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09화 (209/410)

제53장 화하신적(華夏神蹟) (1)

“검상(劍相)에 얽매이지 마라.”

사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역상정위의 오의인 풍운뇌우는 전부 변화를 의미하는 글자. 바람, 구름, 번개, 비.

바람이 불고 나서야 구름이 모이는 것도 아니요, 번개가 쳐야만 비가 내리지도 않는다. 때로는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하고, 때로는 구름도 없이 날벼락이 치기도 하고.

변화란 때에 맞추어 일어나는 법. 예기치 못한 변화라는 것도 결국 순역(順逆)의 흐름 속에선 제자리를 찾은 것일 뿐이다.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을 각각 나누어 운행한 두 손. 검왕수의 강대한 위력을 꺼려 스스로 붕대로 묶어놓았던 두 손.

그래서 막상 검왕수를 펼칠 때도 한 손에 한 자루의 검상이었다.

어차피 상(相)이거늘.

무에 그리 구애받는고?

충격을 버티느라 발목이 꽃밭에 파묻혔지만,

해원기는 교차했던 두 손을 빠르게 풀며 전면을 응시했다.

피잉.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불쑥 치솟는 금광.

일 장 높이에 머물러 빛을 토하는 물체는 바로 금색의 마제철이었고,

“흐흥, 대부 둘을 깔아뭉갤 실력은 되는구나.”

흙먼지가 흩어지면서 드러난 호경륭의 얼굴이 실룩거린다.

손가락 끝 마디만 살짝 구부린 오른손은 높이 들고, 왼손은 품에 넣은 채 두 다리를 엇갈린 모습.

그 앞에 뿌려진 쇳조각은 박살 난 은색의 마제철.

풍운뇌우의 역상정위에 말편자 하나가 파괴되었으나, 호경륭 자신은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 듯.

해원기가 왼손을 앞으로, 오른손을 뒤로 당기며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호경륭이 그냥 금색 마제철을 띄운 게 아니다. 기이하게 구부린 오른손에서 일 장 높이의 마제철까지 이어지는 기운.

비환처럼 던지려는 게 아니라,

“이것도 부숴봐랏!”

키이잉.

호경륭의 호통과 함께 금색 마제철이 그야말로 한 줄기 금광이 되어 해원기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무시무시한 기세. 해원기가 예상했던 대로 이기어검(以氣馭劍)에 필적하는 기어병(氣馭兵)이다.

앞으로 내민 왼손이 작은 원을 그리자, 뒤로 당긴 오른손도 작은 원을 그린다.

사부의 가르침을 들은 듯한 착각, 그건 바로 깨우침이었고.

왜 화산에서 역상정위가 마치 고천무쌍진의 뇌전금강처럼 펼쳐졌는지 그 이유도 깨달았다.

오의(奧義)란 필경 쓰임일 뿐.

유리, 본연, 적멸, 추상은 필요에 따라 구현한 검상이다.

유리에 해운파랑을, 본연에 섬전추풍을, 적멸에 수미전단을, 추상에 탈백붕악을 담는 것도 의식하지 않고서,

왼손도 발검제형, 오른손도 발검제형.

번쩍.

엄청난 빛이 태양처럼 떠오르며,

군림어검(君臨御劍)의 금광섬삭(金光閃爍)이 삽시간에 금광을 지웠다.

콰앙.

폭음 속에 금색 마제철이 산산이 조각나고,

군림검이 그대로 호경륭을 꿰뚫으려는데.

따다다당!

“윽.”

연속적으로 울리는 쇳소리에 짧은 신음이 묻힌다.

두 팔을 한껏 펼친 호경륭, 고통으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으나 활짝 펼친 두 손 사이에 어느새 엮인 고리 한 줄이 출현했다.

해원기가 선뜻 두 손을 엇갈려 검상을 회수했다.

‘사슬? 아니…….’

금광섬삭의 빛이 마구 튀면서 깎여나가기에.

여덟 개의 마제철. 금은이 번갈아 섞인 여덟 개의 마제철이 서로 얽혀 쇠사슬처럼 한 줄로 이어졌다.

분명히 역상정위의 풍운뇌우와 양손의 발검제형으로 부수었거늘.

또 똑같은 말편자를 여덟 개나 끄집어내어 군림검을 막아냈다.

해원기의 눈이 파랗게 물들고,

“정말 빠르군.”

분신(分身)이라고 여길 만큼 빠른 호경륭의 움직임. 금광섬삭이 기어병의 마제철을 깨부수자마자 호경륭의 신형이 옆으로 와르르 불어났었다. 그러면서 그 소매에서 튀어나온 마제철 여덟 개가 저렇게 엮었구나.

동시안이 기어이 호경륭의 기고한 신법을 쫓기 시작한다.

흉하게 일그러진 호경륭의 얼굴. 활짝 펼쳤던 두 팔을 천천히 오므리면서,

“제길, 유휘(逾輝)까지 다섯 마리를 꺼내게 될 줄은……. 퉤엣, 절세검왕이 마냥 헛소리는 아니구나.”

침을 뱉으며 거칠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

얼핏 잘못 나온 말을 얼버무리기 위함.

그래도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매끈했던 안색이 허옇게 질려서 받은 충격이 작지 않은 듯.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얼버무렸다고 흘려들을 수 없는 한 단어.

‘처음의 한 쌍, 그리고 사슬처럼 엮은 네 쌍. 저 금은의 마제철이 설마.’

유(逾)는 넘는다, 휘(輝)는 빛난다는 뜻. 빛을 넘는다는 게 사슬로 만든 네 쌍의 마제철인지, 아니면 군림검의 금광섬삭을 막아낸 기예인지.

그런데 다섯 ‘쌍’이 아니라 ‘마리’라면.

하지만, 생각을 더 할 수가 없었다.

“허어! 이 무슨 변고인고.”

돌연 뒤쪽에서 전해지는 장탄식에 해원기의 어깨가 움찔했다.

군림검의 검상을 회수하며 두 손을 엇갈렸기에 지금은 오른손이 앞으로 나와 비스듬히 선 자세.

귀신처럼 날뛰는 호경륭과 격돌하면서 잠심침령과 동시안을 계속 펼쳤고,

수정지기가 신왕공을 완연히 끌어올렸건만,

뒤에 누가 나타났다는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명비라는 소녀들이 장안 부호들을 끌고 물러간 후에는 아무도 없다고 여겼던 이곳에.

군방대루가 맨 안쪽, 온갖 꽃이 만발했던 꽃밭은 군방대루에서 관상하기 좋도록 중간에 펼쳐졌고.

이 꽃밭으로 들어오려면 둘러쳐진 담장의 좌우에 뚫린 월동문 외에 정문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해원기가 등지고 선 입구.

그 문을 통해 한 걸음 들어선 인물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 뭐든지 억지로 메꾸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라. 이거, 주국경을 뵐 면목이 없구려. 그나저나 젊은 나이에 대단하구먼. 과연 절세검왕이라고 해야 할까.”

뒤도 돌아보지 않는 해원기를 보면서 감탄을 더하자,

좌르륵.

호경륭이 사슬처럼 엮었던 마제철을 하나로 뭉쳐버린다.

정면의 해원기를 무시하고 호기를 부리나.

“흥, 이렇게 직접 나오면 될 일을. 부려먹는 게 그리 재미있소? 각주.”

불만이 잔뜩 담겨 툴툴거리는데.

마지막 호칭에는 해원기의 시선도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각주. 밀각의 우두머리란 말인가.

남색 사방건(四方巾)에 남색 장삼, 목깃과 허리띠가 눈에 띄지 않는 청색이고 발에는 검은 장화를 신어서 어두운 밤에는 더욱 색을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얼핏 보아도 하나같이 은은한 윤기가 도는 재질들. 손에 든 검은 부채와 어울려 말쑥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생김새라. 넓은 이마에 길게 늘어진 눈썹, 감은 듯 가느다란 실눈에 곧게 뻗는 콧날. 곱게 다듬어 늘어뜨린 수염까지. 산뜻하고 빼어난 외모를 지닌 중년인이 고소를 짓는다.

“이런, 이런. 욕을 먹어도 당연하지만, 주국경도 이해를 좀 해주시구려. 맡겨놓은 일이 자꾸 어긋나고 그 뒤처리에 손이 열 개가 돼도 부족하고. 오죽하면 이런 하찮은 일을 주국경에게 부탁했겠소. 아, 이건 그래도 잘한 일이라고 할까? 주국경이 아니었으면 절세검왕을 만나지 못할 뻔했으니까. 허허허.”

고소가 웃음으로. 진짜 기쁜 듯 웃어대자.

해원기가 서서히 손을 내리며 슬쩍 옆으로 돌아섰다.

유항이 들어왔던 월동문을 향한 채, 우측이 호경륭, 좌측이 각주라는 중년인.

“동창 밀각의 우두머리인가?”

손을 내리긴 했으나 언제라도 검왕수를 발동할 수 있는 자세.

중년인이 웃음을 머금은 채 부채를 두 손을 쥐어 들었다.

“해원기라는 이름이지요? 처음 뵙겠소이다. 밀각을 꾸리는 첨유진(詹維進)이라고. 흐음, 이렇게 젊은 분이라곤 믿지 않았었는데.”

과연 밀각의 주인. 이자 또한 호경륭과 마찬가지로 선선히 이름을 밝히며 새삼스럽게 해원기의 얼굴을 살핀다.

해원기도 호경륭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첨유진이란 인물에 주의했다.

기척도 없이 등장한 자. 지금도 눈앞에 있으면서 실재가 없는 것처럼 아스라한 느낌이다.

호경륭과의 싸움에 적잖이 날아간 등롱.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아 훤한데 마치 밤의 어둠이 슬그머니 한 자락 스며든 듯.

예사롭지 않다.

“젊지 않다고 여겼나?”

간단히 말을 받아주자 첨유진이 빙그레 웃는다.

“뭐, 나이가 얼만지 물어볼 곳도 없고.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소문이 잠시 퍼졌던 게 십여 년 전. 대강 서른은 넘었을 거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소. 영세검주가 사라질 때가 마흔 중반이었으니.”

영세검주. 이 칭호는 이 대부에게선가 한번 들은 적이 있다.

첨유진이 손을 풀어 부채로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참, 영세검주란 말은 생경할 수도 있겠네. 나중에 붙인 이름이라, 에, 백년제일검사라 불렸던 당년의 천하제일검. 해 대협의 사부를 일컫는 말이라오. 고검협이란 명호의 묵세…….”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우웅.

해원기의 눈썹이 불끈 솟고.

단호한 고함에 뭉개진 꽃밭이 소스라치게 놀라 들썩인다.

칼로 자르듯 첨유진의 말을 끊은 해원기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어디 감히 사부의 존함을 그 입에 올리려 하는가.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여름밤인데, 해원기가 걸친 허름한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거린다.

슈우우우우.

해원기를 중심으로 파도처럼 퍼져가는 기세에 뭉개진 꽃잎과 흙먼지가 뒤섞여 자욱하게 일어나지만,

첨유진이란 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부채를 가볍게 편다.

촤륵.

검은 살에 흰 비단, 오골선(烏骨扇)이라 불릴 부채가 펼쳐지자 밀려들던 흙먼지가 절로 가라앉고,

“젊은 만큼 성급하군.”

차분한 음성과 함께 실눈이 웃는 듯 주름을 잡는다.

과연 평범치 않은 신수. 놀라운 해원기의 기세를 간단히 막아내면서 여유롭게 부채를 흔들더니.

“유명반혼진(幽冥返魂陣)의 포설은 끝났느냐?”

뜬금없는 소리. 그러나 그 물음에 주변의 담장에 스무 개의 인영이 일제히 올라왔다.

“네. 각주.”

이 역시 전혀 기척을 알 수 없었던 스무 명의 유명비. 석상처럼 무표정한 그녀들이 담장을 따라 빙 둘러서자,

첨유진이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부채를 접었고,

“그럼 영세검주의 제자라는 절세검왕의 솜씨를 볼까나. 혼천검경(渾天劍景)과 신마조화검(神魔造化劍)을 무너뜨렸다는 그 검, 어디까지 익혔을꼬?”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해원기의 표정이 확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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