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장 고도요적(古都妖跡) (3)
단 하나뿐인 의자. 자연스레 시선이 모이는 곳인데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인물.
마치 환상처럼 갑자기 출현한 셈이고,
오른쪽 첫 번째에 선 소녀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장안 지부의 결정이었습니다. 북창항의 여러 기루에서 만나는 게 관례였다고. 그나마 넓은 장소가 이 군방대청뿐이랍니다. 주국(柱國), 아니, 대관인께서 여러 번 움직이실 수 없으니 그만.”
중간의 호칭에서 머뭇거렸지만, 나름 차분한 말씨.
오사모의 대관인이 픽, 웃더니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할 수 없지. 갑작스레 대부들이 불려 나가는 통에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준비는 제대로 한 거냐? 본래 누구 담당이었지?”
“네. 조 대부입니다. 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흥, 그 병신. 에휴.”
소녀의 대답에 코웃음 치며 비웃다가 짧은 한숨을 내쉰다.
짜증과 한심스러움이 번갈아 얼굴에 스치더니, 두 손을 가볍게 털며 들어 올렸다.
“제대로 보고도 올리지 못하고 시답지 않은 소리만 웅얼대더니. 뭐, 어쩔 도리가 없구나. 자.”
어정쩡하게 대청 앞에 몰린 백 명. 전부 장안에서 알아주는 부호들이 어리둥절하든 말든.
안하무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대관인이 손을 들자,
휘리리리리리.
돌연 기이한 음향과 함께 화원에 만발한 온갖 꽃들이 하늘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몽롱한 달빛 아래 자욱한 화향(花香)을 뿜으며.
그러지 않아도 하늘의 달빛조차 이상하게 일렁거리던 밤이다.
백화원 군방대청이 온통 황홀한 분위기에 뒤덮이고, 빽빽하게 모여든 백 명의 부호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꽃잎이 화향을 타고 하나둘, 마침내 수백 수천의 꽃잎이 공간을 온통 휘감으니.
저절로 풀리는 눈, 벌름거리는 코, 헤 벌어지는 입.
순식간에 취해버린다. 심호흡 몇 번 할 동안에.
“호오, 이런 정경이…….”
“아름답다, 아름다워!”
“아, 좋구나. 허허허.”
긴장하고 당황했던 심정은 다 잊었는지. 백 명 전부 자세가 풀려서 감탄하고, 웃고, 어깨춤을 추고.
그야말로 흥겨운 연회의 즐거움에 푹 빠진 모습이다.
오사모의 대관인이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날름 입술을 핥는 혓바닥, 그리고 들어 올렸던 두 손이 슬그머니 뒤집히려는데.
“이들은 세론(世論)을 조종할 주요한 기반이니 귀명술(歸命術)로 끝내도록…… 큭!”
짝!
제때에 말을 건네던 소녀가 뺨을 얻어맞고 휘청거리지만,
대관인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그대로 손을 내려버렸다.
“어디서 일일이 주둥이를 놀리는 게냐? 버릇없는 년.”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소녀 또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똑바로 선다. 심지어 양쪽으로 늘어선 다른 소녀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아서.
바로 앞의 광경과 해괴한 대비를 이룬다.
풍채가 훌륭한 백 명의 부호는 꽃밭에서 취했고, 궁녀 차림의 무표정한 소녀 스물은 뻣뻣하게 쳐다보기만 하고.
그 가운데 대관인이 도로 의자에 앉으며 혀를 찼다.
“쳇, 이런 짓이나 해야 하고 말이야. 정말 한심하구나. 대체 뭘 그리 걱정하는지, 좁쌀만 한 담보로 욕심은 많아 가지고. 황사의 충고도 듣는 둥 마는 둥 이따위 하찮은 일이나 벌이느라.”
중얼중얼. 하려던 행동이 바로 옆 소녀에게 제지당한 불쾌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자리를 주재하러 불려온 게 어지간히 불만이었던 터라, 혼잣말을 거듭할수록 짜증이 더 심해졌고.
기어이 탁자를 치며 다시 일어서고 말았다.
탕.
기다란 탁자가 묘한 울림을 내면서 흩날리던 꽃잎이 놀란 듯 흩어진다.
꽃잎에 눈이 팔렸던 백 명의 부호들도 즐겁던 기분을 다 날려버린 것처럼 전부 제자리에 멈춰 서고.
“어차피 대가리 큰 놈들 빼고 나머지는 필요 없잖아. 유명비(幽冥婢)들, 재산이 많고 적은 거로 절반씩 나눠봐라!”
답답한 속을 풀 방도가 생각났나. 낭랑한 목소리가 높아지자 유명비라 불린 소녀들이 우르르 대청 밖으로 나왔다.
몽롱한 달빛, 자욱한 화향. 흩어지는 꽃잎에도 깨어나지 못한 부호들이 멍하니 넋을 잃었지만.
유명비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백 명을 두 패로 나누고 그 가운데에 벽처럼 일렬종대로 늘어섰다.
대청을 향해 맨 앞에 선 유명비는 바로 방금 따귀를 맞은 소녀.
“대관인께서 보시기에 왼쪽이 재산이 많은 오십 명입니다. 그리고 지금 절반이 줄면 백 명을 대상으로 한 귀명술이 실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디 해량하시길.”
얻어맞은 쪽 뺨이 벌겋게 부어올라 눈까지 감길 판.
가벼운 따귀에 이렇게 강한 힘이 실렸던가. 누구든 불쌍하게 여길 얼굴이 되어가면서도 소녀는 차분한 말투, 그대로 할 말을 다 한다.
대관인이 이 고집스러움에 피식 웃었다.
“하, 독한 년. 안다, 알아. 각주(閣主)가 어지간히 걱정되었나 보구나. 여기서 또 한 열 명만 골라내지, 그것도 재미있으니까. 일각이 다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건 너무 무료하거든. 자.”
스윽.
말이 끝나는 순간 오른쪽에 모인 오십 명 앞에 홀연히 나타나는데.
긴 탁자를 어떻게 넘어서 대청 어디로 나왔는지.
움직이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비비며 훑어보는 시선. 즐거운 듯 눈썹을 세운 아래, 두 눈이 마치 쥐새끼를 희롱하는 고양이처럼 반들거린다.
“요기 모인 녀석들은 잘 듣고 생각해야 해. 너희가 가진 재산을 빼고. 음, 여기서 재산은 금은, 토지, 건물 따위다. 그 재산을 빼고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에 대해 떠들어봐. 뭐든지 좋아. 꼭 물건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한꺼번에 떠들어도 내 귀는 다 들으니까, 그럼. 시이이이이작!”
장난감을 새로 받은 아이처럼 신이 나서,
뭔 소리를 지껄이는지, 또 말투는 얼마나 유치한지.
하지만, 이 황당한 요구의 개시를 선언하자마자 그 앞에 모인 오십 명이 일제히 떠들기 시작했다.
글씨가 어떻고, 그림이 어떻고, 조각이 어떻고, 완물(玩物)이 어떻고.
절세미인을 얻었느니, 희귀한 짐승을 기르느니, 기화이초를 어떻게 재배하느니. 정력을 증강하는 비법이니.
순식간에 도떼기시장처럼 와글와글.
한꺼번에 떠드는 통에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소음이 되었는데.
“그만! 너, 너, 너…….”
대관인이 돌연 목소리를 높이더니 대뜸 여기저기 손가락질을 한다. 정말 이 소음 속에 오십 명의 얘기를 다 분간해 들었다는 건가.
그런데 뚝 끊기는 소음.
대관인에게 손가락질을 당한 스무 명이 나머지와 위치를 바꾸어 앞으로 나서는 동안,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다.
집에서 부리는 강아지도 이렇게 말을 잘 들을 리 없건만.
주르르 늘어선 스무 명을 보는 대관인의 눈은 더욱 요요한 빛을 머금고,
“일단 너희가 가장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네. 재산도 적어, 가치 있는 것도 없어……. 그래도 나름 쓸 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여기 초청을 받았겠지. 에, 그럼 또 뭐로 열 명을 추리나? 옳지, 생각났다!”
손뼉을 가볍게 치며 히죽 웃더니,
“남에게 함부로 밝히기 어려운 비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비밀 한 가지씩 털어놓아 봐. 히힛.”
신이 나서 어깨까지 들썩인다.
화향이 가득 번진 꽃밭. 갈수록 해괴하다.
재산이 많은 쪽, 오십 명은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예 모르는 듯. 고개는커녕 눈길조차 돌리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고.
재산이 적은 쪽에서 조금 전까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던 자들 역시 넋이 빠진 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한다.
이제 앞쪽에 늘어선 스무 명만 대관인의 지시가 들리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한꺼번에 떠들어대기 시작했는데,
채신머리없게 고개를 까닥거리던 대관인이 돌연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잠깐!”
뚝.
아까의 도떼기시장과 똑같이 말소리가 끊겼으나.
시작하자마자 바로 멈춘 탓일까. 제대로 다물지도 못한 입가로 침까지 흘리는 흉한 모습들이고,
그 얼빠진 얼굴 중의 하나를 대관인이 가리킨다.
“개방의 분타주? 허, 장안의 부호들이라면서 그 속에 거지가 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이없다는 시선이 향하는 곳은 스무 명의 오른쪽 끝.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의식하지 못하고서 입을 벌린 채 머리를 끄덕이는 이는 바로 유항이었고.
“맞습니다. 과거 전문간선(傳聞幹線)의 틀을 유지하고자 설립된 장안분타를 맡은.”
놀랍게도 묻는 대로 순순히 정체를 털어놓는다.
대관인의 손가락이 까딱.
“너, 앞으로 나와…….”
대뜸 불러내려는 손짓. 그러나 홍종(洪鐘)처럼 우렁찬 음성이 먼저 울렸다.
“유 분타주! 정신을 차리세요!”
쿠웅.
얼마나 큰 소리인지 진한 화향을 토했던 둥근 꽃밭이 통째로 흔들리고,
유명비 스무 명에 의해 양쪽으로 나뉘었던 백 명의 부호들도 정수리에 얼음물을 들이부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떤다.
“으음.”
“으어어.”
“콜록, 콜록.”
답답한 신음과 목멘 기침이 뒤섞이고, 개중에는 비틀거리는 자도 있는데.
“커억.”
유일하게 유항만이 핏덩이를 울컥 토하며 뒤로 나동그라진다.
유항을 가리켰던 대관인의 손가락이 옆으로 홱 뻗었다.
파파파팍.
나지막한 담장 위를 구름처럼 뒤덮은 나뭇가지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고,
그 속에서 쏟아진 거센 돌풍이 대청 앞을 휩쓸었다.
휘이잉.
꽃밭을 완전히 뒤집을 기세, 만발했던 온갖 꽃을 흙덩이 째 날릴 셈이어서 백 명의 부호들도 전부 나가떨어질 만한데.
중앙에 벽처럼 줄지어 서 있던 유명비 스무 명이 두 손을 반짝 쳐들었다. 쟁반을 받쳐 들고 애교 넘치는 인사라도 올리듯 허리춤에 붙은 두 손.
엉뚱한 반응이지만, 유명비가 동시에 그런 자세를 취하자,
스스스.
맹렬한 돌풍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맨 앞에 선 유명비, 따귀를 맞고도 할 말은 다 했던 소녀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인다.
“주국 대인! 귀명술이.”
“시끄럽다!”
따당, 땅, 땅.
대관인의 고함보다 바로 옆에서 쇳소리가 거듭 터지니 아무리 그녀라도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유항이 나동그라진 곳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충돌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유항을 가리켰다가 담장 위로 방향을 바꾸었던 대관인의 손가락.
돌풍이 쏟아지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유항을 향했고 단숨에 네 번이나 퉁겨졌다.
나동그라졌다고 해도 주위에는 몇 십이나 되는 부호들이 몰린 곳이건만,
좁디좁은 틈을 아무렇지 않게 헤쳐 나와 유향의 머리 위까지 뛰어오르는데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고,
담장 위의 나뭇가지를 폭죽처럼 터뜨렸던 지풍(指風)은 쇳덩이를 내지르는 듯.
유항의 목덜미를 당기며 몸을 빼려던 해원기를 정확히 노린다.
일단 유항을 구해내려고 돌풍과 함께 질풍결을 섞어 움직였거늘.
급한 김에 대충 내치긴 했으나 그래도 검왕오지. 그걸 거침없이 받아치는 통에 미처 신법을 바꿀 겨를이 없다.
더구나 사방은 넋이 나간 부호들로 꽉 막힌 상황이다.
‘으음.’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리며 오른손을 얼른 구부렸다가 폈다. 현을 퉁기듯 경묘하게 떨리는 다섯 손가락.
디리리링.
탄금지의 오현제명(五絃齊鳴)이 진짜 금현처럼 울리며 공간을 흔든다.
“이이익.”
“으아, 뭐냐?”
갑자기 깨어난 것처럼 펄쩍 뛰다가 짚단처럼 와르르 쓰러지는 이들. 수십 명이 비명과 괴성을 지르며 버둥거리고,
그 틈에 해원기가 유향의 가슴을 가볍게 때려 뒤로 밀어냈다.
“큭.”
또 핏물을 뱉어내지만, 이미 제탁지검이 운용되어 자못 정신을 차린 눈치로 재빨리 몸을 가볍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