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장 고도요적(古都妖跡) (2)
젊었을 적에 방주를 수행하여 백협맹에 참가했던 유항.
그 덕분에 맹주와 각계의 영웅들뿐 아니라 ‘그분’을 멀리서나마 뵈는 행운을 얻었고, 그때의 감격은 근 이십 년에 이르도록 잊히질 않았다.
그래서 ‘그분’의 유일한 제자인 해원기에게도 거의 같은 동경과 흠모를 품었고,
함께 떠났던 정록이 보이지 않는 게 궁금하긴 했으나, 일단은 해원기가 언급한 기묘한 기운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미 동창의 밀각이 움직이고 현신장이란 자들도 이 장안에 모인 상황이다.
유항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근래에 소문이 돌았습니다. 관부에서 조만간 재원(財源)을 염출한다는. 이 장안에는 오래된 부상(富商)과 호족(豪族)이 많은지라 비용을 거둘 시기엔 대개 이런 식으로 소문을 먼저 퍼뜨리곤 하지요. 하지만, 봄이 끝날 무렵에 이미 의연(義捐)이니 헌납(獻納)이니 명목을 붙여 한 차례 돈을 뜯어내서. 이번은 그저 헛소문일 거라는 추측이 많았습니다.”
지금의 처지를 설명하는 게 우선.
미간을 좁히는 해원기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농사나 장사나 한참 활기를 띨 때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죠. 양도 잘 먹이고 나서야 깎을 털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관부와 이제까지 유지된 묵계는 일 년에 두 번, 봄가을로 정해진 금액을 바치는 정도였습니다. 뭐, 그 묵계도 이미 몇 년 전부터 깨졌지만. 장안의 부상과 호족 대부분은 벌써 동창의 수작이란 걸 알았고, 저처럼 어중간하게 부자로 알려진 자들은 또 눈치껏 비위를 맞추어 따르게 되었지요. 감히 대들 엄두도 내지 못할 권력과 무력의 위협이니.”
제남과 마찬가지. 아니, 장안의 규모는 훨씬 거대할 터.
장안만이 아니라 중원천지가 다 동창의 토색질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번처럼 한여름에 또 손을 내미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장안의 유지들을 모조리 소집해서, 북창항(北倉巷)의 기루 골목에다 가두듯이. 아, 이 거리의 이름이 북창항입니다.”
장안 번화가의 바로 북쪽 거리.
지명을 들은 해원기가 고개를 조금 틀었다.
“본래 황궁의 곡창(穀倉)이 있던 곳이겠군요. 그런데 골목 어귀에 이르러선 딱히 관병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융성했던 당나라의 도읍.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장안성은 여전히 수도로서의 구조를 뼈대로 삼은 형태다.
그 곡창이 지금은 흥청망청하는 홍등가로 변했지만, 그래도 좁은 골목치고는 번듯하게 길이 정리된 곳. 오는 도중에 자주 보았던 순라꾼과 야경꾼도 없다.
유항도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네. 그러지 않아도 분타의 꼬마들을 풀어 알아봤더니. 장안에서 관병 삼백을 조발했으나, 전부 장안을 떠난 게 확인되었고. 그 외에는 별개로 움직인 병력이 없더군요. 소집된 이들이 줄잡아 백은 넘을 터, 밀명을 전한 자들이야 돌아가 보고했다손 쳐도 접대를 맡은 자조차 없습니다. 보통 통판(通判)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소집할 때에는 동지(同知) 벼슬까지 나와 인사를 나누는 게 상식이거늘.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쯧.”
혀를 찰 만큼 난감한 심정.
옷감과 장신구를 팔아 치부한 유 장자로 위장했지만, 개방에서 장안분타주라는 책임을 맡은 유항이다.
그간 장안의 동향을 나름 파악했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이유도 모른 채 멍한 꼴이라니. 해원기에게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밀명을 전한 자들은 관청의 말단관리. 그자들이야 그저 해당하는 이를 찾아와 종이쪽지 하나 달랑 던져놓으면 그만이고.
본디 공개적으로 모이는 떳떳한 자리가 아니어서 제대로 격식을 갖춘 영접도 바랄 수 없다.
대개 이런 은밀한 기루나 주루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 밀실에서 거래를 마치지만, 남에게 드러내기 곤란한 일은 되도록 빨리 끝내는 게 좋고. 돈을 받은 쪽이야 어떻든 돈을 건넨 쪽이 뭐 기분 좋다고 남아서 즐기려 하겠나.
느긋하게 쉬거나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이들이 죄다 끌려 나와 두 시진째다.
불쾌함을 넘어 불안감까지 느끼기 시작한다.
유항의 주름이 더 뚜렷해졌다.
“개중에는 은밀히 사람을 불러댄 이들도 생겼습니다. 보표(保鏢)든 호원무사(護院武士)든. 밀실에 혼자 앉아 견딜 수가 없었겠지요. 물론 그러다가 혹여 지부대인이나 동창의 비위를 거스를까 안달하는 이도 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려고 나갔다가, 해 대협을 보게 된 거랍니다.”
소집된 장안의 부호만 줄잡아 백 명.
다들 돈 있고 힘 있는 이들이라 겉으로야 아무렇지 않은 척 기녀를 부르고 술잔을 기울이며 노래를 들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조되는 불안함에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개방의 분타주인 유항으로선 관부의 밀명을 의심하면서, 한편 부호들의 불안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항의 말이 끝나자 해원기가 틀었던 고개를 바로 했다.
이제는 자신이 느꼈던 기묘한 기운을 설명해야 한다.
말재주가 없는 간략한 설명이었으나, 유항은 해원기가 뜻하는 바를 금방 알아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구란와자는 저도 압니다. 꽤 희한한 극단으로 알려졌으나 이 장안에는 워낙 해괴한 재주꾼들이 몰리는지라. 흠, 그러나 수차제는…… 그러지 않아도 본 방 내부에서 거지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세상이라는 풍자가. 그렇게 욕먹는 거지 중의 하나가 바로 접니다. 호의개(好衣丐) 유항. 쩝.”
개방도들이 유달리 괴상한 명호를 붙이곤 하지만,
장안분타주 유항의 외호가 호의개라.
“허, 그럼 호식(好食)으로 욕먹는 사람도 있습니까?”
해원기가 묻지 않을 수 없었고, 유항은 또 한 번 쓴 입맛을 다셨다.
“예. 금릉분타를 맡은 거지가 호식개(好食丐) 오권(吳權)이라고. 아, 우리 순행장로의 삼촌뻘이 되는데, 주루와 반점을 여럿 운영하지요. 뭐, 순행장로야 신비의 유룡개라고 방 내에서 아는 사람도 극히 적지만, 저와 오권은. 이거, 얘기가 엉뚱하게 흘렀군요.”
옷감과 장신구를 팔아 치부한 유항은 호의개, 주루와 반점을 여럿 운영하는 오권은 호식개, 그리고 풍류를 즐기는 귀공자 차림의 오소민.
확실히 거지들이 모인 개방의 일원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오소민의 삼촌뻘이라는 소개에 얼핏 흥미가 일었지만, 해원기도 유항도 화제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기에.
얼른 표정을 굳히는 유항.
“대략 십 년 정도, 세상 풍속이 점차 화려한 쪽으로 변하더니 근래에 들어서는 아주 뚜렷해졌습니다. 부박경조(浮薄輕佻)니 부화무실(浮華無實)이니. 걱정하는 소릴 하는 자들이 늘었어도 뭔가 붕 떠서 허랑방탕한 삶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위에서 시작된 흐름이 아래로, 백성뿐 아니라…….”
장자로 위장해 부호들과 접촉하면서 어려운 문자도 익혔는지.
경박하고 방정맞으며,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이 없다는 비판을 예로 들다가, 마지막에 말을 흐렸어도.
해원기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풍조(風潮)라고 하는 세태의 변화는 대부분 높은 자리에 있고 넉넉한 삶을 사는 자들이 사치와 퇴폐에 물들면서 일어나게 된다.
세상이 평화로와 여유가 넘치는 건 좋은 일. 그러나 분수에 넘치는 낭비와 헛된 쾌락은 되레 삶을 망가뜨린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나쁜 유행 또한 백성을 잘못 이끌게 되고.
강호도, 무림도 영향을 받는다.
물론 일개 무부가, 개방의 거지가 논할 문제는 아니겠으나.
유항의 주름진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해 대협은 이 변화가 인위적인 거로, 일종의 미혹이라고 보십니까?”
구란와자와 수차제를 연상한 이유.
해원기가 눈썹 한쪽을 문질렀다.
“잡극단의 구란와자에선 독을, 백희를 연출하던 수차제에선 사술을 바탕에 깔아두었습니다만. 똑같이 사람들을 현혹해 광란하게 하더군요. 그저 풍속으로 치부하기에는, 음.”
손가락이 눈썹 끝에서 잠깐 멈춘다.
유항과 대화하면서 머리를 스치는 다른 기억들. 청부를 받아 암살하는 주제에 꽤 세력을 갖추었던 향락사귀, 의젓한 언행으로 신비스러운 척하던 조양신문.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에 똑같이 ‘현혹’이란 단어가 어울린다.
이미 몇 차례나 해원기로 하여금 의심하게 했던 사건들. 벽세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나, 지부의 마공이 다시 나타났나.
오직 사(邪)와 마(魔)의 재현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유항이 말한 ‘미혹’과 자신이 얘기한 ‘현혹’. 그리고 이 북창항에 서린 기묘한 기운.
뭔가 다른 냄새가 난다.
‘엇!’
유항이 속으로 놀란 소리를 내며 침을 삼켰다.
순간적으로 방안에 번개가 친 것 같은 감각, 그건 해원기의 두 눈에서 번뜩인 엄청난 신광이었다.
“유 분타주 말씀대로 이 소집엔 좋지 않은 내막이 있는 듯합니다. 지부대인의 명의를 썼지만, 재원의 염출이 아닌 다른 의도가. 이를 주도한 자도……!”
말을 뚝 끊으면서 눈썹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바로 방문을 가리킨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을 밝히기 전에,
발소리도 없이 문득 전해지는 기척.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바로 방문 밖에서 목소리가 전해졌다.
“대관인께서 납시었습니다. 귀빈들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민망하시다고, 특별히 군방대청(群芳大廳)에 사과의 자리를 마련하셨으니. 속히 함께 어울려 인사를 나누시지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해원기의 신형이 둥실 떠올라 천장에 달라붙고,
유항이 급히 표정을 가다듬자마자,
드륵.
대답도 필요하지 않다는 건가. 바로 방문을 여는 고운 손.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푸른 궁장, 궁녀로 착각할 차림새의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얀 얼굴, 검은 눈썹, 붉은 입술. 그린 듯 아름다운 용모지만, 딱딱한 말투에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 어쩐지 사람을 거북하게 만든다.
“아, 알겠소이다. 그, 그런데 군방대청이 어디.”
유항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자 소녀가 방안을 한 차례 훑어보곤 바로 몸을 돌렸다.
“서쪽 백화원(百花院) 안쪽입니다. 각각의 담장 사이, 잠긴 문을 다 열어놓았으니 복도를 따라 걸으면 됩니다. 서두르세요.”
이 또한 책을 읽는 투. 그리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데.
스스스.
치마가 복도 바닥을 스치는 소리뿐, 미동도 하지 않고 미끄러져 나아간다.
통보만 할 뿐, 손을 들어 청하는 시늉도 하지 않으니. 귀빈이란 말이 무색한 태도에 유항이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급히 뛰어나갔다.
“백화원이면 여기서 한 집 건너잖소? 어이쿠, 늦었다간.”
궁녀 차림의 소녀 뒤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면서,
위치를 해원기에게 알리는 걸 잊지 않았고, 아울러 소녀에게 전혀 말을 놓지 않았다.
기루에서 일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뜻.
소녀의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전해질 때까지 그 기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유항이지만,
그냥 장안분타주가 된 게 아니다.
아무리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쿵쾅거리며 달려도 소녀의 모습은 금세 사라져서,
혼자 월동문을 두 개나 지나느라 이마에 진땀까지 맺힌 채.
마침내 둥그런 화원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경이 눈에 띄자 유항이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에 무수한 등롱을 내다 걸은 탓에 온갖 꽃이 만발한 화원의 모습이 훤하게 드러나고,
그 화원 뒤에 넓게 자리 잡은 단층 건물.
무성한 나뭇가지에 뒤덮여 아담해 보이지만, 전면 세 칸에 측면 두 칸, 여섯 칸짜리 대청이고.
가운데에는 길고 좁은 탁자가 대청을 가로질러 놓였다.
본래 많은 손님이 한데 어울려 화원을 구경하며 놀도록 만들어진 곳인 듯.
그러나.
아무리 탁자가 길다고 해도 기껏해야 열댓 명이나 앉을까. 대청을 향해 바삐 모여드는 인원은 거의 백 명이나 된다.
게다가 탁자의 가운데에만 의자 하나가 있을 뿐, 그 의자를 중심으로 양쪽에 늘어선 궁녀 차림의 소녀들도 전부 뻣뻣하게 선 채. 바짝 붙어선 소녀의 수도 스무 명이니.
화원을 돌아 모여들던 이들이 전부 대청 밖에 어정쩡하게 멈춰서야만 했다.
“쯧쯧, 누가 여기로 정했어? 좁아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전부 벌을 서야 하잖아.”
그런 광경에 혀를 차는 낭랑한 음성.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일어선다.
머리에는 테두리를 금실로 장식하고 뒤쪽에 두 개의 날개, 앞쪽에는 금실이 세 개 드리워진 오사모(烏紗帽)를 썼으며, 파란빛이 도는 풍성한 머리칼은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옥처럼 반들거리는 얼굴엔 수염 하나 없고, 가는 붓으로 그린 듯한 이목구비는 언제나 웃는 표정. 커다란 검은 피풍을 둘렀으나, 일어나면서 속에 걸친 희귀한 은의(銀衣)가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삼십 대인지 사십 대인지.
일어서며 입을 열기 전까지는 의자에 누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