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장 고도요적(古都妖跡) (4)
“이놈잇!”
자신의 지풍을 전부 쳐내고, 그 와중에 희한한 소리를 울려 주위의 부호들을 일깨우면서 유항까지 빼냈으니.
대관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번갈아 흔들었다. 그것도 해원기니까 알아볼 정도의 엄청난 속도.
무림에 나온 이래로 이렇게 빠른 손속을 처음 보았다.
슈슈슈슈.
게다가 여전히 쇳덩이처럼 무거운 경력. 한결같이 해원기의 전신을 꿰뚫으려 드는 것도 보통 정교한 수법이 아니다.
비록 탄금지로 사람들을 밀어내긴 했으나 워낙 좁은 공간. 함부로 큰 기예로 맞부딪칠 수가 없다.
해원기도 두 손을 섬전과 기수검봉으로 나누었다. 절세오검에서 가장 빠른 섬전, 그리고 오악검법에서 가장 예리한 기수검봉.
검기가 촘촘히 모여 대관인의 손을 거침없이 찔러간다.
퍼펑!
폭음은 짧아도 수십 번이나 마주친 두 손.
대관인이 훌쩍 대청 앞으로 물러났다.
“뭐냐, 거지가 검기를 써? 호오, 이거 재미있네.”
날름. 입술을 핥고 들어가는 혓바닥이 빨갛다.
질문과 대답으로 희롱하던 오십 명은 이미 꽃밭 주위에 처박혀 버둥대지만, 그들이 정신을 차리든 말든 전혀 관심도 없고.
오직 해원기만을 바라보는 눈에 요사스러운 흥미만 가득하다.
주변에 등롱이 줄줄이 걸려서 오사모의 세 줄 금실과 검은 피풍 속의 은의가 묘하게 반짝거린다.
한바탕 뭐가 뭔지 모를 정도의 빠른 격돌 중에도 석상처럼 늘어선 유명비 스물.
맨 앞의 소녀가 또 입을 열었지만,
“주국 대인, 이러시면.”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차피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던 참이다. 너희는 멀쩡한 것들 챙겨서 물러나고, 흠, 각주에게는 내가 전부 책임진다고 전해라.”
대관인은 아예 손을 휘휘 내저어 쫓아내는 시늉.
무표정하던 소녀가 한숨을 내쉬려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습니다.”
그제야 스무 명의 유명비가 석상에서 벗어나 흩어진다. 여전히 미끄러지듯 움직여 부호들을 몰아가서, 마치 빗자루로 쓸 듯이 신속하게 장내를 비워나갔다.
그러면서도 해원기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듯.
재산이 많은 쪽 오십은 여전히 몽롱한 채, 대부분 정신을 차린 재산이 적은 쪽은 짐짝처럼 끌려나갔지만. 찍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해원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으나.
“어이, 네가 그 뭐냐, 절세검왕? 그거지?”
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 대관인을 무시하고 움직이긴 어렵다.
유항이 유명비를 따라 나가고, 그 뒤를 부신수영으로 쫓아서 나뭇가지로 덮인 담장 위에 은신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
화향이 피어오르고, 백 명의 부호가 뭐에 홀린 듯 변하고, 충견이 된 것처럼 시키는 대로 떠들어 대고.
심지어 유항은 자신의 정체까지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구란와자와 수차제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체내의 신왕공이 반발하듯 일어나니 분명히 삿된 술법이다. 그 내막을 확인하기 위해 지켜보려 했지만, 유항까지 걸려드는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개방 장안분타의 분타주. 쉽사리 사술에 말려들 하수가 아니거늘.
그러나 이 군방대청 앞의 꽃밭은 그런 유항이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구란와자의 배우로 분장한 자들, 수차제에 등장했던 조화부인과 그 수하들과 달리.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유명비라는 스무 명의 소녀들.
그리고 해원기가 놀랄 정도의 능력을 보이는 대관인.
심지어 단 한 차례 손을 섞고선 대뜸 검왕이냐고 묻는다.
해원기가 좁혔던 미간을 풀면서.
“각주는 밀각의 주인을 뜻하겠지. 그리고 금실이 세 개나 드리운 오사모, 소위 삼량관(三梁冠)은 고관(高官)이나 쓰는 모자에다가 주국이라는 호칭은 일품훈등(一品勳等)의 이름. 대부보다 높은 주국경(柱國卿)이란 소리인가?”
일부러 시선을 조금 비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미 몇 차례 동창의 인물들을 접해본 경험. 이자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내려다보듯 무례한 공통점이 있다.
과연 대관인의 눈썹이 확 올라붙었지만,
“흐흥, 그냥 무식쟁이는 아니구나. 그래, 내가 바로 무훈일품(武勳一品) 주국경인 호경륭(胡景隆)이란다. 밀각 대부 둘을 병신을 만들었다는 네놈 이름이, 해원기지?”
코웃음을 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묻는다.
이제는 해원기가 누구인지 파악했다는 의미.
비로소 상대를 똑바로 보는 해원기의 눈에 신광이 일렁였다.
“맞다. 제남에서도 그러더니, 유서 깊은 장안에서 이 무슨 삿된 수작인지. 그런 주제에 무훈일품이라. 대체 어떤 무훈을 세웠기에 일품상경(一品上卿)의 지위에 올랐을까.”
당당하게 이름을 밝힌 상대도 처음이지만, 어지간히 자신을 내세우는 말투가 오히려 귀에 거슬릴 뿐.
호경륭이란 자의 두 눈에도 기광이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그럴 만하니까. 무훈십이계(武勳十二階)는 전부 장래의 무림을 이끌 공(功)을 지녔거든. 뭐, 네 말대로 일품상경인 내가 소문만 무성했던 절세검왕의 목을 허리에 달면 딱 어울리지 않겠어?”
목을 허리에 단다. 적장의 수급(首級)을 베어 공적의 증거로 삼는다는 말.
엉망이 된 꽃밭 주위로 살기가 뭉클뭉클 퍼진다.
해원기는 여전히 두 손을 내려뜨린 채.
“흠. 육악지력의 셋과 결말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밀각에는 이렇게 자신만만한 자들이 넘쳐나나 보군. 그러면서 매양 독술이니 사술이니, 영 어울리지 않아.”
호경륭의 살기가 짙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말을 받았다.
이런 해괴한 짓을 벌이는 이유. 그 실마리를 어떻게든 잡으려고.
제남에선 흥륭의 가주를 인질로 잡고 힘으로 협박했다. 비록 강도와 다를 게 없는 소행이지만, 그에 걸맞게 목적도 재물과 상권이었다.
그러나 구란와자가 단지 도박으로 은자를 챙기려는 것이었을까.
수차제는 아예 비용을 들여 고을 사람들을 끌어모았잖은가.
지금도 그렇다. 장안의 부호 백 명을 잡아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사술을 거는 이유가 단지 재물이라고 여기기 어렵다.
특히 유명비가 따귀를 맞기 전에 하던 말. ‘세론을 조종할 기반’의 ‘귀명술’이라고 했다.
귀명(歸命)은 불가에서 부처에 귀의한다는 뜻으로 많이 쓰지만, 글자 그대로 올바른 천명에 귀순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또 당세 천하의 주인은 대명(大明)이라는 국호를 쓰기에 같은 발음인 귀명(歸明)으로도 자주 쓰이는 편.
장안처럼 오래된 도읍의 부호는 단순한 졸부가 아니라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유지(有志)요 명사(名士)들이 대부분.
도박판을 꾸미고, 축제를 벌여 놀게 하며, 지역의 명사를 홀리는 이유가 나라에 귀순시키기 위함이다?
세론이 그 정도로 황실을 부정한다면 또 몰라도.
동창은 황제 직속의 비밀 조직. 환관들이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밀각에서 대부니 무훈일품의 주국경이니. 어불성설이다.
도대체 뭘 꾸미는 건가.
해원기가 굳이 대화를 이어가려는데.
호경륭이 픽 웃으며 내민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훗,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대부는 문산계(文散階)의 직위야. 시키는 대로 일이나 처리하는 것들하고 무훈을 헷갈리면 쓰나? 하긴, 각주가 워낙 조잡한 계책 따위에 골몰해서 현신장도 엉뚱하게 부리고 있으니. 에, 궁금한 게 적지 않을 거야…….”
자신만만하고 과시욕이 넘치는 인물은 대개 말이 많은 법이다.
밀각 소속은 대부라는 칭호, 밀각에서 나간 육악지력의 소유자는 현신장. 곳곳에서 벌이는 해괴한 수작은 밀각의 각주가 꾸민 ‘조잡한’ 계책이고,
호경륭 자신은 밀각과는 다른 계통인 듯.
그러나 술술 이어지던 말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흔들리던 손가락이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진다.
쉬익.
뭉클뭉클 퍼지던 살기가 언제 하나로 뭉쳤을까. 소리보다 먼저 살벌한 기세가 해원기의 목을 꿰뚫는다.
잠심침령이 이미 기색을 판별했고, 늘어뜨린 두 손은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의 검왕수를 준비했었다.
그런데도 해원기가 겨우 목을 꺾어 피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놀라운 속도.
또한 섬전과 기수검봉의 검기를 능히 받아낸 그 손가락은 쇳덩이처럼 무거워서.
검왕법신의 호신강기로도 완전히 퉁겨낼 수가 없다.
파앗.
돌풍, 선풍, 질풍이 발밑에서 한꺼번에 일고,
해원기의 신형이 사선으로 기울어 돌며 발검제형이 벼락같이 뻗었다.
번쩍.
그야말로 한 줄기 뇌전. 바람과 우레가 함께 호경륭을 무찌르지만,
호경륭은 어느새 해원기의 반대쪽으로 돌아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든다. 눈이 핑핑 돌 것같이 무시무시한 속도.
내뻗은 오른팔 아래가 텅 빈 걸 노렸으나, 발검제형의 오의는 수발여의. 해원기가 채 손을 거두기도 전에 기수검봉이 팔꿈치를 타고 거꾸로 날아들고,
호경륭이 멈칫, 신형이 환상처럼 화르르 늘어나 위치를 바꾸는 순간에,
왼손의 재단경위가 섬전추풍으로 그물을 뒤집어씌웠다.
재단경위의 오의는 저사직금. 발검제형의 수발여의를 바꾸어 호경륭을 꿰어버릴 셈인데.
호경륭의 신형은 이미 열 개로 불어나 어느 게 진짜인지. 뻣뻣하게 세운 여덟 개의 손가락이 단숨에 팔십 개로 늘어나 그물을 찢는다.
퍼퍼퍼펑.
해원기가 두 걸음 물러나 어깨를 휘청거렸다.
팔 전체를 울리는 충격. 두 손으로 검왕오형을 펼치고도 밀려나다니.
더욱 놀라운 것은 호경륭이 그새 군방대청 안의 의자까지 날아갔다가 도로 튀어나오는 광경.
이건 거의 귀신이 날뛰는 듯,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지만.
달려드는 두 손이 기이한 형태로 바뀌었음은 순간적으로 포착했다.
“이 까짓게 검형수라고? 히힛.”
비웃는 소릴 언제 했는지. 호경륭의 두 손이 유성처럼 날아든다.
둥근 고리(環)를 절반쯤 잘라낸 모양. 그 절반만 남은 고리를 손가락 끝 마디로만 움켜쥐었다. 하나는 금색, 하나는 은색. 하나를 손바닥 안에 붙이면 하나가 바깥으로 돌아나가 마치 요철(凹凸)처럼 흔들리지만, 그건 바로 말의 발굽에 대는 편자. 마제철(馬蹄鐵)이다.
이걸 가지러 갔던가.
고수에겐 하다못해 길가의 돌멩이도 병기가 되는 법. 그러나 마제철을 손가락에 걸어 쓰는 건 처음 본다.
‘비환(飛環)이나 권(圈)처럼 쓰인다.’
천하의 모든 기문병기(奇門兵器)에 통달한 탁 숙부 덕에 일단 예측은 해보지만.
호경륭의 귀신같은 속도와 무겁기 그지없는 손가락.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피이이이이.
마제철에 뚫린 구멍이 귀를 찌르는 괴음을 토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전신을 짓밟으려 들었다.
저사직금의 오의가 다시 이어지며 검림소연으로 바뀌었다.
분명히 두 개의 마제철이건만, 마치 수백 수천 개로 화한 듯 우박처럼 떨어져서.
공간 전체를 휘감는 수밖에.
퍼퍼펑, 차차차창.
폭음과 쇳소리가 쉬지 않고 터지면서 해원기가 또 한 걸음 물러났다.
어마어마한 압력과 충격에 수주개와의 오의를 펼칠 새도 없다.
상상을 초월하는 공력에 광마처럼 날뛰는 기운, 호경륭의 위치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방어에만 치중하자, 검왕법신까지 흔들린다.
‘음.’
해원기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었다. 지치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빠르고 강해지는 호경륭의 공격, 손을 바꿀 틈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나.
밀려나던 발이 망가진 꽃밭을 밟으면서 얼핏 중심을 잃을 뻔한 순간.
해원기의 눈이 돌연 신광을 뿜었다.
배꼽 부근에서 불현듯 깨어난 기운. 청량하면서도 온화한 두 줄기가 하나로 엉켜 불끈 치솟으니.
밀려나던 발밑에서 잦아들던 바람이 다시 힘을 얻는다.
진정한 보병감로의 수정지력이 바람을 일으키자 신왕공이 무지막지하게 끓어오르고,
오른손이 왼손으로, 왼손이 오른손으로.
수주개와의 오의를 쫓던 검림소연이 비단을 펼치듯 옆으로 풀리면서 공간이 온통 자욱한 검기.
유리검이 바탕을 정하자, 본연검이 여백을 채우고, 적멸검이 부풀리자, 추상검이 검게 물들인다. 네 자루 검상이 거대한 먹구름으로 화하는 순간,
꽈릉!
뇌정의 굉음 속에 군림검이 튀어나갔다.
검왕오형의 네 번째, 역상정위가 광마처럼 날뛰는 기운을 단번에 베어버리는데.
굉음이 끝나기도 전에 해원기의 전면에 불쑥 나타난 타원 하나.
손목을 서로 맞대어 두 개의 마제철을 이어붙인 호경륭이 힘차게 기합을 내질렀다.
“하압!”
고오오오.
손바닥 두 개가 공간 전체를 삼키려는 듯, 경력과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이는데.
해원기도 기다렸던 것처럼 두 손을 교차했다.
“차앗!”
검림소연의 수주개와는 공간을 가두는 면(面), 그 면을 횡으로 비단처럼 펼치니 지붕은 베틀이 되고 기둥은 북이 되고. 다시 경위재단의 저사직금에서 날과 씨가 다 풀려 뻗어가는 건 바로 수발여의의 발검제형.
뒤집힌 검왕오형이 마침내 군림검을 폭우로 쏟아내어.
역상정위의 오의, 풍운뇌우(風雲雷雨)가 타원이 된 마제철과 정통으로 맞부딪쳤다.
콰앙!
추(秋), 상지서(霜之序)
터벅터벅.
맥없는 걸음걸이라고 새삼 깨달은 건 환정곡에 들어와서였다.
해원기가 골짜기 안을 둘러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환정곡. 정이 돌아온 골짜기라고 이름 붙였으나 지금은 그저 쓸쓸하고 조용할 뿐, 그 따뜻했던 정은 다 어디로 갔나.
몇 번이나 오갔던 골짜기 입구다. 예전에는 이렇게 다시 입구로 들어서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지쳤던 다리에도 다시 힘이 생겼는데.
이제는 아무도 자신을 반기는 이 없다.
사부와 두 분 사모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금방 다시 만날 것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고, 아무 일도 아닌 듯 씩씩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건 사실 허전하고 처량한 내심을 숨기려는 억지였다.
사부가, 두 분 사모가 어찌 모를까. 사부는 훌쩍 큰 해원기의 머리를 굳이 쓰다듬어주었고, 사모들은 번갈아 해원기를 안아주었다.
그러나 다시 보지 못할 작별이라는 걸 이미 알기에,
딱 붙은 입에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밤에 얘기는 다 끝내지 않았니. 여기까지 온 백산(白山) 분들이 잘 보살펴주실 테니. 흐음.”
말도 다 맺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사부.
나오려던 기침을 삼키느라 입을 닫고 지그시 눈을 감아버린다.
마지막으로 사부의 모습을 담아두려고 애쓰느라 해원기는 네 명의 백의인이 허리를 숙여 취하는 정중한 인사에 제때 답례조차 하지 못했었다.
백산에서 온 네 사람.
단정곡에서 고죽령까지는 교자(轎子)를 직접 메었고, 고갯마루에는 사방에 휘장을 두르고 바퀴에 부들을 두껍게 감은 안거(安車)까지 마련해두었다.
머나먼 곳에서 이렇게 극진한 준비를 갖추고 찾아온 이들. 그들 중 한 사람은 해원기도 어렸을 때 만난 적이 있었다.
오직 그만이 해원기의 심정을 아는 듯, 따뜻한 손길이 어깨를 가만히 짚어주었지만.
풍요환(風曜煥)이란 이름도 바로 기억나지 않았다.
덜컹.
마차의 바퀴가 움직이고,
땅바닥에 엎드려 떠나는 사부를 향해 큰절을 올리고,
휘장 사이로 잠깐 사모들이 손을 흔들어 주었을까.
그러나 해원기의 뿌옇게 변한 시야는 누구의 손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어서.
땅바닥에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눈물을 닦고도 멍한 시선은 하염없이 마차가 지난 산 아래를 향하고, 공력을 돋운 귓가에 바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러다 일어섰다.
돌아가자.
익숙한 길을 걷는데도 왠지 낯선 느낌. 언제나 반가웠던 이 길이 유난히 멀다.
교노인의 화장한 유해를 품에 안고 돌아올 때도, 정풍선자(定風仙子)를 따라 떠난 여동생을 바래다주고 돌아올 때도 이렇게 멀지는 않았는데.
두 눈이 골짜기 안을 하나하나 새기듯 바라본다.
너른 풀밭, 작은 연못, 커다란 나무와 굵은 가지들, 여기저기 놓인 넓적한 바위.
사부에게 무공을 배우고, 사부와 같이 멱을 감았으며, 사부 등에 업혀 높은 곳까지 올랐다가, 사부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었지.
작은 마루를 갖춘 네모난 목옥(木屋)과 띠를 엮어 올린 모옥(茅屋), 그리고 그 뒤에 비스듬히 세운 헛간 하나.
원래 단출한 모옥뿐이었다. 사는 사람이 늘면서 넉넉한 목옥도 짓고, 모옥도 평수를 늘렸으며, 나중에는 헛간까지 만들어 그럴듯한 살림살이가 되었다.
아직 어렸던 해원기는 몸이 불편한 사부 곁에 붙어서 기껏해야 마실 물이나 챙기는 역할이었지만, 사부가 이것저것 가리키며 사모들의 어설픈 솜씨를 놀려대는 통에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었지.
나중에 해원기 혼자서 헛간을 꾸미자 이번에는 사모들과 합세해서 또 놀려댔었고.
터벅터벅.
추억을 떠올리면서 발이 저절로 움직인다.
연못을 돌아 목옥을 거쳐 초옥을 지나, 헛간 뒤로 빠지는 작은 길.
헛간에는 아직도 꽤 많은 땔감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교 노인이 죽었을 때, 사부는 해원기를 불러 손수 화장할 나무를 장만하려고 이 길을 걸었었다.
걸음을 멈추었다.
목옥의 작은 마루가 지친 다리를 잠시 쉬라고 손짓하는 듯.
마치 사부가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서 쭈뼛거리며 돌아섰다.
이제는 함께한 시간이 꽤 되었다고 제법 손때가 반들거리는 작은 마루에,
가만히 앉아 손바닥을 대어보았다.
가슴속이 울컥해진다.
“항두(炕頭)라고 한자를 쓰는데, 온돌이라는 거란다. 네 사모들이나 교 노인은 다 익숙하지 않으니 원래의 모옥 방은 원기가 쓰려무나. 이 사부도 네 사조와 함께 살았던 곳이고.”
처음에 그렇게 방을 정해주셨지.
그리고,
“허, 이거 사부가 제자 방을 뺏는 꼴이 되었구나. 네 사모 둘이 하도 성화를 부리는 통에. 흠흠, 그래, 이김에 오랜만에 원기랑 같이 자는 것도 좋군. 하하.”
교도인이 죽은 후로 급격히 쇠해진 사부와 잠깐이나마 같이 지냈었다.
큰 사모와 작은 사모가 공력을 아끼지 않고 관음제세대법(觀音濟世大法)을 펼치면서부터는,
어린 소유를 돌보며 목옥과 모옥을 바쁘게 오갔었고,
그러다가 목옥의 큰 방을 아예 사부와 해원기 둘이 쓰게 해주었다.
백산의 초청을 받은 후에,
마지막 닷새를 사부와 단둘이 보냈었다.
“네 사조께서 열여섯 날 달 밝은 밤에 돌아가셨던 일이, 아주 옛날인 듯 아련하구나. 하아, 네 사조께서 지금의 너를 보았다면 참 기뻐하셨을 텐데.”
또 버릇이 나오셨네.
해원기를 데리고 이 환정곡에 온 후로 툭하면 입에 올리시던 그 말. 한 번도 뵙지 못한 사조가 정말 사부처럼 자신을 예뻐하셨을까.
“틀림없단다. 네 사조께선 원기와 달리 살기가 짙은 이 사부를 많이 걱정하셨거든. 사부가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고, 흠, 그래서 미리 백벽(白璧)의 약속도 유언으로 남기셨을 거다. 실혼단정(失魂斷情)의 이 골짜기로 다시 돌아올 걸 아시고서. 뭐, 그래도 이렇게 번듯한 후대를 데려왔으니 이젠 마음을 놓으셨겠지. 나도 그렇고.”
유독 해원기를 아끼는 사부지만, 몸이 쇠해지면서는 농도 많아졌다.
눈이 동그래지는 해원기.
“사부는 달리 남길 게 없다. 사조처럼 ‘백벽을 이루거라.’하고 싶어도 원기의 신왕공이 당최 어떻게 될지 사부도 모르겠으니. 하하, 인중덕(人中德)을 먼저 이루어서 삼산(三閂)의 빗장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아마 고죽천년(孤竹千年)에 처음 일어난 일일 게다.”
이미 아는 얘기. 그다지 반갑지 않다.
사부도 사조도, 고죽에서 대대로 전승되는 신왕공이 왜 해원기에게만 다르게 나타났는지.
시무룩해지는 해원기가 귀여운지 사부가 웃는 낯을 가까이했다.
“괜찮다고 했잖으냐. 고죽의 신왕공은 그저 단순한 무공심법(武功心法)이 아니라고. 네가 박대정심을 목표로 정했기에 신왕공 또한 그에 맞추어 나아가려는 것뿐. 세월이 흐르고 공부가 쌓이면 자연히 풀릴 일이야.”
제자의 기분을 북돋아 주는 말이지만,
몇 번이나 들었던 해원기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고.
스륵.
그 눈에 얼핏 가늘고 하얀 실 몇 가닥이 보였다.
모진 서리를 맞은 것처럼 부서져 떨어지는 머리칼.
얼굴이 절반이나 상해서 평소에는 붕대로 대충 가려놓지만, 이렇게 방안에 들어오면 답답하다고 금방 풀어버리는 사부.
흉한 상처도 상처지만, 머리칼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목 뒤에 하나로 묶은 길고 검은 머리칼이 즐겨 입던 흑의와 정말 잘 어울려서,
묵(墨)이라는 사부의 성을 고스란히 연상케 했었는데.
사부도 눈치를 챘는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지저분해서 싹 밀어버렸으면 좋겠건만, 네 사모들이 영 허락하지 않잖니. 허허, 영 흉하지?”
해원기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사부의 용모가 어떻게 변하든 보기 흉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경사를 떠나 환정곡에 와서 기다리던 사부를 다시 만났을 때, 처참하게 변한 모습에 놀라긴 했어도.
떨어진 머리칼을 주워 손에 꼭 쥐었다.
“아니요. 사부님은 멋있어요.”
“예끼! 멋은 무슨. 하하하. 콜록.”
엉뚱한 대답이라고 웃음을 터뜨리다가 금방 기침이 나오자, 사부는 수염을 쓰다듬는 척 입을 가렸다.
듬성듬성한 수염도 전부 하얘서, 푹 꺼진 볼과 뾰족한 턱을 가리지도 못하니.
그만 쉬셨으면 좋으련만.
사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가 바랐던 마지막 소망, 백산의 도움으로 이룰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지. 다만, 우리 원기와 헤어지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해원기가 허리를 곧게 펴고 사부를 보았다.
헤어진다.
이제 함께 있을 시간은 백산으로 사부와 사모들이 떠나기 전까지.
고죽지보인 이제검(夷齊劍)에 깃든 고죽의 원혼들.
소위 만세신궐(萬世神闕)이라 일컫는 마종본맥(魔宗本脈)에 대한 처절한 한은 마침내 귀왕검(鬼王劍)을 발현시켰으나.
천마(天魔)를 제거한 사부는 이 너무나 공포스러운 귀왕검을 인세에 남기지 않고 당신의 몸에 깃들게 하였다.
처절한 한의 원혼이라도 전부 고죽의 영령(英靈), 한 자루 검을 선영(先塋)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당신의 남은 생명을 진혼위령(鎭魂慰靈)에 쓰겠다는 소망.
하지만, 중화(中華)에서 비롯한 원한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
신왕공이 백벽의 경지에 이르고, 천손검법을 마지막 무상(無相)의 일초까지 연성한 사부조차 어려운 일.
생명을 다 걸었는데도 자칫하면 사부의 천살(天殺)이 귀왕의 흉살(凶殺)을 도로 되살릴 우려까지 있어서.
마침내 아득한 백산(白山)의 비경(秘境)에 묻힐 결심을 굳히고선.
사부는 그걸 최후의 고조회원(顧祖回原)이라고 하셨다.
사부가 하려던 말은 이제 시작이다.
“이제 살기(殺氣)에 관해 얘기해보련다. 원기, 네가 잘 모르는.”
아마 이게 사부의 마지막 가르침이리라.
“너는 본디 살기가 거의 없는 아이. 대부분 살기가 약하면 무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만. 이 사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살(殺)이란 글자가 살출중위(殺出重圍)처럼 겹겹의 포위를 힘써 싸워 뚫는다거나, 살풍경(殺風景)이라고 메마르고 삭막한 경치거나, 살가(殺價)처럼 가격을 깎는다는 의미로도 쓰이긴 해도 본래 죽인다(戮)는 뜻이지. 죽인다, 이건 생명에 대한 행위, 그래서 누구나 두렵고 꺼리는 게 당연하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 의미를 잘 안다. 생명을 앗아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굶주림을 면하려고 동물을 죽이는 것도 꺼림칙한데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니.
“그렇지만, 살(殺)은 생(生)의 반대말이 아니다. 사부의 살기도 하늘이 낳았다고 하니까.”
묘한 비유. 억지 같지만, 천생살기(天生殺氣)란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바삭.
사부의 흰 머리칼이 또 한 올 부서져 내렸다.
“예전에 춘하추동(春夏秋冬)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푸는 걸 얘기했었지. 그때, 가을은 추수(秋收)의 이익만 있는 게 아니라.”
“네. 숙살(肅殺)의 예리함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봄·여름·가을·겨울, 생명의 순환 속에서 가을은 엄혹봉리(嚴酷鋒利)하게 만물을 죽, 인, 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풍요를 말하는 계절이라. 흐음, 마치 한 동전의 양면 같구나…….”
또 기침이 나오려나. 사부의 낮은 목소리가 잦아드는데.
해원기의 눈이 차분하게 일렁거렸다.
가을만을 따지는 게 아니다.
천생살기를 지닌 사부가 진혼위령을 마지막 소망으로 삼은 것. 참혹한 살생의 검을 휘둘렀으되 더 나은 세상을 낳으려는 의지 아니던가.
사부의 목소리가 소곤거리듯 이어진다.
“원기야, 사부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천마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말이다. 마지막에 검(劍)을 죽였기 때문, 아니, 나를 죽였기 때문이란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 백협맹이든 지부든 가리지 않고. 그들이 손에 쥐었던 모든 병기들조차 가리지 않도록. 그러니까 한 자루 이제검이 마침내 모든 이의 모든 병기로 화하더구나. 사부가 그저 설명만 하고 전해줄 수가 없었던 천손검법의 제십초(第十招) 내인내천(乃人乃天)은 그렇게, 살(殺)로 찾아낸 거지.”
사부가 자세히 일러준 천손검법의 최후 절초는 구결(口訣)이라고도 할 수 없는 설명이었다.
당신도 다시 펼칠 수 없다고.
그게 살기라니.
알 듯 모를 듯 아스라하다.
해원기의 눈이 깊어지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사부가 빙긋 웃으며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가을엔 서리가 내리지. 엄혹봉리한 가을의 서리를 그래서 추상(秋霜)같다고 하잖니. 그럼 서리가 무엇일꼬?”
화제를 바꾸어 묻고,
“비(雨)는 수기(水氣), 수기가 뭉쳐 형상(相)을 이룬 것입니다.”
해원기다운 답. 사부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 아는구나. 기운이 뭉쳐 형상을 이루더니 만물을 다 죽여 없앤다라. 가녀린 유상(有相) 하나가 만물의 무상(無相)과도 통하는 모양이다. 이건 네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두고.”
우수수.
일부러 수염과 머리를 거칠게 긁는 사부.
“네게 건네준 검상(劍相) 중에도 추상검이 있지. 네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건 네 사조께서 연제하신 검상이란다. 인협(仁俠)으로 불리셨던 분이. 사부도 이제야 그 의미를 알았으니, 살아계셨으면 둔하다고 꾸중을 내리셨을 게다. 뭐, 그래도 서리 내린 이 머리칼처럼 늦게나마 깨달아 이 중원을 떠나는 거로 용서하지 않을까? 하하하하.”
밭은기침이 나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는 사부.
“아.”
해원기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입 밖으로 나오려던 탄성을 삼켰다.
삶의 마지막 여정을 백산으로 정한 이유.
진혼위령은 사부에게 또 하나의 살(殺)이었구나.
끝까지 사랑하는 제자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는 사부.
차라리 사조처럼 뭘 이루라고 약속이라도 맺어주시지.
협(俠)이 어떻고 무(武)가 무엇이고 하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었다.
처음 사부를 만났을 때, 해원기가 세운 서원은 ‘끔찍한 무림에서 남을 돕는 무인이 되겠다.’라는 것이었다.
사부는 그 서원을 이룰 능력을 주었고, 삶의 지표도 제시해주었다.
그것뿐.
나머지는 해원기에게 모두 맡기고서 이렇게 영원히 떠나가셨다.
네 뜻대로 살아라.
툭툭.
주인 잃은 작은 마루에 다시 굵은 눈물이 떨어진다.
절령제십삼(節令第十三) 입추(立秋)
절령은 달리 절기(節氣)라고도 하니, 사시(四時)의 기(氣)의 변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입추(立秋)는 가을의 첫 번째 절기. 양기가 차츰 거두어지고, 음기가 차츰 늘어나는 전환점이다. 그러므로 입추가 되면 강수량과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하여 만물의 번식과 성장이 침체와 결실로 바뀐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가 되었다고 무더운 날씨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입추 또한 매우 더운 시기에 해당되어 초가을은 여전히 더운 날씨를 보인다. 이른바 ‘열재삼복(熱在三伏)’이라는 말 뒤에 또 ‘추후일복(秋後一伏)’이라고 하지 않는가.
실로 입추는 왕왕 중복(中伏)과 말복(末伏) 사이에 처해서 아직 가을의 시작을 체감하기 어렵고. 되레 민열(悶熱)이라, 숨이 막히는 답답한 열기가 남아있다.
하지만, 이 남은 더위야말로 결실의 표지이니. 더불어 한바탕 흡족한 비라도 더해지면 가히 황금빛 넘치는 수확을 기대할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