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장 고도요적(古都妖跡) (1)
솨아아.
웬만하면 시원할 만도 한데, 어쩐지 바람이 끈적하다. 한낮이 워낙 더워서였을까, 나뭇가지 위에 높다랗게 선 채 해원기가 고개를 들었다.
뿌옇게 달무리가 진 밤하늘이 왠지 지쳐 보이는 건 해원기가 그렇게 느껴서일 듯.
대강 위치를 짐작했다. 태릉의 뒷면, 정록이 일러준 대로 금속산의 등줄기쯤.
이제 어디로 움직여야 할까.
어쩐지 막막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온다.
육 년 가까이 쾌체 일을 했었다. 신분을 감추고 능력을 숨긴 채 남의 심부름으로 살아간 나날.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는 데 익숙했거늘.
무림에 발을 들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변했을까.
처음 겁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나서면서부터 계속 이어졌던 인연들. 오소민부터 조금 전에 헤어지게 된 정록까지.
옛 인연, 새로운 사귐. 그러면서 어느덧 곁을 내주고 슬그머니 기대는 버릇이 생겼나 보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 훌쩍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새 멍청해졌어. 소유(小柔)가 봤다면 또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한다고 놀려댔겠지.’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한참 잊고 지냈구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아니, 일부러 잊으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연산 환정곡에서 보냈던 즐거운 과거를 전부 가슴속에 깊이 묻으면서.
되살아나려는 아련한 감상을 지우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지금은 가슴보다 머리를 쓸 때다.
화산에서 화청궁, 그리고 제갈봉의 도움으로 장안으로 들어갔고. 다시 장안에서 정록과 함께 태릉 묘역에 배장된 고력사의 무덤으로.
화산에서 화청궁으로 간 것도, 장안에서 이 제왕의 묘역으로 오게 된 것도 전부 제갈봉이 알려준 덕분.
‘확실히 적지 않은 소득이 있지만.’
내부를 엿보기 어려운 동창이라는 조직 안에서도 가장 비밀스럽다는 밀각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 현신장. 본래 오소민과 사천으로 넘어가 살피려 했던 자들이다. 인광과 수진으로 하여금 아미와 공동을 떠나 중원으로 오게 한 원인. 과연 육악지력으로 여겨지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고.
밀각의 대부와 현신장이 회합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도 밝혔다. 양경양도라는 역사상의 옛 도읍에서 기특한 비보(秘寶)를 찾으려는 것.
그게 설마 신기역 보병요의 마지막 유물인 보병일 줄은 생각지 못했지만.
‘무엇 때문에 찾았을까. 그들이 하백지정을 알았으리라곤 믿기 어렵다. 뭔지도 모르면서 비보를 발굴하는 건 도굴꾼이나 할 짓.’
동창 밀각의 대부와 현신장 셋이 기껏 도굴이나 하려고 옛 도읍을 돌아다니며 회합한다? 말이 되지 않는다.
제갈봉이 개방 장안분타에 황급히 보낸 편지에도 ‘목적불명’이라고 적었고.
“흠.”
해원기가 목을 무겁게 울렸다.
아홉 개의 금오혈석, 여섯 악수의 힘. 풀리지 않는 문제에 오소민도 기묘한 수수께끼만 남기고 떠났는데,
제갈봉이 이렇게 동창의 기밀한 행동을 놓치지 않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해원기는 제갈봉이 전한 소식에 따라 움직인 셈이니.
어느새 손가락이 눈썹을 문지르고 있었다.
“금오혈석과 육악지력, 그리고 정 형이 본 감로보병의 다른 이름. 전부 사일신화와 연관된다. 그런데 비보를 얻는데 굳이 현신장 셋과 회합해야 할 필요가 있나? 이것도 수상하군.”
미간에 깊게 팬 주름.
머릿속에 떠오르는 복잡한 의문들을 정리하는 것도 간단치 않다.
요술사의 낙혼금종은 상대의 힘을 깎아내니 약수지괴(弱水之怪)인 알유, 붕익천강과 괴이한 독공을 펼친 오온존자는 인면조신(人面鳥身)의 우강, 뜨거운 힘줄기와 얼음 같은 기운을 병용하는 진여신승은 수화지괴(水火之怪)인 구영.
갖가지 술법에 능한 요술사는 그렇다 쳐도 다른 둘이 무덤 지하의 보물을 발굴하는 데 그리 큰 효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따로 진법이나 기관에 능한 여 대부라는 자까지 새로 충원했잖은가.
우두머리 노릇 하던 이 대부의 언동에서 밀각의 대부와 현신장 간에는 묘한 알력까지 느껴졌었다.
‘착치(鑿齒), 봉희(封豨), 수사(修蛇). 육악지력의 나머지 셋도 찾아냈을까,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또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건가. 좌우봉원이라는 계책이 그저 회합만 의미하진 않을 터. 장안과 낙양, 경사와 금릉…… 아니, 양도양경도 봉대저의 설명이었을 뿐, 또 다른 곳, 이를테면 동쪽의 해안이라던가.’
눈썹이 꿈틀거렸다. 문득 산동이 떠올랐기에.
제남에서 벌어진 일을 이제껏 흥륭을 집어삼키려는 음모로만 여겼으나, 다시 생각하면 제남도 오래된 고성(古城). 더구나 그 옆에는 공자를 모신 곡부(曲阜)가 있다.
‘조양신문.’
거쳤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노문기라는 서생도 기억난다.
생각을 정리하자,
묘한 예감이 들었다.
눈썹에서 손을 뗐다.
풀리지 않은 의문을 부여잡고 있어봤자 소용없는 일. 관계되는 것들끼리 묶어 정리한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복잡했던 머리가 어느 정도 명료해지고, 그러면서 다음으로 해야 할 일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정록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고력사의 무덤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미 여 대부로 화신해서 무덤을 빠져나와 동창에 합류했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우려도 있다.
‘관병을 끌고 왔으니 어차피 장안으로 돌아가겠지.’
제갈봉은 어디로 갔는지, 다른 소식이 있는지 황가약포에 알아봐야 하고.
정록의 사정을 적어도 장안분타의 유항에게는 귀띔해줘야 할 터.
전부 장안.
방향을 정한 해원기가 다시 한 번 머리를 들어 뿌연 달을 보았다.
한낮의 더위가 고스란히 하늘로 올라간 탓인지 몽롱한 느낌. 그러고 보니 인적 없는 이 묘역엔 벌레 울음도 들리지 않는다.
“불쾌한 밤이군.”
불쑥 혼잣말을 내뱉던 해원기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왜인지 몰라도 평소와 달리 날씨를 타박하는 자신이 조금 멋쩍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서였겠지.
그렇게 장안으로 몸을 날렸다.
한없이 생각만 할 수도 없고, 상황에 따라 행동을 정할 때긴 했으나.
해원기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느라 한 가지를 잊었다.
자신이 얻은 수정지력. 그 공효가 단지 신왕공의 대지체를 대신하는 정도일까.
여 대부가 아무리 물정 모르는 풋내기에 상대를 경시하는 우를 범했다 해도 그리 쉽게 해치울 수 있었던 건.
검왕오형의 오의가 물처럼 흐르기 때문.
자신을 다시 살피고 얻은 바를 세심히 궁구해야 비로소 그 정수를 체득했다고 한다.
이백이 보병정의 계단에 남겨놓은 글귀에도 의미가 담겨서,
물은 바람을 만나,
구름을 부르는 법이다. 다시 비가 되어 내리도록.
장안의 성벽은 매우 높다.
성문이 이미 다 닫힌 시각, 성벽 위로 날아 내리던 해원기가 눈을 껌뻑였다.
흐리긴 해도 달빛이 있다. 설사 캄캄한 밤이라도 아무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피하려고 일부러 동시안을 시전 했는데.
아까와는 달리 장안성에 묘한 기운이 흐른다.
태릉에서 다시 위남을 거쳐 내려오는 길, 자연스럽게 성의 북문을 골랐고. 그나마 아는 지리는 동문가의 북삼방이라 북문을 넘어 동쪽으로 꺾을 셈이었다.
동서남의 세 방향은 모두 대문이 세 개씩이라고 했으나, 북문은 하나뿐. 대부분의 오래된 성처럼 북방은 귀문(鬼門)이라 문이 작고, 지키는 이도 많지 않았다.
이 밤에 북문 근처에 오가는 이라면 기껏해야 죽은 시신을 성 밖으로 옮기는 자들일 터.
그런 귀문을 넘었다고 이런 기운을 느낄 리는 없다.
동시안을 시전하지 않았다면 해원기라도 아예 감지하지 못했을 미묘한 기운.
멀리 성의 남쪽 절반은 멀쩡하고, 오직 북쪽의 곳곳에서 스멀거린다.
‘이건, 뭐지?’
금속산의 가파른 언덕을 떠날 때 불쑥 느꼈던 불쾌감. 어쩐지 그 불쾌감이 되살아난다.
규모가 큰 고성은 대개 비슷한 구조다.
황가약포가 있는 동문가의 북삼방처럼 북쪽으로 갈수록 가난한 이들이 모이는 누추한 골목. 번화한 중심가에서 곧장 이어지는 북방은 또 기루나 도박장처럼 천한 장사가 주를 이루어서,
밤이 깊어 가는데도 유일하게 불빛이 깜빡거린다.
그 불빛이 원인인지. 미묘한 기운은 바로 점점이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스멀거리는 듯.
해원기가 잠시 그 기운을 응시하다가 훌쩍 몸을 날렸다.
황가약포를 들러 장안분타로 가려던 계획을 미루고, 일단 이 미묘한 기운의 정체를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불빛을 보면서 문득 구란와자와 수차제가 생각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불빛이 가장 많이 모인 곳. 번화가의 바로 뒷골목이다.
허름한 차림새와 용모가 장안에선 꽤 도움이 된다.
장안분타를 찾으러 갈 때도 그러더니, 지금도 마찬가지.
역사를 지닌 옛 도읍이요, 큰 고성인 만큼 야밤에도 불조심을 외치는 야경꾼이나 치안을 맡은 순라꾼이 꽤 돌아다니지만.
해원기를 수상하게 여겨 눈길을 주는 이가 없다.
어디 부잣집 하인이나 심부름꾼으로 여기는지.
그 덕에 생판 모르는 길이지만, 대강 불빛을 목표로 골목을 더듬어갈 수 있었고.
한 식경이 되지 않아 눈앞이 환해졌다.
좁은 골목 좌우에 줄지어 걸어놓은 붉은 등, 그 위로 담장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이 늘어져서 깊은 동굴 속 별천지 같다.
성벽 위에서 왜 불빛이 점점이 깜빡였는지 이유를 알았다.
곳곳에서 악기를 울리고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전해지고, 오가는 이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복장.
그윽한 향기와 고소한 음식 냄새가 이 동굴에 갇혀 빠져나가질 않는다.
소위 홍등가.
처음 오소민을 만났던 산동 양곡현의 골목이 연상되지만, 장안의 규모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어릿하고,
가만히 있어도 술에 취한 듯 몽롱하고.
그렇게 손님들을 홀려서 금은을 아낌없이 탕진하게 만드는 곳.
참으로 휘황찬란해서 어떤 곳인지 뻔히 알면서도 끌려 들어가는 이들이 가득하다. 당장 손님을 잡아끄는 여인들이 전부 드물게 보는 미모에 궁중의 비빈 못잖은 차림새니.
‘홍등가의 기루를 우스개로 재인굴(宰人窟)이라고 하더니. 딱 여기에서 나온 말이겠군. 그나저나.’
재인굴. 사람 저며서 인육으로 만드는 소굴이란 뜻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고, 쪽박 차고 쫓겨나면 다행, 자칫하다간 패가망신에 목을 매다는 얘기도 흔해서.
그만큼 요사스러운 장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원기가 불쾌하게 느낄 기운이 모일까.
동시안을 감추려고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신경을 써서인지 두 눈의 비췻빛이 예전과 달리 은은하게 가라앉아 신비로운데,
“허, 어디를 싸돌아다닌 게야? 한참을 찾지 않았느냐. 어험.”
골목 중간에 나와 크게 헛기침을 하는 이. 삐딱하게 쓴 큰 두건, 불그레한 얼굴에 듬직한 풍채. 돈푼깨나 있을 법한 부유한 노인은 바로 개방 장안분타주 유항이었다.
그도 여기서 해원기를 마주쳐 매우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신 손짓을 해댄다.
“해 대협, 어떻게 여기에? 아, 녹화, 정록이는. 갔던 일은 어찌 되었소이까?”
미리 잡아놓은 아늑한 방에 들어서자,
유항의 질문이 두서없이 쏟아졌다.
생각지도 않게 이 홍등가 골목에서 만났으니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나름 노련하게 해원기를 부리는 하인배로 취급해 데리고 들어왔지만, 상당히 당황한 기색.
해원기가 방안을 둘러보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조금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분타주를 찾아가려던 참에 이곳에 기묘한 기운이 서려서. 유 분타주께서는?”
기루의 고급스러운 방은 밀실과 다름없다.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한 장소. 유항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해원기를 의자에 앉혔다.
“이런 실례를. 음, 저녁 무렵에 갑자기 장안 지부의 밀명이 떨어져 소집을 당했지요. 마침 관부의 동정도 궁금했던 터라. 그런데 두 시진 째 대기 중이랍니다. 저, 옷감과 장신구로 치부한 유 장자(長者)뿐 아니라 장안에서 돈 좀 만진다는 상인들은 전부. 이상한 일인데…… 기묘한 기운이라?”
옷감과 장신구를 팔아 돈을 번 유 장자가 바로 유항이 위장한 신분.
그렇게 장안의 부유한 이들이 전부 소집을 당해 두 시진이나 기루에 갇힌 상황도 심상치 않은 판에, 해원기가 돌연히 나타난 이유는 더욱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해원기 역시 의혹과 동시에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제남에서 흥륭이 당했던 일. 그리고 기묘한 기운을 보면서 연상했던 구란와자와 수차제가 겹치는 느낌이다.