던 자리에 가볍게 내려서는 이는 바로 호경륭에게 따귀를 맞았던 유명비.

마찬가지로 첨유진의 앞에도 또 하나의 유명비가 내려섰는데.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호경륭과의 한바탕 드잡이질을 통해 어느 정도 그 속도에 적응했다. 아무리 빨라도 이미 익숙해진 이상, 군방대루로 돌아간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그런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첨유진이 나타났을 때도, 유명비가 담장 위에 올라섰을 때도.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다? 게다가 호경륭이 물러난 건.’

피곤은 핑계.

부서진 한 쌍 외에 네 쌍이나 되는 마제철을 꺼내 들었잖은가. 군방대루까지 물러난 건 피곤이 아니라 휘말려 들지 않으려는 의도.

그건 해원기의 감각을 무디게 한 소위 유명반혼진을 꺼리기 때문이다.

좌우에 유명비 하나씩. 나머지는 담장 위.

탁.

부채로 손바닥을 치는 첨유진이 짧게 외친다.

“초강여온(楚江厲溫)!”

휘릭.

좌우의 유명비가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좌측의 유명비에게서 마치 먹구름 같은 기운이 뭉클 퍼지고, 우측의 유명비는 한순간에 회색빛으로 물들고.

본래 석상처럼 보였지만, 괴이한 기운을 일으키며 무표정하게 달려드는 모습은 정말 사람 같지 않다.

해원기가 일단 두 손을 활짝 펴 좌우로 떨쳤다.

우웅.

아직 이 진법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대우신장으로 밀어낼 셈. 그러나 손을 떨치자마자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리며 와락 앞으로 튀어나갔다.

지직.

채 반 장도 가지 못해 멈추는 신형. 떨쳤던 손을 거두는 것도 굼뜨다.

반면에 유명비 둘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서 도리어 미끄러지듯 해원기를 쫓아 드니.

대우신장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고, 전신이 갑자기 굳어진 느낌.

지지지직.

멈춰 선 해원기 주위로 거미줄처럼 뻗어가는 하얀 선들. 바로 순식간에 지면을 덮는 서릿발이다.

공간을 뒤덮는 한빙지기(寒氷之氣). 차가움을 느끼기도 전에 신체를 속박하려 든다.

당장 해원기의 등으로 파고드는 먹구름과 회색빛.

해원기가 허리를 틀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파앙.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 같아도 복룡검식을 담은 유리검. 해원기를 속박하려던 한빙지기가 거꾸로 뒤집혀서,

유명비 둘이 뻣뻣한 자세로 밀려나는데.

“송제여근(宋帝余懃), 오관여대(伍官呂岱).”

첨유진의 느긋한 음성이 울리자 해원기의 양쪽 어깨 뒤에서 살벌한 기운이 날아들었다.

촤아아.

화르륵.

해원기가 급히 굳었던 발을 굴러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두 명의 유명비가 내지른 시꺼먼 채찍이 발목까지 이르고, 다른 두 명의 유명비가 높이 쳐든 소매에선 불줄기가 쏟아진다.

이 또한 잠심침령을 무색하게 하는 기습.

휘두른 기세 그대로 유리검이 한빙지기를 휘감아 불줄기를, 왼손이 구현한 본연검은 탈백붕악의 거친 힘을.

펑, 펑.

폭음이 터지며 유명비 넷이 중심을 잃는 순간,

또 첨유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변성원빈(卞城元賓), 태산동화(泰山董和), 도시중용(都市中庸), 평등육유(平等陸游).”

와르르 담장 아래로 뛰어내리는 유명비들.

한빙지기를 펼쳤던 처음의 유명비 좌우로 톱을 든 한 쌍과 망치를 든 한 쌍. 불줄기를 수습하는 유명비 옆에는 붉은 꼬챙이를 세우는 한 쌍, 시꺼먼 채찍을 흔드는 유명비에게는 구부러진 갈고리를 쥔 한 쌍.

이제 일곱 쌍, 열넷의 유명비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아직 공중에 뜬 해원기를 향해.

비명은커녕 신음도 흘리지 않는다.

유리광한(琉璃廣寒)의 검과 궤이굉력(詭異轟力)의 검으로 연달아 세 쌍의 유명비를 두드렸는데, 밀려나면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유명비들.

이름 그대로 유령처럼 기척도 없이 움직이고, 검왕수가 구현한 검상도 능히 견딘다.

사람이 아니라 여귀(女鬼)가 덮치는 듯 섬뜩한 분위기.

그러나 해원기의 파랗게 물든 눈은 되레 공중을 빠르게 훑었다.

왼쪽 담장에 한 쌍, 오른쪽 담장에 한 쌍.

아직 공격에 가세하지 않은 유명비는 넷. 유명비는 총 스무 명이었으니 한 쌍이 빈다.

대우신장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을 때부터 이 유명반혼진이 묘하게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느낌을 받았고,

첨유진이 연달아 읊어대는 진결(陣訣)로 그 의미를 간파할 단서를 얻었다.

박대정심.

천하의 모든 무학을 널리 알고 깊이 이해한다.

공중에 뜬 두 발이 물고기 꼬리처럼 번갈아 떨자,

아무런 힘도 받지 않고서 이 장이나 둥실 떠올랐다.

제남의 대명호에서 무경박사라는 자를 일깨워주었던 상승의 경공. 바로 무력답공(無力踏空)이다.

과연 동시안에 들어오는 마지막 한 쌍. 군방대루의 지붕 위, 무성한 나뭇가지에 덮인 채 둥근 륜(輪)을 받쳐 든 유명비 둘이 보였다.

‘진안(陣眼).’

어떤 진세든 축이 되는 곳이 바로 약점이다.

유리검이 즉각 발검제형으로 뻗는데.

따앙!

“허, 날 아예 잊어먹었냐?”

화살처럼 날아들어 검세와 맞부딪친 마제철과 어이없다는 듯 이죽거리는 호경륭의 목소리.

해원기가 공중에서 휙 뒤집혔다.

아무리 무력답공이라도 한없이 공중에 머물 수는 없는 법. 거꾸로 뒤집혀 아래로 떨어지며 양손이 재단경위의 신마공무로 바뀌었다.

단숨에 서른세 개로 불어난 검영이 몰려드는 유명비들을 회오리 속에 휘말아 넣었다.

쾅!

꽃밭이 통째로 터져서 분수처럼 치솟는 속에,

열넷이나 되는 유명비들이 모조리 담장까지 쓸려나간다.

탁탁, 탁탁.

흙먼지가 내려앉기 전에 부채로 손뼉을 치면서 첨유진이 웃기 시작했다.

“허허허허, 대단하군, 대단해. 그 잠깐 새에 유명반혼진의 진안을 찾아내다니. 어검과 검강 외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검형수라더니. 정말 신기하구먼. 게다가 무력답공의 경공까지, 그래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을 걸?”

감탄이 아니라 비아냥.

그 부채 소리를 따라 쓸려나갔던 유명비들이 하나둘씩 일어난다. 머리채가 헝클어지고 옷자락이 찢겼는데도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들.

해원기가 두 발을 조금 벌리면서 첨유진을 노려보았다.

검왕수를 예전의 검형수로 알고 있지만, 확실히 그의 말대로 자신의 힘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검상의 위력도, 무력답공의 경공도. 호경륭의 방해가 없었어도 훤히 트인 공중으로 빠져나가지 못했을 터.

이전에도 겪었던 것처럼 이 유명반혼진에도 반선진 류의 힘을 삭감하는 공능이 있다.

“사술을 섞었군.”

툭 내뱉는 말을 기다렸던가.

첨유진이 더욱 흥겨운 표정을 지었다.

“사술이라니? 나름 고심한 묘법(妙法)이라 내 귀여운 계집종들도 가진 힘의 절반 밖에는 쓰지 못하는데.”

강기를 연성한 유명비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저따위 흉한 물건들을 들려주었나?”

채찍, 화통, 톱, 망치, 꼬챙이, 갈고리. 첨유진이 일부러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린 애들이 예쁜 몸을 지키려고 나름 애를 쓴 거잖소.”

“연혼(煉魂)을 거쳐 감정을 지운 살수(殺手)가?”

“호, 알아보셨나? 뭐, 연혼을 거친 건 맞지만, 살수가 아니라 귀졸(鬼卒)이 더 맞는 이름이지. 계집들이니 어쩔 수 없이 비(婢)란 이름을 붙였고. 그 검형수로 한바탕 치고받기에는 딱 어울리는 상대라. 허허.”

기분이 좋아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 꼬박꼬박 말을 받으며 연신 히죽거리는 첨유진을 향한 해원기의 시선이 차츰 빛을 더한다.

호경륭이 왜 슬쩍 빠졌는지 이유를 알만했다.

진안을 노리고 펼친 발검제형을 막아낸 마제철도 기어병이 아니라 비환의 수법.

이 유명반혼진은 단순한 사술을 뛰어넘는다. 진을 이루는 자부터 공간 안의 모든 힘을 절반으로 깎으니.

당연히 흉험한 외가(外家)의 병기나 암기, 기계 따위가 훨씬 유용할 터.

일부러 모른 척 대화를 유도했던 해원기의 눈에 신광이 돌아왔다.

완전한 수정지기.

내부의 진기는 충일하고, 맑은 기운이 가슴을 거쳐 정수리까지 이르면서.

조용히 상상지(上上智)를 깨운다.

한 가지를 더 밝혀야 한다.

해원기가 손을 들어 차례로 양쪽을 가리켰다. 왼쪽 담장 위의 한 쌍은 두툼하게 말린 서축(書軸), 오른쪽 담장 위의 한 쌍은 날이 시퍼런 작두를 들었다.

“진광(秦廣)과 염라(閻羅)는 나중에 부를 셈이냐?”

첨유진의 가는 실눈이 살짝 움직이고,

“진결을 열심히도 들었군요. 때가 되면 불러야지요. 해 대협을 초도(超度)할 때에.”

초도는 지옥에서 벗어나 다음 생으로 가는 것.

그 대답을 듣자마자 해원기의 눈이 무서운 빛을 발했다.

“유명반혼진? 십전염왕진(十殿閻王陣)이 본래 이름이겠지. 그리고…….”

양쪽을 가리켰던 손가락이 바로 첨유진을 향하면서,

“지옥재현(地獄再現)은 황량도(荒涼道)에 속하는 힘이지. 오대마도가 어떻게 밀각에 전해졌는지 네 입에서 들어야겠다.”

단호한 음성과 함께.

우우웅.

또다시 물결처럼 퍼져가는 거대한 기세.

사방으로 광풍이 일며 흙더미가 해일처럼 퍼지자, 첨유진이 실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영세검주의 이름을 언급할 때 해원기가 노한 기세를 펼치긴 했으나,

지금은 유명반혼진이 이미 공간을 장악한 상태. 어찌 진세를 무시하고 기세가 밀려든단 말인가.

펼치지도 못한 부채를 몽둥이처럼 크게 휘두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왕발옥(十王發獄)!”

양쪽 담장 위의 진광과 염라라는 두 쌍, 그리고 군방대루의 지붕에 있던 전륜(轉輪)의 한 쌍까지.

첨유진의 고함에 스무 명의 유명비가 일제히 달려들고,

그 흉흉한 공격에 구경하던 호경륭까지 벌떡 일어나 마제철을 양손에 나눠 쥐었다.

이렇게 당황한 첨유진을 처음 보았고, 본능적으로 해원기를 막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파앗.

첨유진이 고함을 지르자마자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해원기.

마제철을 날리려던 호경륭이 움찔했다.

진세의 영향 아래에서는 설사 무력답공이라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이미 겪었을 텐데.

입만 놀리다가 도주할 리 없다.

과연 해원기가 첨유진의 고함보다 몇 배나 우렁찬 외침을 토하니.

“동강! 검을!”

우르릉.

풍뢰결을 온전히 담은 외침에 고막이 터질 듯. 달려들던 유명비들이 멈칫거리고, 첨유진과 호경륭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그 엄청난 고함이 이르는 하늘로 향했다.

등롱으로 주변을 밝힌 탓에 더욱 새까맣게 보이는 밤하늘. 아득히 높은 곳에 분별하기 어려운 검은 점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는 걸 바로 알아챌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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